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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하루를 돌아보자. 카카오톡을 이용해 가족 친구와 대화를 하고, 업무 보고를 하고, 생일인 친구에게 선물을 보내고, 동호회원들에게 n분의 1로 회비를 보내진 않았는지. 요즘 하루에 송·수신 되는 카톡 메시지 수가 110억 개라고 한다. 카톡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 카톡이 최근 먹통이 돼 2시간 21분 동안 멈췄다. ▷카톡은 5일 오후 9시 47분부터 6일 0시 8분까지 메시지 수신이 원활하지 않고 PC버전 로그인이 안 됐다. 5일이 휴일인 어린이날이라 업무상 피해가 그나마 적었을 수 있다. 카카오는 6일 0시 20분에야 트위터에 사과의 글을 올렸다. 회사 측은 “네트워크와 서버 장애가 아닌 내부 시스템 오류였지만 그 이상의 이유는 영업 비밀이라 밝힐 수 없다”고 했다. 사과문을 트위터에만 올린 것에 대해선 “평소 서비스 장애 안내는 트위터 위주로 해 왔다”고 했다. ▷카톡은 2010년 3월 세상에 처음 나왔다. ‘초콜릿이 주는 달콤함과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이 주는 즐거움을 담아’ 서비스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현재는 월간 활성 사용자(한 달에 한 번 이상 이용자)가 4635만 명인 ‘국민 메신저’다. 2009년 말 불어닥친 스마트폰 열풍의 흐름에 잘 올라탄 덕이다. 싸이월드 등 국내 포털이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해외 업체의 공세에 무너질 때 카톡은 서비스 시작 1년 만에 1000만 가입자를 달성했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통신요금 부담이 있는 반면 공짜인 카톡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록인(Lock-in) 효과라는 게 있다. 고객을 묶어둔다고 해서 자물쇠 효과, 잠금 효과로도 불린다. 하나의 서비스로 고객을 잡으면 다른 서비스도 이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먹통 바로 다음 날 발표된 카카오의 실적은 사상 최대였다. 편리한 ‘공짜의 맛’에 몰려들어 대화(talk)를 하게 된 사람들은 카카오가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신사업을 이용하며 카톡 세상에서 돈을 쓴다. ▷카톡은 지난해 3월에도 두 차례 먹통이 있었다. 그런데도 무료 서비스라는 이유로 고객들은 이용 불편에 따른 손해배상을 받을 수 없었다. 지난해 12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일명 넷플릭스법)이 시행되면서 비로소 업체 측에 시정을 요구할 근거가 생겼다. 카카오를 비롯해 구글 등 6개 ‘빅테크’ 콘텐츠 제공사업자의 서비스 품질 유지가 의무화된 것이다. 정부가 이번 먹통을 넷플릭스법 적용 대상으로 보고 조사한다니 결과가 주목된다. 올해 1분기에만 1조 원 넘는 매출을 올린 국내 코스피 시가총액 7위 기업 카카오가 먹통의 원인을 상세히 밝히지 않는 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는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으로 꼽힌다. 그런데 그만큼이나 ‘모순(矛盾)의 영웅’도 드물다. 그는 영웅주의와 비극, 승리와 패배, 진보와 퇴행을 오간 복합적 인물이다. 사실 나폴레옹이 프랑스혁명의 계승자로 칭송되기 시작한 것도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집권한 샤를 드골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위대한 프랑스’를 주창하며 나폴레옹을 역사에서 소환하면서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나폴레옹이 되살아났다. 나폴레옹 사망 200주년을 맞아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다시 보기’가 시작됐다. 나폴레옹재단은 올해를 ‘나폴레옹의 해’로 명명하고 그의 다양한 모습을 조명할 수 있는 유물과 사료 등의 전시를 곳곳에 마련했다. 그의 극적인 삶에는 분명 실수가 있지만 그가 남긴 정치적 문화적 유산을 알아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는 취지다. ▷나폴레옹의 공과(功過) 중 과오에 대한 비판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미국의 ‘캔슬 컬처(cancel culture·공인이나 기업이 잘못했을 때 지원을 철회하는 문화)’가 유입돼 프랑스혁명 정신과 미국식 다양성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대혁명의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노예제를 부활시키고, 법치의 토대를 이룬 나폴레옹 법전에서 여성의 법적 권리를 남편에게 부여한 양면성의 인물이다. 그래서 인종차별주의자, 여성혐오자라는 비판을 받는다. ▷어제는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후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섬에서 눈을 감은 지 200년 되는 날이었다. 4년 전 5월 7일 나폴레옹 이래 역대 두 번째 최연소(39세)로 국가원수가 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행보에 관심이 쏠렸다. 대선 출마 때부터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자유주의자”를 선언했던 그는 나폴레옹 묘역에 헌화하며 통합의 리더십을 꾀했다. “나폴레옹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훗날의 판단은 미화도, 부정도, 회개도 아니다.” ▷프랑스는 기억과 새로움이 조합된 나라다. 정치인과 화가 등을 기려 거리 이름을 짓고 작가의 장례식에 대통령이 참석해 추모사를 읽는 나라다.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인의 삶은 나폴레옹에 대한 기록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역사를 통해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나폴레옹은 숨을 거두기 전 “소설 같은 나의 생애여.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한 연민이 물결칠 것이다”라고 했다. 가구를 직접 디자인하고, 샹베르탱 와인을 물에 타 마시고, 신문을 열심히 읽던 나폴레옹의 인간적 면모도 이번에 더 많이 발견되면 좋겠다.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외환위기였던 1990년대 후반, 서울역 화장실에 ‘피 팝니다’란 문구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살벌하고도 슬픈 광경이었다. 정리해고 칼바람에 남성들이 줄줄이 일자리를 잃으면서 온 나라가 초상집 분위기였다. 평범한 가장이 매혈(賣血)을 할 만큼 절박했다.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도 직장을 잃은 ‘IMF 아빠’들의 공감 속에 ‘아버지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코로나19 팬데믹도 우리 사회 가장들을 피눈물 흘리게 했다. 다니던 직장이 문을 닫거나 거리 두기로 자영업 장사가 힘들어지면서 날벼락처럼 가계수입이 줄었다. 밤늦게까지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쓰러지거나 병을 얻은 남성들이 많다. 그런데 코로나는 ‘코로나 엄마’도 낳았다. 