[글로벌이슈]“돈에는 국적 없다”… 월가 인재들 속속 합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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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 흔드는 벌처펀드 정체는?

한국 대기업의 합병과 후계 분쟁으로 ‘벌처펀드(vulture fund)’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지고 있다.

죽은 동물을 먹이로 삼는 대머리독수리를 뜻하는 ‘벌처’라는 말에서 나온 이 펀드는 이미 삼성물산과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주주총회 대결로 한국에서 한껏 주목받았다. 게다가 롯데그룹의 후계 분쟁으로 대기업 지배구조 문제가 또 불거지면서 한국이 벌처펀드의 먹잇감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벌처펀드는 원래 빈곤국 국공채나 부실기업 채권 등 망하기 직전의 고위험 자산에 투자한 뒤 악착같이 자금을 회수하는 단기투자 전문 헤지펀드다. 그런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영국 벨기에 등 각국이 규제에 나서면서 벌처펀드도 빠르게 변신하고 있다.

최근에는 각국 대기업으로 투자처를 다변화하고 취약한 지배구조, 낮은 배당 등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스스로를 ‘주주 행동주의(shareholder activism)의 전도사’로 부르며 대중을 상대로 정당성까지 얻어내려 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약탈자’란 이미지를 갖고 있는 벌처펀드의 세계를 해부해 본다.

정크본드가 낳은 벌처펀드

벌처펀드는 1970년대 미국에서 생겨났다. 당시만 해도 부도 위험이 높은 투자부적격 채권(정크본드)은 월가 대형 금융사의 투자 대상이 아니었다. 이때 ‘정크본드의 창시자’로 불리는 미 억만장자 마이클 밀컨(69)이 등장했다. 1973년 드렉셀 버넘 램버트 증권에 입사한 그는 여러 개의 정크본드를 묶어 거래하면 일부가 부도나도 다른 채권에서 얻은 수익으로 손실을 메울 수 있다는 논리(유동화 전략)로 투자를 시작했다.

1986년 미 저축대부조합(S&L)의 파산으로 벌처 투자가 붐을 이뤘다. 한국의 상호신용금고와 비슷한 저축대부조합의 파산은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유사했다. 엄청난 양의 부실채권이 시장에 쏟아졌고 휴지조각으로 전락한 채권을 대량 매입한 몇몇 투자자가 위기가 끝난 후 이를 비싸게 되팔아 엄청난 돈을 벌었다. 칼 아이컨 아이컨엔터프라이즈 회장(79), 넬슨 펠츠 트라이언펀드매니지먼트 대표(73), T 분 피킨스 BP캐피털매니지먼트 대표(87) 등이 이때 출현했다. 이들은 지금도 월가를 쥐락펴락하는 유명한 기업사냥꾼이다.

1990년대 미국의 ‘신경제’ 호황으로 부실기업이 줄자 벌처펀드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중남미와 아프리카의 저개발국 채권을 헐값에 사들인 뒤 소송 등으로 해당 정부를 압박해 투자금의 수백 배까지 거둬들였다. 페루 파나마 콩고민주공화국 아르헨티나에 투자한 엘리엇매니지먼트를 비롯해 도니걸인터내셔널, FG헤미스피어, 테미스캐피털, 디모인인베스트먼트, 아우렐리우스캐피털, 다트매니지먼트 등이 대표 주자로 떠올랐다. 세계은행은 2000년대 이후 유명 벌처펀드가 빈곤국을 상대로 낸 소송 25건을 통해 최소 10억 달러(약 1조1700억 원)를 벌었다고 분석했다.

소송과 로비에 능한 변호사가 설립

영국 가디언이 지목한 벌처펀드 업계의 3대 거물은 마이클 시핸 도니걸인터내셔널 이사, 피터 그로스먼 FG헤미스피어 공동 설립자, 폴 싱어 엘리엇매니지먼트 회장(71)이다.

미 탐사보도 전문기자 그레그 팰러스트 씨(63)의 각종 보도로 싱어의 개인정보가 만천하에 공개된 것과 달리 시핸과 그로스먼의 정보는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 팰러스트 씨의 집요한 추적으로 시핸과 그로스먼의 얼굴이 알려진 게 전부다. 60, 70대로 추정되는 이들의 정확한 나이, 현 거주지, 출신 국가, 가족관계 등이 모두 미스터리다.

지금까지 나온 이들의 일부 약력 중 공통점은 명문 로스쿨을 졸업한 변호사라는 것이다. 각국 정부를 상대로 채무지급 소송을 벌인 일개 민간펀드가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데는 금융공학에 정통한 상당수 헤지펀드 운영자보다 복잡한 법리와 각종 로비에 능통한 변호사가 더 유리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업계에서 ‘골드핑거’(007 영화에 나오는 백만장자 악당)로 불리는 시핸은 아프리카 최빈국 잠비아에서 재미를 봤다. 잠비아는 1979년 3000만 달러를 빌려 루마니아의 농기계 설비를 사들였다. 부패와 가뭄으로 19년이 흐른 1998년에도 단돈 1원도 갚지 못하자 루마니아는 할 수 없이 채무탕감 협상을 시작했다. 이때 시핸은 루마니아에 330만 달러를 주고 모든 권리를 승계받은 후 잠비아 자산을 동결했다. 때마침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이 잠비아 원조를 결정하자 시핸은 영국 법원에 소송을 내고 “액면가와 이자를 합해 4200만 달러를 물어 달라”고 잠비아 정부에 요구했다. 법리만 따진 영국 법원은 2007년 시핸의 손을 들어줬다.

