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현란한 조명 속에서 무용가들은 변화무상하게 움직였다. 극장을 울리는 꽹과리와 장구 소리는 휘모리장단으로 몰아치며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한바탕 광풍이 지나간 다음 남성 무용가 네 명은 관객들에게 등을 보인 채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흡사 상모를 돌리는 듯한 여운이 남는 마지막 장면. 베레시트 무용단(대표 박순호)의 ‘조화와 불균형’이 막을 내리자 극장 안에는 “원더풀”이란 환호와 함께 뜨거운 박수갈채가 터졌다. 3일 오후 인도 남부 벵갈루루 시의 랑가 샹카라 극장. 올해 6회를 맞은 인도 최대의 국제 현대무용 축제인 ‘아타칼라리 인디아 비엔날레’ 폐막작이 무대에 올랐다. 아타칼라리는 공연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22개국 무용가 250여 명이 지난달 25일부터 열흘 동안 펼친 축제의 마지막은 한국 무용가들이 준비한 ‘케이 스타일(K-Style)’ 공연이었다. 베레시트 무용단을 시작으로 이디엑스투 무용단(대표 이인수)의 ‘모던 필링’과 ‘헬프’, 최상철 현대무용단(대표 최상철)의 ‘논쟁’이 무대에 올랐다. 뉴델리, 뭄바이에 이어 인도 3대 도시인 벵갈루루는 인구 850여만 명의 대도시지만 현대무용은 아직 낯선 곳이다. 하지만 이날 공연의 좌석 330석은 일찌감치 매진됐고, 일부 관객은 계단에 앉아 공연을 볼 정도로 한국 무용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관람료는 200루피(약 4000원). 현지 패스트푸드점 KFC의 ‘크리스피 버거’가 25루피(약 500원)인 것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금액이다. ‘조화와 불균형’은 관객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안무와 함께 어우러진 판소리 별주부전의 통역이 안 되는 등 언어적 장벽이 있었지만 사물놀이와 빠른 안무가 공연장을 후끈 달궜다. 가끔 현대무용을 본다는 마유라 카두르 씨(29·치과의사)는 “전반적으로 공연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코리안 드럼(장구)이 매우 훌륭했다”고 말했다. 자야찬드란 파라지 축제 총감독(54)은 “케이 스타일 공연에 관객들이 크게 호응한 것은 싸이의 ‘강남 스타일’ 인기 때문만은 아니다”며 “한국 현대무용에는 ‘강함’ 속에 ‘섬세함’이 잘 녹아 있다”고 평가했다.벵갈루루=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소설가 최정희 선생(1906∼1990)은 1952년 첫 수필집 ‘사랑의 이력’을 펴냈다. 6·25전쟁의 혼란이 한창이던 서울에서였다. 먹고살기에도 바쁜 시절에 책을 낸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힘들었던 때였지만 화가 김환기가 표지 장정 그림을 맡았고 계몽사가 선뜻 출판했다. 소설가 김동리는 이 책이 나오자 ‘평범한 말, 부드러운 문장으로 정한의 세계를 솔직하게 기록한 책’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 책을 펴면 최정희 선생이 대구에 피란 갔던 시절을 전하는 대목이 눈에 띈다. 》 ‘요새는 상고예술학원을 세울 계획을 하고 교무처장인 최인욱 씨가 교사를 얻으러 분주히 돌아다니시고, 조지훈 박기준 박영준 구상 이분들은 벌써부터 교수할 준비에 바쁘십니다. 상고예술학원은 상화와 고월의 유고집(1951년)이 나온 것을 계기로 하여 세우게 된 학교인데, 상화(尙火·이상화)의 상(尙)자와 고월(古月·이장희)의 고(古)자에서 두 자를 따서 상고예술학원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뒷돈은 이곳 유지들이 담당하고, 교수는 우리들이 담당하기로 합니다. 문학 외에 음악과도 두고 미술과도 두게 한답니다. 하루 바삐 교사가 얻어지기를 모두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선 매주 토요일마다 문예강좌를 하기로 되었습니다.’ 대구 출신의 문우(文友)였던 이상화(1901∼194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와 이장희(1900∼1929·‘봄은 고양이로다’의 시인)의 호에서 한 자씩을 딴 ‘상고예술학원’이란 무엇인가.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이 학원을 기억하는 문인은 별로 없다. 6·25전쟁 당시 ‘피란도시’ 대구에 설립되었던 이 학원은 당대 최고의 교수진을 갖춘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예술학원이었다. 대구에 피란 온 예술가들이 중심이 되어 대구·영남 문인 예술가들과 힘을 합쳐 결성한 이 학원에는 무려 90명의 예술가가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소설가 박종화 김기진 김말봉 김동리 장덕조 최정희 정비석 최상덕 최인욱 박영준 김영수가 있고, 시인 이은상 오상순 유치환 구상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양명문 김달진 박귀송이 뜻을 더했다. 국문학자 양주동 이숭녕, 평론가 최재서, 아동문학가 마해송, 극작가 유치진, 연극인 이해랑, 수필가 전숙희, 음악가 김동진 김성태 등 문학을 넘어 여러 예술 분야의 인사가 참여했다. 대구의 문화예술인 가운데는 시인 백기만 이효상 이호우 이설주 이윤수와 소설가 김동사, 국문학자 김사엽 왕학수, 화가 서동진 박명조 등이 대구의 유지들과 뜻을 합하여 참여했다. 이 학원의 설립취지문을 보면 ‘선인의 업적과 민족예술의 전통을 깨우치게 하여 뒷날의 대성이 있게 하고자 한다’고 그 목적을 밝혔다.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신문예 초창기의 시인 이상화와 이장희의 뜻을 기린다’라는 뜻도 담아 지역 유지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1951년 10월 대구 남산동 향교 북쪽 편 길 건너 모퉁이의 단골 술집에 모인 문인들은 학원장에 마해송을 선임했다. 소설가 최인욱은 교무 담당, 시인 조지훈 구상, 소설가 박영준 최정희 등은 전임 강사가 됐다. 그리고 남산동 657 오르막길 옆에 있던 교남(嶠南)학교를 학원 교사로 정했다. 교남학교는 일찍부터 영남지역 근대교육의 출발점이었으며 이상화 시인이 1930년대 교편을 잡았던 곳이었다. 교남학교가 1942년 수성동으로 이전한 뒤 그 자리에 자리 잡은 상고예술학원은 교육기간 6개월 단위로 하는 단기 강습학원이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예술인들로 구성된 강사진과 수준 높은 강의 내용으로 전란 중에도 문학예술을 꿈꿀 수 있는 새 희망의 배움터가 되었다. 문학 음악 미술의 세 개 학과가 운영됐다. 수강 학생과 교수 모두가 강의가 끝나면 단골 막걸리집에 모여 피란생활의 고달픔을 서로 달래곤 했다. 상고예술학원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예술 전문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예술의 꽃을 피우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도 가득했다. 당시 전쟁은 국군의 서울 수복 후 중공군의 남하로 더욱 치열해진 상황이었다. 서남지역에서는 공비토벌작전이 전개되면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하였고, 국민 모두가 생계를 꾸리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한 지경에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지역의 유지들은 피란 문인들의 뜻을 받들어 학원 설립 자금을 지원했다. 학원의 운영은 처음부터 적자를 면하기 어려웠지만 여기 참여한 강사들은 열의를 갖고 가르쳤다. 하지만 학원은 개교 후 2년 반을 채 넘기지 못하고 사실상 폐교하고 말았다. 