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

정미경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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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미경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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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2~202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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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이든도 AOC도 꽂혔다…‘프롭22’ 대체 뭐길래? [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조 바이든 행정부 집권을 앞둔 미국에서 ‘프롭22’가 화제입니다. 정치인들은 서로 암호를 주고받듯이 “프롭22”라고 수군댑니다. 워싱턴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AOC’라는 이니셜로 더 잘 알려진 젊은 여성 정치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도 “프롭22” 얘기만 나오면 열을 올립니다. ‘프롭22’가 뭐기에 그럴까요.미국은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선거로 민의를 반영하는 시스템도 있습니다. ‘주민발의’ 제도죠. 이건 주 단위로 운영됩니다. 주에서 논란이 되는 사안에 대해 주민들이 의견을 모아 발의하면 직접선거로 찬반 투표를 하는 겁니다. 통과되면 주 헌법으로 제정 또는 개정됩니다.이 제도가 활성화된 주가 있고 안 된 주가 있습니다. 가장 활발하게 운영되는 주는 캘리포니아입니다. 지난달 대선 때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TV에서 지겹도록 본 정치광고는 조 바이든-도널드 트럼프 유세 광고가 아닙니다. ‘프롭22’ 광고입니다. 주민발의는 영어로 ‘프로포지션’ ‘이니셔티브’ 등으로 불립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프로포지션,’ 줄여서 ‘프롭’이라고 하고, 그 뒤에 해당 안건의 행정번호를 붙입니다.대선이 있던 날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프롭22’를 포함한 12건의 주민발의 안건에 표를 던지기 위해 투표소로 향했습니다. 관심의 초점은 ‘프롭22’ 통과 여부. 결과는 58%의 지지를 얻어 통과였습니다. 그런데 이 안건은 내용이 좀 독특합니다. 주민발의에서는 동성결혼, 낙태 등 주로 윤리적인 이슈들이 많이 다뤄지는데 반해 이 건은 매우 테크니컬하고 지엽적인 이슈였죠. 하지만 협소하게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미국 경제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 그리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근로자의 법적 지위 논란을 정조준한 안건이라는 평가가 많았습니다.‘프롭22’의 핵심 내용은 올해 초부터 캘리포니아 주에서 시행되고 있는 ‘AB5 법’의 예외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AB5 법’은 플랫폼 근로자들을 정직원으로 고용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시대에 실리콘밸리는 몸조심하기 바빴지만 ‘AB5 법’은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분위기가 강했죠. 우버, 리프트 등 공유경제 기업들이 ‘프롭22’ 발의를 주도했고, 인스타카트 등 신선식품 배달업체들도 합세했습니다. 기업으로서는 정직원으로 대우하면 최저임금, 고용보험, 유급휴가 등을 보장해야 하므로 비용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죠. 실리콘밸리는 부랴부랴 주민발의를 통해 ‘AB5 법’에 각종 예외조항을 만들어 플랫폼 근로자들을 직접 고용직원이 아닌 독립적 개인사업자로 규정하도록 한 것입니다. 요즘 ‘공유경제’ ‘플랫폼 근로자’ 같은 단어를 모르면 안 되는 시대입니다. 디지털 플랫폼을 매개로 단기간 근로가 이뤄지는 경제형태입니다. 미국에서는 ‘긱 이코노미’ ‘긱 워커,’ 또는 그냥 ‘긱’이라고 부릅니다. 미국은 이미 ‘긱’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올해 노동인력의 35%가 “프리랜서” “계약근로자” “플랫폼노동자” “우버드라이버” 등 뭐라고 불리던 간에 ‘긱 이코노미’에 종사한다는 경제잡지 포브스 조사결과가 있습니다. 2023년에는 노동인력의 절반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건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발발 전 예측이니 지금 조사한다면 그 비중은 훨씬 더 높겠죠. 한국에서는 아직 협소한 범위에서 사회적 논의가 진행되고 있기는 합니다만 ‘배달의 민족’ 같은 플랫폼 근로자나 일반 택배 노동자의 근로조건이 문제가 되고 있죠.실리콘밸리는 ‘프롭22’를 통과시키기 위해, 노동관련 단체들은 이를 막기 위해 치열하게 맞붙었습니다. 우버 등은 홍보와 로비 비용으로 2억 달러(2180억 원 정도)를 썼다고 합니다. 캘리포니아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이 들어간 투표였습니다. 뉴욕타임스가 “주지사나 상하원 선거도 아닌 일개 주민투표에 이렇게 돈을 쏟아 부은 사례가 없다”고 평할 정도였으니까요. 우버는 주민투표를 앞두고 15시간 이상 일하는 근로자에 대해서는 건강보험과 고용보험 혜택을 주겠다는 선제적 양보안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제 주무대는 캘리포니아에서 워싱턴으로 옮겨갔습니다. ‘프롭22’ 통과 다음날 우버 경영진은 “이 모델을 미 전역에 적용시킬 수 있은 방안을 찾겠다”고 밝혔습니다. 다른 주에서 주민발의를 통해 비슷한 안건이 올라오거나 연방 의회 및 주 의회 차원에서 안건이 상정되면 통과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말이죠. 벌써 ‘프롭22’는 미 정치권의 핫이슈가 됐습니다. 민주당 내 진보세력의 얼굴마담 격인 오카시오코르테스는 “캘리포니아 정치에 참견한다”는 비난을 들으며 ‘프롭22’ 통과 저지에 힘을 썼습니다만 별로 효과를 내지 못했죠. 배달 근로자들이 많은 뉴욕 브롱크스와 퀸즈 구역을 지역구로 둔 그녀는 “바이든 행정부에서 실리콘밸리 ‘빅 테크’ 기업들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바이든 당선자가 가장 먼저 부딪힐 문제 중의 하나는 급변하는 경제 속에서 적절한 근로권의 범위를 찾는 일이 될 것입니다. 연방의회 차원에서는 올해 9월 일부 민주당 상하원 의원들 주도로 플랫폼 근로자들에게 최저임금 건강보험 등을 보장하는 법안을 발의해 놓은 상태입니다. 대선 때 실리콘밸리와 노동단체들의 지지를 동시에 얻은 바이든으로서는 이들 간에 이해관계 균형을 맞추기가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다른 나라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죠.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0-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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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이든 취임식에 트럼프 상징 돼 버린 성조기 들수 있을까?[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싱가포르와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렸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에서 어떤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으십니까. 두 정상이 악수하는 장면이요? 합의사항에 서명하는 장면이요? 미국인들에게 물어보면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대답은 ‘국기 장면’입니다. 미국인들이야 한국이랑 보는 시각이 다를 테니까요. 당시 두 정상 뒤로 정말로 많은 수의 미국과 북한 국기가 배치돼 있었습니다. 워싱턴 특파원을 하면서 자주 행사를 취재해 봤지만 그렇게 많은 국기가 자리 잡을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각기 다른 나라 국기들도 아니고, 같은 두 나라 국기들을 저렇게 반복적으로 많이 늘어놓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시 두 나라 국기가 뒤쪽 배경을 완전히 뒤덮은 것을 보면서 북한과의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의지를 읽는 것 같았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나는 지금 애국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자기 과시 본능을 보는 듯 했습니다. 두 정상이 악수하는 장면이 빨갛고 파란 원색의 국기들과 어울리다보니 확실히 시선 집중 효과는 크더군요. 트럼프 대통령의 공과는 후세가 판단할 것이고, 그 평가가 후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의 확실한 공(?)을 하나 꼽자면 국기를 자기 브랜드화 했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조 바이든 시대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국기 회복’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자 결집을 위해 마음대로 가져갔던 국기의 본래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당장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 때 애국심을 표하고 싶은 대다수 미국인들은 마음 놓고 손에 들고 흔들 게 없습니다. 성조기를 흔들자니 ‘트럼프 지지자가 훼방을 놓으려고 저러는 것’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국기는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로고가 박힌 야구모자 만큼이나 친(親) 트럼프 진영의 심벌이 됐기 때문입니다. 국기는 미국인들에게는 ‘스타즈 앤 스트라이프스’ ‘스타 스팽글드 배너’ ‘올드 글로리’ 등의 애칭으로 불리면서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렇다고 평탄한 세월을 보낸 것만은 아닙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성조기를 불태우는 행위에 대해 당시 공화당 주도 의회와 중립적인 연방대법원이 ‘국기보호법’ 제정을 둘러쌓고 대치한 것은 유명한 사례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베트남전 때 미국의 참전을 반대하는 단체들은 국기를 거꾸로 꼽는 ‘업사이드다운 아메리칸 플래그’ 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정권이나 정부 정책에 항의하는 미국인들은 국기를 거꾸로 꼽는 식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합니다. 2018년 퓨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시대에 미국인들의 국기 노출 빈도가 최고 수준에 달했다고 합니다.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 스타일이 많은 미국에서는 국기를 내다 거는 집들이 많은데 트럼프 대통령 시절에는 그러한 경향이 특히 높았다는 것이죠. 집 앞에 국기를 펄럭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한 비율은 공화당 지지자들이 민주당 지지자들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았다고 합니다. 국기를 통해 지지층을 결집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을 흔히 ‘깃발의 정치’라고 부릅니다.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보수행동정치회의(CPAC) 연단에서 국기를 껴안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지요. 지지자들의 반응이 좋자 올해는 키스도 하고 “베이비, 너를 사랑해”라고 고백도 합니다. 한 참석자는 “우리의 아름다운 국기를 트럼프만큼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는 트윗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깃발은 비슷한 의미를 가진 또다른 깃발을 부르기 마련입니다. 트럼프 지지 집회에서 남부연합기나 ‘트럼프를 짓밟지 마라’고 쓰인 개즈던기는 국기만큼이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M)’ 인종차별 반대 시위 때 트럼프 지지자들은 국기 중간 한 줄만 푸른색으로 칠한 ‘경찰의 목숨도 중요하다’ 깃발을 흔들기도 했습니다. 이에 맞서 민주당 지지자들은 국기를 나치 깃발과 함께 드는 식으로 저항의 표시를 했습니다. 국기가 완전히 트럼프의 전용물이 된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일부 반(反) 트럼프주의자들은 하도 들게 없다보니 미국 원주민 깃발까지 들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시각효과가 큰 ‘깃발 싸움’에서 민주당 진영은 철저히 패한 셈입니다. 바이든 당선자는 화합을 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화합의 상징으로 성조기를 드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짧은 역사를 커버하기 위해 유달리 국기에 애착을 보여 온 미국이 국기를 멀리 하게 된다면 정말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쯤 다시 국기 흔들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 궁금합니다.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

