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

허진석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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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허진석 기자입니다.

jameshur@donga.com

취재분야

2025-11-06~2025-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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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땜질식 누더기 개편… 잦은 변경에 “청약이 움직이는 과녁이냐”[수요논점/허진석]

    《새집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주택청약제도는 이 중요한 문제를 다룬다. 집값이 급격히 오르고 주택자금 대출은 여의치 않으니 사람들은 더 청약에 매달리는 상황이다. 청약통장 가입자는 올해 1월 말 2730만 명을 넘었다. ‘인생 최대의 쇼핑’인 생애 최초 주택 마련에는 7년 안팎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도 걸린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청약통장을 만들고, 땀 흘려 오랫동안 일하며 자금을 마련한다. 하지만 막상 청약을 하려고 보면 청약 조건은 이전과 달라져 있기 일쑤다.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니 불편하고 불안하다. 유주택자가 되려면 움직이는 과녁 정도는 맞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10명 중 1명은 부적격자로 탈락 청약은 조건이 복잡해져 지뢰밭 수준이다. 가령 지난달 19일 시행된 주택법 시행령을 모른 채 청약했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 있다. 2월 19일 이후 입주자모집공고를 낸 분양가 상한제 아파트를 분양받으면 반드시 입주를 해야 하고 2∼5년을 의무적으로 살아야 한다. 새 아파트를 전세로 내놓고 그 전세금으로 잔금을 치르지 못한다는 의미다. 새 아파트의 잔금이 부족할 때 일정 기간 전세를 주고 그사이 돈을 모아 입주하는 기회를 막은 것이다. 자금 부족으로 계약을 하지 못하면 청약통장은 무효가 되고 당첨일로부터 10년간 투기과열지구 등의 주택에 청약할 수 있는 자격이 박탈된다. ‘남은 무주택자’에게는 더 혹독한 자금 조달 조건이 부과된 셈이다. 청약제도는 국토교통부의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으로 주로 실현된다. 이 규칙은 1978년 5월 처음 나와 지난달까지 시행 횟수 기준으로 148번 고쳐져 시행됐다. 1년에 3.4회꼴이다. 1순위 자격은 툭하면 변경됐고, 바뀔 때마다 금지 규정이 신설되거나 사라졌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7년 5월 이후로는 4년이 채 안 되는 동안 20번 새로 시행됐다. 청약제도의 잦은 변경은 청약 혼선과 함께 부적격자 양산이라는 문제를 낳는다. 내 집 마련의 꿈이 어그러지고, 투기과열지구 등에서 1년간 청약이 제한되는 불이익도 받는다. 2017∼2019년 매년 청약 당첨자의 11%가량, 즉 10명 중 1명꼴로 부적격자 판정을 받았다. 경쟁이 치열한 곳은 20%를 넘기도 한다. 지난해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세대 갈등까지 부른 청약제도 청약제도는 세대 갈등까지 야기한다. 지난해 서울 아파트 매매에서 30대 이하가 차지한 비중은 37.3%로 10명 중 4명꼴이다. 청약 시장에서 밀린 청년층이 대거 주택 매입에 나선 결과다. 정부는 2017년 투기지역과 투기과열지구에서 분양하는 전용면적 85m² 이하 물량은 가점제로만 당첨자를 가리도록 했다. 가점에서 불리한 청년층이 소외된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후 신혼부부 특별공급의 소득기준을 완화하고, 민간분양에도 생애최초 특별공급 등을 도입하며 달랬다. 이렇게 조건을 바꾸자 청약 대상이 줄게 된 장년층의 불만이 커졌다. 서울시가 작년 8·4대책에서 지분적립형 주택의 100% 추첨제를 발표했을 때도 20년 이상 청약통장에 돈을 넣으며 기다린 50대 이상 무주택자들은 반발했다. 한정된 물량을 일반공급(가점제)과 특별공급으로 가르니 제도가 바뀔 때마다 어느 쪽에서건 불만이 나온다.로또 분양 막을 채권입찰제 필요 청약제도를 둘러싼 잡음은 과도한 차익이 근본 원인이다. 당첨되면 많게는 10억 원의 이득이 생기니 청약자들은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민간택지 분양가 상한제가 도입된 지난해 7월 말을 기점으로 수도권 분양 아파트 1순위 경쟁률에서 세 자리 경쟁률이 속출했다. 당장 집이 필요 없더라도 일단 해보자는 심리가 팽배하다. 실수요자 내 집 마련은 멀어지고 언젠가는 당첨될 거라는 희망고문만 늘어난다. 과도한 시세 차익을 줄이려면 분양가 상한제를 없애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채권입찰제가 현실적 해법이다. 당첨자가 독차지하던 시세 차익을 공공채권으로 흡수하면 시세 차익을 노린 투기적 수요를 막을 수 있고 공공채권을 주택 건립 재원으로 활용하면 주택 공급에도 도움이 된다. 예전에는 분양가상한제 등으로 분양가를 통제하면 채권입찰제는 바늘과 실처럼 같이 갔다. 1990년대 초반 1기 신도시 분양 때 그랬고 참여정부가 판교신도시를 분양할 때도 그랬다. 로또 분양을 그대로 두고 대출 규제를 옥죄면 부모의 도움을 받는 금수저만 웃는 불공정 논란도 계속된다. 한국 가계 자산의 80%가량이 집이다. 새집 배분 방식을 담은 청약제도는 사실상 자산을 배분하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더 공정하고 알기 쉬운 청약제도가 필요한 이유다. 1인 가구가 전체 30%… 가점제 손봐야청약제도는 2007년 청약가점제도가 도입되면서 더 복잡해진 측면이 있다. 가점은 부양가족 수(35점)와 무주택 기간(32점), 청약통장 가입 기간(17점)을 합쳐 84점이 만점이다. 항목은 3개로 많지 않지만 해외 체류 등을 감안한 무주택 기간, 양어머니의 부양가족 포함 여부 등 개인 사정을 따져가며 정확한 계산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 신혼부부, 생애최초, 다자녀 등 특별공급에 소득 기준 같은 별도 조건이 붙으면서 청약제도는 더 복잡해졌다. 투기과열지구 등 규제지역별로 조건을 달리 적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점제는 결혼을 해서 자녀를 둘 이상 두고 부모를 봉양하는 가정에 유리하도록 만들어졌다. 하지만 1인 가구가 615만 가구로 30%에 달하고 30, 40대에도 미혼인 인구가 383만 명에 이를 정도로 시대가 바뀌었다. 김덕례 주택산업연구원 주택정책연구실장은 “달라진 환경에 맞춰 가점제 배점 항목이나 점수 비중을 바꾸지 않고, 특별공급 물량을 늘리면서 제도가 복잡해진 측면이 있다”며 “생애 주기에 맞춘 청약 등 큰 틀에서 단순하고 오래가는 청약제도를 만들어야 할 때”라고 했다. ::채권입찰제::아파트 분양 이후의 경제적 이득을 노리고 투기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청약 때 매입할 채권액수를 적어내고 많은 순서로 당첨자를 결정하는 제도. 매입한 채권을 은행에 할인해서 팔게 되면 수분양자는 그 할인액만큼 비용을 더 지불하게 되는 셈이 된다.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 2021-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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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월세 전환율[횡설수설/허진석]