가장 큰 이유는 물론 경영상의 적자였다. 1953년 휴전회담이 진전되면서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문인과 학생이 속출하면서 설립 당시의 열정이 식어버린 것도 한 이유였다. 지난달 24일 학원이 있었던 대구 남산동 657 일대를 찾았다. 그 옛날 강사와 학생이 어울리던 뒷골목 싸구려 막걸리집도 다 사라졌고, 주택가가 생겼다. 한편에는 주상복합아파트가 하늘을 찌를 듯 서있다. 생활고와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도 예술에 매진했던 당시 예술인들의 뜻이 무위로 돌아간 것일까. 아니다. 비록 학원은 흔적조차 사라졌지만 그 취지는 이어졌다. 소설가 김동리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했던 ‘서라벌예술대학’이나 극작가 유치진이 세웠던 ‘서울예술전문학교’ 등으로 뜻이 이어졌다.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양파 같다. 까면 깔수록 진실을 알기 어렵다. 분량으로 치면 경장편이지만, 복잡한 사건과 인물 구성 때문에 읽고 나면 장편 하나를 담은 듯 머리가 묵직해진다. 간단치 않은 소설이다. 처음은 쉽게 읽힌다. 요코와 하루미란 30대 중반 여성의 등장. 요코는 지방의회 의원의 아내이고 아들 유타가 있다. 하루미는 미혼의 신문기자다. 대학 시절 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다 만난 이들은 하나의 공통점으로 깊은 친구 사이가 된다. 둘 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려져 보육원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하루미는 파란 리본을 주고 떠난 친모의 기억을 요코에게 털어놓고, 요코는 이를 그림책으로 발표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집안 살림만 하던 요코가 작가로 활동하게 된 것은 하루미의 친모를 찾는 데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선거를 앞둔 남편의 재선을 돕고 싶었기 때문. 잔잔히 흐르던 소설은 여기서 첫 번째 파문을 일으킨다. 요코의 아들 유타가 실종됐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소설은 본격적인 추리물로 변하는데 영리하게 ‘변주’를 시도한다. ‘범인은 누구인가’라는 진부한 숙제보다 ‘범인이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기 때문. 범인이 팩스로 보낸 요구사항은 한 줄로 요약된다. ‘세상에 진실을 공표하라.’ 밑도 끝도 없는 요구사항. 무슨 ‘진실’을 ‘어떻게’ 세상에 알리라는 건지? 요코를 비롯한 등장인물들도, 이를 읽는 독자에게도 물음표가 생긴다. 본격적인 양파 까기가 시작되는 것도 이때부터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눈치를 챘겠지만 요코와 하루미의 출생 비밀이 진실의 하나다. 이들이 태어나기 전 인근 지역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고, 가해자의 아내가 출산을 했다는 것. ‘살인자의 딸은 누구인가’라는 추리와는 별도로 요코의 남편에게도 숨겨진 비밀이 있다. 한때 부정 기부금을 받아 검찰 수사를 받은 것. 고발자의 신원도 오리무중이다.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요코를 비롯한 인물들이 범인이 추가로 보내 주는 협박 팩스를 힌트로, 자신도 잘 몰랐던 진실에 다가서게 된다는 것이다. 독자가 작중 인물에게 이입되기 쉬운 구조다. 물론 반전의 반전도 거듭한다. 결정적으로 ‘전혀 의외의 인물이 범인’이라는 추리소설 최대의 매력을 선물한다. 기자의 추리도 빗나갔다. 일본 추리소설의 대부분은 선 굵은 남성적 색채가 강하지만, 이 소설은 좀 다르다. 동화 같은 추리소설이랄까. 요코와 하루미의 시선이 교차되며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데 그 묘사와 대화가 섬세하고 감성적이다. 하드보일드 추리보다는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 가는 두뇌게임형을 즐기는 추리 팬에게 추천한다. 출판사는 출간에 맞춰 초판(4000부) 구입자에 한해 그림책 ‘파란 하늘 리본’을 함께 준다. 소설과 현실이 헷갈리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든다. 기자는 소설을 읽고 그림책을 나중에 읽었는데, 소설의 여운이 더 짙어지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너와 헤어져 돌아오는/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로 시작하는 신경림 시인(77)의 시 ‘가난한 사랑 노래’. 요즘도 널리 애송되는 이 시가 담긴 시집 ‘가난한 사랑 노래’가 출간 25주년을 맞았다. 실천문학사는 이를 기념해 이 시집의 특별 한정판(2000부)을 이달 말 펴낸다. 반가운 마음에 시인에게 약속을 청했다. “에이 뭐 쓸 얘기가 있겠어?”라는 퉁명스러운 답변. 신년 인사를 겸해 “차나 한잔하시죠”라고 다시 청해 29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1955년 등단한 시인은 1975년 자유실천문인협회를 결성하고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및 이사장,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등을 지내며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시단의 원로. 지난 대선에서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멘토단에 참여했다. 시집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대선과 김용준 총리 후보자의 자격 논란으로 흘렀다. ―‘가난한 사랑 노래’는 언제 쓰셨나요. “1987년 내가 (서울 성북구) 길음동 살 때였어. 시내에서 (술을) 덜 먹고 들어가면 한 번씩 들르는 술집이 있었지. 그 집 딸이 남자친구라며 내게 데려왔는데 ‘지명수배가 돼서 결혼을 못 한다’고 하더군. 그래서 술김에 ‘결혼해라, 내가 주례 서 줄게’ 하고 축시 써주고, 주례 섰지. 작은 개척교회에서 했는데 하객이 10여 명밖에 안됐어.” ―결혼식 축시였군요. “아냐. 내가 써준 것은 ‘너희 사랑’이라는 시였어. 한 편 더 쓴 게 ‘가난한 사랑 노래’지. 실천문학사에 가져갔더니 ‘가난한 사랑 노래’가 더 좋다고 해 시집의 표제시가 됐어. 하지만 난 아직도 ‘너희 사랑’에 더 애착이 가.” ―그 부부하고 지금도 연락을 하시나요. “가끔 해. 그 사람(남편)이 결국 감옥 다녀왔고, 지금은 인천에서 조그만 가게를 해.” ―1980년대엔 시 쓰기 힘드셨죠. “‘가난한 사랑 노래’에 ‘기계 굴러가는 소리’란 대목이 있어. 사실 이게 원래는 ‘탱크 굴러가는 소리’였지. 하지만 출판사에서 수정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고쳤지.” “진짜 옛날 얘기들이네”라고 말한 시인은 회상에 젖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금방 민주주의가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우리 사회가 1980년대와 비교하면 많이 진화했고, 당시와 지금이 똑같다고 말하면 ‘사기꾼’이라고도 했다. ―박근혜 당선인이 대통령이 되면 ‘박통시대’로 회귀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없지. 어떻게 옛날로 돌아가. 박근혜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박근혜도 바보가 아니고 우리도 바보가 아니야.” ―김용준 총리 후보자의 각종 의혹이 요즘 논란입니다. “보수층에 깨끗한 사람이 잘 없는 거야. 1970, 80년대 조금이라도 벼슬을 했으면 때가 묻은 거야. 지저분하게 부동산 투자하고, 자식들 군대 안 보낸 건데, 우리는 그럴 재주도 없어. 