    • 2020-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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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흑인대학 나왔다고?”…아이비리그 졸업장 없이 美대통령 된 바이든[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I got started out HBCU, Delaware State.” 오늘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학벌’ 얘기를 하기 위해 영어로 시작해봤습니다. 지난해 바이든이 유세할 때 한 말인데요. “나는 HBCU인 델라웨어 스테이트에서 시작했다”라는 뜻이지요. ‘HBCU’는 미국에 100여개 넘게 있는 흑인 전용 대학을 줄여 부르는 말입니다. 인종차별 시대의 산물로, 델라웨어 스테이트 대학도 그 중 하나이지요. “바이든이 흑인대학을 나왔다구?” 당장 이런 의문이 드실 겁니다. 그래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9월 TV 대선토론 때 이를 문제 삼기도 했지요. 그는 바이든이 ‘치매 때문에 말실수를 한다’고 트집 잡으면서 “당신은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델라웨어 스테이트 대학 출신인가”라고 공격했습니다. TV토론 때는 흐지부지 넘어갔지만 미 언론들도 이상하게 여겨 팩트 체크를 해봤나 봐요. 그래서 바이든이 하려던 말의 의미는 “내가 처음 정치를 시작했을 때 델라웨어 스테이트 대학의 지지를 받은 것이 큰 도움이 됐다”였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확실히 하자면 바이든 당선인이 나온 대학은 델라웨어 스테이트 대학이 아닌 ‘유니버시티 오브 델라웨어,’ 즉 델라웨어대입니다. 그 후 시라큐스대 로스쿨을 졸업했습니다. 둘 다 좋은 대학입니다.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의 시선으로 봤을 때 더 높게 쳐주는 대학들이죠. 하지만 솔직히 말해 ‘톱 클래스’는 아닙니다. 지금은 바이든 당선 축하 무드니까 아무도 크게 얘기하지 않지만 워싱턴에서는 이렇게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립니다. “배우 출신으로 일리노이 주 유레카 칼리지를 나온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이후 40여년 만에 아이비리그 학부나 대학원 졸업장을 가지지 못한 첫 번째 대통령”이라고요. 그렇다고 바이든 당선인에게 ‘학벌 콤플렉스’가 있다거나, 자신이 나온 대학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모교 졸업 기념연사로 네 차례나 등장했고, 대학 스포츠경기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열성 동문’으로 통합니다. 부통령 시절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블루 헨즈(푸른 암탉들)’라는 팀명으로 유명한 델라웨어대 미식축구 경기를 자주 관람하기도 했죠. 델라웨어대도 바이든 당선 때 홈페이지에 한국식으로 치자면 ‘우리 학교 경사 났네’라는 축하 배너를 내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바이든 본인은 아이비리그 졸업장을 가지지 못한 것을 끊임없이 의식했다고 주변 사람들은 말합니다. 누가 이를 업신여기기라도 하면 상처도 받고요. 워싱턴은 그런 동네이기 때문입니다. 똑똑한 수재들이 대개 의사나 판사, 대기업 직장인으로 방향을 잡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은 워싱턴으로 진출합니다. 직접 정계에 투신하던지, 아니면 싱크탱크에서 정책 연구를 하면서 거대한 엘리트 공동체 사회를 형성합니다. 바이든의 한 측근은 “그는 워싱턴에 모여드는 수재들을 한편으로는 존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질투하는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바이든이 풍기는 분위기는 외골수 학구파나 연구자로 보이지 않지만, 의회를 통해 정력적으로 많은 정책들을 입안하고 협상하는 상원의원 생활을 40년 가까이 지냈습니다. 뛰어난 학문적 성취나 졸업장 없이 ‘정책통’으로 통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에 인재들이 많이 포진해 있다는 의미겠죠. 자신의 지적 능력은 뛰어나지 않지만 하버드급 브레인들을 잘 활용하는 것, 이를 워싱턴에서는 ‘바이든 패러독스’라고 부르죠. 한 언론 조사에 따르면 현재까지 내정된 바이든 내각의 92%는 아이비리그 졸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학력이나 경력보다는 자신의 대한 충성심을 최우선으로 치며 요직에 앉혔던 트럼프 대통령과 비교해보면 화려함 그 자체입니다. 국무장관에 지명된 토니 블링컨은 하버드대 출신으로 국무부 요직을 거쳤고. 공화당이 집권해 정치에서 물러났을 때는 싱크탱크 연구원으로 로비스트로 수십 년의 경력을 가졌습니다. 론 클레인 백악관 비서실장 내정자 역시 하버드 법대 출신으로 되기 힘들다는 연방대법원 서기직을 거쳤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낙점된 제이크 설리번은 예일대 졸업장에 영국 옥스퍼드대 로즈 장학생 출신입니다. 바이든 인재 경영론의 두 번째 포인트는 ‘오래 두고 본다’는 겁니다. 그는 인재들을 젊은 나이에 영입해 키우는데 매우 열성적인 스타일입니다. 젊은 정치인들과 많은 토론을 하고, 그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일을 벌려볼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죠. 일명 ‘그루밍 전략’입니다. 일각에서는 ‘바이든 초대 내각이 버락 오바마 시대 요직 인사들로 채워졌다’는 얘기가 있지만,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바이든이 키운 인재들이 당시 정치 경험이 부족했던 오바마 대통령 밑에서 많이 중용됐었다’일 겁니다. 바이든 사단의 대표주자인 클레인 비서실장 내정자는 20대 중반 나이에 의회에서 임명하는 법사위원회 자문변호사로 일하다가 우연히 이 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된 바이든 상원의원의 눈에 띄게 되면서 아예 바이든 진영에 합류해 1988년 대선 출마 때 연설담당자로 활동하게 됩니다. 워싱턴도 작은 동네라 일 잘하면 소문은 나게 마련이어서 앨 고어 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 바이든 부통령 비서실장, 오바마 행정부의 전염병 에볼라 대응팀 수장까지 맡게 되죠.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시절 그녀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제임스 루빈 전 국무부 대변인 역시 바이든이 키운 정치인 중 한 명이죠. 그는 ‘바이든 인재론’을 이렇게 정리합니다.“When you work for him, he trusts you to run with the ball and he protects you when you fumble.”(만약 당신이 바이든을 위해 일한다면, 그는 당신이 주도적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믿어주고, 만약 당신이 실수를 했다면 그가 당신을 보호해준다)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

    • 202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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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국방장관 후보 떠오른 플러노이가 보는 ‘워라밸’이란?[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미국 워싱턴 시내에는 국무부, 법무부, 재무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등 많은 정부 부처 본부들이 있습니다. 한 곳 예외가 있다면 워싱턴 근교 알링턴에 있는 국방부 본부, 펜타곤입니다. 너무 커서 워싱턴 시내에는 도저히 지을 수 없었다고 하죠. 펜타곤은 근무자가 2만7000~2만8000명에 달하는, 단일 건물로는 세계 최대 규모입니다. 물론 이건 본부 규모일 뿐이고, 현역 군인, 주방위군 등 실제 군인들 숫자까지 합치면 미 국방부는 280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세계 최대 고용주입니다. 그래서 국방부 수장을 뽑을 때는 작전 수행 능력과 더불어 조직 운영 능력을 중요하게 봅니다. 이 말은 두 가지 능력을 동시에 갖춘 사람을 찾기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죠. 대부분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장성 출신들이 출세 코스로 장관이 되지만 그 방대한 조직을 잘 이끌지 못해 고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혹 짐 매티스 전 국방부 장관처럼 두 가지 능력을 두루 갖춘 인물이 나타나기도 해요. 하지만 매티스 전 장관은 가장 중요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코드’가 맞지 않아 거의 쫓겨나듯 물러났습니다. 그래서 조 바이든 초기 내각의 국방부 장관으로 여성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아무리 바이든 차기 행정부가 여성 중용 정책을 내걸었다고 해도 최대 조직에 전장에 나가 총 한번 쏘아본 경험이 없는 여자를 리더 자리에 앉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파격이죠. 강력한 후보로 떠오르는 인물은 미셸 플러노이 전 국방부 차관(59)입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정책담당 차관을 지냈습니다. 정책 차관을 ‘넘버3 포스트’라고 하는데요. 장관, 부장관에 이은 5명의 차관 중 가장 노른자위 직책으로, 미국이 수많은 세계 분쟁 중 어느 분쟁에 나서야 하고, 어떤 군 위주로 개입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의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지 등을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하버드대 졸업-옥스퍼드대 유학이라는 고위관리 교육 정코스를 밟은 후 하버드대에서 연구하다가 빌 클린턴 행정부 때 처음 정치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죠. 그녀가 차관 시절 수립했던, 그리고 이후 싱크탱크 연구에서도 계속 담당해온 전시작전 계획들은 실제로 “뛰어나다”는 평을 듣습니다. “사려 깊은” “실용적인” 등의 수식어가 붙죠.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같은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변하는 국가적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위기가 예상되는 지역에 기민한 선제 대응을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사이버 군사전, 인공지능(AI) 도입 등 군 수뇌부 인사들이 뒤쳐지는 ‘IT 리터러시(정보기술 해독력)’도 앞선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경험이 없다보니 플러노이의 전쟁 리더십에 “이론적이다” “탁상공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것도 사실인데요. 이런 경험 부족을 메워주는 것이 바로 그녀의 조직 이해력입니다. 그녀가 장관이 될 수도 있다는 말에 국방부 직원들이 가장 기뻐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플러노이 조직 리더십의 강점은 ‘생활로서의 군’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군은 전쟁을 위해 존재한다고 할 만큼 전쟁수행 능력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국가간 대규모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기 힘든 21세기 정치외교 구도로 볼 때 생활인, 조직 구성원, 커리어 관리 차원에서 군인들을 통솔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입니다. 이게 바로 그녀가 스스럼없이 강조하는 ‘워라밸(가정-일 양립)’ 개념이기도 합니다. 물론 너무 흔해져버린 이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조금 근사하게 들리는 ‘인재 유지(best talents retainment)’라는 말을 쓰더군요. 군이 그 특유의 권위주의적, 상명하복 조직 문화를 개선하지 않으면 최고의 인재들을 다른 분야로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거창한 정책 변화도 아닙니다. ‘워라밸’이라고 해서 여성에게만 이득이 되는 제도도 아니구요. 플러노이 차관 시절 국방부는 ‘예상시간 휴무제(PTO)’를 도입했습니다. 직장인이라면 일주일에, 또는 한달에 몇 차례 꼭 가정을 위해 시간을 내야 할 때가 있죠. 아이들 학교에 가기 위해, 부모님을 병원에 모시고 가기 위해 한나절이 필요합니다. 미리 예상 가능하지만 필요할 때마다 상사에게 주저리주저리 말하기 꺼려지는 시간이죠. 