    입시학원이 밀집해 있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은 전세 수요가 많다. 임대차 2법이 도입되기 전인 작년 7월까지만 해도, 은마아파트 전용면적 84m²를 기준으로 했을 때 전세가격은 5억 원가량이었다. 지금은 2개의 전세가격이 존재한다. 이미 세 들어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5%(2500만 원)만 올려주면 된다. 하지만 새로 전셋집을 찾아들어가는 사람이라면 10억 원을 내야 한다. 이처럼 전세가격이 급등하면서 전세를 월세로 전환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전세를 월세로 전환할 때 적용하는 비율은 현재 2.5%로 주택임대차보호법 시행령에 정해져 있다. 한국은행이 정하는 기준금리(현재 0.5%)에 2%포인트를 더하는 방식으로 나온 것이다. 1억 원의 전세를 월세로 돌린다면 1억 원의 2.5%인 250만 원을 연간 내면 된다. 즉, 월세로는 20만8333원이 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기존 세입자가 살던 전셋집에서 전세금 일부를 월세로 돌릴 때 해당하는 이야기다. 다른 사람이 전세로 살던 집에 월세로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시장에서 평균적으로 형성되는 전월세전환율은 법정 전환율과는 차이를 보인다. 한국부동산원 통계에 따르면 시장 전월세전환율은 작년 11월 기준 전국 평균이 5.7%로 나타났다. 1억 원의 전세금이 모자라면 월세 47만5000원이 필요하다. 2억 원이면 95만 원이나 된다. 시장 전월세전환율은 시기는 물론 지역에 따라 다르다. 작년 11월 기준 서울이 4.8%, 경기 5.9%, 인천 6% 수준이다. 수도권(5.2%)보다 지방(6.7%)이 높다. 서울의 한강 북쪽은 5%, 한강 남쪽은 4.6%다. ▷월세를 줄이고 전세금을 높일 때는 시장 전환율로 계산하는 게 세입자에게 유리한데, 이 방식을 적용하도록 국토교통부가 유권해석을 내렸다. 법정 전환율로 계산하면 훨씬 더 많은 환산 전세금이 나와서 세입자에게 불리하다. 다만 등록임대주택에 사는 세입자는 불리한 줄 뻔히 알면서도 법정 전환율을 써야 한다. 등록임대에 적용되는 민간임대특별법의 규정이 그렇게 돼있기 때문이다. ▷전월세살이가 복잡하게 꼬였다. 거슬러 가보면 작년 7월 31일 임대차 2법의 급격한 시행이 진원이다. 정부는 갱신계약을 한 세입자는 2년 더 거주하는 혜택을 입고 있다고 하는데, 현실에는 법과 원칙을 지키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입자를 힘들게 하는 각종 편법이 난무하는 중이다. 더 큰 문제는 2년 뒤다. 추가계약 기간 2년이 끝나면 전세금 인상을 막을 방법이 없다. 이 모든 것이 세입자를 보호한다며 만든 임대차 2법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 2021-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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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대재해법 내년 시행… 비상 걸린 산업 현장[논설위원 현장 칼럼]

