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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은 시대와 타협하거나 무작정 뛰어넘어 혼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적응하며 극복해왔습니다.”계간지 ‘창작과비평’이 올해로 창간 60주년을 맞았다. 염종선 창비 대표는 24일 서울 마포구 창비 사옥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계간지로 60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동력’을 이렇게 설명했다.1966년 1월 백낙청 창간편집인이 주도해 정가 70원에 132쪽의 작은 책자로 출발한 ‘창작과비평’은 한국 지식인 사회의 비판적 담론을 형성하는 창구 역할을 해왔다. 군사정권의 탄압 등을 겪으며 1980년 폐간, 1985년 출판사 등록 취소 등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 1988년에 복간됐으며, 올해 3월 60주년 기념호(통권 211호) 출간을 앞뒀다. 창비는 60주년을 맞아 올해 봄호부터 기획연재 ‘한국문학과 K사상의 가능성’을 시작한다. 현실에 대한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는 ‘사상 자원’으로서 한국 문학이 해온 역할을 본격적으로 조명한다는 취지다. 동시대 독자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현장성과 문학성도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찾아가는 현장’ ‘50인 신예시인선’ 등을 운영해 새로운 작품 발굴에도 힘쓴다. 지난주 재단법인 창비문화재단을 설립하는 등 문학·인문학 진흥을 위한 사회공헌 프로젝트도 추진한다. 10억 원을 출연해 설립한 재단은 현기영 작가(85)를 초대이사장으로 선임했다.현재 ‘창작과비평’ 정기구독자는 1만 명 수준. 이남주 주간은 “최근 10년을 보면 큰 변화 없이 일정 독자가 유지되고 있는 건 긍정적”이라며 “독자들이 관심을 갖는 문제를 포착하고, 그 문제와 ‘싸운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글쓰기를 강조하려고 한다”고 말했다.창비 측은 ‘창작과비평’이 전통적으로 문학 속에 사회적·정치적 논리와 주장을 담아내는 역할을 이어왔다는 점도 강조했다. 황정아 부주간은 “최근 문학도 현실에 대해 발언해야 한다는 과거의 전통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며 “문학과 정론의 결합이 창비가 지금까지 버텨온 힘이자 앞으로 더 나갈 수 있는 토대”라고 강조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일반 독자들이 이상(1910~1937)이라는 특이한 존재를 이해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엔 쉽게 쓴 평전으로 생각하다 소설체로 쓰게 됐습니다.”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78)는 23일 서울 종로구 설악만해사상실천선양회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상의 삶을 소설 ‘주피터 초상’(폭스코너)으로 쓰게 된 계기를 이렇게 밝혔다.권 교수는 국내 이상 문학 권위자다. 그의 기존 저작들이 작품과 사상을 분석한 평론서였다면, 이번 책은 “인간 이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방점을 찍은 소설 형식의 작업이다. 권 교수는 신작에 대해 “시기별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다 사실이지만, 그 사이사이 비어있는 내용들은 허구로 채웠다”고 설명했다. 사실에 기반하되, 기록의 공백은 상상력으로 메워 인간 이상의 내면에 다가가려 했다는 취지다.소설은 이상의 벗이었던 서양화가 구본웅(1906∼1953)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권 교수는 “소학교부터 이상이 죽기 직전까지 같이 있었던 인물이 구본웅이었고 그가 이상을 가장 가까이서 증언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며 “이상의 고뇌와 선택의 과정에 늘 구본웅이 있었다”고 설명했다.책에는 구본웅 외에도 김기림, 박태원 등 이상과 교류했던 당대 예술인들이 등장한다. 일제강점기 경성의 풍경과 구인회(九人會)를 중심으로 한 문학·예술계의 흐름까지 함께 조망하며, 한 시대의 문화 지형을 총체적으로 복원해낸 점도 눈길을 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그룹 블랙핑크가 세계 아티스트 가운데 최초로 유튜브 구독자 1억 명을 돌파했다. 21일 유튜브는 블랙핑크에 채널 구독자 1억 명을 인증하는 기념패 ‘레드 다이아몬드 버튼’을 수여했다고 밝혔다. 블랙핑크 유튜브 채널은 2016년 6월 개설돼 약 9년 8개월 만에 이런 대기록을 세웠다. 현재 채널에 등록된 동영상은 648개다. 블랙핑크는 ‘뚜두뚜두’, ‘킬 디스 러브’를 포함해 지금까지 공식 채널 내 9개 영상을 유튜브 ‘10억 뷰 클럽’에 올렸다.블랙핑크는 같은 날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영상을 올리고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제니는 “이 기록을 ‘블링크’(팬덤명)와 함께 만들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로제는 “뜻깊은 기록”이라고 했다. 블랙핑크는 27일 세 번째 미니앨범 ‘데드라인’ 발표를 앞두고 있다. 2022년 9월 정규 2집 이후 3년 5개월 만에 내놓는 앨범이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작가의 ‘인생 책’2026년 병오년도 벌써 두 달이 다 지나고 있습니다. 혹시 올해도 ‘책을 열심히 읽겠다’고 다짐하셨다가 작심삼일에 그친 분들이 계신가요. 2026년 101주년을 맞은 동아일보 신춘문예의 당선 작가들에게 ‘인생 책’이 무엇인지 물어봤습니다. 분야별 당선자들이 인생 책과 추천 사유, 책 속 한 문장을 정리했습니다. 신춘문예 작가들이 마음속에 간직한 책들을 함께 펼쳐 보면 어떨까요.》이형초 / 시 당선자◇사물의 뒷모습/안규철 지음·현대문학좋은 글이란 작가만의 고유한 ‘사유’가 책의 전면에 단단히 자리하고 있는 작품일 것이다. 이 책은 사물과 형상, 그리고 자신의 삶을 향한 소박하지만 깊이 있는 사유를 담아낸 에세이집이다. 그림과 글이 함께 어우러지며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 온 사물의 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게 한다. 특히 3장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선 우리가 무언가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믿는 순간조차 실은 그 일부만을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역설적이며, 익숙하다고 여겼던 장면들 역시 낯선 얼굴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의 벽과 부딪힐 때마다 이 책을 다시 꺼내 든다. 내가 보았다고 믿은 것들은 실은 제대로 본 적이 없었고, 있다고 여긴 자리에는 실제로 서 본 적이 없었다는 문장을 되새긴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마주하는 순간 삶은 이전과는 다른 깊이로 열리기 시작한다.● 책 속 한 문장 “우리는 우리가 본다고 생각한 것을 실제로 본 적도 없었고, 있다고 생각한 곳에 실제로 있어 본 적도 없었다.”김순호 / 시조 당선자◇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마거릿 미첼 지음·안정효 옮김·열린책들소설을 읽기 시작한 계기가 영화 관람의 감동 때문이었다. 내 생애 첫 영화이자 첫 소설책이다. 1800년대 중후반 미국의 남북전쟁과 노예 해방, 이후 이어지는 남부와 북부의 갈등,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스칼릿 오하라의 사랑과 성장을 다룬 작품이다. 작가 마거릿 미첼이 1936년에 쓴 장편소설로 이듬해인 1937년에 퓰리처상을 받았고, 1939년에 영화로 제작됐다. 영화에서 느낀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시종 흥미진진하게 읽었고, 거기서 미처 다루지 못한 디테일과 여백을 채워 넣으며 몰입할 수 있었던 책이었다. 영리하고 고집 센 남부의 미녀 스칼릿 오하라, 그녀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생존하려는 강한 의지를 지닌 인물이다. 미국의 아픈 역사인 남북전쟁을 바라본 인간의 욕망과 생존 본능을 이렇게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느끼며 여러 번 읽었다. 전쟁의 시작, 생존과 재건, 사랑과 갈등, 비극과 이별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는 아직도 왜소해지려는 내 자아를 자주 각성시키고 있기에, 그 영향은 현재진행형이다.● 책 속 한 문장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거야.”