미국 직장들은 팀별로 일을 많이 진행하니 팀제도로 PTO를 도입할 경우 미리 신고만 하면 다른 팀원이 나를 위해 몇 시간 일을 커버해줍니다. 플러노이 전 차관은 “이런 제안마저도 정시 출퇴근을 중시하는 국방부 문화에서 쉽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처음 국방부 내부 타운홀 미팅에서 이런 제안을 했더니 상사와 동료들이 쓴웃음을 지으며 ‘먹히지도 않을 소리’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하죠.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도입된 후 국방부 직원들이 가장 잘 활용하는 제도도 정착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활 속에서 필요한 워라밸 제도는 그녀의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자녀 3명을 둔 엄마’라는 워싱턴 성공 교과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여성 직장인이다 보니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잘 아는 것이죠. 그래서 더 이상 시간 관리가 용이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때는 미련 없이 국방부 3인자의 자리를 포기했습니다. 임명 3년 뒤 아이들이 손이 많이 가는 10대 청소년기에 접어들자 남편과 상의 후 사표를 냈습니다. 그녀의 남편 역시 당시 보훈부 차관으로 이들 부부는 워싱턴의 잘 나가는 파워 커플이었죠. 그녀의 사표는 워싱턴 정가에서 큰 화제가 됐었죠. 12월부터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의 장관 발표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외교관계 차원에서 한국이 관심을 두는 미국 장관은 서너 명에 불과합니다. 국방장관은 국무장관과 더불어 톱급인데요. 플러노이가 예상대로 장관이 된다면 트럼프 대통령 시절 추락한 국방부의 자존심과 내부 결속력을 다시 올리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그녀만큼 모든 면에서 갖춘 후보를 찾기도 힘들지요.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0-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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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피부 보호에 특효 ‘먹는 화장품’

    국내 이너뷰티 시장은 콜라겐에 집중돼 있지만 해외에서는 피부 표면에서 수분장벽 역할을 하는 세라마이드와 피부 형태를 유지하고 조직을 단단하게 해주는 콜라겐을 함께 섭취하는 추세가 확산되고 있다. 매일유업의 생애주기별 영양설계 전문 브랜드 매일 헬스 뉴트리션은 100% 우유에서 추출한 세라마이드 성분을 함유한 ‘먹는 화장품’(이너뷰티) 신제품 ‘셀렉스 밀크세라마이드’를 선보였다. ‘셀렉스 밀크세라마이드’는 밀크세라마이드(600mg)와 저분자 피시 콜라겐(1000mg)을 한꺼번에 섭취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여기에 콜라겐과 함께 먹으면 좋은 비타민C 하루 권장 섭취량(100mg)과 히알루론산, 엘라스틴까지 추가했다. 신제품에 포함된 ‘밀크세라마이드’는 매일유업의 50년 유가공 전문 노하우를 바탕으로 100% 우유에서 추출한 특허받은 피부 보호용 조성물이다. 매일 하루 1포 물 없이 간편하게 털어 먹는 분말스틱 형태이며 부드럽고 맛있는 요거트 맛이다. 가격은 4주 분량 1팩에 4만5000원. 매일유업 관계자는 “30대부터는 콜라겐과 세라마이드를 함께 섭취하면 좋다”고 말했다. 매일 헬스 뉴트리션의 대표 브랜드인 셀렉스는 2019년 단백질 건강기능식품 최다 생산 실적을 기록하며 단백질 성인 영양식 시장 1위를 달리고 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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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르노샵 부근서 막 내린 ‘트럼프의 야망’[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패배 불복 와중에 미국인들을 웃게 만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웃고 지나갈 게 아니라 뒤죽박죽 상태인 미국 정치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대선 후 소송전을 개시하던 무렵 트럼프 대통령이 트윗을 올렸습니다. “내일 주말 아침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포시즌즈에서 기자회견 열림. 참석 바람.” 기자회견 앞에 ‘대규모(big)’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써가며 기대감을 높였죠. 대선 패배 후 저기압 모드였던 트럼프 대통령이 모처럼 신이 나 트윗을 올렸으니 기자들은 포시즌즈 호텔에 “회견이 예정돼 있느냐”고 전화를 겁니다. 그러나 트럼프 진영으로부터 회견장 예약이 없었던 포시즌즈 호텔은 오히려 “이게 뭔 소리?”라는 반응을 보이죠. 회견 장소에 대한 의문은 당일 아침 풀립니다. 트럼프 측은 “오늘 회견은 ‘포시즌즈 토털 랜드스케이핑’이라는 조경회사에서 열린다”고 기자들에게 수정 문자를 보냅니다. “웬 조경회사?”라는 의문을 가진 기자들이 삼삼오오 지정된 장소에 집결합니다. 도착해보니 특급 호텔 포시즌즈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필라델피아 슬럼가에 있는 조그만 조경회사. 이 때부터 기자들의 관심사는 ‘기자회견에 누가 나오느냐’ ‘무슨 얘기를 하느냐’가 아니라 ‘왜 이런 곳에서 기자회견이 열리나’로 옮겨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을 둘러보니 기자회견 장소로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한쪽으로는 성인용품 상점, 다른 한쪽으로는 화장장 사이에 끼여 있는 조경회사, 그것도 회사 내부 사무실이 아닌 야외 주차장에서 기자회견이라뇨. 그런데 정말 기자들 사이를 뚫고 루돌프 줄리아니 트럼프 대통령 개인 변호사 겸 전 뉴욕 시장이 등장합니다. 줄리아니 하면 트럼프 대통령의 ‘심복’ 아니겠습니까. 뒤로는 급조한 무대를 배경으로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화려한 경력의 트럼프 법률팀이 쭉 도열해 있습니다. 줄리아니는 새로울 것이 없는 “이번 선거는 사기다” “부정선거다”라는 주장을 펴기 시작합니다. 열변을 토하는 사이 펜실베이니아 개표가 끝나고 언론사들은 일제히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 승리’라고 공식 발표를 합니다. 기자들은 수군거리며 더 큰 뉴스가 나올 바이든 선거본부로 발걸음을 옮기죠. 기자들이 왜 떠나는지 모르는 줄리아니는 주변에 물어보고 “모두들 바이든이 승자래요”는 대답을 듣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하던 줄리아니는 역시 드라마적 연출에 강한 면모를 보이며 수습에 나섭니다. 회견 도중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오 신이시여, 언제부터 네트워크(방송사)들이 승자를 결정했습니까. 법정에서 결판이 나야지요”라며 울부짖습니다. 배경, 등장인물, 타이밍, 스토리라인 등이 모두 4차원스러운 이 한 편의 드라마는 CNN 등 언론사들에 의해 주말 아침 생중계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자회견 장소 예약을 담당하는 트럼프 진영 말단 직원의 ‘실수’로 발생한 일이라고 합니다. 웬만한 거짓 트윗은 지우지 않은 트럼프 대통령도 포시즌즈 트윗은 창피했던지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러는 사이 이 조경회사는 소셜미디어에서 최고 검색어로 등극하며 수많은 유머의 소재거리가 됐습니다. CNN의 잭 태퍼라는 앵커는 “트럼프타워의 금빛 엘리베이터에서 시작된 트럼프의 대통령 야망이 결국 포르노샵 부근 동네에서 막을 내렸다”고 비꼬기도 했죠. 성인용품 상점 주인까지 조연으로 등장해 기자들의 인터뷰 공세에 “트럼프도 자기가 진 줄 알아, 알고 말고”라며 혀를 찹니다. 이 사건은 작게 보면 한 말단 직원의 실수지만 크게는 트럼프 법률전략의 대전환을 의미한다고 미 언론은 지적합니다. 패배를 예감한 트럼프 진영은 이미 6월부터 백악관 법률팀을 가동해 소송 전략을 수립했다고 하죠. 이곳저곳에서 소송을 벌이는 것이 간단해 보일지 몰라도 사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각 주마다 제각각인 선거관련 법률을 알아야 하고, 주의 대표적인 로펌들을 소송 대리인으로 선정하고, 부정선거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선거 핫라인으로 모아 해당 법정에 자료로 제출해야 하는 복잡한 과정입니다. 올 6월에 시작했어도 늦은 감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 진영 핫라인에 40여명이 근무한다고 하는데 턱도 없이 작은 인원입니다. 장난전화를 골라내야 하고, 설사 부정이 개입했다 하더라도 선거를 무효화할 수 있을 만큼 조직적인 규모로 이뤄졌는지 판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줄리아니의 등장은 의미가 있습니다. 주마다 각개전파로 진행돼온 소송전에서 이제 발을 빼겠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대부분이 ‘함량미달’인 소송을 대량으로 전개한 뒤 ‘걸리는 것이 있으면 다행’이라는 주먹구구식 전략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것을 누구보다 트럼프 대통령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줄리아니가 법률 총책임자로 전면에 나섰으니 앞으로는 대규모 대중집회와 언론을 통한 부정선거 호소에 더 집중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물론 이런 대중선동 전략도 ‘약발’은 오래 가지 않겠죠. 이름도 낯선 ‘포시즌즈 토털 랜드스케이핑’ 사건을 보면서 많은 미국인들은 “트럼프 시대가 정말 막을 내리는구나”라고 직감했을 겁니다. 대선 불복 몽니를 부리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죠. 혼란의 미국에 부조리 코미디극을 선사한 사건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듯 합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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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론조사를 여론조사 하라!’ 또 망신살 美대선 여론조사[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승리로 올해 미국 대선 드라마가 마무리됐습니다. 이런 결과를 두고 두 그룹의 사람들이 울고 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도널드 트럼프 선거진영과 지지자들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졌으니 이 사람들의 우울한 반응은 당연합니다, 또 다른 그룹은 여론조사 업계입니다. 내놓는 사전 여론조사마다 바이든 당선자의 압승을 예측했던 업계는 실제 개표 집계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예상 밖 선전을 하면서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야 할 처지가 됐죠. “대충 바이든 당선자가 이겼으니 됐지 않았느냐”구요? 아닙니다. 정확성이 생명인 여론조사에서 “대충”이라는 말로 그냥 넘어가는 사례는 없습니다. 특히 언론이 이 문제를 걸고넘어지고 있습니다. 여론조사를 믿고 바이든 압승 시나리오를 만들어놨다가 함께 망할 뻔했던 미 언론사들은 여론조사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몇 개 헤드라인을 볼까요.“여론조사, 남은 믿음마저 다 버렸다”“대재앙 여론조사”“여론조사업계 자폭해야”“여론조사(의 필요성)를 여론조사 하라” 아직 개표가 완료된 상황은 아닙니다만 현재까지 나온 결과로 본다면 바이든 당선자의 ‘접전 끝 승리’라는 결론이 가능합니다. 특히 후반부로 가면서 몇몇 경합 주에서 우편투표에서 큰 격차를 보인 것이 승리의 견인차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사전 여론조사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선거 직전까지 대표적인 여론조사기관 ‘리얼클리어폴리틱스’는 7.2%포인트, 뉴욕타임스 산하 ‘파이브써티에이트’는 8.4%포인트로 바이든 당선자의 여유 있는 승리를 예측했습니다. 일부 조사기관은 “두 자리 수로 이긴다”고 장담하기도 했습니다. 여론조사의 오차범위가 3% 내외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바이든 당선자의 승률을 너무 높게 잡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죠. 개별 주로 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플로리다 주에서 이기자 다들 놀랐는데요. 원래 여론조사에서는 2.5%포인트 격차로 패할 것이라는 예측이었는데 정작 개표를 해보니 3.5%포인트 차이로 이겼습니다. 오하이오는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1% 내외로 이기는 힘든 싸움이 될 거라고 하더니만 개표 결과는 8%포인트 차이로 압승 그 자체였습니다. 언론처럼 여론조사도 트럼프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에 과소평가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상하원 선거도 함께 치러진 이번 대선에서 전반적으로 공화당 후보들을 너무 ‘박하게 대접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수전 콜린스라는 메인 주의 여성 상원의원(공화)은 트럼프 행정부 정책에 사사건건 반기를 들다가 찍혀서 이번 선거에서 물갈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죠. 