여성 종사 비중이 높은 교육 서비스업, 숙박과 음식점업 등이 코로나 직격탄을 맞으면서 여성들이 대거 일자리를 잃은 것이다. ▷호텔의 침구관리, 항공기 기내 청소 등 일상의 보이지 않는 곳을 뒷받침해주던 일자리가 무너졌다. 사실 이 일자리는 IMF가 만든 눈물의 일자리였다. IMF 아빠들이 제조업이나 금융업 등에서 실직하자 집에 있던 여성들이 싼값의 비정규직으로 노동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당시 때밀이 학원에서 세신(洗身) 기술을 배우던 IMF 아빠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남편들이 뭐라도 기술을 배워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 할 때 아내들은 그들이 집에서 하던 돌봄의 일을 사회에서 찾았다. ▷코로나가 안타까운 건 초등학생 자녀가 있는 39∼44세 기혼 여성이 일자리를 스스로 관두고 ‘경단녀’가 된 것이다. 학교가 문을 닫아 아이들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IMF 아빠와 코로나 엄마는 닮은 듯 다르다. 똑같이 직장을 잃었어도 코로나 엄마는 사회적으로 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 측면이 있다. ‘돌봄은 여성의 일’이라는 잘못된 사고 때문에 일자리를 잃어도 ‘집에서 애 보면 된다’고 여기는 시선이 있다. 돌봄 노동을 남에게 맡기려면 “그 돈만큼 벌지 못하면 뭐 하러 나가 일하느냐”는 말도 듣는다. 여성의 사회 참여가 적은 인구수축사회는 미래의 재앙이란 걸 모르고 하는 소리다.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과 교수는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여성은 일터에서 차별을 겪고도 그렇다고 말하지 못한다고 썼다.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게 곧 권력이다. 위태로운 일자리의 여성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 엄마가 새로운 유망산업으로 옮겨 적응할 수 있도록 직업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한국 경제가 IMF 아빠의 슬픔을 딛고 위기를 극복해냈듯 코로나 엄마의 재취업을 늘려야만 코로나 이후의 도약을 준비할 수 있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어두운 그림자가 자주 드리웠던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삶에서 반려동물은 믿음직한 친구였다. 그는 첫 원고료로 버터와 신발을 사는 대신 페르시아고양이를 입양했다. 작은 오두막 서재에서 글을 쓸 때 곁을 지키거나 함께 산책에 나선 건 ‘핑카’라는 이름의 개였다. 그가 핑카의 관점에서 쓴 ‘플러쉬: 어느 저명한 개의 전기’란 책은 울프의 저서 중 가장 많이 팔렸다. ▷국내 반려동물 860만 시대다. 전국 638만 가구에서 860만 마리의 반려동물을 기른다. 개 602만 마리, 고양이 258만 마리다. 흥미로운 것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의 연령대다. 개는 30대와 60대, 고양이는 20대가 많이 기른다. 20대들은 “기혼자들이 자녀를 키우면서 무슨 생각을 하나 궁금했는데 고양이를 길러 보니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게 흐뭇한’ 마음을 알겠다”고 한다. 고양이는 절대로 안 된다며 반대하던 중년 남성들도 일단 자녀가 고양이를 식구로 들이면 누구보다 애지중지하는 모습이 유튜브에 많이 올라와 있다. ▷반려동물이 늘어나면서 ‘펫티켓’(반려동물 에티켓)이 중요해졌다. 반려견과 동반해 외출할 때에는 목줄과 가슴 줄, 소유자 연락처를 표시한 인식표 착용이 필수다. 맹견은 입마개도 꼭 씌워야 한다. ‘층견(犬) 소음’에 조심하면서 엘리베이터 같은 공용 공간에서는 반려견을 안거나 목줄의 목덜미 부분을 잡아야 한다. 내겐 소중한 반려동물이 누군가에는 위협이 될 수 있으니까. 반대로 남의 반려동물에게 불쾌한 언행을 해서는 안 된다. ▷‘모든 동물은 생태계에서 존재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 권리의 평등은 개체와 종의 차이를 가리지 않는다’(세계동물권리선언 제1조). 이 선언은 세계인권선언 이후 30년 만인 1978년 선포됐다. 한국에서는 1991년 동물보호법이 제정됐지만 동물 학대는 끊이지 않고 있다. 처벌도 대개 솜방망이 수준이다. 길고양이를 화살로 사냥하는 영상과 사진을 공유한 최근의 ‘동물판 n번방’ 사건 등은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수준을 드러낸다. ▷코로나19로 대면접촉이 줄면서 반려동물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국민 58%가 만성 울분을 겪는 요즘, 속이지 않으면서 조건 없는 사랑을 주는 반려동물은 국민 정신건강을 지켜주는 고마운 존재다. 일찍이 나이팅게일도 “반려동물은 환자들의 훌륭한 동반자가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도 인간의 사랑과 돌봄을 필요로 한다. 어느 길로 산책할 때 좋아하는지, 토닥여줄 다친 마음은 없는지 그들의 시선에서 세심하게 관찰하자. 다정한 반려동물과의 교감은 결국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고 성장시킨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붉은 행성’ 화성은 지구에서 2억2500만 km 떨어진 이웃이다. 이곳에서 미국 항공우주국(NASA·나사)이 띄운 헬기가 날았다. 독창성이라는 뜻을 지닌 인저뉴이티(Ingenuity)라는 이름의 이 무인 헬기는 태양광 패널 밑 케이블 주변에 라이트 형제가 남긴 유산(遺産)을 테이프로 붙여 놓았다. 1903년 이 형제가 미 노스캐롤라이나의 언덕에서 인류 최초로 동력 비행에 성공했던 플라이어 1호기의 날개 덮개용 무명천과 같은 천 조각이었다. ▷19일 인저뉴이티가 날자 나사 직원들은 “우리는 다른 행성에서 ‘라이트 형제의 순간’을 맞았다”며 환호했다. 비행시간은 39.1초. 118년 전 라이트 형제는 12초간 날았다. 나사는 헬기가 이착륙한 지표면에 ‘라이트 형제 필드’라는 이름도 붙였다. 2월 화성탐사선 퍼시비어런스(Perseverance·인내)의 배 밑에 붙어온 이 초소형 헬기는 지구의 100분의 1에 불과한 화성의 대기 밀도를 극복해야 했다. 탄소섬유 날개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분당 2500번 회전하면서 날아오를 수 있었다. 독창성과 인내가 이룬 쾌거였다. ▷이번 비행은 화성 공중탐사 시대를 연 동시에 실추됐던 나사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과거 우주왕복선 비행을 극비로 진행하면서 걸핏하면 로켓이 추락해 외면받던 나사를 앞서 살려냈던 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1972년 아폴로17 이후 중단된 나사의 유인 달 착륙을 2017년 승인하면서 우주개발을 국가안보 의제로 삼은 것이다. 2019년 나사는 궁극적으로는 화성에 가기 위한 달 탐사 프로젝트의 명칭을 ‘아르테미스 프로그램’이라고 발표했다. ▷반드시 화성에 가야겠다는 사람이 있다. 테슬라 창업주인 일론 머스크다. 그가 2002년 세운 민간 우주탐사 기업 ‘스페이스X’는 16일 아마존 창업주 제프 베이조스의 블루오리진을 누르고 아르테미스 프로그램의 민간 달착륙선 사업자로 선정됐다. 머스크가 화성 탐사용으로 개발하는 스타십 우주선이 달에 가게 된다. 우주 탐험을 인간 의식의 확장으로 보는 머스크는 ‘화성으로 날자’는 자신의 꿈에 더 다가갔다. ▷한화, LIG넥스원 등 국내 방위산업체들도 우주로 향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뛰어들어 민간 주도가 대세인 우주산업은 2040년 600조 원 시장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머스크는 지구와 화성이 26개월마다 가깝게 접근하는 30일 정도를 화성 여행의 적기로 보면서 2050년까지 100만 명이 사는 도시를 화성에 만들겠다고 한다. 