투기를 해놓고도 나쁘게 생각 안 하고 (후보자로)나온 게 문제야. 박근혜가 실패한다면 인사문제로 실패할 것 같아.” ―대선 재검표 얘기도 이어지는데요. “뭐 근거도 없잖아. 몽니 부리는 거지. 이런 것을 보면 민주(통합)당이라는 게 집권할 능력이 없는 것 같은 느낌도 줘. ‘문재인, 민주당이 됐어도 큰일이었다’ 그런 생각도 들지.” 하지만 시인은 선을 그었다. “다시 (지지)한다고 해도 문재인을 하겠지만,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는 얘기야”라고 말한 그는 이 말은 꼭 써달라고 했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가 박근혜 당선의 일등공신’이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민주당이 패배 책임을 이정희에게 뒤집어씌우는 거야. 이정희는 자기 지지자들을 위한 역할을 충분히 했을 뿐이야.” 대선 후 전국을 돌며 ‘힐링 토크’ 콘서트를 열고 있는 소설가 황석영 얘기를 꺼내자 시인은 짧게 말했다. “얘기하지 맙시다. 원래 설치는 사람이니까.” 대선의 여파는 문단에도 이어지고 있다. 문인 137명이 지난해 12월 14일 한 일간지에 선언문 광고를 실었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돼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선거법 위반한 것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야. 다만 작가들의 정서, 양심에 비춰서 원만히 해결됐으면 좋겠어. 당국이 관용을 가지고 볼 필요가 있어.”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오세영의 장편 ‘원행’(2006년)과 이를 원작으로 만든 케이블 채널 CGV의 ‘정조암살미스터리-8일’(2007년), 이정명의 장편 ‘바람의 화원’(2007년)과 이를 원작으로 한 SBS 드라마 ‘바람의 화원’(2008년), MBC 드라마 ‘이산’(2007년)과 케이블 채널 OCN의 ‘조선추리활극 정약용’(2009년)까지. 몇 년 새 쏟아져 나온 이들 역사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답은 모두 정조시대를 배경으로 했다는 것이다. 오혜진 남서울대 교수(사진)의 ‘대중, 비속한 취미 ‘추리’에 빠지다’(소명출판)는 최근 소설과 드라마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팩션(사실에 허구를 붙인 이야기) 열풍을 분석했다. 그는 다양한 팩션 작품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역사 연구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왕조 중심의 거시사가 아닌 민중과 여성들에 대한 미시사 연구가 1990년대 들어 활발하게 전개돼 작가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는 것. 또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등 외국 팩션들이 국내에서 인기를 끈 것도 그 이유의 하나다. 그러면 왜 정조인가? 오 교수는 ‘상상력의 확장 가능성’을 꼽았다. “정조는 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매우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죠. 사인에 대해서도 독살 등 여러 설이 존재해 이야깃거리가 많아요. 독자들이 바라는 현재 지도자의 모습이 개혁적 인물인 정조에서 구현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정통 역사물의 시대가 기울고, 팩션에 추리적 요소가 가미되는 것도 요즘 추세다. 오세영의 ‘원행’이나 드라마 ‘조선추리활극 정약용’의 경우 정약용이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역할을 한다. 이정명의 ‘바람의 화원’에서는 김홍도가 사건을 해결한다. “역사 추리소설은 오락 요소가 강해 소설과 드라마를 넘나들죠. 회별로 이어지는 드라마가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기 위해 추리적 요소가 강화되는 추세입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제주도4·3사건을 다룬 오멸(본명 오경헌·42) 감독의 영화 ‘지슬’이 미국 독립영화 축제인 선댄스영화제에서 최고상에 해당하는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26일(현지 시간) 미국 유타 주 파크시티에서 열린 제29회 선댄스영화제에서 월드 시네마 극영화 경쟁부문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1948년 11월 제주에 ‘해안선 5km 밖의 모든 사람을 폭도로 간주하고 무조건 사살하라’는 미군정의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지슬은 제주 방언으로 감자를 뜻한다. 이 영화제는 초청작을 자국(미국)과 외국 영화(월드 시네마)로 나누고, 다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부문으로 나눠 4개 부문에서 상을 주는데, 심사위원대상은 각 부문 최고상이다. 한국영화가 이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2004년 김동원 감독의 ‘송환’이 월드시네마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특별상에 해당하는 표현의 자유상을 받은 바 있다. 시상식 전날 귀국한 오 감독은 비디오 동영상으로 식장에서 소감을 밝혔다. “개인적인 영광이라기보다는 제주 사람들과 함께 (영광을) 나누고 싶고, 함께한 수많은 영혼들과 함께하고 싶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올해는 우리 현대 시문학사에서 의미 깊은 해다. 최초의 근대시로 평가받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1908년 11월 1일 ‘소년’ 창간호에 실린 지 105주년을 맞았다. 또한 국내 첫 창작시집인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1923년)가 출간 90주년을 맞는다. 문학세계사는 현대 시집 역사가 90년이 된 것을 기념해 현대 시단을 밝힌 50권의 대표시집을 선정하고 해설을 곁들인 ‘한국 대표시집 50권’(사진)을 펴냈다. 기획위원으로 참여한 박덕규 배우식 송희복 이숭원 이승하를 비롯해 황현산 이남호 이숭원 최동호 정과리 유성호 박철화 구모룡 엄경희 김용희 정끝별 김수이 등 75명의 시인과 평론가가 대표시집 선정에 참여했다. 문인들이 10권씩의 시집을 추천해 총 투표 수는 750표였다. 김소월이 1925년 펴낸 시집 ‘진달래꽃’이 63표(8.4%)를 받아 ‘대표 중의 대표’로 뽑혔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으로 시작되는 ‘진달래꽃’이 표제시로 들어간 이 시집은 2011년 문화재로 등록되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송희복은 소월을 “곡진한 모어(母語)의 텃밭을 일구어낸 재능과 기량이 널리 인정되는 시인”이라고 평했고, 소설가 고종석은 “본원적 정서의 여분을 서럽게 쓰다듬는 가인(歌人)”으로 명명했다. 서정주의 ‘화사집’이 60표(8%)로 뒤를 이었고, 백석의 ‘사슴’(59표·7.9%), 한용운의 ‘님의 침묵’(56표·7.5%),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48명·6.4%) 순이었다. 책에는 흥미로운 분석도 들어 있다. 시집의 출간 연도 기준으로 봤을 때 선정된 50권 중 1980년대에 13권, 1950년대에 12권이 몰려 있는 것. 1950년대는 6·25전쟁 발발 이후 극심했던 사회 혼란기이고, 1980년대는 문단도 서릿발 같은 군사정권의 폭압적인 사회 분위기에 짓눌리던 시기였다. 시인이 인내한 아픔과 고통 속에서 절창(絶唱)은 피는 것인가. 추천위원 대부분이 문학평론가였기 때문에 대중성보다는 ‘문학사적 의미’에 치중한 감이 있다. 