그랬는데 초반부터 선두를 유지하더니 결국 6.2%포인트 차이로 이겼습니다. 퀴니피액대 여론조사에서는 12%포인트라는 어마어마한 차이로 패할 것으로 예측됐었는데 말이죠. 선거 여론조사는 힘들기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개표 집계라는 결과로 바로 확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험지 채점’이 즉시 된다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전문가 그룹에서 정말 ‘톱 중의 톱’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평소 미국 정치에서 이름도 못 들어본 리얼클리어폴리틱스니, 파이브써티에이트니 하는 여론조사기관들은 선거 때만 되면 여기저기 인용되면서 물 만난 고기처럼 대활약을 하죠. 미국인들의 농담 중에 “‘리얼클리어폴리틱스’라는 이름이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하면 선거철이 왔다는 증거”라는 말이 있을 정도죠. 고고한 명성을 쌓아오던 여론조사가 2016년 대선 때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승리를 예측했다가 크게 한번 당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당시 여론조사업계는 1년여의 자체 조사를 거쳐 실패의 원인을 심층 분석하는 보고서를 내놓았습니다. 표본 추출에서 인종, 경제력 등과 비교해 덜 발달된 교육 수준이라는 변수를 더 세분화해야 한다는 결론이었습니다. 또 유선전화와 함께 휴대전화까지 응답자에 포함시킨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냥 끊어버리는 응답에 대해 문자메시지, 이메일 등의 대안을 줘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개선된 올해 대선 여론조사로 또다시 망신을 당했으니 할 말이 없게 됐습니다. 들리는 얘기로는 우편투표 유권자들의 응답이 과대 반영된 것이 문제의 시발점이라고 합니다. 친(親) 바이든 성향의 우편투표 유권자들은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외출을 꺼리니 여론조사 전화를 받고 적극적으로 응답할 가능성이 높죠. ‘샤이 트럼프(숨은 트럼프 지지자)’의 여론조사에 대한 불신을 감안해야 했다는 반성도 나온다고 합니다. 샤이 트럼프는 여론조사를 믿지 않기 때문에 응답 자체를 거부하는 비율이 높으니까요. 외부인들이 보기에 여론조사는 미스터리 그 자체입니다. 이 분야는 웬만한 정보는 ‘업계 비밀’이라며 공개를 꺼리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여론조사가 크게 빗나간 두 건 모두 트럼프 시대에 집중돼 있다 보니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는 여론조사로는 끄집어내기 힘든 그 어떤 무엇이 있다”는 워싱턴 호사가들의 뒷얘기가 그럴싸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이제 트럼프 시대는 끝나가고 있지만 여론조사는 한번 잃는 신뢰를 되찾는데 시간이 걸릴 듯하네요.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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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 대통령의 슬기로운 퇴임 후 생활[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전임 대통령의 삶보다 더 처량한 삶은 없다.” 존 퀸시 애덤스라는 미국 6대 대통령이 한 말입니다. 200여 년 전 나온 말이지만 지금 들어도, 아니 지금 듣기 때문에 더욱 수긍이 갑니다. 글로벌 미디어와 인터넷 헤드라인을 매일 장식하는 자리에서 내려온 뒤의 삶은 얼마나 허전할까요. 이 말을 한 애덤스 전 대통령도 얼마나 전임 대통령의 삶이 싫었던지 한참 급을 낮춰 하원의원으로 다시 정치 세계에 뛰어들어 17년 동안 활동하다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제 새 미국 대통령을 뽑는 때입니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패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이번에 안 물러난다고 해도 어차피 4년 뒤에는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트럼프 대통령은 물러난 뒤 어떻게 전임 대통령의 삶을 살아나갈 것인가’입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아웃사이더’인 트럼프 대통령이 퇴임 후 살아가는 과정도 예사롭지 않을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인데요. 지구상 그 어느 누구보다 관심의 초점이 되기를 원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슬기롭게 전임 대통령의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요. 미국에는 ‘전임 대통령 클럽’이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전임 대통령 장례식이 있을 때 이 클럽 회원들은 서로 모여 정담을 나누고 어깨를 도닥여 주는 훈훈한 장면을 연출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클럽에 자동 가입은 되겠지만 환영은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본인도 인정했습니다. 지난해 블룸버그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아무래도 전임 대통령 클럽에서 ‘왕따(집단 따돌림)’ 당할 것 같다”구요. 전임 대통령도 명성과 대중적 인기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떠난 뒤 외교와 자선활동을 통해 더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 클럽의 지원사격도 없이 혼자 ‘포스트-프레지던트 라이프(퇴임 후의 삶)’을 개척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퇴임 후 처량한 삶을 살 것으로 예측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습니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진출할 것이다” “‘트럼프-TV’를 개국할 것이다” “러시아 모스크바에 트럼프타워를 지을 것이다”는 등 들리는 얘기가 많죠. 가능성 중 하나는 ‘펜실베이니아 대통령’설(說)입니다. 워싱턴에서 백악관은 펜실베이니아 가(街)에 있습니다. 우연하게도 워싱턴의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도 펜실베이니아 가에 위치해 있죠. 트럼프 대통령이 물러난 뒤에도 트럼프 호텔에 운동본부를 차려놓고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펜실베이니아 가의 또 다른 대통령’이라는 의미죠. 트위터로 기자 브리핑을 매일 열고, 폭스뉴스 진행자나 논객을 초청해 열렬 지지자들이 좋아할만한 이슈를 만드는 것이죠. 이 방안은 상당한 논의가 진전됐다고 합니다. 재임 업적을 홍보하는 테마파크 건설 소문도 들립니다. 허황된 얘기 같다구요? 아닙니다. 나중에 건설될 트럼프 기념 도서관을 변형시켜 기념관도 보고 놀이시설도 즐기는 방식으로 짓는다면 그리 힘든 일도 아니죠. 기념 도서관이야 전임 대통령의 특권이니 당연히 세금으로 지어지게 됩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마러라고 별장이 있는 플로리다에 ‘디즈니월드’가 있으니 그와 견줄만한 테마파크 건설은 필생의 사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외교적으로는 평소 친하게 지내온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등 ‘독재자 친구들’과 조인트벤처 사업을 벌이거나 정치 컨설팅에 뛰어들 수도 있습니다.이런 구상들이 실현되려면 시기가 관건입니다. 미국 대통령들은 퇴임 직후 일정 기간동안 대중의 시선에서 사라집니다. 워싱턴 전문용어로 ‘그레이스(자비의) 기간’이라고 하죠. 후임 대통령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도록 빠져주는 기간입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퇴임과 함께 텍사스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내 침묵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한 말은 유명합니다. 오바마 전 대통령 역시 후임으로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이 못마땅했지만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훌륭한 전통”이라며 2년여 동안 공식 석상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완전히 정치를 은퇴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 기간 동안 노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재창조 작업을 하게 되죠. 트럼프 대통령은 열성 지지자들이 많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빨리 활동을 재개하고 싶은 마음일 텐데요. 하지만 정치의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재개 시점의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모르죠. 북한에서 사업을 벌일 구상을 하고 평양 경기장에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손잡고 나타나 농구 경기를 관람하는 날이 올 지두요.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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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사람 뭘 말하려는 건지 모르겠어”[정미경의 이런 영어 저런 미국]

    미국 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가장 생생한 유권자 민심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뭘까요. 맞습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댓글들을 살펴봤습니다. △“Like him or not, Trump lets you know where he stands. Biden stands for whatever the teleprompter tells him to stand for.” 폭스뉴스 페이스북에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평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을 보면 자기주장이 확고하죠. “그를 좋아하건 말건 이건 인정해야 한다. 트럼프는 자신의 주장이 뭔지(where he stands) 당신에게 알게 해준다.” “반면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는 텔레프롬프터(자막 모니터)가 시키는 대로 주장을 편다.” ‘Stand for’는 ‘(어떤 쪽 주장을) 옹호하다’는 뜻입니다. △“I didn’t realize doing rallies, watching TV and tweeting was considered the president working his ass off, lol.” CNN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댓글입니다. 이 댓글이 달린 동영상을 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나는 한가한 바이든 후보와는 달리 여기저기 유세 다니며 뼈 빠지게 일한다(work my ass off)”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댓글은 그 발언을 비꼽니다. “유세하러 다니고, TV 보고, 트위터 하는 걸 대통령이 열심히 일한다고 하는 건 줄 몰랐네.” 그리고 ‘lol(정말 웃겨)’로 끝을 맺죠. 대통령의 직무가 아닌 자기 선거운동 하러 다니고, 취미생활 하는 걸 어떻게 열심히 일한다고 할 수 있느냐는 거죠. △“The US is just like these tik tok people. They don’t care how dumb they look, as long as all eyes are on them.” 최근 마지막 대선 TV 토론을 생중계한 NBC방송 웹사이트에 올라온 댓글입니다. 해외 시청자 댓글이네요. “미국은 꼭 ‘틱톡’ 출연자들 같다. 자기들이 얼마나 멍청해 보이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관심만 받으면 된다(all eyes on them).” 틱톡에는 몸을 이용한 묘기를 선보이는 출연자들이 많습니다. 우스꽝스럽지만 관심 받는 것 자체를 즐기는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높죠. 외국인이 보기에는 저것도 토론이랍시고 하면서 그저 주목 받는 데만 관심이 팔린 두 후보가 틱톡 묘기자랑 같다는 것이죠. 정미경 콘텐츠기획본부 기자·前 워싱턴 특파원 mickey@donga.com}