박혜겸 / 희곡 당선자◇동승/함세덕 지음·지만지드라마나는 자주 사람들의 마음이 두렵다. 그들이 품은 어떤 분노는, 그리움은, 억울함은 도무지 막아설 수 없기 때문이다. 고 함세덕 작가의 ‘동승’에는 그런 심지를 품은 아이, 도념이 등장한다. 그리고 도념의 심지가 언제 활활 타오를지 몰라, 불이 붙을 만한 거라곤 모조리 싹을 자르는 주지가 그 옆에 있다. 도념은 절을 떠나며, “스님, 이 잣은 다람쥐가 겨울에 먹으려구 등걸구멍에다 뫄둔 것을 제가 아침에 몰래 꺼내 뒀었어요. … 동지섣달 긴긴 밤 잠이 안 오시어 심심하실 때 깨무십시오”라고 말한다. 희곡을 다 읽고 나면 도념이 두고 간 잣을 오독오독 깨물어 씹는 주지가 떠오른다. 평소라면 작은 목숨의 겨우살이에 손을 대었다고 날뛰었겠으나, 그날만큼은 그것을 꼭꼭 짓이겼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도념이 짓이겼을 응어리를 한 알 한 알 삼키며, 자신이 결국 어찌할 수 없었던 열망을 헤아려 보았을 것이다. 마침내 도념이 응어리를 활활 불태우며 절을 떠날 때, 희곡을 읽는 내내 품어온 두려움은 슬픔으로 바뀌고 만다. 자신의 마음도, 타인의 마음도 어찌할 수 없는 우리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 유약한 것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책 속 한 문장 “스님, 이 잣은 다람쥐가 겨울에 먹으려구 등걸구멍에다 뫄둔 것을 제가 아침에 몰래 꺼내 뒀었어요. 어머니 오시면 드릴려구요. 동지섣달 긴긴 밤 잠이 안 오시어 심심하실 때 깨무십시오.”배은정 / 중편소설 당선자◇아침의 피아노/김진영 지음·한겨레출판사철학자 김진영이 암 선고를 받은 뒤, 임종 사흘 전까지 13개월 동안 쓴 기록이다. 그동안 읽고 생각하고 말해 온 삶을 증명하듯, 일상을 ‘열심히 구경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오류의 습관에서 벗어나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했다. 고요의 말, 조용히 외로운 것들, 감정이 아닌 정신으로서의 사랑, 생의 명랑성을 지닌 우렁찬 목청, 사랑과 아름다움과 감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지 않기. 철학자가 끝까지 붙든 삶의 태도 앞에서 묻게 된다. 생의 마지막 순간, 나는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 가족이 입원한 병원 서점에서 이 책을 샀다. 퇴원 후에도 마음이 거칠어질 때마다 책을 펼쳤다. 심란할 때는 생각을 가라앉히는 차 한 잔이 되었고, 자기 연민에 기울 때는 정신을 세우는 죽비가 되었으며, 숨이 가쁠 때는 속도를 늦추는 고삐가 되어 주었다. 정갈한 문장은 정신을 맑게 했다. 사이사이 드러나는 연약함에서는 위로를 얻었다. 저자가 세상을 떠난 지 7년이 지났다. 여러 권이 더 나왔지만, 모두 이 책의 주석서처럼 느껴졌다.● 책 속 한 문장 “글을 어떻게 쓰는 건지도 알겠다. 그건 백지 위에 의미의 수사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오선지 위에 마침표처럼 정확하게 음표를 찍는 일이다.”김근희 / 단편소설 당선자◇디어 라이프/앨리스 먼로 지음·정연희 옮김·문학동네이 단편집을 이야기할 때면 늘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저자가 ‘현대 단편 소설의 거장’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그런 거장의 마지막 책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더 본질적이다. 단편 예술의 극치가 이 책에 담겨 있어서다. 책은 열네 편의 단편 소설을 수록하고 있다. 캐나다의 시골을 배경으로 소소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이런 문장만으로는 이 단편들이 가진 서늘함을 다 표현할 수 없다. 이야기 안에는 보통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기 마련인데, 여기 담긴 단편들에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이 숨어 있다. 단편을 읽다 보면 우리의 인생이 떠오른다. 지나간 것에 대한 곱씹음과 숙고를 거쳐 간신히 닿을 수 있는, 가냘프지만 의미로 충만했던, 우리의 인생. 어쩌면 너무 호들갑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인생 책’이라는 주제로 이 책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는 없다. 만약 평생 단 한 권의 책만을 읽어야 한다면 주저 없이 이 책을 읽고 싶어서다. 마지막 책으로 오기까지 작가가 보낸 시간과 삶을 책 한 권으로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축복일까. 책 제목이 ‘디어 라이프’인 이유를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이다.● 책 속 한 문장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최승연 / 동화 당선자◇숨결이 바람 될 때/폴 칼라니티 지음·이종인 옮김·흐름출판일에 치여 하루를 보내다 보면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까먹곤 한다. 부모님 안부 전화를 미루고,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 소설은 간신히 첫 장만 들춰 본다. 소중한 이들이 영원히 곁에 머물 거라는, 언젠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현재는 그저 미래로 건너가기 위한 사다리가 된다. 이 책은 젊은 의사 폴 칼라니티가 암 선고를 받고 2년 동안 써 내려간 수필집이다. 폴은 시리도록 아름다운 문장들을 엮어 삶과 죽음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각오를 담담하게 서술해 나간다. 청년 시절 느꼈던 막연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폴은 마침내 죽음 앞에서 의사가 갖추어야 할 태도를 완성해 낸다. 암 선고를 받고 환자가 된 뒤에도, 폴은 의사로서 정체성을 지켜 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죽음이 모든 것을 앗아가는 게 아니므로, 그 앞에도 분명 삶이 존재하므로 폴은 좌절하지 않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만 집중한다. “점심시간 이후의 미래를 생각하는 건 시간 낭비다”라는 폴의 말처럼 미래는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기에 일상을 사랑하는 것으로 가득 채우고, 행복을 미래로 미루지 않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삶은 유한하므로.● 책 속 한 문장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곽경선 / 시나리오 당선자◇소설 윤동주/최인수 지음·집문당자극적이고 휘발되는 말과 영상에 피로가 몰려올 때, 문득 찾게 되는 고요가 있다. ‘소설 윤동주’는 한 사람의 삶과 그가 남긴 글을 통해 고요한 내면과 마주하게 하는 책이다. 일제강점기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는 조용히 말의 씨를 심고 키워내며 마침내 영원한 꽃을 피워 낸 시인이었다. 소설 속 그는 특별한 영웅이 아니다. 내성적이고 문학과 자연을 사랑했던 곧은 성품의 청년이었다. 말과 글을 빼앗긴 시대에 문학을 선택한 그는 깊은 정적 속에 서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사랑을 배우기 전 민족의 아픔을 먼저 자각했고, 닿을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암울한 세상에 한 줄기 빛이 스며들길 꿈꾸었다. 맑고 영롱한 시를 쓰고자 했지만, 냉혹한 시대의 벽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혐오하며 객혈처럼 시를 토해냈다. ‘소설 윤동주’는 저자가 윤동주의 주변 인물들을 만나 채록한 기록을 바탕으로, 젊은 동주의 삶을 풀어낸 소설이다. 수많은 글과 영상이 난무하는 오늘날, 한 청년의 삶과 시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성찰해야 하는지,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말없이 자문하게 한다.● 책 속 한 문장 “만 27년 1개월 동주가 지향해 온 지순한 세계의 도달점은 하늘이었다.”박지민 / 문학평론 당선자◇사랑의 지혜/알렝 핑켈크로트 지음·권유현 옮김·동문선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고도 왠지 모를 철학적 허기가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한번 뒤적거려 보길 권한다. 이 책은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한 철학자의 생각에 대한 해설로, 사랑이란 주제에서 시작해 철학 역사 정치 종교 등을 종횡무진 횡단한다. 