감성의 시보다는 격정의 시, 서정시보다는 실험 시들이 많이 들어 있다. 책의 제목에 들어간 ‘대표’란 말보다는 원래 선정위원들에게 보낸 설문지에 들어간 ‘가장 영향력이 있는’ 시집으로 이해하면 이견이 줄 듯하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소설가가 됐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소설을 쓰는 사람인 것은 맞겠죠.” 가수 루시드 폴(본명 조윤석·38·사진)이 소설집 ‘무국적 요리’(나무, 나무)를 펴내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2008년 가사집 ‘물고기 마음’, 2009년 시인 마종기와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서간집 ‘아주 사적인, 긴 만남’에 이어 소설 창작에 문을 두드린 것. 고향을 떠나 도시로 온 주인공이 목욕탕을 찾아 헤매는 하루를 그린 ‘탕’을 비롯해 단편 8편을 묶었다. 매년 여름과 겨울 공연을 했던 루시드 폴은 지난해를 스스로 안식년으로 정하고 공연을 쉬었다.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1년 새 단편 8편을 탈고했다. “앞선 책들과 달리 순수한 창작물로 메운 책이라 저에겐 의미가 커요. 소설 공부를 따로 한 적은 없어요. 제 글이 나쁘게 말하면 서툴고, 좋게 말하면 신선하게 보일 것 같아요.”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나와 스위스 로잔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998년 밴드 미선이의 1집 ‘Drifting’으로 가수가 됐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의도보다 전달 방식을 문제 삼는 경우가 있다. 영화감독 김기덕의 문제의식에는 동감하지만 그가 앵글에 담는 잔혹하고 역겨운 날것 그대로의 영상에 몸이 먼저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식이다. 이런 공식을 소설로 옮겨본다면 이 책의 저자(32)를 거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2010년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첫 장편 ‘제리’를 통해 뜨거운 신인으로 떠올랐다. 적당한 성애묘사는 머리에 피가 돌 듯 아찔한 쾌감을 주지만 도가 지나치면 속이 불편해지는 이치였다. 지방대 여대생과 호스트바에 다니는 남성의 희망 없는 오늘을 그린 이 소설에서 그가 그린 섹스 장면들은 노골적이었다. 누군가에겐 ‘유희’로, 다른 이에겐 ‘치유’로 읽혔다. 호불호를 떠나 그가 문제적인 신인이 된 것만은 분명했다. 2년 7개월 만에 들고 온 두 번째 장편도 파격적이다.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엄마를 둔 20대 후반의 동성애자(게이) 성재가 주인공. 성재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고 싶지만 길은 요원하다. 화장품가게 점원으로 일하는 성재에겐 일곱 살 연상의 애인이자 이미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된 민수 형이 있다. 꿈도 사랑도 성재에게는 버겁기만 하다. 소설은 날것 그대로의 현실을 조명한다. 게이들이 주로 모이는 극장이나 찜질방, 호프, 클럽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진다. 대개 장면의 마지막은 격한 성애 장면으로 끝난다. 물론 자극적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19금’ 부류로 읽히지 않는 것은 그 섹스의 마지막에 짙은 비애와 공허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출입 불가’인 찜질방을 제외하고는 게이들이 모이는 장소를 거의 섭렵했다는 저자. 보통의 동성애자처럼 보건소에 가서 “저, 에이즈 검사 받으러 왔는데요”라고 말하고 검사도 받았단다. 발로 뛴 취재 덕분에 그는 어두운 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간다. 그러기에 그들의 아픔이 솔직하고 묵직하게 다가온다. 타인의 아픔을 말하는 듯하지만 기실 저자는 자신의 아픔을 들춰내고 있었다. 그도 20대 초반 꿈도 희망도 없이 방황했다. 소설이라는 출구를 본 다음에 5년 동안 습작했지만 등단이란 벽 앞에 좌절하기를 여러 번. ‘제리’에 이어 ‘정크’까지 그가 우울한 20대에 주목하는 것은 어쩌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저자는 이제 “힘들었던 지난 경험이 문학적 자산이 됐다”고 밝게 말한다. “동시대 청춘들과 함께 고민하며 절망을 극복하고 싶다”는 그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보면 어떨까.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스콧 피츠제럴드의 장편 ‘위대한 개츠비’. 옛 사랑을 잊지 못하는 사업가 개츠비의 순애보로만 읽으면 안 된다. 개츠비는 온갖 불법사업에 손을 댄 부도덕한 기업가였으며 그의 집에서 벌어진 성대한 파티는 금주법 시대에 엄연한 불법이었다. 1920년대 미국 사회에 팽배했던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이 작품의 기저에 깔려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모비딕’ ‘작은 아씨들’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 미국의 정체성과 문화를 확립하는 데 기여한 소설, 시를 비롯한 작품 25편을 선정하고 해설을 곁들였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속았다 싶었다. 나로호 관련 소설을 썼다고 해서 만났더니 작가의 입에서 나온 말은 태반이 자동차 얘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중학생 시절 자동차 디자이너를 꿈꾼 뒤 서울대 산업디자인학과를 나와 1988년부터 10년간 기아자동차에서 자동차 디자이너로 일한 그다. 승용차 ‘크레도스’와 ‘슈마’가 그의 작품이다. 구상 한밭대 산업디자인학부 교수(47·사진)가 ‘히든 솔저’(나남)를 펴냈다. 자동차를 소재로 한 ‘천년을 꿈꾸는 자동차’ ‘꿈꾸는 프로메테우스’에 이어 세 번째 장편소설이다. 23일 기자간담회에서 ‘디자이너가 왜 소설을 쓰느냐’고 물었다. “자동차 디자인에도 스토리가 필요합니다. 학생들에게 ‘5년 뒤 네가 출근할 때 거리 풍경과 느낌을 디자인으로 표현해보라’고 얘기해요. 스토리텔링은 창의적 디자인의 필수 요소이죠.” 작가의 상상력은 기발하다. 국가유공자로 순직한 군인들이 실제는 살아 있으며, 이들이 비밀리에 나로호의 개발책임자를 납치해 장거리유도탄을 만든다는 줄거리다. 국정원의 비선조직이라는 이 ‘히든 솔저’들은 구국결사대쯤 된다. “북한이 지난해 말 (장거리 로켓) 은하3호 발사를 성공시킨 것을 보고 소름이 돋았어요. 나로호를 비롯한 우주발사체 연구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으면 하는 생각에 소설을 썼습니다.” 그는 자동차도, 우주발사체도 노하우 습득이 중요하다고 했다. 수많은 도전과 실수 끝에 명품이 나온다는 것.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인 피터 슈라이어(60)가 최근 현대·기아차 디자인 총괄사장에 오른 것에 대해선 이렇게 평했다. “현대차는 동양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는 반면 기아차는 유럽적인 디자인을 따르죠. 슈라이어가 두 회사를 책임지면 현대차의 개성이 다 없어지지 않을까요.”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녹색평론'을 보고 있으니 회사대표가 '불온서적 보고 있냐'고 잔소리하시더라고요. 한 달에 1만 원 내고 정기 구독하고 있어요." 가수 이효리(34)가 최근 한 인터뷰에서 밝힌 말이다. '녹색평론'은 환경과 생태 담론을 다루는 격월간지. 