    • 20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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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빨리 문 열어!” 고함치며 문 때려부순 ‘브룩스 브라더스 군단’[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오늘은 옷 얘기 좀 해볼까요. 정장을 잘 차려 입은 남자를 보면 “와! ‘수트빨’ 산다”고 하죠. 미국에서는 ‘정장빨’ ‘수트빨’ 좋은 남자를 가리켜 ‘브룩스 브라더스족(族)’이라고 합니다. 미국 여행객이나 연수, 유학생들이 워낙 많은 시대이니 아시는 분은 잘 아시겠지만 브룩스 브라더스는 정장 판매 회사입니다. ‘저렴이’가 아니라 고가 기성복을 판매합니다. 오프라인 샵들은 최근 경기 한파로 파산 신청을 냈지만 브랜드는 건재하고 온라인 판매는 성업 중이죠. 그런데 미국 대선 역사에서도 브룩스 브라더스가 등장합니다. “미국 대통령이 브룩스 브라더스 옷을 즐겨 입는다”라는 차원의 얘기가 아닙니다. 선거는 민주국가에서 가장 합법적인 의사 표현 방법입니다. 반면 폭력은 가장 불법적인 정치행태라고 할 수 있죠. 합법의 정점 선거에 끼어든 가장 불법적인 폭력 사태, 그 교차점에 브룩스 브라더스가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구요. 미국처럼 자기 나라 선진 정치를 금쪽같이 떠받드는 나라에서 대선 현장의 폭력사태는 정말로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가끔 일어납니다. 때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00년 대선.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와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가 대결했을 때입니다. 사건은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서 벌어졌습니다. 미국 대선에 관심 없는 분들이라도 ‘플로리다 재검표’ 논란은 아실 겁니다. 정확히 말해 마이애미 데이드 카운티 선거구에서 벌어졌죠. 우리나라 TV에서 미국 대선일 풍경 비춰줄 때 투표용지를 개표하는 선거요원들 모습을 보셨을 겁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책상에 둘러앉아 수작업으로 열심히 세고 있죠. 그 작업은 투명선거를 위한 언론 공개가 원칙입니다. 워싱턴 특파원 때 보니 선거관리위원회가 기자들에게 개표작업 참관을 원하는지 사전 신청을 받더군요. 물론 개표 요원과 참관인들 사이에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당시 데이드 카운티 선거구 개표 수작업 결과 1만 750여 표가 실제 투표인 수와 차이가 났습니다. 그러자 카운티 선거당국은 기계를 이용한 개표 작업을 다시 한번 진행하기 위해 기계가 설치된 옆방으로 투표용지를 가져가려고 했죠. 정확히 말해 그 기계를 ‘밸럿 스캐닝 머신(ballot scanning machine)’이라고 합니다. 당시 민주 공화 양당의 전국위원회에서 파견된 선거 참관인들도 많이 보고 있었는데요. 마감 시간을 맞추느라 정신이 없던 선거당국이 양당 위원회나 선거본부 측 참관인들과 충분한 사전 협의 없이 투표용지를 옮겼던 게 문제의 발단입니다. 당시 공화당의 부시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앞서던 상황이었죠. 투표용지를 옮기자 안 그래도 재검표 작업 자체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공화당 측 참관인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일대 난투극이 벌어졌습니다. 선거 관계자들이 재검표 기계가 있는 방에 들어가 문을 닫자 이를 열려는 공화당 참관인들이 문을 부수고 난리도 아니었죠. 당시 월스트리트저널 보도를 보면 “브룩스 브라더스 정장에 에르메스 넥타이, 손에는 휴대전화를 든(휴대전화가 흔치 않던 시절이므로) 공화당 참관인들이 ‘빨리 문 열어!’ ‘하던 일 못 멈춰!’라고 고함을 치며 문을 때려 부쉈다”고 합니다. 이 날은 선거일. 마이애미 일반 유권자들의 의상은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겠죠. 공화당 시위자들의 의상이 얼마나 도드라졌는데 이들을 가리켜 ‘브룩스 브라더스 군단’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시위를 ‘브룩스 브라더스 폭동’이라고 하죠. 미국 선거 흑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큰 사건입니다.결국 기계 재검표는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민주당의 고어 후보는 재검표를 포기하고 선거결과에 승복했죠. 당시 브룩스 브라더스 군단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선거 난동꾼이었지만 공화당의 부시 진영에게는 승리의 수훈갑이었죠. 그들은 부시 행정부에서 주요 직책을 차지하며 영전했습니다. 당시 브룩스 브라더스 군단 주동자 중에서 아직까지도 친숙한 이름이 있습니다. 올해 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관련된 러시아 스캔들 공판에서 위증 혐의로 실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갈 위기에 처했던 정치 컨설턴트 로저 스톤입니다. 자기 자신을 가리켜 “나는 GOP 히트맨(공화당 청부살인업자)이야”라고 공공연히 홍보하고 다니는 약간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인물인데요. 얼마 전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전 마지막 권한으로 스톤에 대한 사면 결정을 내려 감옥행을 면하게 해주면서 미 정치권이 소란스러웠죠. 요즘 미국 사회를 보면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에, 인종차별 반대 무드에, 대선 불안까지 겹치면서 ‘브룩스 브라더스 폭동’ 비슷한 것이 또 한번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브룩스 브라더스’가 아니겠죠. 2000년 당시야 정보기술(IT) 활황으로 경제적 거품이 잔뜩 끼어있을 때니 정장을 빼입고 시위를 벌였죠. 지금은 ‘AR-15 폭동’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습니다. ‘AR-15’는 미국인들이 많이 소지하고 있는, 총기사고 때마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콜트사의 반자동 소총입니다. 시대가 이렇게 변한 것이죠.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0-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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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단의 아픔을 평화의 음악으로 감싸안다

    ‘희귀한 음악회’가 마련됐다. 연주 도중 바람이 휙 불면서 흰색 악보들이 흩어져 하늘로 나부낀다. 연주자와 관객들은 이걸 주우러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닌다. 모두들 즐거운 표정이다. 자연 속에서 즐기는 음악회의 묘미이기 때문이다. 25일 강원 철원에서 열린 ‘DMZ(비무장지대) 생태평화공원 음악회’가 바로 그런 행사다. 전쟁의 상흔이 감도는 DMZ 눈앞에서 열린 음악회지만 관객들의 얼굴에는 무거움보다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행사를 기획한 사단법인 PLZ 페스티벌 측도 참석자들에게 “단순히 음악을 듣는 수동적인 입장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관객배우’의 역할을 해 달라”고 주문했다. 이날 행사는 DMZ 남방한계선 부근 3곳을 옮겨 다니며 하루 세 차례 열렸다. 40분 정도씩 미니 음악회 형식으로 무료로 진행됐다. 우리 시대 화두인 평화와 생태보존의 중요성을 현장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느껴보자는 취지다. 생태습지 용양보에서 열린 오전 행사에선 6·25전쟁 당시 군인들이 건너다녔던 출렁다리를 배경으로 김진세 박지형 기타리스트 듀오가 영화 ‘시네마천국’ 배경음악 등을 연주했다. 또 다른 6·25 격전지 암정교에서는 임미정 PLZ 페스티벌 예술감독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테너 김세일 씨의 ‘그리운 금강산’ 등 우리 가곡을 선보였다. 오후 4시 같은 장소에선 땅거미가 지는 초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스타파이브 퀄텟의 마지막 현악 4중주 공연이 펼쳐졌다. DMZ 인근은 민간인 통제구역이지만 이날 참석자들은 주최 측에 사전 신상정보만 제공하면 생태평화공원 입장이 가능했다. 임미정 감독은 “희망자들이 몰리면서 1회 공연당 50명씩으로 참석 인원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대다수 관객은 오기 힘든 곳에서 세 차례 음악회를 모두 즐기고 돌아갔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보병사단 중 하나인 백골부대 제3보병사단 관할 지역이다. 음악을 듣다가 고개를 돌리면 분단의 현실을 보여주는 군사 시설물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사단의 고광일 정보담당 원사는 “클래식 음악회인 만큼 사격 소리나 다른 소음이 들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전했다. DMZ 행사는 7월부터 강원도 접경지역 5개 군에서 진행돼온 PLZ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다. 이달 18일 사진 명소로 통하는 인제군 ‘비밀의 정원’에 직접 들어가 단 2명의 노부부 관객을 위해 마련된 오전 7시 음악회는 소셜미디어 화제의 영상으로 통한다. PLZ 측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연 영상과 사진 등을 공개하고 있다. PLZ 페스티벌은 11월 말까지 진행되며 12월 초 학술 포럼으로 마무리된다. 숲속, 갈대밭, 다리 위, 박물관 등 음악회가 열리는 곳은 다양하다. 공통점을 찾자면 일제강점기, 6·25전쟁 등 역사의 질곡을 거치며 평화와 생태보존의 중요성을 전해줄 수 있는 장소들이라는 것이다. 모든 공연 참가는 PLZ 페스티벌 온라인 사이트(홈페이지, 페이스북)에 사전 신청을 하면 된다. 날씨 변화에 대비해 주최 측은 무릎담요, 후드집업, 핫팩, 선캡 등을 현장에서 나눠준다.철원=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0-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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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TIP]맥도날드, 빨대 줄이기 앞장

    맥도날드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작지만 큰 변화’라는 슬로건을 공개하며 환경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고 있다. 최근 문을 연 친환경 플래그십 스토어 고양삼송DT점은 태양열 집열판 및 발광다이오드(LED) 조명, 100% 전기 바이크, 종이 메뉴판 없는 디지털 메뉴보드 등을 선보이고 있다. 업계 최초로 플라스틱 빨대가 필요 없는 음료 뚜껑을 도입한 것도 화제가 되고 있다. 일회용 플라스틱 배출량 저감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자체 개발한 애니메이션 캐릭터 ‘뚜껑이’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면서 온라인 고객 참여 이벤트도 진행 중이다. ‘뚜껑이’ 도입을 시작으로 2025년까지 비닐봉투, 포크, 나이프 등 플라스틱 포장재를 재생 가능하거나 재활용된, 또는 인증 받은 원자재를 사용한 포장재로 전환할 방침이다. 맥도날드는 2003년부터 매장 내 다회용 컵 사용에 앞장서 지난해까지 약 11억7000만 개의 일회용 컵 사용을 줄였다. 이런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달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0-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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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임에 실패한 美대통령들의 굴욕사[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미국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뒤숭숭합니다. 불안감의 원인은 패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과연 순순히 물러날까 하는 것입니다.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안 물러나겠다고 버티지는 않을까요? 열성 지지자들이 들고 일어나 극도의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지는 않을까요? 최근 로이터통신 보도를 보니 불안감 때문에 미국인들의 총기 구매가 사상 최고치에 달했다고 합니다. 임기 4년, 1회 중임으로 총 8년 재임이 가능한 미국 대통령제에서 ‘단임(one-term)=굴욕’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로 대통령에게나 국민에게나 큰 충격을 주는 사건입니다. 대통령 자신의 인생에서 단임이 낙인처럼 평생을 따라다닌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아버지 부시’로 통하는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은 재선 실패 후 “나는 단임 대통령이었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한동안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공화당이 상원 다수당이지만 2010년 소수당이던 시절 미치 매코널 원내대표는 당시 지지도가 높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가리켜 “내 목표는 그를 단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큰소리를 쳐 “저 사람 뭘 믿고 저런 말을 하는거냐”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는데요. 