무엇에 대한 사랑이든, 사랑에 몰두하는 사람이라면 그 대상을 다 알 것만 같은(혹은 다 알아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사랑이 지혜의 필요충분조건”이라는 이 책의 말을 곱씹어 보면, 비판과 반성을 멈추는 것이 반지성주의이듯 타자를 다 알았다고 확신하는 것 역시 반사랑주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인생 책’이란 걸 정하기엔 나는 너무 인생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이 내 인생을 일궈 나가리란 예감 자체는 언제나 나에게 있다 말하겠다. ● 책 속 한 문장 “실제로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분리시켜서, 나에게 오디세우스의 모험담과는 다른 모험담을 알려 주는 것은 이 세상에서 타인의 얼굴뿐이다. (…) 만약 이 무력감이 없다면, 삶은 아무리 엉뚱한 것일지라도 자기를 떠나 자기를 향해 가는 단조로운 여행에 불과할 것이다.”최우정 / 영화평론 당선자◇리어 왕/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최종철 옮김·민음사문학이 좋다는 사람을 만나면 셰익스피어를 좋아하는지 묻고, 그렇다는 답이 돌아오면 무엇을 가장 좋아하는지 묻는다. 이런 대화로 여러 인연을 얻게 됐다. 사랑과 배신, 복수와 용서, 희망과 욕망, 오슨 웰스와 구로사와 아키라를 얘기하며 말이다. 인생 책이란 우연으로 와서 필연으로 남은 책이고, 마음에 볕이 들 때나 폭풍이 몰아칠 때나 함께하는 책일 것이다. 모든 선택은 포기의 다른 이름이지만, ‘리어 왕’을 선택하는 데만은 별 망설임이 없다. 인류의 역사에 불변하는 거의 유일한 의제가 있다면 ‘인간은 외롭다’라고 생각한다. 고독과 허무를 감당치 못해서 그 숱한 폭력이 벌어졌다는 게 아니라, 인간이 서로 의존하는 취약한 존재임을 안다면 본인과 타인에게 덜 가혹할 수 있다는 뜻이다. 홀로 남은 리어는 “불쌍하고 헐벗은 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외친다. “자신을 노출시켜 가엾은 자들을 느껴라.” 매번 예상을 빗나가는 인생은 통제 불가능하지만, 눈앞의 고통에 공감하며 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 내게 ‘리어 왕’은 고통과 구원과 성장에 관한 가장 탁월한 이야기다.● 책 속 한 문장 “넓고 넓은 바보들의 무대로 나왔다고 태어날 때 우는 거야.”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김민 기자 kimmin@donga.com}

“K팝은 아직 엔터테인먼트 영역에 머물러 있습니다. 산업이 문화로 확장되려면 옥스퍼드 같은 교육 브랜드와 함께 가야 합니다.” 대중음악 작곡자이자 프로듀서로 유명한 김형석(사진)이 영국 옥스퍼드대와 K컬처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교육과정 개발에 힘을 모으기로 했다. 김 작곡가와 옥스퍼드대 정치국제관계학부 산하 ‘옥스퍼드 캐릭터 프로젝트’는 12일(현지 시간) 영국 현지에서 ‘키사스(KISAS·Korean International School of Arts and Sciences)’ 교육 프로그램 지원 및 한국 예술교육 분야 인성·리더십 연구 협력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김 작곡가는 19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K팝 하면 노래와 댄스만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종합적인 ‘패키지’ 상품”이라며 “시장 구조를 들여다보면 커뮤니티 비즈니스에 가깝다”고 이런 협약의 배경을 설명했다. 김 작곡가는 “팬들, 특히 방탄소년단(BTS)의 ‘아미’가 보여 주고 있는 선한 영향력은 아티스트와 팬이 상호보완적으로 연결된 수평적 관계에서 나온다”며 “이 구조가 상상력과 창의력을 자극한다. 인공지능(AI) 시대에 가장 잘 들어맞는 문화적 소스가 바로 K팝”이라고 했다. 2024년엔 옥스퍼드대 한국어 교육과정에 자신이 만든 1400여 곡의 사용을 허락하기도 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K팝은 아직 엔터테인먼트 영역에 머물러 있습니다. 산업이 문화로 확장되려면, 옥스퍼드 같은 교육 브랜드와 함께 가야 합니다.”대중음악 작곡자이자 프로듀서로 유명한 김형석이 영국 옥스퍼드대와 K컬처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교육과정 개발에 힘을 모으기로 했다. 김 작곡가와 옥스퍼드대 정치국제관계학부 산하 ‘옥스퍼드 캐릭터 프로젝트’는 12일(현지 시간) 영국 현지에서 ‘키사스(KISAS·Korean International School of Arts and Sciences)’ 교육 프로그램 지원 및 한국 예술교육 분야 인성·리더십 연구 협력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김 작곡가는 19일 동아일보와 전화 통화에서 “K팝 하면 노래와 댄스만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종합적인 ‘패키지’ 상품”이라며 “시장 구조를 들여다보면 커뮤니티 비즈니스에 가깝다”며 이런 협약의 배경을 설명했다.이번 협력 프로그램은 단순히 K팝 아티스트를 배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K컬처를 매개로 해 예술과 인문학을 가르치고, 인성과 창의성을 겸비한 젊은 리더와 창작자를 길러내는 게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장기적으로는 이 커리큘럼을 세계적으로 적용 가능한 모델로 발전시켜 개발도상국 등의 초중등 과정에도 비상업적으로 보급할 계획이다.김 작곡가는 “팬들, 특히 방탄소년단(BTS)의 ‘아미’가 보여주고 있는 선한 영향력은 아티스트와 팬이 상호보완적으로 연결된 수평적 관계에서 나온다”며 “이 구조가 상상력과 창의력을 자극한다. 인공지능(AI) 시대에 가장 잘 들어맞는 문화적 소스가 바로 K팝”이라고 했다.김 작곡가는 김광석 ‘사랑이라는 이유로’와 신승훈 ‘아이 빌리브’, 박진영 ‘너의 뒤에서’, 성시경 ‘내게 오는 길’ 등을 작곡하며 오랫동안 ‘히트곡 제조기’로 불려 왔다. 2024년엔 옥스퍼드대 한국어 교육과정에 자신이 만든 1400여 곡의 사용을 허락하기도 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47년간 시를 써온 김혜순 시인. 그는 자신의 일상을 녹화한 수 시간 분량의 필름을 갖고 있다. 녹화된 자신의 모습을 원래 속도로 끝까지 볼 용기는 없어, 재생 속도를 높여 들여다본다. 수 시간이 5분으로 압축되자, 자신이 마치 “심신미약, 신체장애, 조현병, 청각장애인, 시각장애인, 말더듬이”인 것처럼 행동한다는 걸 그는 발견한다. 겨우 시간의 흐름을 축지법처럼 접어본 것뿐인데, 시간을 쥐어짜듯 다뤄본 것뿐인데 벌어진 일이다. 김 시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詩作)의 내밀한 과정을 포착한다. 몸을 시간 속에서 일부러 파괴해 보고, 넘어뜨려 보는 것. 그리하여 정상과 비정상,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놓인 자세를 발견하는 것. ‘정상적’이라고 명명된 언어의 질서에 다른 기준을 적용해 보는 것이다. 신간 ‘공중의 복화술’은 김 시인이 문예지 ‘Axt’에 연재한 산문 13편과 국내외 강연 및 여러 매체를 통해 발표한 산문 가운데 6편을 추려 묶은 시론집이다. 복화술, 목소리, 슬픔, 침묵 등 김혜순 시학의 핵심어 19개를 축으로 구성됐다. 수록된 산문 ‘딸꾹질 전문가’에서 그는 문학을 “차별의 시선에 대한 심한 딸꾹질”에 비유한다. 정상성을 외치는 이들의 참혹한 응시에 시달리다 보면 몸 깊숙한 곳에서 딸꾹질이 치밀어 오른다는 것이다. 마치 온종일 방치돼 울던 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몸을 부르르 떨며 딸꾹질을 시작하듯이 말이다. 이렇듯 경련하고 발작하는 존재들은, 평탄하고 평안하게 존재하고자 하는 ‘정상인’들의 청각과 시각을 교란한다. 쫓겨났으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주변에 남아 웅성거리며 존재를 지속한다. 죽은 자의 넋처럼. 김 시인은 한국인 최초로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독일 국제문학상을 잇달아 수상한 세계적 시인이다. 1979년 등단한 그가 어떻게 새로운 창발을 거듭할 수 있는지를 이 산문집을 통해 엿볼 수 있다. 1970년대 말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며 군부 검열과 폭력에 시달렸던 경험, 이를 7편의 시로 남기게 된 사정까지 김혜순 시의 내외부적 맥락을 두루 살필 수 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약 7년 전, 강미현 건축사(52)의 건축사사무소로 요양병원 설계 의뢰가 들어왔다. 문제는 위치였다. 병원 맞은편에 장례식장이 있었다. 요양병원 창문 너머로 장례식장이 그대로 보이는 자리. 강 건축사는 최소한의 가림막 설치를 제안했지만, 사업주는 비용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해당 설계를 포기했다. 적법하게 지어졌더라도,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초라하게 만드는 건축물이 있다. 강 건축사는 건축 현장에서 체감해온 이런 문제의식을 주거, 노동, 장애, 교육, 공존이라는 다섯 가지 주제로 풀어낸 책 ‘존엄하고 초라한’(흠영)을 최근 펴냈다. 12일 전화로 만난 그는 “이 책은 제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반성문”이라고 했다.