실현 가능한 것을 목표로 삼는 게 아니라 상상한 뒤 실현 방법을 찾는 머스크와 경쟁하려면 우리 기업도 국가도 갈 길이 바쁘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행복은 다양한 순간에 여러 표정으로 찾아온다. 그래서 지역마다 다른 언어가 자생해 발전했다. 호주 원주민 핀투피족은 엄마의 품처럼 안아주기라는 뜻의 ‘칸이닌파’란 말을 쓴다. 파키스탄의 파슈툰족이 쓰는 ‘멜마스티아’는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가기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인종과 종교 등을 따지지 않고 호의와 경의를 보이는 태도라고 한다. 최근 10회를 맞은 ‘LG와 함께하는 동아 다문화상’ 시상식에 참석한 ‘아름답게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그 따뜻한 말들을 읊조리게 됐다. ▷다문화가족 부문 우수상을 받은 중국 출신 이미화 씨는 틈나는 대로 복지관 이용자들과 이웃들에게 무료로 파마와 염색을 해 준다. 자신이 한국에서 미용사가 되기까지 받았던 도움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돌려주고 싶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3년 전 담화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주자는 빈손으로 오지 않습니다. 보물 같은 그들의 문화만이 아니라 용기와 능력과 에너지와 열망을 가지고 옵니다. 그래서 그들을 받아들인 국가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줍니다.” ▷국내 거주 외국인은 약 222만 명으로 전체 인구 대비 4.3%다. 한국은 3, 4년 후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정한 ‘다문화 다인종 국가’ 기준(인구 중 외국인이 5%)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외국인 중에는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15만 명의 청소년이 있다. 이들을 엄마의 품처럼 안아 사랑으로 키우는 게 곧 글로벌 미래 세대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다름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포용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다문화 세대는 좋은 법규와 제도, 성장과 통합 프로그램 못지않게 한국인들의 인간적 친밀함을 원한다. 김지혜 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교수는 저서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한국인이 다 되었네요”라는 말이 이주민들에게 모욕감을 준다고 썼다. 그 말에는 아무리 한국에 오래 살아도 당신을 온전한 한국인으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전제가 깔렸다는 것이다. 차별당하는 사람은 분명히 있는데 스스로는 차별하지 않는다고 믿는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많은 게 현실이다. ▷다문화라는 말은 다양한 문화의 공존과 존중을 강조하는 사상인 다문화주의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좋은 말도 배려심이 부족한 사람이 누군가를 차별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하면 흉기가 되기도 한다. 교사로부터 “야, 다문화”라고 불려 상처를 받는다는 어느 중학생의 고백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내 안에 차별주의자가 사는 건 아닌지 자주 들여다보는 차별 감수성을 키워야 다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것이다.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동물생태학자 야마네 아키히로는 “개인주의가 된 현대인들이 충직한 개보다는, 자유롭고 도도한 고양이의 모습에 공감한다”고 했다. 그는 이런 개인주의의 중심에 1인 가구와 MZ세대가 있다고 지목했는데,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할 수 있겠다. 럭셔리 제품을 즐겨 소비하는 비혼·비출산의 30대 남성인 ‘럭비남’이다. ▷1982∼1991년 태어난 럭비남은 명품 소비의 주축으로 떠오른 새로운 소비권력이다. 20년 전만 해도 한국 남성들의 초혼 평균 나이는 29.3세로 대개의 남성은 어린 자녀를 양육하느라 30대를 가족을 위해 바쳤다. 하지만 지난해 남성 초혼 평균 나이는 33.2세로 30대에도 결혼을 미루는 남성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이들은 오직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경향이 강한데 그 중심에 럭비남이 있다. ▷럭비남은 핵가족에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기애(愛)와 개인주의가 몸에 뱄다. 가정을 늦게 꾸리다 보니 여유롭게 자신을 위한 럭셔리 소비를 할 수 있다. 의상심리학에서는 이런 소비자를 ‘패션 에고이스트(패션 이기주의자)’라고 부른다. 럭비남은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통해 패션을 정보로서 습득할 기회도 많다. 혼술 혼밥 혼영(혼자 영화) 혼캠(혼자 캠핑)에 이어 ‘즐거운 혼쇼(혼자 쇼핑)’가 가능해진 이유다. 애인과 동행하지 않고 나만의 안목에 따라 쇼핑을 한다. 한동안 여행 등 무형의 경험을 중시하던 소비가 코로나19를 맞아 럭셔리 제품에 집중되고 있다. ▷럭비남은 아티스트들과 활발하게 콜라보(협업)를 하거나 의식 있는 젊은 감각의 브랜드들을 선호한다. 특히 힘 빼고 플렉스(flex·자기 과시)하기 좋은 패션 아이템 중 하나가 스니커즈다. 값은 비싸도 구두를 잘 신지 않는 요즘 직장문화에서 편하면서도 폼 나기 때문에 오히려 가성비가 높다는 주장이다. 서울 강남의 ‘똘똘한 아파트 한 채’처럼 럭셔리 스니커즈가 ‘똘똘한 신발 한 켤레’라나. 남과 다른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빈티지나 한정판 제품도 주요 쇼핑 리스트다. ▷최근 경기 판교를 중심으로 기술 개발자들의 연봉이 크게 오르면서 ‘판교 럭비남’이 서울 럭셔리 매장들의 주된 손님으로 등극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주식시장이 좋으면 럭비남의 씀씀이도 커진다. 이들의 소비는 시장 파급효과도 일으켜 결혼해 아이가 있는 30대 남자와 20대 남자의 럭셔리 소비까지 늘리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소비는 일종의 보복 소비다. 코로나로 해외여행을 못 하는 데 대한 보복이요, 힘들게 돈 모아봤자 뛰어넘을 수 없는 ‘넘사벽’ 현실에 대한 보복이다. 자유롭고 도도하지만 한편으로는 슬픈 소비다.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지금 세계인을 공통적으로 곤혹스럽게 하는 존재가 몇 가지 있다면 그중 하나가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일 것이다. 백신 접종 초기부터 안전성 논란을 빚더니 일부 특이 혈전과의 연관성도 밝혀졌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자.’ 