이효리의 발언 이후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쉽게 읽기 어려운 잡지임에도 잡지사에는 "나도 정기 구독하겠다"는 문의전화가 이어졌고 이틀 만에 40여 명의 구독자가 생겼다. 이효리는 유기견 보호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각종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히면서 누리꾼들로부터 '개념 연예인'으로 불리고 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섹시 아이콘이자 가십의 대상이던 그의 변신 과정은 대중문화계에서 일고 있는 '개념 연예인' 열풍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파티 대신 홀몸노인 방문 대중문화 속 개념 연예인의 이미지는 이효리의 활동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가 달라진 것은 2010년으로 거슬러간다. 그는 당시 4집 'H-Logic'이 표절 시비에 휘말리자 2년가량의 공백기를 가진 뒤 달라진 행보를 보였다. 그는 2011년 10월 트위터를 통해 "비싼 모피옷 사지 말고 따뜻한 옷 한 벌 사서 어려운 사람에게 가자"며 봉사활동을 독려했다. 그해 12월에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제안했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 달동네를 찾아 홀몸노인에게 털모자를 전달했다. 지난해 12월 대통령선거 땐 투표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이효리의 활동을 중심으로 보면 개념 연예인의 모습은 △정치·사회적 이슈마다 균형감 있는 의견을 피력하고 △사회적 소수자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는 데서 드러난다. 개념 연예인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 영향력 때문이다. 이들이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발언하면 수십만 명의 팔로어를 통해 확산되고 다시 인터넷매체에 기사화되면서 여론으로 형성된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과거에는 연예인을 엔터테이너로만 봤지만 요즘 정서는 다르다. 가진 것이 많은 연예인이 공동체와 함께 나눠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폴리테이너·소셜테이너와는 다르다? 개념 연예인은 '폴리테이너'(정치활동 연예인)나 '소셜테이너'(사회적 이슈에 참여하는 연예인)와는 개념이 다르다. '개념 연예인'이란 제목의 책이 나온 메디치미디어 출판사 윤경선 과장은 "투표 독려를 넘어 자신의 정치적 지향점을 내세우면 폴리테이너, 영향력 확대를 고려해 발언을 자주 한다면 소셜테이너"라며 "개념 연예인은 정치적 이득이나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지 않고 묵묵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추구하는 스타"라고 말했다. 이 기준으로 보면 배우 김여진(41)은 여성 노동자 문제 해결에 노력했지만 정치색이 강해 개념 연예인이라기보다는 폴리테이너에 가깝다. 사회봉사에 앞장서는 배우 차인표(46)나 저소득가정 아동을 지원하는 션(41) 정혜영(40) 부부는 개념 연예인에 가깝다. 개념 연예인을 마케팅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기획사들도 있다. 한 기획사 관계자는 "소속 연예인에게 SNS에 사회이슈에 대한 소견을 남기게 한다"고 밝혔다. 이효리 역시 나이 탓에 '섹시' 콘셉트를 내세울 수 없자 사회활동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다른 기획사 관계자는 "순수하게 좋은 일을 하는데도 '연예인 주제에 너무 나댄다'는 안티팬들이 늘어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인기 영합을 위한 '가짜 개념 연예인'은 퇴출될 것이라는 의견을 보이고 있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평소 활동을 보면 된다. 행동 없이 발언만 하면 홍보용"이라고 말했다.김윤종·황인찬 기자 zozo@donga.com 정건희 인턴기자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인 가람 이병기(1891∼1968)의 생가는 전북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573번지에 남아있다. 한국 근대문인의 생가 가운데 그 단아한 초가집의 원형이 유일하게 그대로 보존돼있다. 가람은 이 집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을 보냈고, 노후에 이곳을 찾아 자족하며 시조를 짓고 화초와 벗 삼았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후 바로 이 집이 내려다보이는 뒷산 언덕에 묻혔다. 이곳에 가람의 삶이 그대로 담겼고, 그 문학의 향취가 살아있는 것이다. 》날이 풀려 고드름이 똑똑 물방울을 떨어뜨리던 14일 오후 이곳을 찾았다. 학생들과 답사차 몇 번 왔는데 헤아려 보니 벌써 10여 년 만이다. 가람 생가 입구에 서니 가장 먼저 반기는 자그마한 모정(茅亭)인 승운정(勝雲亭)이 정겹다. 그 옆으로 담도 대문도 시작되기 전에 사랑채부터 일자형으로 길게 자리 잡고 있다. 그 곁에 파놓은 작은 연못은 눈에 덮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사랑채의 툇마루 앞을 지나노라면 지금도 누군가 문을 열고 헛기침을 하면서 마루로 나올 것 같다. 진수당(鎭壽堂)이란 편액을 걸어놓은 사랑채의 끝방은 가람이 책방으로 사용했단다. 평소 기거했던 곳은 한 칸 건너 수우재(守愚齋)라는 편액이 붙은 작은 방이다. 수우재와 진수당 사이는 칸 전체를 다락으로 만들었고, 툇마루에 서면 건너편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앞이 탁 트여 시원하다. 사랑채를 둘러본 뒤 대문간을 들어서면 좁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와 마주하게 된다.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높다랗게 지은 안채는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부엌이 다락처럼 돌출해 있는데, 비어 있는 안마당이 그저 아늑하다. 이 집은 가람의 조부 시절에 지었다고 전해지니 그 나이가 이백 살에 가까운 셈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서로 어울려 집 전체가 아늑하고 너무도 소박하다. 가람은 이 집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며 한문 공부에 매달렸다. 그러나 신학문에 관심을 갖게 되자 나이 스물에 전주고보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한성사범학교에서 수학했다. 이때 그가 만난 이가 한글학자 주시경이다. 그는 주시경 선생이 운영하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우리말 문법을 처음 배웠다. 학교를 졸업한 후 7, 8년간 전주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부터 민간에 흩어져 있는 우리 고문헌을 수집 정리하고 우리말과 우리 문학에 대한 연구에 전념했다. 가람이 생전에 수집한 문헌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방대한 장서를 이루었는데, 말년에 서울대에 기증해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가람문고’로 보존돼 있다. 