“건축, 특히 공공건축은 그 사회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느냐에 따라 설계돼요. 우리는 편안함보다는 면적이 크고 화려한 것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답답함도 있고, 미안함도 있어요.” 강 건축사의 문제의식은 장애인 주거복지 활동을 하며 더욱 또렷해졌다. 장애인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 친구가 되면서 “설계 도면만으로는 알 수 없던 일상의 불편함을 체감하게 됐다”고 한다.“제가 ‘우리 맛집 가자’고 했더니,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누나, 나는 갈 수 있는 데가 맛집이야.’” 대표적인 예가 화장실이다. 현행 법규는 수동 휠체어를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실제로는 더 큰 전동 휠체어 등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화장실임에도 현실에선 이용이 어렵다.“그 친구는 사람을 만나러 가도 물도 안 마시고 음식도 잘 안 먹어요. 화장실이 불편하니까요.” 강 건축사는 요양병원 건축에 대해서도 “현실의 설계는 병실과 레크리에이션용 공동 공간을 배치하는 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며 “하지만 사람답게 살려면 그것만 필요한 게 아니다”라고 짚었다.“가족이 왔을 때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고, 친구들이 오갈 수 있어도 좋고요. 반대로 조용히 혼자 지내고 싶은 분들은 자기만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고요. 실제 사용자의 입장에서 공간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원광대 건축학과 겸임교수이기도 한 그는 후배 건축가들에게도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건축을 한다고 하면 크고 거창한 걸 꿈꾸잖아요. 그런데 저는 정말 작은 것 하나, 예를 들면 도시의 계단 하나를 만들더라도 제대로 만드는 건축이었으면 좋겠어요. 건축이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담아낼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약 7년 전, 강미현 건축사(52)의 건축사무소로 요양병원 설계 의뢰가 들어왔다. 문제는 위치였다. 병원 맞은 편에 장례식장이 있었다. 요양병원 창문 너머로 장례식장이 그대로 보이는 자리. 강 건축사는 최소한의 가림막 설치를 제안했지만, 사업주는 비용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해당 설계를 포기했다.적법하게 지어졌더라도,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초라하게 만드는 건축물이 있다. 강 건축사는 건축 현장에서 체감해온 이런 문제의식을 주거·노동·장애·교육·공존이라는 다섯 가지 주제로 풀어낸 책 ‘존엄하고 초라한’(흠영)을 최근 펴냈다. 12일 전화로 만난 그는 “이 책은 제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반성문”이라고 했다.“건축, 특히 공공건축은 그 사회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느냐에 따라 설계돼요. 우리는 편안함보다는 면적이 크고 화려한 것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답답함도 있고, 미안함도 있어요.”강 건축사의 문제의식은 장애인 주거복지 활동을 하며 더욱 또렷해졌다. 장애인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 친구가 되면서 “설계 도면만으로는 알 수 없던 일상의 불편함을 체감하게 됐다”고 한다. “제가 ‘우리 맛집 가자’고 했더니,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누나, 나는 갈 수 있는 데가 맛집이야.’”대표적인 예가 화장실이다. 현행 법규는 수동 휠체어를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실제로는 더 큰 전동 휠체어 등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화장실임에도 현실에선 이용이 어렵다. “그 친구는 사람을 만나러 가도 물도 안 마시고 음식도 잘 안 먹어요. 화장실이 불편하니까요.”강 건축사는 요양병원 건축에 대해서도 “현실의 설계는 병실과 레크리에이션용 공동 공간을 배치하는 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며 “하지만 사람답게 살려면 그것만 필요한 게 아니다”라고 짚었다.“가족이 왔을 때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고, 친구들이 오갈 수 있어도 좋고요. 반대로 조용히 혼자 지내고 싶은 분들은 자기만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고요. 실제 사용자의 입장에서 공간을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원광대 건축학과 겸임교수이기도 한 그는 후배 건축가들에게도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건축을 한다고 하면 크고 거창한 걸 꿈꾸잖아요. 그런데 저는 정말 작은 것 하나, 예를 들면 도시의 계단 하나를 만들더라도 제대로 만드는 건축이었으면 좋겠어요. 건축이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담아낼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항공업계에 종사하는 30년 차 직장인 김모 씨(57)는 요즘 퇴근하면 그리스어 알파벳을 펜으로 쓰며 외우고 있다. 철학을 전공한 그는 언젠가 제대로 “그리스 철학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이에 정년을 앞두고 첫걸음을 뗐다. 김 씨는 “고대 희랍어는 문자로만 남아있는 사어(死語)라 오히려 배우는 재미가 있다”며 “유럽에서 근무하던 시절 익힌 언어들이 실용을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오로지 ‘책을 읽기 위한 공부’라 즐겁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첫 부분을 원어로 읽어보는 게 목표”라고 했다. 인공지능(AI) 번역과 요약이 일상화되면서 언어 학습은 이전과는 다른 국면을 맞고 있다. “AI가 다 해주니 외국어는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이런 흐름과 반대로, 고대 그리스어·산스크리트어처럼 실용성과 거리가 먼 언어를 배우는 이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 원전을 몇 달에 걸쳐 완독하는 등 의도적으로 ‘비효율적인 공부’에 나서기도 한다.● ‘뿌리의 뿌리’를 찾는 즐거움 고대 희랍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유를 남긴 언어다. 플라톤 연구로 석사, 호메로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고전학자 강대진 씨는 “2500년 전 언어지만, 일상에 가장 깊숙이 스며든 언어 중 하나”라며 “헤게모니, 패러다임, 카리스마 같은 단어도 희랍어에서 왔다. 사람들에겐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욕구가 있고, 희랍어는 그 갈증을 채워준다”고 했다. 강 박사는 최근 ‘쉽게 배우는 고전 그리스어’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리스·로마 고전 강독 수업’에 참여 중인 주부 황경화 씨(57)는 최근 번역본 독서를 넘어 희랍어 공부를 시작했다. 황 씨는 “고전 읽기도 어느덧 6년이 됐으니, 희랍어 역시 평생 공부라 생각한다”며 “인생에서 금요일 하루만큼은 고전을 읽는 시간으로 두려 한다”고 했다. 소설 ‘희랍어 시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해되지 않는 언어 앞에 멈춰 서는 시간은 삶의 리듬을 바꾼다고. 강 박사는 “AI 시대에 어떤 언어라도 실용성은 큰 의미가 없으니 차라리 ‘무익한 것’을 해보자는 제안”이라며 “고귀함이란 무용한 걸 계속하는 것이란 말도 있다”고 덧붙였다.● AI가 따라올 수 없는 것 프랑스·독일·스페인 문학 번역가인 최성웅 씨는 지난해부터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고 있다. 고대 인도 언어로 불교와 힌두교 경전에 쓰인 언어다. 최 씨는 현대 문학은 상당 부분 AI 번역으로 대체될 수 있지만, ‘고전’은 다르다고 믿는다.“고전어에는 논리 접속사가 붕괴되는 지점이 종종 나타나요. 인과와 역접이 동시에 성립하는 식이죠. 그걸 이해하려면 개인의 논리 자체가 흔들리는 지점까지 가야 합니다. 일종의 소크라테스식 산파술이죠. 고전 텍스트 영역은 AI가 쉽게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고대 이집트어인 콥트어를 취미로 독학하는 직장인 이모 씨(29)도 “AI가 검은 밤바다처럼 밀려오는 시대에, 오랫동안 살아남았던 무언가를 배워 간직할 수 있는 게 기쁘다”고 했다. 