그러자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나는 늘어지는 8년을 보내느니 굵고 짧은 4년을 택하겠다”고 재치 있게 맞받아친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물론 오바마 전 대통령은 그 늘어지는 8년을 위해 열심히 재선 운동을 벌여 당선됐죠. 대통령에게 ‘8년의 유혹’은 말하면 입만 아픈 것이지요. 워싱턴 정가에서는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 ‘결단의 책상’을 가리켜 “저 자리에 앉아만 있으면 자동 8년”이라는 농담이 있습니다. 그만큼 현직 프리미엄이 절대적이라는 뜻이죠. 대통령이 일하는 듯한 모습만 보여줘도 언론이 척척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니 선거운동이 되는 셈입니다. 특히 ‘외롭고 고독한 최고결정권자 자리에 앉아본 경험’이라는 이미지 메이킹에만 성공하면 선거가 접전일 때 최고의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쉬워 보이는 ‘8년’에 성공하지 못한 대통령도 있습니다. 미 역사상 5명이 있는데요. 2명은 워낙 오래 전 분들이고, 현대 정치사에서는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아버지 부시 대통령 등 3명입니다. 이들은 어쩌다가 단임 대통령의 굴욕을 겪게 된 것일까요. 물론 이들이 단임 대통령이 된 정치적 배경은 각기 다르고 복잡합니다. 다만 대체적으로 보면 ‘경제 운영 실패’가 공통적인 원인입니다. 역시 선거는 경제가 좌우하지요.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이들은 최고결정권자로서 민심에 반하는 중대 결정을 내렸고, 재선 여부를 판가름하는 대선은 이에 대한 국민적 심판 성격이 컸다는 점입니다. 포드 전 대통령은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임자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사면을 결정했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국민적 회의론을 뒤엎고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구출에 나섰다가 실패했습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최대 세일즈 포인트였던 “내 입술을 읽으세요. 새로운 세금은 없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한 뒤 2년 반 만에 슬금슬금 세금을 올렸다가 거짓말쟁이 신세가 됐습니다. 좀 더 크게 본다면 단임 대통령은 ‘나는 국가를 이렇게 끌고 나가겠다’는 어젠다가 실종됐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비록 허황된 측면이 있고 세밀함이 부족하더라도 대통령은 비전을 제시해 국민을 안심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냉정하게 말해 국민은 이성적인 집단이기 때문에 떨어뜨릴만한 대통령을 떨어뜨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비전을 제시하시에 4년은 너무 짧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좀 일하다가 보면 4년이 후딱 지날 텐데 어떻게 국민을 감동시킬만한 어젠다를 준비해 정책을 마련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4년마다 대선 치르느라 등골이 휜다는 4년 대통령제 반대론자들의 주장도 바로 이것이지요. 그렇다면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들의 업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8년 대통령의 업적을 분석한 자료들에 따르면 대부분의 굵직한 업적은 앞쪽 2년에 70~80%가 집중돼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재선 4년은 덤 4년”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요.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다는 목표 상실감에 빠지고 야당은 공세 기술을 연마해 지루한 정국 대치가 이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대통령이던 실적과 비전은 앞쪽 1,2년에 집중돼 있기 마련이고, 단임 대통령은 이 같은 초반 집중도에서 뒤진다는 결론입니다. 임기 초 ‘오바마케어’(건강보험 개혁안) 철폐, 미국-멕시코 국경장벽 설치 등 주요 공약을 좌충우돌 식으로 추진하다 러시아 스캔들, 탄핵 정국 등으로 이어지면서 흐지부지돼버린 트럼프 대통령 역시 단임 대통령 정코스를 밟는 듯 보입니다. 풀죽은 단임 대통령의 뒷모습을 보는 것은 참 씁쓸한 일이죠. 그래도 초강력 팬덤을 가진 대통령이니 마지막 반전의 기회는 남아있을 듯 합니다. 열흘 좀 지나면 그 결과를 알 수 있겠지요.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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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사에서 멀어질수록 당신의 월급이 위험하다’, 실리콘밸리의 새로운 트렌드[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에 재택근무를 장기적으로 채택하는 회사들이 늘고 있습니다. 기업들은 경영효율 측면에서 재택근무를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죠. 그런 점에서 세계 기업 트렌드를 선도한다는 미국 실리콘밸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실리콘밸리 재택근무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한계선 전략’입니다. ‘일정 선까지는 적극 지지하지만 이를 넘으면 직원 입장에서 불이익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죠. 실리콘밸리에서는 전 직원을 대상으로 재택근무를 허용하는 곳들이 많습니다. 풍족한 실리콘밸리답게 재택근무를 지원하는 수당까지 지급합니다. 컴퓨터 설치 등 ‘홈오피스’를 꾸밀 수 있도록 돈까지 준다는 의미죠. 페이스북은 2000달러(한화 약 230만 원), 구글은 1000달러, 좀 더 작은 기업들은 500달러 정도 준다고 하네요. 여기에 육아수당까지 올린 곳들이 많습니다. 미국은 재택근무도 근무의 한 방식이라는 의식이 철저한데요. ‘재택근무를 하는 김에 코로나19 때문에 등교하지 못한 자녀 돌봐라’는 생각은 있을 수 없죠. 돈을 더 주거나, 휴일을 늘려주는 방식으로 ‘차일드케어’ 수당을 올렸습니다. ‘세일즈포스’라는 중견 정보기술(IT) 인력회사는 육아휴직을 연 4주에서 6주로 늘리고, 매달 하루에 100달러씩 5일치를 육아보조금으로 신설해 대상 직원들에게 지급합니다. 직원 입장에서는 좋은 일입니다. 탄력적으로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재택근무를 하면서 이런 저런 수당까지 받으니까요. 하지만 좋은 건 여기까지입니다. 최근 실리콘밸리에서는 ‘급여 지역화(pay localization)’ 정책을 도입하는 회사들이 늘고 있습니다. 무슨 행정용어 같지요. 쉽게 말해 재택근무 직원이 회사에서 멀리 떨어져 살수록 월급을 깎는다는 얘기입니다. ‘VM웨어’라는 소프트웨어 회사를 볼까요. 샌프란시스코 인근 팔로앨토에 본사를 둔 이 회사는 코로나19가 발생한 뒤, 예컨대 물 좋고 경치 좋은 콜로라도 주 덴버로 이사를 간 직원은 연봉의 18%를 깎았습니다. 같은 캘리포니아 주 내에서도 로스앤젤레스나 샌디에이고로 이사 간 직원은 8%를 깎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느냐고요? 아시다시피 코로나19는 밀집 지역일수록 감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다보니 인구 밀도가 낮은 곳으로 이사 가는 직장인들이 급증하고 있죠. 동부에서 뉴욕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면 서부 쪽에서는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모여 있는 샌프란시스코 일대에서 거대한 이동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곳이 바로 샌프란시스코입니다. 뉴욕보다 더 비싸죠. 특히 집값이 살인적으로 높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IT 기업들이 집중된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어리어 주민들의 평균 소득은 연 11만2000달러(약 1억2900만 원)입니다. 미국 평균보다 월등히 높죠. 하지만 이렇게 경제수준이 높은 실리콘밸리 직장인들도 집값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한 부동산업체 조사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 일대에서 집을 사려면 연소득으로 최소 17만2000달러(1억9000만 원)는 벌어야 한다고 하네요. 미국 직장인들의 대표적인 채팅 앱인 블라인드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직장인의 70%는 ‘집값을 감당할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코로나19를 기회 삼아 인구 밀도가 낮고 물가도 싼 타 지역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이제 재택근무로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할 필요도 없으니 이사 가는데 제약이 없죠. 경영자 입장에서는 생활비가 싼 곳으로 이동하면 급여를 깎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입니다. 들리는 얘기로는 이렇게 급여 삭감으로 확보한 예산으로 육아보조금, 홈오피스 설치 비용 등 앞에서 거론한 특별수당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월급 차등 정책을 도입한 회사가 워낙 많다보니 ‘급여 지역화’라는 새로운 용어도 나온 것이죠. 페이스북도, 트위터도 이를 도입했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출중한 대형 IT 기업들은 코로나19 이전부터 이 정책을 만들어놓고 있었죠. 다만 활용 수준이 매우 미미했었는데 이제 본격 가동하고 있는 셈이죠. 페이스북, 트위터는 내년 1월부터 ‘급여 지역화’ 정책을 실시한다고 합니다. 다만 급여 삭감은 워낙 민감한 문제여서 이 정책을 대놓고 홍보하는 기업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회사에서 멀리 이사를 가는 불이익을 감당하겠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하지만 놀랍게도 절반 가까이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채팅 앱 블라인드가 샌프란시스코, 뉴욕, 시애틀 직장인 28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44%가 ‘물가가 싼 곳으로 이사하는 대신 급여가 줄어도 괜찮다’고 답했습니다. 계산법은 이렇습니다. 삭감이 이뤄지는 부분은 ‘기본급’입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는 워낙 보너스 같은 수당이 많은 곳입니다. 기본급과 기타수당이 절반 정도씩이라고 보면 됩니다. 기본급에서 10% 정도 깎여도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생활비와 세금이 20% 정도 싼 곳으로 이사 가는 것과 비교했을 때 오히려 ‘남는 장사’라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죠.물론 재택근무 자체를 선호하지 않는 실리콘밸리 기업도 아직 꽤 있습니다. 넷플릭스는 최고경영자(CEO)가 나서서 “재택근무 왜 합니까”라고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전면적인 재택근무가 아닌 일주일에 절반 정도만 출근하는 절충안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재택근무인 것만큼은 확실해 보입니다. 집값 하면 치를 떠는 우리나라에서도 언제 ‘급여 지역화’ 개념이 본격 도입될지 두고 봐야겠습니다. 일 닥친 뒤 급히 계산기 두드려볼 것이 아니라 미리미리 고민해두는 게 낫지 않을까요.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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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원行 트럼프가 꼭 챙겨간 ‘이것’은? 美 대통령의 분신이 ‘풋볼’? [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최근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대통령 전용 헬기 머린원을 타고 월터 리드 군 병원으로 향하는 사진들 중에서 ‘풋볼’ 사진도 포함돼 있더군요.웬 풋볼? 3주 전쯤 코로나19를 뚫고 개막한 미 프로미식축구리그(NFL) 얘기를 하는 거냐구요? 아닙니다. 여기서 ‘풋볼’은 미식축구가 아니라 미국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핵무기 발사 비밀코드가 담긴 핵 가방을 말합니다. ‘풋볼’ 또는 ‘핵풋볼(nuclear football)’이라고 불리죠. 트럼프 대통령이 트랩에 오르기 전 ‘풋볼’ 전담 수행원이 매우 빵빵해 보이는 검정색 가죽가방을 들고 미리 헬기에 오르는 사진이 찍혔더군요.핵 가방이 ‘풋볼’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건 냉전이 한창이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드롭킥’이라고 불리는 핵전쟁 시나리오를 만든데 서 유래했습니다. ‘드롭킥’은 미식축구나 럭비에서 공을 땅에 한번 튀긴 뒤에 차는 킥을 말합니다. 