이달 초 독일을 시작으로 지난 주말 프랑스도 ‘교차 접종’ 카드를 꺼내 들었다. AZ로 1차 접종을 했더라도 2차는 다른 백신을 맞도록 하자는 것이다. ▷교차 접종을 추진하는 국가들은 비활성화된 병원체를 인체에 주입하는 바이러스 벡터 백신과 스파이크 단백질 정보를 담은 RNA를 넣는 mRNA 백신이 결국 같은 표적에 작용하기 때문에 상호 보완적으로 쓰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AZ는 바이러스 벡터 백신, 화이자와 모더나는 mRNA 백신이다. 프랑스는 2월 초부터 3월 중순까지 AZ로 1차 접종을 한 55세 미만의 53만 명이 이 교차 접종의 대상이 된다고 본다. 세계보건기구가 교차 접종의 효과에 대해 “아직 적절한 자료가 없다”고 했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마이 웨이’를 택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영국 보건 당국의 조사 결과 20대는 AZ의 이득이 0.8, 위험이 1.1이라고 보도했다. 20대는 AZ로 잃는 게 얻는 것보다 많다는 뜻으로, 영국은 30세 미만에겐 AZ 외에 다른 백신 접종을 권고했다. 한국 질병관리청도 AZ의 위험 대비 이익이 20대는 0.7배라 위험하다며 접종 중단 5일 만인 오늘부터 재개되는 AZ 접종 대상의 연령을 30세 이상으로 발표했다. ▷그런데 교차 접종은 우리에겐 ‘그림의 떡’이다. 대체할 백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6월까지 국내에 들어올 백신 1808만8000회분 중 AZ는 절반 이상인 59%다. 가장 큰 비중이다. 세계적 백신 품귀 현상 속에 모더나, 노바백스, 얀센 등의 백신은 언제 얼마만큼이 들어올지 알 수 없는 깜깜한 상황이다. 미국에서 접종이 시작된 얀센도 혈전증이 보고돼 빨간불이 켜졌다. 쓸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 결국 한국이 교차 접종을 하려면 현재 75세 이상에게 접종하는 화이자를 젊은층에게 바꿔 배정하는 등 연령별 접종 계획의 전반적인 재조정이 불가피하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팬데믹에서는 전문가 집단의 활약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한국이 접종 후진국이 된 데는 정부가 뒤늦게 백신 확보에 나선 것이 큰 이유지만 아무도 소신 있게 나서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유럽의약품청의 결정만 목 빠지게 기다리며 그 결과에 따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으로는 국민들의 백신 불신을 절대로 해소할 수 없다.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MZ세대의 특징 중 하나는 신조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이다.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월루’(월급 루팡·하는 일 없이 월급만 축내는 직원) 등 주로 일상과 관련한 줄임말 신조어다. ‘네카라쿠배당토직’은 요즘 뜨는 신조어다. 네이버 카카오 라인 쿠팡 배달의민족 당근마켓 토스 직방의 앞 글자를 합친 말로 취업준비생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회사들이다. ▷신조어의 시작은 당초 ‘네카라쿠배’였다. 여기에 당근마켓 토스 직방이 회사 규모를 공격적으로 늘리면서 ‘네카라쿠배당토직’이 됐다. 2월엔 크래프톤이 개발 직군 초봉을 기존 4000만 원에서 6000만 원으로 올려 국내 정보기술(IT) 업계 최고 대우 기업이 되자 연봉서열 5곳만 추렸다는 ‘크네카라쿠’란 말도 생겼다. 연봉 따라 직장을 옮기는 MZ세대에게 연봉서열은 최고의 관심사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개발 직군 초봉이 5000만 원 정도다. ▷국내 취업준비자는 약 85만 명으로 이 중 20, 30대가 89%다. 그런데 코로나19 영향으로 올해 상당수 기업은 지난해보다 채용을 축소하겠다고 한다. 그나마 수백 명대의 채용을 예고한 곳이 네카라쿠배당토직이다. 그러니 ‘문송’(문과라 죄송합니다)한 인문계 학생들도 IT 학과로 모여든다. 성균관대 소프트웨어학과는 복수전공 신청자가 하도 몰려 지난해 2학기부터 복수전공 신청자 수를 제한하고 있을 정도다. ▷코딩학원에 다니거나 관련 복수전공을 해서 비전공자들이 IT 일자리를 얻는 성공 사례도 나온다. 그런데 네카라쿠배당토직이 진짜로 찾는 IT 인재는 대학에서 전공을 하고 심도 있는 연구까지 한 학생이다. 하지만 우리 대학은 기업이 원하는 수준의 인재를 충분히 수급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는 자유롭게 첨단 학과의 정원을 늘리지 못하고 학생은 자유롭게 전공을 바꿀 수 없는 탓이다. ▷기성세대는 MZ세대가 꿈 없이 돈만 따라다닌다고 탓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미래세대는 할 말이 있다. 집값이 ‘미쳐서’ 결혼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연봉을 더 준다고 하면 두말없이 짐을 싼다는 것이다. 늘 머릿속으로 돈을 따지면서 ‘더 (연봉이) 높은 곳’을 올려다보며 사는 게 자신들도 서럽다는 것이다. 산업계에서는 기술 변화의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한 분야가 뜬다고 우르르 몰려가는 건 위험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글로벌 경쟁에 임하는 인재가 되려면 최신 트렌드는 파악하되 외국어와 인문학적 소양, 체력 등 내공을 기르라고 조언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심장이 무엇을 뜨겁게 원하는지 들어보라고 한다. ‘네카라쿠배당토직’ 세대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전하고 싶은 얘기다.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미얀마의 한 시민이 트위터에 올린 사진에 ‘미얀마를 구하라’ ‘여성과 어린이를 그만 죽여라’와 함께 ‘우리는 R2P가 필요하다’는 문구의 팻말이 있다. 요즘 미얀마의 트위터에는 해시태그 ‘#R2P’가 달린 게시물이 넘쳐난다. 유엔의 ‘보호책임(Responsibility to Protect)’을 일컫는 R2P를 통해 국제사회에 도움을 촉구하려는 것이다. ▷R2P는 국가가 집단학살, 전쟁범죄, 인종청소, 반인류 범죄 등 4대 범죄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할 책임을 뜻한다. 이에 실패하는 국가가 있다면 국제사회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개입할 수 있다는 국제정치 개념이다. 2005년 유엔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이래 2007년 케냐 인종학살, 2011년 리비아 내전 등에 유엔이 나선 전례가 있다. 그래서 지난달 1일 쿠데타를 시작해 지금까지 510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미얀마 군부의 반인류 범죄에 R2P를 적용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미국이 미얀마와 교역협정을 중단하기로 했지만 미얀마 군부를 한목소리로 압박하는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는 아직 없다. 각국의 계산이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서는 홀로 더 밀어붙이면 미얀마가 중국 편이 될까 걱정이다. 중국도 신(新)실크로드 전략구상인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미얀마 군부와 척지고 싶지 않다. 중국과 러시아는 27일 미얀마 군(軍)의 날 열병식에 축하 사절도 보냈다. 