옛 언어를 배우는 이들의 마음은 비슷하다. AI가 결과를 손쉽게 제공하는 시대지만, 이들은 어떤 이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 공부의 의미 역시 재정의돼야 한다고 했다.“공부 자체를 좋아하고, 자기 마음을 단련하는 여정으로 받아들일 때 의미가 생깁니다. 한국어만 봐도 수많은 언어가 뒤섞여 형성됐잖아요. 요리사가 재료를 하나씩 꺼내 보듯 한자와 문법, 어원을 들여다보는 식이죠. AI 시대에 모두의 독해력이 낮아질수록, 고어를 통해 독해력을 기르는 건 또 다른 힘이 될 수 있습니다.”(최성웅 씨)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항공업계에 종사하는 30년 차 직장인 김모 씨(57)는 요즘 퇴근하면 그리스어 알파벳을 펜으로 쓰며 외우고 있다. 철학을 전공한 그는 언젠가 제대로 “그리스 철학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이에 정년을 앞두고 첫걸음을 뗐다.김 씨는 “고대 희랍어는 문자로만 남아있는 사어(死語)라 오히려 배우는 재미가 있다”며 “유럽에서 근무하던 시절 익힌 언어들이 실용을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오로지 ‘책을 읽기 위한 공부’라 즐겁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첫 부분을 원어로 읽어보는 게 목표”라고 했다.인공지능(AI) 번역과 요약이 일상화되면서 언어 학습은 이전과는 다른 국면을 맞고 있다. “AI가 다 해주니 외국어는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이런 흐름과 반대로, 고대 그리스어·산스크리트어처럼 실용성과 거리가 먼 언어를 배우는 이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 원전을 몇 달에 걸쳐 완독하는 등 의도적으로 ‘비효율적인 공부’에 나서기도 한다.● ‘뿌리의 뿌리’를 찾는 즐거움고대 희랍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유를 남긴 언어다. 플라톤 연구로 석사, 호메로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고전학자 강대진 씨는 “2500년 전 언어지만, 일상에 가장 깊숙이 스며든 언어 중 하나”라며 “헤게모니, 패러다임, 카리스마 같은 단어도 희랍어에서 왔다. 사람들에겐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욕구가 있고, 희랍어는 그 갈증을 채워준다”고 했다. 강 박사는 최근 ‘쉽게 배우는 고전 그리스어’를 출간하기도 했다.‘그리스·로마 고전 강독 수업’에 참여 중인 주부 황경화 씨(57)는 최근 번역본 독서를 넘어 희랍어 공부를 시작했다. 황 씨는 “고전 읽기도 어느덧 6년이 됐으니, 희랍어 역시 평생 공부라 생각한다”며 “인생에서 금요일 하루만큼은 고전을 읽는 시간으로 두려 한다”고 했다.소설 ‘희랍어 시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해되지 않는 언어 앞에 멈춰 서는 시간은 삶의 리듬을 바꾼다고. 강 박사는 “AI 시대에 어떤 언어라도 실용성은 큰 의미가 없으니 차라리 ‘무익한 것’을 해보자는 제안”이라며 “고귀함이란 무용한 걸 계속하는 것이란 말도 있다”고 덧붙였다.● AI가 따라올 수 없는 것프랑스·독일·스페인 문학 번역가인 최성웅 씨는 지난해부터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고 있다. 고대 인도 언어로 불교와 힌두교 경전에 쓰인 언어다. 최 씨는 현대 문학은 상당 부분 AI 번역으로 대체될 수 있지만, ‘고전’은 다르다고 믿는다.“고전어에는 논리 접속사가 붕괴되는 지점이 종종 나타나요. 인과와 역접이 동시에 성립하는 식이죠. 그걸 이해하려면 개인의 논리 자체가 흔들리는 지점까지 가야 합니다. 일종의 소크라테스식 산파술이죠. 고전 텍스트 영역은 AI가 쉽게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고대 이집트어인 콥트어를 취미로 독학하는 직장인 이모 씨(29)도 “AI가 검은 밤바다처럼 밀려오는 시대에, 오랫동안 살아남았던 무언가를 배워 간직할 수 있는 게 기쁘다”고 했다.옛 언어를 배우는 이들의 마음은 비슷하다. AI가 결과를 손쉽게 제공하는 시대지만, 이들은 어떤 이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 공부의 의미 역시 재정의돼야 한다고 했다.“공부 자체를 좋아하고, 자기 마음을 단련하는 여정으로 받아들일 때 의미가 생깁니다. 한국어만 봐도 수많은 언어가 뒤섞여 형성됐잖아요. 요리사가 재료를 하나씩 꺼내 보듯 한자와 문법, 어원을 들여다보는 식이죠. AI 시대에 모두의 독해력이 낮아질수록, 고어를 통해 독해력을 기르는 건 또 다른 힘이 될 수 있습니다.”(최성웅 씨)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정보기술(IT) 기업 디자이너로 일하는 서경수(가명·41) 씨는 회사에서 ‘도어 투 도어(Door to Door)’ 15분 거리에 산다. 직장이 바뀔 때마다 웬만하면 회사 근처로 이사했다. 그에게 집은 대기실 같다. 들어가서 잠만 자는 공간. 서 씨는 “개인적으로 진짜 쉬고 있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생활이 가능한 건 그가 1인 가구이기 때문이다.지난해 행정안전부 조사에 따르면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 비율은 42%로, 1000만 가구를 넘어섰다. 하지만 1인 가구를 대상으로 한 국내의 본격적인 연구는 아직 드문 게 현실. 김수영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1인 가구 109명을 직접 만나 쓴 신간 ‘필연적 혼자의 시대’(다산초당·사진)는 이런 공백을 메우기 위한 시도다. 서 씨와 같은 이들을 수차례, 수 시간에 걸쳐 인터뷰하며 통계 뒤에 가려진 삶을 끌어냈다. 김 교수를 5일 전화로 인터뷰했다.“1인 가구들을 만나 보면 커리어 이야기는 아주 적극적이고 담대하게 해요. 그런데 연애나 가족 계획을 묻는 순간, 말이 흐려지죠. ‘좋은 사람 만나면요’ 같은 식으로요.”김 교수가 현장에서 포착한 이 미묘한 머뭇거림은 ‘혼자 사는 삶=자발적 선택’이란 통념과 사뭇 달랐다. 그는 지금을 ‘솔로 권하는 사회’라고 표현했다. 노동시장이 급격히 유연화되면서 언제든 이동 가능하고, 24시간 투입 가능하며, 가족 부양 책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1인 가구가 현재의 노동시장에 가장 잘 맞는 형태가 됐다는 설명이다. 업무 효율에 최적화된 삶을 살다 보니 ‘어쩌다 솔로’가 된 사람들이 지금의 1인 가구라는 해석이다.혼자 살면서 가장 먼저 흔들리는 건 식사다. 통계에 따르면 아침 식사를 거르는 비율은 다인 가구의 두 배에 이른다. 하루 한 번 이상 외식하는 비율은 40%에 육박한다. 만성질환 유병률은 다인 가구보다 세 배, 우울 위험은 2.4배 높았다.그럼에도 여전히 “1인 가구는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적지 않다. 이들을 위한 정책도 번번이 추진력을 얻지 못한다. 김 교수는 1인 가구가 겪는 문제의 핵심을 ‘관계의 결핍’에서 찾았다. 해법 역시 막대한 재정 투입이 아니라, 연결망을 만드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인 가구들이 의미를 느끼며 기여할 수 있는 삶, 가족을 이루지 않아도 사회 안에서 역할과 자리가 주어지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기부든, 자원봉사든, 작은 모임이든 형태는 다양합니다. 특히나 앞으로는 혼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자산과 물건, 경험을 가족이 아닌 사회에 의미 있는 방식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경우가 늘어날 거예요. 그렇다면 이런 연결망은 오히려 이미 존재하는 자원이 순환되게 하는 거죠.”그는 “전체의 42%가 1인 가구라면 그건 이미 다수”라며 “다수의 위험을 그냥 방치하는 게 국가의 기조여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IT(정보기술) 기업 디자이너로 일하는 서경수 씨(41·가명)는 회사에서 ‘도어 투 도어(Door to Door)’ 15분 거리에 산다. 직장이 바뀔 때마다 웬만하면 회사 근처로 이사했다. 그에게 집은 대기실 같다. 들어가서 잠만 자는 공간. 서 씨는 “개인적으로 진짜 쉬고 있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생활이 가능한 건 그가 1인 가구이기 때문이다.지난해 행정안전부 조사에 따르면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 비율은 42%로, 1000만 가구를 넘어섰다. 하지만 1인 가구를 대상으로 한 국내의 본격적인 연구는 아직 드문 게 현실. 김수영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1인 가구 109명을 직접 만나 쓴 신간 ‘필연적 혼자의 시대’(다산초당)는 이런 공백을 메우기 위한 시도다. 서 씨와 같은 이들을 수 차례, 수 시간에 걸쳐 인터뷰하며 통계 뒤에 가려진 삶을 끌어냈다. 김 교수를 5일 전화로 인터뷰했다.“1인 가구들을 만나보면 커리어 이야기는 아주 적극적이고 담대하게 해요. 