가람은 1920년대 중반부터 시조 창작을 통해 널리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 그는 최남선의 시조부흥운동에 적극 동참하면서 시조의 원류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물론이고 현대시조 창작에 관한 실제적인 방법을 다양하게 제시했다. 그는 최초의 시조 연구 창작 모임인 ‘시조회’를 결성해 시조에 관심을 갖는 시인들을 모았다. 그가 발굴한 시조시인 조남령 김상옥 이호우 등은 모두 가람시조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현대시조의 거장이 됐다. 가람이 발간한 ‘가람시조집’(1939년)은 현대시조의 전범(典範)이다. 가람은 현대시조의 시적 형식에 감각성이라는 고도의 미의식을 부여했다. 가람시조는 전아한 기품을 자랑하고 있지만 사실은 단조로움에 빠져들기 쉬운 시적 진술에 특유의 감각성을 부여하고 있는 게 두드러진 특징이다. 가람은 시조의 격조를 현대적으로 살려내기 위해 우리말의 음절량과 그 이음새에서 나타나는 말의 마디를 자연스럽게 변형시키면서 율격을 지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시조의 시적 형식이 어떤 틀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인에 의해 그렇게 형성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난초’ 같은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절제된 감정과 언어의 감각을 가람시조의 미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드는 볕 비껴 가고 서늘바람 일어 오고/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시조 ‘난초 1’ 전문) 가람은 초창기 국문학자로서 연구 활동에도 진력했다. 그는 1921년 권덕규 임경재 등과 함께 조선어문연구회를 조직해 우리말과 글의 연구 보급에 앞장섰다. 1930년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으로 일하면서 우리말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에 깊이 간여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가람은 한국 고문헌의 고증과 주석 작업에도 힘쓰면서 ‘한중록’ ‘인현왕후전’ ‘요로원야화기’ 등을 발굴 소개했고, ‘춘향가’를 비롯한 신재효의 판소리를 발굴 소개하여 구비문학 연구의 기반을 만들었다. 광복이 되자 가람은 서울대 교수가 돼 한국문학의 근대적인 교육 연구 체제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6·25전쟁 직후 서울대 강단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 전북대에서 강의하다 1956년 퇴임했다. 가람은 강단에서 물러난 후 고향인 여산에 돌아와 자연을 벗 삼고 시조를 노래하며 풍류를 즐겼다. 그는 스스로 ‘술 복’과 ‘글 복’ ‘제자 복’을 타고난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 자처하며 술을 즐기고 시를 사랑하고 제자를 아꼈다. 가람의 집에는 가람을 존경하고, 가람의 시조를 사랑하며, 그 풍모를 따르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 현대시조의 문학적 성소(聖所)가 바로 이곳이다. 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에 따라 그 성격과 의미가 정해진다는 말이 있다. 가람의 생가를 둘러보면 이 말이 더욱 실감난다. 이 작은 초가집이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요즘은 세상이 변해 버젓이 살아있는 사람의 기념관이나 문학관이 들어서기도 한다. 생가는 보존됐지만 가람의 문학을 돌아볼 수 있는 학술적 공간이 없어 아쉽다. ‘가람시조문학관’ 같은 것이 왜 아직도 서지 못했는지 궁금하다. 가람이 평생을 두고 썼던 일기는 한국 근대문학 최대의 보물이다. 이 장대한 기록문학을 제대로 보관할 수 있는 기념관이 어서 들어서길 기대한다.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살아봐야 아는 것들이 있다. 부모가 세상을 뜬 뒤에야 그들의 부재로 인한 아린 그리움을 깨닫게 되고, 아이를 낳아봐야 내리사랑의 의미를 알게 되는 식이다. 이런 깨달음은 뒤늦게 찾아온다. 후회도 반복된다. 사람들은 실수를 줄이기 위해 타인의 삶을 살펴본다. 예순이 넘은 남성 작가 세 명이 나란히 새해 들어 에세이를 펴냈다. 시인 정호승(63)과 김용택(65), 소설가 박범신(67). 문단의 중심에 선 작가들이지만 이들이라고 삶의 회환과 뒤늦은 깨달음이 없으랴.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로 귀결되는 듯하다. ‘비워낼수록 채워진다.’ 올해는 조금 가벼운 짐을 지고 길을 나서면 어떨까. 재작년 한여름 밤. 서울 인사동에서 정호승 시인과 술자리를 가졌다. 밤이 깊어가도 그의 온화한 미소는 변하지 않았으며 목소리는 내내 잔잔했다. 그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밤이었다. 정호승의 에세이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비채)를 읽다보니 그 여름밤 시인의 미소가 다시 떠올라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가 2006년 펴낸 에세이 ‘내 인생의 힘이 되어준 한마디’가 30만 부를 넘기며 큰 사랑을 받은 것도, 글 속에서 그의 미소를 그려본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신작 에세이에는 76개의 이야기가 있다. 시인이 읽은 글과 지인들과의 만남을 비롯한 여러 경험들이 잔잔히 펼쳐지는데, 놀라운 것은 시인의 비범한 시각이다. 이를테면 ‘문’과 ‘벽’에 관한 얘기는 이렇다. 영화 ‘해리포터’를 보다 소년 해리가 런던 킹스크로스 역의 벽을 뚫고 가는 장면을 본 시인. 벽이 문이 되는 장면을 보고 그는 ‘모든 벽 속에는 문이 존재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시인은 단언한다. 인생의 각종 고난이 벽처럼 서있지만 “문 없는 벽은 없다”고.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자신이 나고 자란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의 정겨운 삶을 산문으로 옮겨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번에 출간한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문학동네·총 8권)는 ‘내가 살던 집터에서’ ‘살구꽃이 피는 마을’이란 신작 에세이 2권에 먼저 펴낸 에세이 6권을 보탠 것이다. ‘내가 살던 집터’에서는 ‘양용기 할아버지’ ‘풍언이 양반’ ‘광주댁’ ‘정수네 집’ 등 진메마을 집들의 내력을 다큐멘터리처럼 기술해나간다. 비슷비슷한 집안 내력이 이어져 좀 지루하다. 제대로 된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살구꽃이 피는 마을’이 나을 듯하다. 시인의 유년기가 주로 펼쳐지는데 부엌에서 갑자기 먹구렁이가 나오거나 학교에서 나눠준 우윳가루를 집에 가져와 쪄먹었던 1950년대 중후반 농촌 풍경이 정감 있게 그려진다. 시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마을을 떴다. “농경사회 속 오래된 공동체의 파괴는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나는 무너져가는 한 작은 마을의 시인이었다. 이제 나는 그 마을 밖으로 유배되었다.” 2010년 한 달 일정으로 터키를 다녀온 소설가 박범신은 동서양이 만나는 터키의 문화를 접하고 깊은 감흥을 받았다. 벌써 세 번째 방문이었지만 그는 “꼭 다시 가고 싶은 곳”으로 터키를 꼽는다. 그의 에세이 ‘그리운 내가 온다’(맹그로브숲)에서는 이국땅에서 느낀 삶과 문화, 종교에 대한 단상들이 감각적인 사진들과 어우러진다. 