소송만으로는 투자금의 10배 이상을 벌긴 어렵다. 시핸은 루마니아의 권리를 사면서 프레더릭 칠루바 당시 잠비아 대통령에게 뇌물을 주고 채무이행 약속을 받아냈다. 동시에 미국과 영국에서 로비를 벌여 채무 상환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했다. 채권 매입부터 투자금 회수까지의 모든 과정이 치밀하게 계산된 행보였다.

아르헨티나 국채를 4800만 달러에 산 싱어는 해외에 정박 중인 아르헨티나 군함을 억류하고 아르헨티나군의 해외 창고까지 점거하며 악명을 떨쳤다. 이를 통해 투자금의 약 28배인 13억3000만 달러(약 1조5561억 원)를 챙겼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2013년 미국을 방문할 때 임대 비행기를 탔다. 전용기를 타고 갔다 압류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벌처와 행동주의 투자자 사이


벌처펀드가 많은 돈을 벌수록 이들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규제도 심해졌다. 경쟁자도 크게 늘었다. 이에 폴 싱어, 칼 아이컨, 넬슨 펠츠 등은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바로 주주 행동주의다. 주주 행동주의란 주식 대량 매수를 통해 특정 기업의 주요 주주가 된 이후 지배구조, 사업전략, 자본구성 변화 등을 주도하며 수익을 내는 방식이다. 김예구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과거 펀드들이 기업의 회생능력 등에 대한 ‘예측’에 주력한 반면 지금 벌처펀드는 경영 개입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해 그 예측을 ‘실현’한다”고 설명했다.

헤지펀드는 성장률 등 거시변수를 예측하는 ‘글로벌 매크로’, 싼 주식을 사고 동시에 다른 비싼 주식을 공매도하는 ‘롱숏’, 주가에 미칠 영향이 큰 사건을 배후 조종하는 ‘이벤트 드리븐’ 전략 등을 주로 구사한다. 행동주의 투자자는 이 이벤트 드리븐 전략을 적극 활용하는 셈이다.

헤지펀드 전문가인 정삼영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 금융대학원장은 “엘리엇이 아르헨티나 등에서는 벌처 투자자였지만 삼성물산에서는 지배구조 개선, 소액 주주권 보호 등을 주장하는 전형적인 행동주의 투자자의 면모를 보였다”며 “‘먹튀’나 투기자본이라는 말로 몰아세울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아이컨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인수 기업을 낱낱이 분해한 후 되파는 것으로 악명을 떨쳤지만 금융위기 후 애플, 이베이 등 우량 대기업에 주로 투자하고 있다. 또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적자사업 구조조정 등 장기 기업가치 향상을 위한 각종 전략을 제시하고 이를 소셜미디어 등으로 널리 알려 일반 주주의 호응을 얻었다. 그의 전략은 무배당 정책으로 유명한 콧대높은 애플에도 통했다. 애플은 올해 4월 “2017년 3월까지 총 2000억 달러를 주주들에게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막을 수 없는 성장세

요미우리신문 기자 출신인 일본 소설가 마야마 진(眞山仁)이 벌처펀드를 소재로 쓴 작품 ‘하게타카(ハゲタカ)’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돈에는 색깔이 없다. 중요한 건 결과를 내는 거다. 그렇게 하면 벌처의 먹잇감이 되는 대신 벌처를 이용해 승리자가 될 수 있다.”

벌처를 상대로 한 머니게임에서 승률을 높일 기업은 얼마나 될까.

전문가들은 상당 기간 벌처펀드들이 활황을 보일 것으로 예상한다. 우선 먹잇감이 넘쳐난다. 3일 부도를 선언한 미 자치령 푸에르토리코, 부도 위기에 직면한 우크라이나와 그리스 등은 벌처펀드들의 단골 투자 대상이다. 최근 뉴욕타임스(NYT)는 ‘헤지펀드의 제왕’으로 불리는 미 억만장자 존 폴슨(60)이 경영난에 처한 푸에르토리코의 고급 호텔, 카지노 등을 닥치는 대로 사들인다고 보도했다. 폴슨은 이미 지난해 푸에르토리코 정크본드 1억 달러어치를 매입했다.

벌처펀드가 금융시장의 약한 고리 곳곳을 헤집고 다니자 대형 금융사도 벌처펀드와 비슷한 전략을 활용하고 있다. 약 700억 달러의 부채가 있는 우크라이나는 벌처펀드 공격에 가장 취약한 나라로 꼽힌다. 미 자산운용사 프랭클린템플턴은 2010년부터 우크라이나 국채를 사들여 현재 89억 달러를 보유하고 있다. IMF가 이 나라에 추가 금융지원을 하면 템플턴이 엘리엇이나 도니걸과 비슷한 방식으로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월가 인재의 유입도 심상찮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2011년부터 3년간 설립된 신규 헤지펀드 1428개 중 약 15%가 골드만 등 미 5대 투자은행에서 퇴사한 인력이 세운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은 안전할까. 이장혁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롯데와 삼성의 경영권 분쟁에서 보듯 순환출자와 족벌 세습 등 지배구조 관련 문제가 많은 한국 기업들은 싫든 좋든 주주 행동주의를 주창한 벌처펀드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삼영 원장은 “냉혹한 월가 자본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이들을 ‘악마’로 폄하하거나 국민 정서에 호소하는 식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국가든 기업이든 살아남으려면 생존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애초에 벌처펀드에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는 게 먼저라는 뜻이다.

:: 벌처펀드 ::

헤지펀드의 일종으로 부실증권(distress securities) 펀드로도 불린다. 헤지펀드가 주식 채권
외환 원자재 파생상품 부동산 등 서로 다른 다양한 분야에 투자해 각각의 투자위험을 ‘상쇄(hedge)’하는 것과 달리 벌처펀드는
부실증권 투자에 특화돼 있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벌처펀드#헤지펀드#부실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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