미얀마가 가입해 있는 아세안은 다른 회원국들조차 정치 상황이 혼란해 미얀마를 도울 처지가 못 된다. ▷미얀마 군부의 폭력성은 극에 달하고 있다. 주택가에 총탄을 쏘아 유아를 숨지게 하고 머리를 쏘는 헤드 샷과 참수(斬首)도 서슴지 않는다. 시민 114명이 군경의 유혈 진압으로 숨지던 순간 군 장성들은 흰 제복에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유유자적 파티를 했다. 결국 기댈 곳은 오늘(31일) 열리는 긴급 유엔 안보리다. R2P를 적용해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 또는 회복’하기 위한 무력행사를 허용하는 유엔 헌장 제7장의 발동을 논의할지 주목된다. ▷미얀마 군의 날, 국제미인대회에 참가한 미얀마 여대생은 흐느끼며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했다. “미얀마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려고 거리에 나설 때, 저는 이 무대에서 민주주의를 외칩니다.” 그는 마이클 잭슨의 노래 ‘힐 더 월드(Heal The World)’도 불렀다. 지금 어디에선가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고…. 어린이까지 참혹하게 살해하는 미얀마 군부를 더는 방치할 시간이 없다. 국제사회가 인류애로 힘을 합칠 때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 올라와 퍼지고 있는 15초짜리 영상에서는 미국 나이키 운동화들이 불타고 있다. 공산당 기관지 런민(人民)일보가 소셜미디어에 나이키 등을 ‘블랙리스트’로 선정해 올린 게 불씨였다. 여기서 블랙리스트는 중국 신장의 강제노동에 반대해 신장산(産) 면화를 쓰지 않는 외국 기업이다. 그러자 중국의 샤오펀훙(小粉紅)이 봉기했다. 이들이 주도한 불매 운동은 다른 글로벌 브랜드들을 대상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샤오펀훙은 맹목적 애국주의를 분출하는 공격적 성향의 중국 청년 인터넷 부대다. ‘작은 분홍색’이란 뜻으로, 2003년 극단적 애국주의에 심취한 젊은이들이 주축이 된 사이트의 메인 페이지가 분홍색이었던 것에서 명칭이 유래했다. 20, 30대 고학력 남성이 주축으로, 아이돌을 숭배하듯 국가를 사랑해 ‘팬덤 민족주의자’로도 불린다. ▷머릿속에 물을 붓듯 세뇌시키는 관수법(灌水法)이라는 게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중요한 원리로 중국 관수이론의 창시자는 마오쩌둥(毛澤東) 초대 국가주석이다. 중화민족이 세계 중심에 선다는 중국몽(夢)을 가진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이 관수법을 계승해 샤오펀훙을 교육시켰다. 문자, 언어, 이미지 관수가 다 사용됐다(김인희 ‘중국 애국주의 홍위병, 분노청년’). ‘21세기 시진핑 키즈’인 샤오펀훙에게는 든든한 배경이 있다. “너희를 믿는다”며 독려하는 중국 정부다. ▷샤오펀훙의 주된 전술은 해외 웹사이트 공격이다. 출정을 위한 의식과 규율, 해외 방화벽 뚫는 법 등을 갖추고 조직적으로 활동한다. 애국주의라는 사상적 무기와 이모티콘이라는 공격 무기를 겸비하고 인터넷 게시판을 의미 없는 내용으로 도배해 마비시키는 방식이다. 그런데 최대 공격 대상이 한국이다. 첫 해외 출정이었던 동방신기 홈페이지 공격을 시작으로 최근엔 방탄소년단 등 한류 스타들에 대해서 비난을 퍼붓는다. ▷어제 SBS는 노골적으로 중국풍 소품을 사용해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인 월화 드라마 ‘조선구마사’를 방영 2회 만에 폐지했다. 폐지 전, 샤오펀훙은 “당시 한국의 전형적 모습”이라며 물 만난 고기처럼 장면들을 인터넷에 퍼 날랐다. 중국은 20년 전부터 한국 고대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가동시키고 최근엔 한복도, 김치도 자기네 문화라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시 주석은 요즘 부쩍 공산당 역사학습을 강조한다. 내부 결속의 의도겠지만 이 과정에서 빚어지는 샤오펀훙의 타국 증오를 중국 당국은 방관하고 있다. 샤오펀훙에서 세계 평화를 위협할 ‘미래의 홍위병’이 연상된다.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지난해 K팝 등의 수출 실적이 반영된 문화예술저작권 무역수지가 사상 첫 흑자를 냈다. 흑자 규모도 1억6000만 달러에 이른다. 특히 음악과 영상 분야 저작권이 지난해 적자에서 올해 2억 달러에 가까운 대규모 흑자로 돌아섰다. 한국의 대중문화(K컬처)가 세계인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이 수치로도 확인된 것이다. ▷영화의 본고장인 미국 할리우드는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소재 고갈에 부닥쳤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것을 찾아 눈을 돌린 게 아시아다. 2018년 미국을 강타한 할리우드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원작자도 출연진도 모두 아시아인이었다. 그런데 찾다 보니 아시아에서도 유독 스토리텔링이 독보적인 나라가 한국이었다. 웹툰 기반의 상상력과 잘 만들어진 공포영화에 세계가 매료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국 영화는 100주년을 맞던 2019년 영화 ‘기생충’으로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국내 흥행작이었던 한국 영화 ‘완벽한 타인’의 원작은 본래 이탈리아 영화인 ‘퍼펙트 스트레인저’다. 이 원작은 프랑스 등 12개국에서 리메이크됐다. 그런데 베트남의 한 제작사는 완벽한 타인의 제작진을 찾아와 지원을 요청했다. “한국 리메이크가 가장 좋으니 공감 포인트를 어떻게 잡을지 가르쳐 달라”고. 한국 정서를 담자 베트남 리메이크도 대박이 났다. 부산국제영화제도 최근엔 영상으로 제작될 가능성이 높은 원작 콘텐츠(만화와 소설 등)의 지식재산권을 거래하는 마켓을 공들여 운영하고 있다. ▷방탄소년단(BTS)은 한국 음반시장을 구해낸 공신이다. 20년 전 음악 공유 서비스로 공짜 음악이 나돌게 된 후부터 국내 음반 판매는 추락했다. 하지만 2017년 BTS의 음반이 100만 장 넘게 팔리더니 지난해엔 ‘2020 글로벌 앨범 판매 차트’에서 1, 2위를 휩쓸었다. K팝은 영상미와 스토리가 만난 뮤직비디오로 세계 시장을 장악했다. 변방이었던 K컬처의 확산에는 SNS의 힘도 크다. MZ세대는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들어도 팬심으로 음반을 사고, 자신의 취향을 SNS에 적극 공유한다. ▷지난해 문화예술저작권 무역수지는 흑자였지만 전체 지식재산권 무역수지는 18억7000만 달러 적자였다. 특히 한국의 게임은 2019년 10억8000만 달러 흑자에서 지난해 3억 달러 적자가 됐다. 게임회사들의 수출이 늘었는데도 플랫폼인 구글에 내는 수수료(인앱 결제)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란다. 영상도 넷플릭스 결제가 매년 늘고 있지만 지난해엔 수출이 압도해 흑자를 낼 수 있었다. 콘텐츠가 중요하지만 플랫폼도 중요하다. 무역수지 숫자가 ‘K컬처가 가야 할 길’을 알려준다.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라는 말이 요즘 자주 쓰인다. 그리스어로 인류를 뜻하는 anthropos와 지질시대 단위인 세(世)를 나타내는 접미사 cene의 결합이다. 노벨화학상 수상자 파울 크뤼천이 2000년 사용해 담론을 확산시킨 말로, 인류로 인해 빚어진 시대란 뜻이다. 46억 년을 버텨온 지구 환경을 인간이 70년 만에 훼손했으므로 1만7000년 전에 시작된 지금의 홀로세(Holocene·그리스어로 ‘완전히 새로운 시대’라는 뜻)와는 다른 이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코로나19 시대는 인류세의 비극에 코로나 쓰레기를 추가하고 있다. 