박범신은 여행을 통해 ‘꿈을 꿀 수 있다’고 말한다. “어느 새 우리는 목표와 꿈을 하나로 보는 쩨쩨한 수준에서 희망을 말한다. 자본주의적 세계관이 가리키는 목표를 꿈과 일치시키는 버릇은 우리를 쩨쩨하게 만들 뿐이다.” 거대한 타임캡슐 같은 이스탄불을 지나, 고대도시 케코바 앞바다에 이른 박범신은 이렇게 읊조린다. “우리가 스스로 자연이라는 걸 인식하고, 저 자연 속에 들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에 애달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주입해 준 욕망을 내려놓는 것만큼 자연이 우리에게 가까워집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이 열린 16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 차분했던 시상식 분위기가 단편소설 부문 당선자인 송지현 씨의 등장으로 떠들썩해졌다. 그가 수상소감을 말하려고 시상대에 오르자 서울예대 동기들이 왕관과 모형 칼을 전해준 것. 왕관을 쓴 송 씨는 수줍어하면서도 함박웃음을 띠며 칼을 높이 쳐들었다. 식장 여기저기에서 웃음과 박수 소리가 터졌다. 송 씨의 수상소감은 신선했다. “미용실에 갔는데 제가 (미용사에게) 말을 잘 전달 못했어요. 머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지하철 화장실에서 다 풀고 왔는데, 엄마가 ‘돈만 많이 썼다’고 하셔서 싸웠어요. 말이라는 도구를 잘 전달해야 하는데…. 남을 아프게 하는 소설을 쓰지 않겠습니다. 가족들, 오는 길에 싸웠지만 사랑해요. 미용실 원장님 다시는 안 가겠습니다.” 이날 시상식에서는 송 씨를 비롯한 당선자 이병국(시) 고송석(중편소설) 최준호(희곡) 임세화(문학평론) 이채원(영화평론) 이수안(동화) 조은덕(시조) 이동은 씨(시나리오)가 상패와 상금을 받았다. 조은덕 씨는 “수상식 때 신으라고 신발 사준 친구에게 감사한다. 정형시의 탑을 쌓는 일에 작은 돌을 올리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세화 씨는 “엄마카드, 아빠카드 돌려쓰면서 책만 사봐서 딸로서 죄송한 마음이다. 오늘 이 떨림까지도 고스란히 쓸 수 있는 작가가 되겠다”고 말했다. 진솔하고 담백한 수상 소감이 이어지자 심사위원을 맡았던 소설가 오정희는 미리 준비했던 격려사의 원고를 접고 마이크 앞에 섰다. “당선자들의 너무도 예쁘고 빛나는 이야기들을 들으니 제가 미리 생각했던 말들이 남루하게 느껴졌어요. 옛날 제가 문청 시절에 어느 친구가 ‘동아 신춘(문예 당선)은 아무나 하나’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만큼 동아 신춘 출신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을 잃은 슬픔은 사람으로 치유되는 것처럼 글로 막힌 것은 글로 뚫어야 합니다. 쉼 없이 쓰십시오.” 최맹호 동아일보 대표이사 부사장은 축사에서 “가볍게 흐르는 디지털 시대의 세파 속에서 인간의 감성을 일깨우고 인간 사회의 길을 생각하는 게 문학인 것 같다. 당선자들이 많은 노력을 일궈 독자와 관객에게 호평 받는 거목으로 성장하기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시상식에는 소설가 이문열 강영숙 한강 윤성희 편혜영 박성원, 시인 장석주 장석남, 시조시인 한분순, 문학평론가 권성우 손정수 씨, 그리고 동아일보문학회 회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대형 출판사인 민음사가 세계문학전집 시장에서 그렇게 할인 공세를 하면 어떻게 합니까. 다른 후발주자들은 다 죽으라는 얘기 아닙니까.” 한 출판사 대표의 푸념이다. 민음사가 지난해 11월 30일과 12월 16일 두 차례 GS홈쇼핑을 통해 실행한 ‘반값 할인’이 발단이 됐다. 민음사는 당시 세계문학전집 300권을 정가(297만5500원)의 50.4%인 149만9000원에 내놨다. 여기에 예스24 e북 리더기 ‘크레마 단말기’(12만9000원)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전자책 베스트 20권(14만 원)까지 사은품으로 끼워 넣었다. 사은품을 감안하면 반값도 안 되는 파격 할인이다. 주문자들이 몰려 준비해두었던 600세트가 방송 종료 5∼10분 전 모두 팔렸다. 민음사는 이달 중 추가 방송 판매를 고려 중이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출판계의 시선은 곱지 않다. 1998년 8월부터 세계문학전집을 내기 시작해 307권까지 펴낸 이 바닥 ‘강자’인 민음사의 물량 공세는 도가 지나치다는 것이다. 세계문학전집을 펴내는 한 출판사 국장은 “우리도 홈쇼핑과 방송 판매를 논의했지만 50% 할인, 사은품에 방송수수료까지 감안하니 순수한 책 제작비마저 나오기 힘들어서 접었다. 그 정도(민음사의 상품 구성)면 팔면 팔수록 손해 본다”고 말했다. 민음사는 정말 ‘손해’ 보며 파는 것일까. 대답은 ‘아니다’다. 세계문학전집을 구성하는 책 가운데 잘 팔리는 것은 극소수이다. 민음사의 ‘레미제라블’(301∼305호)은 총 10만 부 넘게 팔렸는데 이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래서 전집으로 한꺼번에 팔면 재고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다. 또 전집 판매는 연속성이 있다. 한 출판사 대표는 “색감이 통일된 책들로 서가를 꾸미기 위해 전집의 경우 원래 있던 책과 동일한 출판사의 책을 이어서 사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현행 도서정가제에서는 ‘끼워 팔기’ 규정이 없어서 민음사의 판매 형태를 처벌하기는 어렵다. 다만 출판물불법유통신고센터(위원장 윤철호)는 지난해 12월 “구간과 신간(발간 후 18개월 이내) 할인율을 별도 공지하라는 (센터의) ‘가이드라인’을 위반했다”며 민음사에 구두로 시정을 요구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문학평론가 조남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65)는 올봄 강단을 떠난다. 정년퇴임을 앞둔 마지막 방학이지만 그는 거의 매일 연구실에 출근해 집필에 매진 중이다. 1989년부터 24년간 몸담았던 서울대 강단을 떠나는 감회를 묻자 그는 차분히 말했다. “‘연습’을 많이 했는데, 연구실에 가면 예전에 갖지 못했던 감정들이 솟아올라 오네요. ‘이제 나가야 하는구나’ 싶죠.” 정년이 다가오자 조 교수는 한 가지 ‘숙제’를 떠올렸단다. 1994년 ‘소설과사상’에 연재를 시작해 2000년 종료했던 ‘한국 현대소설사’를 책으로 묶지 못한 것.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출간 작업에 들어간 그는 10여 년 전 원고를 다시 읽으니 한숨부터 나왔다고 했다. “너무 제한된 작가들만 다뤘나 싶었죠. 소설 연구자 사이에서 기존에 얘기됐던 수준에 머물러 ‘이런 식으로 내려면 안 내는 것이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조 교수는 논의의 장을 대폭 확장키로 했다. ‘1급 작가’뿐만 아니라 기존에 많은 조명을 받지 못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정리하기 시작한 것. 소설가 김훈의 아버지인 김광주를 비롯해 박완서 한말숙의 숙명여고 은사였던 박노갑, 농촌소설을 주로 썼던 최인준을 비롯해 백신애 석인해 이무영 함대훈 현경준을 재조명했다. 그는 개화기부터 광복 전까지 소설가 154명의 작품 5000여 편을 담은 ‘한국 현대소설사 1, 2’(문학과지성사)를 최근 펴냈다. 10일 서울 광화문에서 그를 만났다. “거의 새로 쓰다시피 했다”며 7년 동안의 재집필 노고를 떠올린 그는 “시원한 것은 말도 못한다. 쾌감까지 느껴진다”며 웃었다. “다만 작업을 좀더 일찍 시작해, 광복 이후 소설사도 정년 전에 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소설사를 정리하며 당대 인기 있었던 작품이나 작가를 다루기보다는 소설사적으로 의미 있는 것들만 골랐다고 했다. 학자로서 객관적 평가에 치중한 것이다. 