그런데 연애나 가족계획을 묻는 순간, 말이 흐려지죠. ‘좋은 사람 만나면요’ 같은 식으로요.”김 교수가 현장에서 포착한 이 미묘한 머뭇거림은 ‘혼자 사는 삶=자발적 선택’이란 통념과 사뭇 달랐다. 그는 지금을 ‘솔로 권하는 사회’라고 표현했다. 노동시장이 급격히 유연화되면서 언제든 이동 가능하고, 24시간 투입 가능하며, 가족 부양 책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1인 가구가 현재의 노동시장에 가장 잘 맞는 형태가 됐다는 설명이다. 업무 효율에 최적화된 삶을 살다 보니 ‘어쩌다 솔로’가 된 사람들이 지금의 1인 가구라는 해석이다.혼자 살면서 가장 먼저 흔들리는 건 식사다. 통계에 따르면 아침 식사를 거르는 비율은 다인가구의 두 배에 이른다. 하루 한 번 이상 외식하는 비율은 40%에 육박한다. 만성질환 유병률은 다인가구보다 세 배, 우울 위험은 2.4배 높았다.그럼에도 여전히 “1인 가구는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적지 않다. 이들을 위한 정책도 번번이 추진력을 얻지 못한다. 김 교수는 1인 가구가 겪는 문제의 핵심을 ‘관계의 결핍’에서 찾았다. 해법 역시 막대한 재정 투입이 아니라, 연결망을 만드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인 가구들이 의미를 느끼며 기여할 수 있는 삶, 가족을 이루지 않아도 사회 안에서 역할과 자리가 주어지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기부든, 자원봉사든, 작은 모임이든 형태는 다양합니다. 특히나 앞으로는 혼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자산과 물건, 경험을 가족이 아닌 사회에 의미 있는 방식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경우가 늘어날 거예요. 그렇다면 이런 연결망은 오히려 이미 존재하는 자원이 순환되게 하는 거죠.”그는 “전체의 42%가 1인 가구라면 그건 이미 다수”라며 “다수의 위험을 그냥 방치하는 게 국가의 기조여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하루하루 살아 있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어머니는 몸소 삶으로 보여주셨고 김을 매듯 글을 쓰셨습니다.” 9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올해 타계 15주기를 맞은 소설가 박완서(1931∼2011·사진)를 기리는 ‘박완서 아카이브’ 개관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작가의 장녀인 호원숙 작가(72)는 “어머니는 사랑에는 얼마나 큰 품이 드는지 보여줬고, 어머니의 문학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게 한다”고 말했다.‘박완서 아카이브’는 박 작가의 유족이 기증한 자료 6000여 점 가운데 470여 점을 엄선한 전시 겸 보존 공간이다. 도서관 본관과 관정관을 잇는 공간을 리모델링한 ‘헤리티지 라이브러리’ 내에 약 50평(165㎡) 규모로 조성됐다.아카이브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건 작가가 생의 마지막 13년을 보낸 경기 구리시 아치울 자택을 재현한 공간이다. 고인이 실제로 사용했던 장서와 책상, 의자, 컴퓨터를 그대로 옮겨와 서재로 꾸몄다. 박 작가는 실제로 이 서재에서 장편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과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를 집필했다. 다섯 아이의 어머니인 박 작가는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게 쉽지 않았다고 한다. 고인은 가족을 돌보며 틈틈이 엎드려 등단작 ‘나목’을 썼고, 등단 뒤에도 15년이 흐른 1985년에야 자신의 책상을 갖게 됐다. 생애 첫 책상을 마련한 뒤 박 작가는 “엎드려서 글을 쓰다가 밥상을 놓고 글을 쓰니 이렇게 좋은 것을, 하고 좋아하던 게 엊그저께 같은데 이젠 버젓하게 큰 책상에다 의자에 앉아서 쓴다”는 소회를 남기기도 했다. 작가가 의자에 앉아 오른쪽 큰 창으로 내다보던 마당 정원도 실제 나무와 흙으로 재현했다. 아치울에 이사를 오자마자, 고인은 유년 시절 살던 집 뜰을 닮은 마당을 가꿨다. 손수 호미를 들고 흙을 만지는 일은 아파트 생활로 숨이 막혔던 그에게 “생각만으로도 비죽비죽 웃음이 나올 정도로” 큰 위안이 됐다고 한다. 아카이브에는 이 밖에도 박 작가가 사용하던 재봉틀과 사진기, ‘해산 사발’ 등 생활 유물과 친필 원고, 일기 등 육필자료가 전시됐다. 4월 30일까지 아카이브 조성 기념전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도 개최된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하루하루 살아 있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어머니는 몸소 삶으로 보여주셨고 김을 매듯 글을 쓰셨습니다.”9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올해 타계 15주기를 맞은 소설 박완서(1931~2011)를 기리는 ‘박완서 아카이브’ 개관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작가의 장녀인 호원숙 작가(72)는 “어머니는 사랑에는 얼마나 큰 품이 드는지 보여줬고, 어머니의 문학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게 한다”고 말했다.‘박완서 아카이브’는 박 작가의 유족이 기증한 자료 6000여 점 가운데 470여 점을 엄선한 전시 겸 보존 공간이다. 도서관 본관과 관정관을 잇는 공간을 리모델링한 ‘헤리티지 라이브러리’ 내에 약 50평(165㎡) 규모로 조성됐다.아카이브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건 작가가 생의 마지막 13년을 보낸 경기 구리시 아치울 자택을 재현한 공간이다. 고인이 실제로 사용했던 장서와 책상, 의자, 컴퓨터를 그대로 옮겨와 서재로 꾸몄다. 박 작가는 실제로 이 서재에서 장편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과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를 집필했다.다섯 아이의 어머니인 박 작가는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게 쉽지 않았다고 한다. 고인은 가족을 돌보며 틈틈이 엎드려 등단작 ‘나목’을 썼고, 등단 뒤에도 15년이 흐른 1985년에야 자신의 책상을 갖게 됐다. 생애 첫 책상을 마련한 뒤 박 작가는 “엎드려서 글을 쓰다가 밥상을 놓고 글을 쓰니 이렇게 좋은 것을, 하고 좋아하던 게 엊그저께 같은데 이젠 버젓하게 큰 책상에다 의자에 앉아서 쓴다”는 소회를 남기기도 했다.작가가 의자에 앉아 오른 쪽 큰 창으로 내다보던 마당 정원도 실제 나무와 흙으로 재현했다. 아치울에 이사를 오자마자, 고인은 유년 시절 살던 집 뜰을 닮은 마당을 가꿨다. 손수 호미를 들고 흙을 만지는 일은 아파트 생활로 숨이 막혔던 그에게 “생각만으로도 비죽비죽 웃음이 나올 정도로” 큰 위안이 됐다고 한다. 아카이브에는 이 밖에도 박 작가가 사용하던 재봉틀과 사진기, ‘해산 사발’ 등 생활 유물과 친필 원고, 일기 등 육필자료가 전시됐다. 4월 30일까지 아카이브 조성 기념전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도 개최된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일본의 과학소설(SF) 작가 이토 게이카쿠(伊藤計劃)는 근미래를 묘사한 ‘세기말 하모니’에서 건강을 사회의 최우선 가치로 삼는 세상을 그렸다. 정부는 개인의 건강 상태를 상시 관리하기 위해 모든 시민의 몸에 초미세 기계를 삽입한다. 조금이라도 정상 범주에서 벗어나면 강제 치료가 이뤄진다. 그 결과 사람들은 모두 건강하게 100세 이상 살 수 있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묘하게 불편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일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저자는 이 작품을 언급하며 “‘건강’하지만 ‘부자유’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근미래를 상상할 필요도 없다. 현대인은 인류 역사상 가장 청결하고 안전하며 질서 정연한, 그야말로 쾌적한 사회에 살고 있다. 저자는 이 쾌적함이 타인을 향한 노골적인 배제와 통제를 토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자유를 잃어버렸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대표적인 사례가 ‘의료화’다. 기존에는 의학적 문제로 간주되지 않았던 다양한 증상과 행동이 질병이나 장애로 규정되고 치료의 대상으로 편입되는 현상을 의료화라고 부른다. 