이 쓰레기는 코로나가 낳은 소비 변화의 결과물이다. 온라인 쇼핑으로 물건을 시키면 상점에 가서 살 때보다 포장이 비대해질 수밖에 없다. 카페에서 음료를 마실 때에도 일회용 컵이 안심이 된다. 특히 한국은 빠른 속도와 배달의 효율을 자랑하는 나라답게 코로나 쓰레기가 급증하고 있다. ▷1인 가구가 늘어나는 가운데 배달음식 주문이 많아진 게 주된 이유다. 지난해 플라스틱 폐기물은 전년 대비 18.9%, 스티로폼 등 발포 수지는 14.4% 늘었다. 비대면 쇼핑의 확산으로 택배 상자와 같은 종이 폐기물도 24.8% 늘었다. 코로나 쓰레기는 쏟아져 나오는데 소각 비용을 내지 않으려는 폐기물 업체의 무단 투기까지 늘어 걱정이다. 2019년 미국 CNN 보도로 국제적 망신이 됐던 경북 의성군 폐기물 처리장의 20만 t 규모 ‘쓰레기 산’은 지난달에야 사라졌다. ▷코로나 쓰레기를 이루는 플라스틱은 1907년 발명돼 주요 산업 자재로 사용되며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하지만 플라스틱이 잘게 부서져 미세 플라스틱이 되면 생태계를 교란하고 인류의 건강을 위협한다. 불행 중 다행은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자는 제로 웨이스트 운동이 지금의 인류세에서 확산되는 점이다.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가 뉴노멀(새로운 기준)로 자리 잡고 있는 만큼 앞으로 동참하지 않는 기업은 좋은 평판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플라스틱 빨대와 같은 소재로 필터를 만드는 마스크도 대표적인 코로나 쓰레기다. 그런데 한국화학연구원이 한 달 안에 퇴비화 조건에서 100% 자연 분해가 되는 마스크 필터를 개발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K마스크가 신음하는 지구에 회복과 위로를 주기 바란다. 환경오염이 초래하는 기후변화는 최근 봄꽃이 피어나는 시기를 열흘 이상 앞당기고 꽃 피는 순서도 헝클어놓았다. 폴란드 망명정부 지폐 같은 쓸쓸한 낙엽을 봄날에 보는 재앙을 맞지 않으려면 코로나 쓰레기를 줄이는 노력을 필사적으로 해야겠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본국에 안식년 가 있는 외국인 동료 교수가 연락을 해 왔어요. 서울의 모든 외국인 근로자가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하는 게 사실이냐고요. 그렇다고 했더니 서울에서 교수를 계속 해야 하는지 환멸을 느낀다고 했어요. 많이들 마음에 상처를 입었지만 이제라도 서울시가 행정명령을 거둬들여 다행입니다. 외국인 교수들이 소식을 듣더니 서울 시민과 외국인과의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자진해서 검사를 받겠다고 하네요.”(구민교 서울대 학생처장) ▷말 많던 서울시의 ‘외국인 근로자 코로나 진단검사 의무화 행정명령’이 이틀 만에 철회됐다. 서울시는 17일 발동했던 이 명령을 고위험 사업장에 대한 검사 권고로 변경한다고 어제 밝혔다. 밀접, 밀집, 밀폐 즉 ‘3밀(密)’ 근무 환경의 노동자만 검사받도록 권한다는 것이다. 사흘 동안 적잖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사이먼 스미스 주한 영국대사가 “불공정한 명령”이라고 물꼬를 튼 후 주한 외국대사들이 인종 차별이라며 외교부에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주한 외국상공회의소와 서울대도 철회를 요구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조사에 착수했다. ▷당초 서울시가 모든 외국인 근로자에게 검사를 의무화한 근거는 외국인 감염률 추이였다. 지난해 말 2%대이던 외국인 감염률이 올 들어 6%대로 올랐다는 이유였다. 밀집생활을 하는 외국인 근로자가 많아 집단 안전을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도 했다. 도를 넘은 행정편의주의였다. 서울의 외국인 근로자 7만 명 중에는 밀집생활과는 무관한 외국계 기업의 임직원과 외신기자도 있다. 글로벌 인재의 유입을 막고 국가 신뢰도를 떨어뜨린다는 우려를 낳았던 이유다. 서울시는 정부의 공식 철회 요구에 어제 오후 늦게 입장을 바꿨다. ▷이번 명령과 철회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는 차별이라는 의제를 다시 돌아보게 됐다. 1978년 채택된 유네스코의 ‘인종과 인종적 편견에 관한 선언’의 제1조 1항은 ‘모든 인간은 존엄과 권리에서 평등하며 그들 모두는 인류에 없어서는 안 될 일부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인권위도 어제 “이주민을 배제하거나 분리하는 정책은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차별을 낳고 인종 혐오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내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인종 차별 철폐의 날이다. 1960년 3월 21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렸던 통행법 반대 평화집회를 기리는 날이다. 이동할 때마다 백인에게 통행권을 제시해야 했던 유색 인종의 설움을 역사에서 되풀이하지 말자고 다짐하는 날이다. 아시아인을 향한 인종 차별을 과거에도 지금도 겪는 우리가, 행정편의주의에 매몰돼 외국인을 차별하는 일이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국내 혼인 건수가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혼인 건수는 21만4000건으로 1970년 관련 통계 작성 이래 가장 적었다. 반세기 만의 최저치다. 인구 1000명당 혼인 건수도 사상 최저인 4.2건으로 감소했다. 가장 많았던 1980년의 10.6건에 비하면 절반에도 못 미친다. ▷코로나19로 결혼이 연기되거나 취소된 경우가 많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결혼 적령기 남녀의 연애, 구체적으로는 마스크 쓴 남녀의 대면접촉 연애가 어려워진 건 아닌지 우려된다. 연애의 사전적 의미는 ‘성적(性的) 매력에 이끌려 서로 좋아하며 사귐’이다. 전염병에 대한 인간의 공포가 에로스를 약화시킬 수 있다. 더욱이 확진자 동선이 낱낱이 드러나는 한국사회에서는 ‘코로나 시대의 사랑’이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나는 사유하는 존재 이전에 행위하는 존재, 즉 몸(body)적 존재”라고 했건만. ▷미국에서는 코로나 이후 데이트 앱 시장이 호황이다. 보통 남성들이 애용하던 데이트 앱에 여성들의 참여가 늘어 일대일 화상 채팅도 활발하다. 최근에는 자기소개 프로필에 “나는 백신을 맞았다”고 올려 데이트 상대를 안심시키는 이용자도 많아졌다. 뉴욕타임스는 ‘세상의 끝을 위한 연인 찾기’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코로나로 미래에 대한 불안이 클수록 혼자인 게 두렵기 때문에 동반자 관계에 대한 갈망을 키운다”고 분석했다. ▷아쉬운 대로 비대면 사랑이라도 키워 나가면 결혼이 늘어날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전망은 그렇지 않다. 지난해 국내 평균 초혼 연령은 남성 33.2세, 여성 30.8세로 20년 전인 2000년에 비해 각각 3.9세, 4.3세 높아졌다. 주목할 점은 여성의 초혼 연령이다. 역대 최고치일 뿐 아니라 출생연도를 따지면 1990년대생의 결혼시장 진입이 코앞이다. 이 청년세대에게 결혼은 결코 필수가 아니다. 아무리 ‘노오력’(노력의 풍자어)을 한들 일자리도 집도 얻기 어려운데 어떻게 가정을 이뤄 아이를 낳고 키우는가. 사실상 미혼을 강요받는 셈이다. ▷혼인 건수는 출산율의 선행지표다. 결혼을 포기하는 ‘결포족’이 늘면 인구수축사회가 더 빨리 찾아온다. 