그런 그에게 ‘2013년 소설사에 담을 만한 작가를 꼽아 달라’고 질문을 하자 그는 머뭇거렸다. ‘정초에 한무숙문학상, 이상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김애란은 어떤가’라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물론 김애란 씨 소설은 1급이죠. 하지만 그의 모든 작품을 소설사에 담을 수는 없지요. 시원치 않은 것은 당연히 빼야죠.” 조 교수는 ‘한국문학잡지사상사’(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도 함께 펴냈다. 개화기부터 광복 전까지 출간된 잡지 130종, 총 1000여 권을 정리한 책이다. “서지학적인 정리에 머물렀다는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잡지에 실린 시나 소설의 내용까지 요약하려 애썼습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1990년대 후반 9%를 넘겼던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2%까지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수치는 지난해 세계 경제성장률 3.3%(국제통화기금 추정)보다도 1.3%포인트 낮다. 한국은행은 올해 우리의 경제성장률을 2.8%로 전망했다. 한국이 이미 저(低)성장 국가에 진입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저자의 주장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저성장이 아니라 성장이 정체된 ‘제로 성장의 시대’가 곧 다가온다는 것. 수출 위주의 고(高)성장으로 국가경제 규모를 늘리고 복지 수준을 올렸던 우리에게 경고등이 켜진 셈이다. 왜 성장이 멈출 수밖에 없는가. 여러 곁가지를 쳐내면 저자의 분석은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화석 연료를 비롯한 주요 자원의 고갈 △자원을 사용할 때 발생하는 환경오염을 방지하는 비용의 증가 △자원과 환경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남발한 정부와 민간의 부채 증가다. 물론 이 전망이 틀릴 수도 있다. 일부 경제학자는 대체연료 개발을 비롯한 기술혁신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책은 반론을 편다. 예컨대 몇 년 전만 해도 석유의 대체재로 옥수수에서 추출한 에탄올이 꼽혔지만 최근 경제성이 적은 것으로 판명 났다. 자원 위기는 금융 위기로 이어진다. 자원 고갈로 비롯된 저성장 기조는 끊임없는 성장을 전제로 만들어진 현재 경제시스템에 타격을 줘 결국 금융대란, 사회불안으로 이어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원 고갈로 비롯되는 세계경제의 위기는 오래전부터 제기된 문제이기에 저자의 분석이 신선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다만 저자가 제시한 대안들에는 눈길이 간다. 에너지 사용을 줄이자 같은 기본적인 대안에 이어 사회의 결속력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이웃끼리의 정보교환, 협동, 상호부조 등을 통해 제로 성장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질의 빈곤 시대를 맞아 ‘마음의 교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이웃 간에 훈훈한 정(情)을 나눴던 앞선 세대들의 삶이 떠오른다. 세상은 돌고 도는 걸까.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채널A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이 4일 신년특집에서 제안한 ‘MSG(인공조미료) 선택권 소비자에게 주자’는 캠페인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11일 점심시간에 서울 종로구 견지동 사찰음식점 ‘발우공양 콩’을 찾은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 음식을 담고 있다. 조계종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이 운영하는 이 음식점은 MSG 대신 식물의 뿌리와 줄기, 잎, 열매 등 천연재료로 맛을 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가격은 ‘1식 5찬’에 7000원이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황당할 수도 있다. 성인 여성이 아이로 변한다거나, 고양이와 대화도 나눈다. 남성은 쥐로 변하기도 한다. 물론 공상과학이나 판타지 소설은 아니다. 연애성장소설로 정의될 수 있는 이 작품은 이렇게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기묘한 사랑 얘기를 만들어낸다. 논리적일 필요는 없다. 차분하고 몽환적인 분위기, 그 매력적인 유혹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자꾸 책장을 넘기게 되는 끌림의 힘도 여기에서 나오니까. 여기 서른셋의 여배우 ‘나’가 있다. 아역부터 시작했지만 뜨지 못한, 서른이 넘은 나이에 TV 단막극의 주연 자리를 겨우 맡은 사람. 그는 늦은 밤 놀이터에서 맥주를 마시다 만난 고양이에 이끌려 거대한 쥐 떼를 만나고, 깨어나자 일곱 살 아이로 변한다. 지갑도, 휴대전화도 없이 세상에 버려진 것. 아이가 된 ‘나’는 ‘달’을 만나 의지한다. 달은 자신이 출연한 단막극의 작가. 달은 서른셋의 ‘나’에게 호감을 표시했었다. 하지만 그는 ‘나’가 아이가 된 줄 모른다. 둘은 함께 살며 의지하기 시작한다. 중간부터 본격 연애소설의 공식을 충실히 따른다. 나가 점차 달의 진심을 깨닫고, 달이 나의 정체를 짐작하게 되면서 서로 가까워진다. 하지만 이때 삼각관계가 펼쳐진다. 달의 애인이었던 서른셋의 고등학교 교사 ‘수지’가 다시 달 앞에 나타난 것. 달은 두 여자 사이에서 고민하고, 나는 달이 떠날까 봐 불안해진다. 이야기의 흐름만 보면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삼각관계를 다룬 소설이 어디 한둘인가. 하지만 작가는 비현실적 상황을 들여와 보다 현실적인 고민을 하게 하는 영민함을 발휘한다. 달이 아이의 내면에 있는 진실한 나의 모습을 보려 한다든가, 나가 달이 쥐로 변할 것을 알면서도 깊이 사랑하는 식이다. 사랑은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을 봐야 한다는 메시지일까. 하지만 불안전한 존재인 나와 달의 사랑은 이뤄지기 힘들다. 그렇기에 더 애잔하다.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소설이기에 개연성에 대한 양보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작가가 설정한 가상적 전제가 와 닿지 않는 부분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나가 아이가 되는 과정을 작가는 ‘달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와서’라고 간접적으로 밝히지만 독자는 ‘그냥 고양이를 따라갔더니’라고 읽을 소지가 크다. 고양이와 회색쥐, 흰쥐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존재들임에도 어떤 개성이나 성격을 부여하지 않은 것도 아쉽다. 보다 동화적이고, 상상력 넘치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매력적인 소설임은 자명하다. 무엇보다 비슷비슷한 연애소설에 질렸던 독자들에게 강추! 2004년 장편소설 ‘피터팬 죽이기’로 제28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고, 2008년 소설집 ‘파란나비 효과 하루’를 펴낸 작가는 세 번째 책에서 개성을 십분 발휘했다. 그의 과감한 도전을 응원하고 싶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