핵 가방의 내용물이 궁금하시죠? 우선 무게가 20kg이나 나간다고 하네요. 할리우드 영화에서 빨강색 ‘핵 버튼’이 종종 등장합니다만 실제 핵 가방 안에 그런 장치는 없습니다. ‘블랙북’으로 불리는 75쪽짜리 핵 공격 가이드 책자, 대통령 피신장소 목록, 군 명령전달 지침, 대통령 진위 인증카드 등 4가지가 들어있습니다. 이 중 핵 공격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대통령 권한 코드가 가장 중요합니다. ‘비스킷’으로 불리는 이 카드만 따로 꺼내 양복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대통령도 있습니다. 많은 미국인이 트럼프 대통령과 동행한 ‘풋볼’ 사진을 보면서 “백악관이 경황없는 와중에 그래도 핵 가방은 잘 챙기고 있구나”하고 안심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안심감이 중요한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정신을 딴 데 두고 있는 듯한 매우 혼란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데다 ‘마러라고 릭’ 사건도 있었기 때문이죠. ‘릭 사건’은 2017년 아베 일본 총리가 플로리다 주 마러라고 리조트를 방문했을 때 열린 파티에서 한 손님이 ‘풋볼’ 수행원과 기념사진을 찍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사건입니다. 친절하게도 “이 사람은 ‘풋볼’ 수행원 릭이야”라는 설명까지 붙였답니다. 하필이면 북한이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북극성 2호를 시험발사하면서 난리도 아니었던 때였죠. 백악관 비서실장 급이 거치는 극도로 면밀한 인적사항 사전조사를 거쳐 군에서 선발되는 수행원이 무슨 생각으로 일반인과 기념사진을 찍고 페이스북에 올리도록 놔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릭’은 나중에 해고됐다고 합니다.사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핵 가방이 경호 소홀로 인해 노출되거나 마구 다뤄지는 경우가 꽤 많이 있습니다.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1981년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피격을 당해 병원으로 실려 갔을 때 ‘비스킷’ 카드가 대통령 구두 안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왜 다른 곳도 아닌 구두 안이냐고요? 당시 유력한 설(說)은 레이건 전 대통령이 평소 ‘비스킷’을 양복 안주머니가 아닌 양말 안쪽에 넣고 다녔다는 것이었죠. 병원에서 급히 양말을 벗기면서 구두에 떨어져 나중에 발견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 다른 일화는 1999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워싱턴 시내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가 끝난 뒤 ‘풋볼’ 가방을 챙기지 않고 다른 보좌관들과 함께 떠나버린 것입니다. ‘풋볼’ 수행원은 나중에 나토 회의 장소에서 백악관까지 1km 정도를 혼자 터덜터덜 걸어갔다고 합니다. 사실 핵 가방을 들고 지하철을 타겠습니까, 택시를 타겠습니까. 걸어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기에 다행입니다. 이밖에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주머니에 ‘비스킷’이 들어있는지도 모르고 양복을 드라이클리닝을 맡긴 일화도 있습니다. 또 당시 브렌트 스카우크로프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풋볼’ 가방 내용물을 모두 뺀 뒤 맥주 빈 캔과 콘돔 한 개를 넣어 카터 전 대통령에게 보여주면서 장난을 치기도 했다고 하네요. 전 세계의 생명과 안전이 달린 핵 가방을 이렇게 가지고 놀아도 되는 걸까요. 이름만 봐도 ‘풋볼’ ‘비스킷’ ‘드롭킥’처럼 너무 경박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만사에 무게 잡지 않는 것이 미국적 사고방식 아니겠습니까. 심각해야 할 때는 심각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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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피’가 빠진 추수감사절, ‘메리’가 빠진 크리스마스 [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미국은 10월 핼러윈, 11월 추수감사절, 12월 크리스마스로 이어지는 ‘명절 3종세트’로 연말 시즌을 장식합니다. 예년 같으면 들뜨고 흥겨운 기분이겠지만 올해는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발발 후 첫 연말 시즌인 만큼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죠. 요즘 미국 소셜미디어에서는 연말 인사법을 바꿔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추수감사절에는 “해피 쌩스기빙!”이라는 인사를 주고받는데요. 올해는 앞쪽 ‘해피’를 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로 ‘메리’를 빼야 한다구요. 별로 해피하거나 메리한 분위기가 아니라는 거죠. 그냥 “쌩스기빙!” “크리스마스!”라고만 인사를 나누자는 것입니다. 이 웃긴 인사법에 미국인들은 완전 찬성 모드입니다. 누가 처음 제안한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찬성 댓글이 수천 개씩 달립니다. 코로나19가 삶의 대부분을 바꿔놓더니 이제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명절 인사법까지 바꿀 태세입니다. 지난 주 미 질병예방통제센터(CDC)는 ‘가을 및 겨울 명절 특별 방역 가이드라인’을 발표했습니다. 올해는 때가 때인 만큼 일찌감치 발표했다고 하네요. 미 가이드라인은 최근 발표된 우리나라 추석 방역수칙과 대개 비슷합니다. 연말에 고향 방문이 많다 보니 이동 자제를 권고하는 것도 우리와 비슷합니다. 반면 문화적 차이도 있습니다. 예컨대 미국은 다른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갈 경우 사전에 필히 그 집에 연락해 방역 수준과 절차에 대해 의논하고 확인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추석 때 어른들 집에 가는 경우가 많은 우리나라에서야 대놓고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좀 어렵지만 사전 확인 절차를 거치는 것이 확실히 좋은 예방법인 듯 합니다. 또 CDC 가이드라인은 음식을 모여서 먹지 말고 이산가족처럼 떨어져 먹을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같은 테이블에서 거리두기 정도가 아닌, 아예 서로 얼굴을 다른 쪽으로 향하게 하거나 아예 한 명은 소파에서, 다른 한 명은 부엌에서, 또 다른 한 명은 방에서 먹는 식으로요. 여기에 핼러윈 얘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핼러윈을 즐기는 문화가 많이 퍼져 있죠. 특히 ‘코스튬 파티’라고 부르는 귀신이나 유명인 분장 파티는 우리나라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인기입니다. CDC는 이것 역시 온라인상에서 비대면으로 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북적이는 코스튬 파티에서는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 때문인데요. 해골 탈 같은 분장용 마스크는 코로나19 마스크 대용이 될 수 없으며 분장용 마스크 위에 코로나19 마스크를 겹쳐 쓰는 것도 위험하다고 합니다. 코로나19로부터 내 몸을 지키고자 하는 결심은 누구나 다 똑같겠지만 모두 내 마음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특히 미국처럼 개인주의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방역수칙에 대한 거부감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마스크 하나 쓰는 것에서부터 저항이 상당하죠. 저항세력을 설득하는데 는 상당한 사회적 에너지가 소요됩니다. 보건당국이 설득방법까지 세세하게 가이드라인으로 발표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주로 언론이 담당하죠. 그래서 요즘 미국 언론에서는 추수감사절 식탁에서 코로나19에 비협조적인 가족 멤버 설득 비법 기사들이 자주 눈에 띕니다. 예컨대 비협조파에게 코로나19 통계를 들이대는 것은 ‘돈트(Don’t),‘ 즉 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통계라는 것은 언제나 왜곡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그보다는 좋아하는 연예인의 코로나 감염을 사례로 드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그런 기사들을 몇 개 읽다보니 심리학자나 정신건강학자들의 공통적인 결론이 있습니다. “설득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죠. 어느 정도 설득하다가 안 되면 포기하라는 겁니다. 매정하게 들리기는 합니다만 이제 그런 세상이 됐습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0-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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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탄산수 시장 1위 트레비… 당분 줄이고 과일향 그대로

    몇 년 전만 해도 “탄산수가 뭐야” 했던 소비자들이 변했다. 지금은 ‘뭘 좀’ 아는 소비자라면 건강음료로 탄산수부터 찾는다. 롯데칠성음료 ‘트레비’는 국내 탄산수 시장에서 부동의 1위다. 2007년 트레비가 처음 출시됐을 때만 해도 탄산수는 낯선 음료였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웰빙(참살이)을 추구하는 소비자가 늘면서 탄산수 시장은 빠르게 성장했다. 2010년 30억 원대였던 탄산수 시장 규모는 지난해 마트, 편의점 등 소매점 판매를 기준으로 920억 원대로 늘어났다. 이탈리아 로마의 명물 분수에서 이름을 딴 트레비는 100% 천연 과일향에 트랜스지방 제로, 칼로리 제로, 당류 제로의 탄산수다. 당분 섭취를 줄이려는 소비자들에게 ‘물보다 시원하게 즐기는 탄산수’라는 이미지로 어필하고 있다. 트레비는 천연 과일향으로 라임, 레몬, 자몽, 금귤 등 4가지가 있다. 과일향 없이 그냥 순수하고 깔끔한 맛을 원한다면 플레인과 워터 중 선택할 수 있다. 지난해 8월 출시된 트레비 금귤은 2015년 4월에 나온 자몽 이후 약 4년 만에 선보인 신제품이다. 껍질째 먹는 금귤 특유의 상큼한 맛과 향을 그대로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500mL 페트병 단일 용량으로 출시됐다. 트레비 워터는 일반 먹는 샘물을 사용해 부드러운 맛이 강점이며, 천연 미네랄이 함유된 것이 특징이다. 다양한 맛과 향의 제품을 내놓는 동시에 패키지에도 관심을 기울여 소비자의 선택 폭을 넓혔다. 355mL 캔부터 페트병도 300mL, 400mL, 500mL, 1.2L 등 다양한 사이즈를 선보이고 있다. 트레비는 2014년 국내 탄산수 시장의 1등 자리에 올랐다. 탄산수 시장 저변 확대와 더불어 대학가, 클럽, 피트니스센터, 워터파크, 록페스티벌 등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진행한 덕분이다. 롯데칠성 관계자는 “트레비는 국내 탄산수 시장에서 절반이 넘는 약 60%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올해도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성장세를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0-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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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버드대 입시도 바꿨다?…‘포스트 코로나’ SAT운명은[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우리들의 삶의 상당부분을 바꿔놓은 가운데 미국 ‘수능’에 해당하는 대학입학자격시험(SAT)도 큰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요즘 미 대입 현장에서는 두 개의 ‘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첫째, SAT 일정에 막대한 차질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수험장들이 줄줄이 폐쇄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둘째는 대학들이 SAT를 고려하지 않거나 선택적으로 고려하겠다고 정책을 바꾼 것입니다. SAT 점수가 필수요소가 아닌 선택사항이 된 겁니다. 우선 첫째 사건부터 볼까요. SAT는 일년에 7번 치러집니다. 올해 3월 이후 SAT는 완전히 취소됐다가 지난달부터 재개됐습니다. 하지만 응시생의 절반 정도 밖에는 시험을 못 치르고 있습니다. 수험장이 운영된다 해도 거리두기 수칙 때문에 한 교실에 10명 정도 밖에는 수용하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자기 동네 수험장이 없어 인근 도시로, 주(州)로 시험 보러 가는 ‘원정 SAT족’이 생겨나고 있죠. 한때 ‘재택 시험’ 방안도 추진됐지만 부작용을 고려해 없던 일로 했습니다. 