경제활동을 해서 세금을 내는 국민이 줄기 때문에 국가 재정도 타격을 받게 된다. ‘90년생’은 왜 기성세대가 만든 불평등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느냐고 항변한다. 100년 전 소설가 현진건이 쓴 ‘술 권하는 사회’에서 술 마시는 남편의 아내는 말했다.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90년생들도 말할지 모르겠다. “이 몹쓸 사회가 왜 결혼을 권하는고.”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본인이 말하길 “특별히 전성기나 대표작이 없었던 것 같다”는 나이 일흔넷의 배우 윤여정이 영화 ‘미나리’로 제93회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한국인으로는 처음, 아시아계로는 5번째다. 이미 거머쥔 다른 여우조연상만 33개.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우리 사회에서 ‘조연’이 이토록 주목받은 적이 있던가. ▷남다른 멘토로서 그의 모습은 영화 ‘여배우들’(2009년)에서 이미 돋보였다. 이미숙 고현정 등 쟁쟁한 후배 여배우들과 함께 출연했던 이 영화는 배우들의 실제 삶이 반영된 즉흥 대사가 많았다. 윤여정은 후배들에게 조언했다. “인간의 본성이 나만 주목받고 싶은 것이지만 그건 욕심”이라고. “살아보니 박수를 받으면 돌멩이질도 그만큼 받더라. 세상엔 공짜가 없으니 분할 것도 억울해할 것도 없다.” ▷윤여정은 1966년 TBC 탤런트 공채 3기로 데뷔해 연기생활 55년째다. 한양대 국문과 재학 시절 신종 직업으로 뜨던 탤런트에 도전했다. 남편을 여의고 홀로 딸들을 키우는 양호교사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할 것 같아서. 드라마 ‘장희빈’과 영화 ‘화녀’로 유명해진 뒤 가수 조영남과 결혼해 미국 가서 13년을 살았지만 헤어졌다. 고생하며 아이들을 키운 건 그였다. 그의 어머니도, 그 자신도 ‘생명력 강한 미나리’였다. ▷‘미나리 리더십’의 핵심은 겸손과 섬김이다. 겸손은 자신의 객관화에서 출발한다. “미모도 재능도 없기 때문에 노력한다”는 그는 박카스 아줌마(영화 ‘죽여주는 여자’)로도 치매 걸린 할머니(영화 ‘계춘할망’)로도 변신한다. 조연이라고 뒤로 빠지지도 않는다. 주연이 빛나도록 배려하면서 필요할 때 나선다. 영화 미나리에서 할머니가 삶은 밤을 씹어 손자에게 주는 장면, “미나리는 원더풀이란다”라는 핵심 대사는 그가 제안한 것이다. 제작비 200만 달러(약 22억 원)의 초저예산 영화를 찍으며 후배들을 살뜰히 챙긴 것도 그였다. ▷윤여정은 욕심의 힘을 뺀 궁극의 나이스 스윙을 떠올리게 한다. 나이 들었다고 무게 잡지 않고, 밥값을 내고, 남 탓 안 하며, 유머가 있다. 아카데미 후보로 오르자 “여러분의 응원이 감사하면서도 부담스러워 올림픽 선수들의 심적 괴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창창한 나이일 때는 빨리 깨질수록 좋다.” “나는 나같이 살면 된다.” “인생이 별거 아니다. 재밌게 사는 게 제일이다.” 윤여정은 요즘 말로 ‘찐멘토’(진정한 멘토)다. 기성세대도 미래세대도 한국인도 미국인도 그에게서 세상을 살아갈 힘과 위로를 얻는다. 윤여정의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수상마저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다.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딸이 며칠 전 중학교 입학 날 학교생활 참고자료를 받아왔다. ‘선생님께 알려드리는 나의 이야기’란 제목의 질문지였다. 장래희망, 좋아하는 과목과 싫어하는 과목 등을 적는 것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가족 소개였다. 가족 구성원의 이름을 네 명까지 적은 뒤 친밀도를 하트 5개까지 칠하도록 한 표였다. 딸은 엄마 아빠 동생 외할머니를 기입한 뒤 엄마인 내게는 하트를 4개 반, 외할머니에게는 최고점인 5개를 줬다. 그걸 본 순간 떠올랐다. 영화 ‘미나리’에서 할머니가 손자는 침대에 눕히고 자신은 침대 옆 바닥에 이부자리 깔고 누워 도란도란 얘기하던 장면이…. 외할머니는 아이들에게 ‘할미’다. 할머니가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듣다 보니 할머니와 마미(mommy·엄마)를 합친 말도 된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친정 바로 옆 단지로 이사했던 맞벌이 딸과 사위를 대신해 할미는 손녀 손자를 돌봐왔다. 기저귀 떼는 연습을 시킨 것도, 열이 오르면 밤새 기도하며 곁을 지킨 것도 할미였다. 1980년대 병아리를 감별하며 밤낮 없이 일하는 미국 이민가정의 할머니와 2021년 한국 맞벌이가정의 할머니는 닮아도 너무 닮았다. 지금의 할머니는 어려서 6·25전쟁을 겪고 배울 거 다 배웠지만 가정을 위해 집에 들어앉았던 당신이다. ○○○ 씨가 아니라 누구누구 엄마로 불리다가 이제는 누구누구 할머니로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하교하는 손주를 기다리는 당신이다. 국내 대기업 부장인 지인의 친정 엄마(73세)는 중학교 3학년 손녀가 생후 90일 때부터 지금껏 ‘할머니의 이중생활’을 한다. 주말에만 경기 고양시 일산의 집에 가고 주중엔 서울 강남의 딸집에 살며 손녀를 챙긴다. 그렇게 돈독한 모녀 관계도 냉랭해진 적이 있다. 코로나19로 딸이 재택근무를 할 때다. 갑자기 집에 붙어 지내게 된 엄마와 딸은 서로 예민해졌다. 딸은 “엄마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100세 시대에 60∼80대 할머니는 몸은 아픈 곳이 많아도 마음은 청춘이다. 할머니는 노래교실에 다니며 자신을 위해 쓸 수도 있는 시간을 손주들에게 바쳤다. 코로나로 여성의 일자리가 특히 위태롭다 하니 아들 부럽지 않게 키운 딸이 직장에서 신경 쓸까 봐 힘든 티도 안 냈다. 손주들이 예쁜 행동을 하면 그걸로 됐다고, 할머니가 진정으로 자신들을 돌본 걸 아이들이 누구보다 잘 알 거라고 했다. 할머니들에게도 피아니스트나 발레리나와 같은 어린 시절 꿈이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꿈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와 학교, 공동체가 맡아야 할 돌봄의 역할이 할머니들의 선의(善意)의 희생에 떠넘겨져 있다. 열정페이(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며 열정만을 요구) 못지않은 열정돌봄인 셈이다. 공립초등학교는 왜 그렇게 일찍 끝나야 하는가. 집에서 줌으로 방과 후 수업을 한다는데 그건 또 옆에서 누가 돌볼 것인가. 할머니들이 서운해 하는 것은 인생 후반부를 쏟는 돌봄에 대해 우리 사회의 경의(敬意)가 부족한 점이다. 할머니의 돌봄은 결코 당연시돼서는 안 된다. 서울 서초구만 10년째 시행 중인 손주돌봄수당도 다른 많은 지역으로 확대돼야 한다. 영화 미나리의 할머니는 나이를 따져보면 요즘 할머니들의 엄마 격이다. 이런 돌봄노동의 대물림은 이제 끊자. ‘할미꽃 당신’은 홀가분하게 고령사회의 청춘을 누려야 한다.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국내 대기업이 최근 스웨덴의 신제품 향수를 수입해 들여오며 온라인을 통해 래플 판매를 공지했다. 래플(raffle)은 추첨 복권이라는 뜻으로, 한정 수량의 제품을 살 수 있는 자격을 무작위 추첨으로 주는 방식을 일컫는다. 나이키와 협업해 운동화를 내놓았던 미국의 유명 힙합 가수가 ‘우주의 향기를 만들어냈다’는 업체의 마케팅에 래플의 경쟁률은 500 대 1에 달했다. 100mL에 30만 원이 넘는 향수였다. ▷래플은 MZ세대(1980년 이후 출생)와 코로나19가 만나 시너지를 일으킨 소비 행태다. 2015년 무렵부터 럭셔리 브랜드와 스트리트 브랜드가 한정판을 내놓기 시작할 때엔 선착순 판매 방식이었다. 글로벌 패션 브랜드 H&M이 프랑스 발맹과 협업했을 때에는 서울 명동에서 엿새간 노숙 구매 행렬이 이어졌다. 