과거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행동과 태도는 이제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나 자폐스펙트럼장애(ASD)로 해석되며 의료와 복지의 관리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의료와 복지의 지향은 자본주의 사회에 원활히 적응하는 삶에 가깝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내세운 ‘1억 총활약 사회’를 언급하며 “사람들은 정신질환의 정도와 사회 적응의 수준에 맞춰 ‘1억 총활약 사회’ 속 어딘가로 재배치되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됐다”고 했다. ‘1억 총활약 사회’는 50년 뒤에도 인구 1억 명을 유지하고, 1억 명 모두 활발하게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슬로건이다. 틀 바깥의 삶을 상상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선 20세기 초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았다. 환자는 단골 의사의 왕진을 받았고, 가족과 이웃이 지켜보는 가운데 삶을 마무리했다. 병든 사람 역시 죽음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와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고도 경제 성장을 거치며 질병과 죽음은 점차 일상의 공간에서 밀려났다. 자택 사망은 꾸준히 줄어든 반면,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경우는 크게 늘었다. 의료 인프라의 발달은 삶에서 병과 죽음을 분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상 속에서 병과 죽음을 받아들일 여지는 줄어들었고, 현대인은 자신이나 가족에게 질병과 죽음이 닥쳤을 때 이를 마치 기습적인 사건처럼 받아들이게 됐다. 병과 죽음을 삶의 일부로 인식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저자는 우리가 추구해 온 사회는 분명 많은 고통을 줄였지만, 동시에 불완전함과 다양성을 포용하는 능력 역시 약화시켰다고 본다. 의료와 복지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체계가 만들어낸 차별과 배제를 성찰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책이다. 일본의 사례를 다루지만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쾌적함 속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우리가 여전히 인간다운 삶을 고민하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최근 출판 시장에선 문학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상대적으로 비문학은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존재감이 떨어지는 모양새다. 인공지능(AI)이 방대한 정보를 즉각 제공하는 시대다 보니, 오랫동안 ‘지식 전달’을 핵심 역할로 해 온 비문학이 약세에 처했다는 평가가 나온다.실제로 출판계에선 기존 ‘백과사전형’ 비문학은 막을 내렸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인터넷서점 예스24의 손민규 인문PD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같은 책들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지식 나열형 책들은 수요가 덜하다”고 전했다. 한 출판사 관계자도 “개념 설명을 나열하는 책은 기획 단계부터 걸러낸다”고 했다. 그렇다면 AI 시대에도 독자에게 사랑받는 비문학은 어떤 게 있을까.① 단순 지식 넘어 ‘세계관’ 제공 당연히 비문학이라고 모두 외면받진 않는다. 특히 스테디셀러들은 강하다. 1998년 국내 출간된 ‘총, 균, 쇠’와 2015년 나온 ‘사피엔스’는 여전히 잘 팔린다. 김영사에 따르면 ‘사피엔스’는 2021년부터 2025년까지 해마다 8만 부 이상 팔렸다. 그래픽노블 버전인 ‘사피엔스 그래픽 히스토리’도 2024년 유발 하라리 신작 ‘넥서스’ 출간과 맞물려 판매량이 9만 부까지 뛰었다. 이런 비문학 스테디셀러는 공통점이 있다. 세상을 해석하는 관점을 제시하고, 지식에 접근하는 태도를 길러준다. 최신 정보가 아니어도, 독자의 세계관 형성에 도움을 주는 ‘문화 자본’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김윤경 김영사 편집이사는 “거시적인 흐름을 문명사적으로 바라본 책들은 신간 이상으로 잘 팔린다”며 “단편적인 질문에 즉각 답을 내놓는 AI와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설명했다.② 곁에서 독자의 삶과 ‘동행’지난해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오른 비문학도 공통점이 있다. ‘초역 부처의 말’(6위)과 ‘위버멘쉬’(16위), ‘쇼펜하우어 인생수업’(21위)은 종교나 철학 등 순수 학문과 자기계발서의 경계에 선 책들이다. 한 출판 관계자는 “전문서적에서 다뤄지던 내용을 격언 형태로 재구성해 ‘씹어먹기 좋게’ 만든 게 닮은 꼴”이라고 했다. 이런 책들은 ‘완결성’을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불안이나 고독, 관계 등 현대인의 고민과 맞닿는 문장을 제시한다. 철학을 설명하는 대신 사용하게 만드는 방식. 한 출판사 대표는 “비문학에 대한 기대가 ‘설명’에서 ‘동행’으로 이동한 결과로 보인다”며 “완독이 필요하지 않아 곁에 두고 가끔 펴 봐도 좋은 책들”이라고 분석했다.③ ‘반 AI’ 느림과 불편을 지향 손 PD는 지난해 주목받은 비문학으로 ‘먼저 온 미래’와 ‘편안함의 습격’, ‘경험의 멸종’, ‘불안 세대’를 꼽았다. 모두 디지털 환경 아래 줄어든 신체 감각과 느린 시간, 불편함의 의미를 다룬 책들이다. AI로는 충족되지 않는 ‘인간의 개인적 경험’이 녹아 있는 비문학이 새로운 경쟁력을 얻고 있다. 이 책들의 또 다른 특징은 저자의 서사가 전면에 드러난다는 점이다. ‘편안함의 습격’에서 저자는 직접 극한을 체험하기 위해 33일간 알래스카 순록 사냥을 떠난다. 비문학이지만 분명한 스토리텔링이 있고, 저자는 관찰자가 아니라 등장인물에 가깝다. 독자는 정보를 얻기보단 이야기를 따라간다. 이김 출판사의 김미선 편집자는 “과거엔 비문학의 효용 가치가 지식 습득에 치중돼 있었다면, 지금은 인간다움과 새로운 나의 발견으로 무게추가 옮겨지고 있다”며 “앞으로도 독자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는 ‘능동적인’ 책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최근 출판 시장에선 문학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상대적으로 비문학은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존재감이 떨어지는 모양새다. 인공지능(AI)이 방대한 정보를 즉각 제공하는 시대다보니, 오랫동안 ‘지식 전달’을 핵심 역할로 해온 비문학이 약세에 처했다는 평가가 나온다.실제로 출판계에선 기존 ‘백과사전형’ 비문학은 막을 내렸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인터넷서점 예스24의 손민규 인문PD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같은 책들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지식 나열형 책들은 수요가 덜하다”고 전했다. 한 출판사 관계자도 “개념 설명을 나열하는 책은 기획 단계부터 걸러낸다”고 했다. 그렇다면 AI 시대에도 독자에게 사랑받는 비문학은 어떤 게 있을까.① 단순 지식 넘어 ‘세계관’ 제공당연히 비문학이라고 모두 외면받진 않는다. 특히 스테디셀러들은 강하다. 1998년 국내 출간된 ‘총, 균, 쇠’와 2015년 나온 ‘사피엔스’는 여전히 잘 팔린다. 김영사에 따르면 ‘사피엔스’는 2021년부터 2025년까지 해마다 8만 부 이상 팔렸다. 그래픽노블 버전인 ‘사피엔스 그래픽 히스토리’도 2024년 유발 하라리 신작 ‘넥서스’ 출간과 맞물려 판매량이 9만 부까지 뛰었다.이런 비문학 스테디셀러는 공통점이 있다. 세상을 해석하는 관점을 제시하고, 지식에 접근하는 태도를 길러준다. 최신 정보가 아니어도, 독자의 세계관 형성에 도움을 주는 ‘문화 자본’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김윤경 김영사 편집이사는 “거시적인 흐름을 문명사적으로 바라본 책들은 신간 이상으로 잘 팔린다”며 “단편적인 질문에 즉각 답을 내놓는 AI와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설명했다.② 곁에서 독자의 삶과 ‘동행’지난해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오른 비문학도 공통점이 있다. ‘초역 부처의 말’(6위)과 ‘위버멘쉬’(16위), ‘쇼펜하우어 인생수업’(21위)는 종교나 철학 등 순수 학문과 자기계발서의 경계에 선 책들이다. 한 출판 관계자는 “전문서적에서 다뤄지던 내용을 격언 형태로 재구성해 ‘씹어먹기 좋게’ 만든 게 닮은 꼴”이라고 했다.이런 책들은 ‘완결성’을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불안이나 고독, 관계 등 현대인의 고민과 맞닿는 문장을 제시한다. 철학을 설명하는 대신 사용하게 만드는 방식. 한 출판사 대표는 “비문학에 대한 기대가 ‘설명’에서 ‘동행’으로 이동한 결과로 보인다”며 “완독이 필요하지 않아 곁에 두고 가끔 펴봐도 좋은 책들”이라고 분석했다.