둘째, SAT 차질을 감안해 대학들이 속속 입시요강을 바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test-optional’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데요. ‘SAT가 옵션이 됐다’는 말입니다. SAT 점수를 제출하지 않아도 내신, 자기소개서, 과외봉사활동 등 다른 요소들만으로 학생들을 선발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버드대, 프린스턴대, 노스웨스턴대도 SAT 옵션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대학들이 갑자기 입학조건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학생들을 점수벌레로 만든다” “학생들의 지적능력을 평가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는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비판들이 SAT들 두고 오랫동안 제기돼 왔습니다. 코로나19가 SAT 회의론을 가속화시키고 있을 뿐이죠. 일각에서는 “이게 바로 윈-윈”이라며 기뻐합니다. 학생들은 힘들게 SAT 안 봐서 좋고, 대학들은 귀찮게 SAT 점수 안 따져도 되니까요. 낮은 SAT 점수를 장애물로 여겼던 학생들은 이제 꿈꾸던 대학에 원서를 낼 수 있을까요. 하지만 대다수 미국인들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SAT 응시 열기는 옵션제 논의가 있기 전에 비해 큰 차이가 없습니다. SAT에 대비해 공부한 것이 아깝기도 하고, 뭐가 어떻게 바뀌는 건지 불안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코로나19 와중에 휴가를 내고 몇 시간을 운전해 아이를 SAT 수험장에 데려다 주는 것은 이제 익숙한 풍경이 됐습니다. 또 좋은 대학들일수록 옵션제를 적용하는 기간을 올해, 또는 내년 입학생 정도로만 제한하고 있습니다. 임시 적용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죠. 미국은 교육제도에 문제가 있으면 빨리 달려들어 뜯어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각 주의 자치권이 크다보니 중앙정부가 획일적인 제도를 만들어 전달할 수 있는 구조도 아니고요. 뿐만 아니라 대입은 학생과 대학 간의 쌍방 플레이라는 인식이 크기 때문에 행정 당국의 입김이 작용할 여지가 크지 않죠. 여기에 내신 자소서 등 비(非)SAT 기준에 내재된 주관적 요소들을 과소평가하지도 않습니다. 어쨌든 코로나19로 인한 SAT 혼란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학생과 학부모들의 고민도 그만큼 커졌죠. ‘SAT 점수를 제출할까 말까’에서부터 ‘고등학교에서 어떤 과목들을 들어야하나’까지 고민은 천차만별입니다. ‘코로나19가 교육현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뉴욕타임스(NYT)의 지적을 이해할 만 합니다.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

    •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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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상에 드리운 전쟁 그림자…9·11 키즈의 삶은 기구하다? [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우리는 과거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매우 드물게 또렷하게 기억하는 과거의 순간이 있습니다. 2001년 9월 11일 늦은 저녁. 이날이 무슨 날인지는 아실 겁니다.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TV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 한동안 잠을 못 이루셨을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도 아니지만 그 비주얼적인 충격인 어마어마했죠. 9·11 테러는 미국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벌어졌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무너져도 태어날 아기는 태어나는 법. 이날 미국에서 1만3238명의 아기가 탄생했다고 합니다. 이날, 아니 정확히 이날은 아니어도 그 주변 달(月)에, 해(年)에 출생한 아기들까지 모두 합쳐 ‘9·11 키즈’라고 부르죠.요즘 미국에서는 ‘9·11 키즈의 기구한 삶’이 화제입니다. 사실 ‘기구하다’는 약간 적절치 못한 표현인 듯 해서 ‘드라마틱하다’ 정도로 해두겠습니다. 9·11 키즈의 상당수는 올해로 19년을 살았습니다. 특히 올해 주목을 받는 것은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대학에 진학했을 수도 있고, 직장에 취직했을 수도 있고, 다른 꿈을 꾸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성인이라는 카테고리에 들게 됐고 선거권을 행사하게 됐습니다.9·11 키즈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요. 개인적인 인생이야 모두 다를 것이니 그 인생에 영향을 미친 사회적 환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부모로부터 “너는 9·11 때 태어났어”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으면서 자랐겠죠. 이는 “중요한 때 태어나서 좋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까지 살던 세상과는 달라. 조심해서 살아야 한다”는 염려의 메시지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9·11 테러 후 미국은 많이 변했습니다. 이라크 전쟁을 시작했고, 아프가니스탄도 침공했습니다. 다시 일상생활에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죠. 하지만 이거야 다른 나라 땅에서 지지고 볶고 전쟁을 치른 것이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2007~08년 주택시장 붕괴로 인한 금융위기는 기업 파산과 실업 양산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나라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급 충격을 미국인들에게 안겨줬습니다. 버락 오바마 시대에 접어들면서 미래를 꿈꾸는가 싶었지만 인종차별, 총기난사, 약물남용 등의 내재적 문제점들은 더욱 깊어만 갔죠. 이후 도널드 트럼프 시대의 분열상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여기에 9·11 키즈는 성인으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시점에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결정적 충격을 맞게 됩니다. 그렇다고 9·11 키즈의 삶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스마트폰에서 페이스북, 틱톡까지 이들만큼 정보통신(IT) 신세계의 혜택을 온전히 누리면서 살아온 세대는 드뭅니다. 또 최근 미국에서 벌어진 인종차별 반대시위의 30~40%는 9·11 키즈를 포함한 Z세대(1990년대 말~2000년대 초 태어난 세대)였을 만큼 사회적으로도 목소리를 낼 줄 압니다. 정신적으로 고립됐다거나 세상 한탄만 하는 젊은이들이 아니라는 것이죠. 역사적인 사건들을 인생의 변곡점마다 부딪혀온 9·11 키즈의 삶을 ‘기구하다’거나 ‘드라마틱하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정확한 지적이 아닐지 모릅니다. 누구보다 많은 것을 경험해 그 어떤 세대보다 ‘성숙하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듯 싶습니다.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

    • 2020-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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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꽉 막힌 해외여행 어떻게 뚫나…포스트 코로나 시대엔 “집 떠나면 고생”?[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우리사회 각 부분에 많은 불편과 희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영업자도, 샐러리맨도, 수험생도, 전업주부도, 어린 아이도 정말 힘든 때입니다. 옛날 같으면 이렇게 정신적으로 지칠 때 에너지 충전과 분위기 쇄신을 위해 해외여행이라는 선택이 있었는데 지금은 꽉 막혀있습니다. 직장인 10명 중 6,7명은 코로나19 때문에 해외여행을 못 가게 된 것이 가장 서글프다고 말하죠. 물론 국내여행을 다녀오면 되겠지만 어떻게 공항이 주는 설렘, 여행 전날 짐을 쌀 때의 기분 좋은 분주함, 여권에 찍힌 스탬프를 보는 뿌듯함에 비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미국에서는 ‘가상 여행놀이(virtual travel)’가 유행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집콕’하면서 뭐하나 봤더니 상상 속에서 여행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거죠. 가고 싶은 곳을 구글맵으로 찾아보고 자연경관과 길거리뷰 등을 샅샅이 훑어보는 인터넷 사이트나 소셜미디어 포스트들이 인기라고 합니다. 비행기 시간표도 나와 있고 호텔 비교도 할 수 있습니다. 소셜미디어 핀터레스트가 특히 이 분야에서 강점이 있다고 하네요. 가상 여행에서는 코로나19도, 사회적 거리두기도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와야 할 때입니다. 해외여행이 언젠가는 가능해지겠지만 코로나19 이전보다 복잡해질 것은 분명합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전개될 여행의 세계로 한번 풍덩 빠져볼까요. 첫째, 해외여행 금지 언제 풀리나: 얼마 전까지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별다른 제약 없이 관광 또는 일반적인 방문 목적으로 상대국에 입국해 여행하는 ‘매스 트래블(mass travel)’ 시대에 살았습니다. 이게 언제 다시 가능해질까요. 여행업계, 항공업계에서는 이걸 ‘백만 불짜리 질문’이라고 하더군요. 그 어느 누구도 확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해외여행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해외자료와 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내년 말이나 내후년 초 여행 제한이 풀리기 시작할 것으로 보입니다. 백신 가능성, 글로벌 입출국 프로토콜 준비 등에 걸리는 시간을 계산한 것이라고 하네요. 일단 내년은 참고 넘어가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둘째, 여행 예약 어떻게 달라지나: 많은 분들이 인터넷을 통해 예약 절차를 밟는데요. 일단 이 첫 단계부터 골머리를 앓아야 할 듯 합니다. 내 개인정보, 특히 건강정보가 상당부분 공개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일정 양식에 자신의 인증 받은 건강상태에 대해 기입해 업로드 해야 합니다. 코로나19 증상, 병력은 물론 언제 나올지 모르는 백신 접종, 항체 형성 여부 등에 대해 자세히 기입해야 하겠죠. 예컨대 미국 쪽에서는 여행지 어느 곳이나 돌아다녀도 되는 초록색, 제한이 따라붙는 노란색 등으로 구분되는 시스템을 구상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자신의 건강정보를 담은 바코드 시계를 차고 다니는 게 현실이 되겠네요.셋째, 공항 절차는 어떻게 달라지나: 결론부터 말하면 출국검사대와 입국심사대에서 상당히 긴 줄이 예상됩니다. 미국 항공사들은 단계별 공항검역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우선 폐 단층촬영(HRCT)을 언택트(비대면) 방식으로 실시합니다. 이를 통과하지 못하는 여행객들에 대해서는 좀 더 불편을 감수해야 할 목구멍과 코에 면봉을 밀어 넣어 검체를 채취하는 타액검사법과 혈액검사 등을 실시합니다. 검사 결과는 항공티켓에 전자 기재돼 공항 내 장소 출입이 결정됩니다. 뿐만 아니라 기내 배정에서도 특정 섹션, 특정 좌석만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넷째, 여행객들은 무엇을 눈여겨봐야 하나: 지금까지 여행객들이 좀 더 싸거나 사고 안 나는 항공사를 선호했다면 이제는 기내 방역 수준을 읽는데 초점을 맞추겠지요. 어떤 살균제를 사용해 어느 부분까지 세심하게 소독하는지, 어떤 에어필터를 사용해 기내 공기를 순환시키는지 등을 궁금해 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 코로나19 상황은 언제라도 급변할 수 있다는 점에도 환불정책이 조금이라도 더 유연한 항공사가 유리할 것으로 보입니다. 환율 유연성은 호텔에도 적용되겠죠.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여행을 살펴보니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아 보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익숙해지겠죠.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여행 절차를 간소화시키는 방안들이 나오리라 기대해 봅니다. 그래도 싫다면, 가상 여행놀이에 만족할 수밖에 없겠죠.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20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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