미국 슈프림이 한정판을 낼 때마다 뉴욕과 파리에서도 비슷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코로나로 외출이 어려워지자 MZ세대는 쇼핑의 공간을 비대면 채널로 옮겨왔다. 업계는 ‘공정’을 목숨만큼 중시하는 이들을 위해 래플을 제시했다. ▷래플은 리셀(resell)로 불리는 되팔기와 한 짝이다. 한정판 제품은 공급은 적은데 수요가 많기 때문에 중고여도 시간이 지나도 가격이 오른다. 특히 MZ세대가 매달리는 건 한정판 운동화다. 부동산과 예술품에 비하면 진입장벽이 높지 않은 데다 신고 즐기다가 현금화할 수 있어 대체자산의 성격을 띤다. 이 때문에 경매회사들까지 뛰어들며 달아오른 글로벌 운동화 재판매 시장은 2025년엔 60억 달러(약 6조8000억 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주말 서울 여의도에 개점한 한 백화점에는 유명 중고거래 플랫폼의 첫 오프라인 매장이 선보였다. 럭셔리 브랜드 또는 유명 연예인과 협업한 운동화들을 판다. 한정판이라 구하기 어려웠던 수백만 원짜리 제품들도 있다. 럭셔리 제품에 기꺼이 지갑을 여는 MZ세대와 그들의 부모 세대인 과거 X세대가 두루 방문한다. 이 중에는 운동화 가격 추이를 주식 차트처럼 분석하는 스니커테크(스니커즈+재테크) 고객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운동화 재판매도 주식처럼 투자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국내 래플 시장의 성장에는 국산 온라인 패션 플랫폼이 큰 역할을 했다. 펭수 한정판 상의도, 코로나 방역 마스크도 래플을 했다. 언택트 소비자들에게 제품 스펙에 대해 상세하게 알리고, 소비를 게임하듯 즐기는 재미를 일깨우고, 공정한 소비의 규칙을 제시했더니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매출이 폭풍 신장 중이다. 결국은 공정과 신뢰의 문제다. MZ세대가 원하는 것을 알고 싶다면 래플을 연구하면 된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러시아 국민시인 고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요즘 그게 참 쉽지 않다. 코로나19가 인류에게 실존적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코로나 우울을 뜻하는 ‘코로나 블루’에 이어 분노로 격화된 ‘코로나 레드’와 ‘코로나 블랙’이란 신조어도 등장했다. ▷지난해 코로나로 인해 기존의 ‘노멀 라이프’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 벌어졌다. 집에 갇혀 지내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 사회와 공동체가 맡아야 할 돌봄의 역할이 대개의 가정에서 여성에게로 몰렸다. 엄마 또는 손자를 돌보는 조모나 외조모에게로. 82세 할머니까지 ‘82년생 김지영’이 되었다. ▷코로나는 일자리도 앗아갔다. 용도 폐기됐다는 고립감과 경제적 위협은 생명의 위협과 다를 바 없다. 원망과 불안이 마음에 쌓이면 몸에 고장을 일으킨다. 집 밖으로 아예 나오지 않거나 다른 사람을 병원체로 여기는 것도 문제다. 사회취약계층은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동과 소통 등 인간의 기본 욕구가 막혀 ‘전 국민 우울경보’라도 내려야 할 판이다. ▷스코틀랜드의 자선단체 ‘모두를 위한 길(Path for all)’은 코로나 우울에 빠진 국민을 구제하기 위해 ‘자연과 함께 걷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바람과 숲을 느끼며 걷는 시간이 심신의 건강과 행복감을 가져온다는 믿음에서다. 최근 음성기반 소셜미디어인 클럽하우스에 사람들이 몰려든 것도, 타인의 취향을 조용하게 들려주는 팟캐스트나 명상 음원이 인기인 것도 코로나 우울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일 수 있다. ▷색을 통해 심리적 치유를 얻는 컬러 세러피도 있다. 지난주 디지털로 열린 뉴욕패션위크는 암울한 지금보다는 밝아질 미래를 희망하며 달콤한 색들을 펼쳤다. 지난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식 때 시를 낭송한 어맨다 고먼도 노란색 프라다 코트를 입었다. 글로벌 색채회사 팬톤이 올해의 색으로 노란색과 회색을 함께 선정한 것은 이 지긋지긋한 우울을 떨쳐내자는 다짐이다. ▷한 지인은 주말 새벽 수산시장에서 장을 봐 시집간 딸의 집으로 ‘아빠표 밀키트’를 보내주며 가족애를 다진다. 전문가들은 전화 통화, 식물 키우기, 산책 등이 마음 챙김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19세기 역병을 그 자신이 겪었던 푸시킨의 시는 이렇게 연결된다.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집단방역에 성공해도 끝이 아니다. 국가가 국민들의 심리적 정서적 후유증 관리에 적극 힘써야 한다. 한국형 코로나 블루에는 집값 폭등으로 인한 절망과 상실, 자영업자들의 눈물이 섞여 있다는 걸 새겨야 한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프랑스의 글로벌 스타트업 행사 ‘비바 테크놀로지’를 2018년 파리에서 참관했다. 구글 등 정보기술(IT) 업계 수장들이 대거 파리로 몰려온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란 건 따로 있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연설이었다. “사회적 책임을 지는 착한 기술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미국이나 중국과는 다른 유럽만의 규제 모델을 만들겠습니다.” 이후 구글은 프랑스에 온라인 교육센터들을 지었다. ▷‘구글과의 전쟁’의 전초전이었다. 프랑스는 2019년 3월 구글이 돈 한 푼 안 내고 기사를 노출시킨다며 뉴스 사용료를 요구했다. 그해 7월엔 유럽연합(EU) 중 처음으로 디지털세(稅) 법안도 통과시켰다. 국경을 초월해 돈을 버는 미국 기업 구글이 프랑스에서도 세금을 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구글은 항복했다. 최근 했다. 뉴스 사용료 지불 법안을 만들겠다는 호주에서도 돈을 내기로 했다. ▷지난해 9월 했다. 인도는 이 수수료를 과거 영국 식민지 시대의 소금세에 빗대며 반발했다. 인도의 150여 개 스타트업이 이에 대항하는 앱 장터를 만들겠다고 나서자 구글은 무릎을 꿇었다. 까지로 미뤘다. ▷한국은 미국과 인도에 이어 구글의 전 세계 매출을 이끄는 세 번째 나라다. 지난해 국내 모바일 앱 매출액 중 66.5%가 구글 앱 매출액(5조47억 원)으로 구글에 지급하는 연간 수수료가 무려 1조529억 원이다. 그런데도 구글은 지난해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는 등 VIP 고객 국가를 홀대하더니 인도에서는 미룬 인앱 결제 의무화를 한국에서는 올해 말부터 적용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구글은 한국에서 최대 1568억 원을 더 벌게 된다. ▷구글은 1998년 창립 때부터 ‘전 세계 정보를 체계화해 모두가 편리하게 이용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강력한 검색엔진, 메일 포토 드라이브 등 무제한에 가까운 정보 저장 서비스로 시장을 평정했다. 기업의 이윤 활동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구글이 비싼 플랫폼 통행료(수수료)를 받아야겠다면 우는 아이 떡 주듯 하지 말고 정보의 정당한 비용(뉴스 사용료)부터 각국에 지불하는 게 맞다. 구글은 코로나19 시대 인류의 생필품이지만 개인정보 수집과 감시의 논란도 낳는다. 구글이 사회적 책임을 지려면 ‘사악해지지 말자’던 초심부터 되새겨야 한다.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