③ ‘반 AI’ 느림과 불편을 지향손 PD는 지난해 주목받은 비문학으로 ‘먼저 온 미래’와 ‘편안함의 습격’, ‘경험의 멸종’, ‘불안 세대’를 꼽았다. 모두 디지털 환경 아래 줄어든 신체 감각과 느린 시간, 불편함의 의미를 다룬 책들이다. AI로는 충족되지 않는 ‘인간의 개인적 경험’이 녹아있는 비문학이 새로운 경쟁력을 얻고 있다.이 책들의 또 다른 특징은 저자의 서사가 전면에 드러난다는 점이다. ‘편안함의 습격’에서 저자는 직접 극한을 체험하기 위해 33일간 알래스카 순록 사냥을 떠난다. 비문학이지만 분명한 스토리텔링이 있고, 저자는 관찰자가 아니라 등장인물에 가깝다. 독자는 정보를 얻기보단 이야기를 따라간다. 이김 출판사의 김미선 편집자는 “과거엔 비문학의 효용 가치가 지식 습득에 치중돼 있었다면, 지금은 인간다움과 새로운 나의 발견으로 무게추가 옮겨지고 있다”며 “앞으로도 독자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는 ‘능동적인’ 책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요즘 도서전의 주인공은 도서가 아니라 ‘굿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국제도서전이 15만 명이 찾는 화제의 행사로 자리 잡는 데도 굿즈의 힘이 컸다. 그런데 이런 흐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도서전이 열렸다. 이름부터 지향점이 분명하다. ‘디스 이즈 텍스트(This Is Text)’. 지난달 31일부터 이틀간 서울 중구 알라딘 빌딩에서 열린 이 도서전은 ‘굿즈 없는 도서전’을 전면에 내걸었다. 출판사 ‘이김’과 ‘힐데와소피’가 주최했고, 16개 논픽션 출판사가 참여했다. 1일 오전 찾은 현장은 도서전이면 으레 보여야 할 풍경이 보이지 않았다. 굿즈도 없고, 유명 저자의 북토크도, 줄을 서는 사인회도 없었다. 그 대신 조용한 대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책만 있는 도서전에 사람들이 올까 싶었지만, 600장의 사전 예매 티켓이 모두 팔렸다. 각 부스에선 책을 사이에 두고 편집자와 독자의 대화가 이어졌다. 부스마다 ‘대화 카드’가 마련돼 있었다. 출판사 ‘현실문화연구’ 부스에서 한 독자가 ‘책이 나오기까지 정말 오래 걸린 책은?’이란 카드를 가리키자, 김수기 대표의 답변이 이어졌다. “‘세계 끝의 버섯’은 만드는 데만 7, 8년이 걸렸어요. 비문학이지만 문학적 표현이 많아서 번역자를 찾는 데만 10개월이 걸렸어요. 인간중심적 사고에 머물러서는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걸 보여 주는 책입니다.” 김 대표는 “장터처럼 떠밀리듯 구경하다가 진이 빠지는 여느 도서전과 달리, 여기서는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천천히 만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이번 도서전은 회차별 입장 인원을 70명으로 제한하고, 관람 시간도 70분으로 설정했다. ‘양’보다 ‘밀도’를 택했다. 대구에 있는 ‘한티재’ 출판사는 비수도권 출판사로는 유일하게 이번 도서전에 참여했다. 1인 출판사인 만큼 참가비와 숙박비 부담 때문에 서울 도서전은 늘 먼 이야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오은지 대표는 “이번에는 ‘굿즈 없는 도서전’이라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했다. “책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다른 출판사들이 예쁜 굿즈를 쏟아내는 걸 보면 그 자체가 부담이 되기도 해요. 이번 도서전이 책의 ‘본질’로 돌아가는 하나의 물꼬가 되지 않을까 기대가 큽니다. 한티재를 응원하려고 대구에서, 전주에서 일부러 찾아온 독자들도 계셨어요. 그런 분들을 직접 만나는 것만으로도 다음 책을 만들 힘을 얻습니다.” 도서전을 방문한 독자들도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책 네 권을 구매했다는 대학원생 김다연 씨(26)는 “온라인 서점에도 정보가 넘쳐나지만, 도서전에서는 대표님들이 어떤 마음으로 책을 만들었는지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며 “책들이 이전과 다르게 보였다”고 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1. 2017년 9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겨냥한 트윗을 올렸다.“방금 북한 외무성 장관이 유엔에서 한 발언을 들었다. 이 말이 꼬마 로켓맨의 생각을 반영한 거라면 둘 다 오래 살아남진 못할 듯!” 수천만 명에게 동시에 전달되는 트윗에서 그는 북한의 독재자를 ‘꼬마 로켓맨’이라고 불렀다. 다른 국가를 향한 핵전쟁 위협이나 다름없는 발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북한은 이를 “명백한 선전포고”라고 규정했다. 사실 당시 트위터엔 ‘폭력적 협박 및 폭력 조장을 금지한다’는 명시적 규정이 있었다. 그러나 트위터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트럼프의 발언에 ‘뉴스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 한 달 뒤인 2017년 10월, 미 배우 로즈 맥가윈은 할리우드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하는 트윗을 올렸다. 트위터의 대응은 정반대였다. 회사는 그의 계정을 정지시켰다. 게시물에 타인의 전화번호가 담긴 스크린샷이 포함돼 있었고, 이는 ‘당사자 동의 없는 개인 연락처 공개를 금지한다’는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이 결정은 거센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대통령에겐 트위터를 사용할 자유를 허용하면서,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는 여성의 목소리는 침묵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었다.‘표현의 자유’와 ‘영향력에 따르는 책임’ 사이에서 플랫폼은 무엇을 선택하는가.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마다 트위터 내부에서는 어떤 논쟁이 벌어졌고, 어떤 기준이 작동했을까. 이 책은 블룸버그 비즈니스·기술 전문 기자인 저자가 트위터가 흥망성쇠를 거쳐 결국 ‘X’로 변모하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한 기록이다. 150명이 넘는 트위터 안팎 관계자를 심층 취재해 현대 기술 기업이 안고 있는 구조적 위험과 책임을 드러냈다. 원래 트위터는 ‘다양성’을 핵심 가치로 내세운 기업이었다. 흑인, 라틴계, 성소수자 직원을 위한 사내 후원 모임도 활발했다. 트럼프는 그런 기업 문화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트위터 직원들이 설계하고 가꿔 온 서비스를 토대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다. 많은 직원에게 이는 불편하고 모순적인 현실이었다. 잭 도시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트위터 정책 책임자들은 트럼프에 대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일상적으로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도시 CEO는 대통령의 트윗을 차단하는 데 극도의 거부감을 보였다. 발언이 아무리 부적절하더라도, 대통령의 생각을 들여다볼 통로를 아예 없애는 것보다는 낫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투자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익 압박과, 세계 여론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플랫폼이라는 사실 사이의 긴장은 도시 CEO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는 트위터가 상장 기업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에 회의를 품었다. 그가 선택한 해법은 모순적이게도 일론 머스크였다. 상장 기업의 굴레를 벗어날 대안으로 머스크를 주목한 선택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소셜미디어 기업과 가장 논쟁적인 기업가의 결합으로 이어졌다. 자유의 상징이던 트위터는 440억 달러에 머스크의 ‘X’가 됐다. 이 책은 한 기술 기업이 잘못된 방향 설정으로 어떻게 위기에 빠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이는 트위터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향력 있는 매체를 손에 쥐고 사유화하려는 시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소셜미디어 기업들에서 반복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경고이기도 하다. 가볍게 읽히지 않는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