    말 많았던 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중대재해처벌법에는 대기업의 경영책임자뿐만 아니라 1000m² 이상의 음식점 목욕탕 PC방 등 대형 다중이용업소 주인을 처벌하는 ‘중대시민재해’ 조항도 담겼다. 처벌 수위가 높은 법이 나왔으니 안전이 담보될 것인가. 2018년 12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협력업체의 비정규직 신분으로 설비점검에 나섰던 김용균 씨(당시 24세)가 끔찍하게 숨지는 비극이 있었다. 비슷한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이 개정돼 지난해 1월 시행됐다. 처벌이 강화된 개정 산안법은 ‘김용균 법’으로 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산업재해 중 업무상 사고 사망자는 860명(고용노동부 잠정 집계)으로 그 전해 855명보다 늘었다. 처벌만 강화한다고 해서 사고가 곧바로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을 징역 1년 이상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했고, 원청 업체에도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했다. 반면 원안에 있던 5인 미만 사업주 처벌은 빠졌다. 50인 이상 기업은 내년부터, 50인 미만은 2024년부터 적용된다. 재계와 노동계는 중대재해법 제정 이후에도 여전히 고쳐야 할 점이 많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사망 최대 요인은 건설 현장 추락 추운 날씨가 잠시 주춤했던 14일 오후, 서울 시내의 한 고층 건물 리모델링 현장. 1층에 들어서니 회색 벽면에 빨간색과 초록색의 LED 불빛이 반짝였다. ‘추락 주의!’ 그 아래엔 안전 포스터까지 붙어 있었다. ‘아빠! 안전을 먼저 생각하세요.’ 웬만한 건설 현장에선 업무 시작과 끝이 안전 교육일 정도로 안전은 제1순위다. 그럼에도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의 절반은 건설 현장에서 나오는 게 현실이다. 2019년 업무상 사고 사망자 855명 중 428명(50.0%)이 건설업 종사자다. 제조업은 206명(24.1%)으로 그 뒤다. 건설 현장에서 가장 많은 사망 원인은 추락(떨어짐)이다. 2019년 건설업 산재 사망자 428명 중 무려 265명(62%)이 추락으로 사망했다. 추락 사고를 예방하려면 발판과 난간을 튼튼하게 만들어 주면 된다. 그래서 각광을 받는 것이 ‘일체형 작업발판(시스템 비계)’이다. 기존에 나무나 강관을 엮어서 사용하던 비계를 규격화해 안전성을 높인 것이다. m²당 240kg도 견딘다. 이날 방문한 리모델링 현장에서도 시스템 비계를 쓰고 있었다. 시스템 비계 위의 근로자 두 사람은 마치 복도에서 일하듯 편안해 보였다. 그러나 시스템 비계도 사고에서 자유롭진 못하다. 현장의 비계 설치 전문가는 “물건을 옮긴다고 잠깐 난간을 풀어두거나 시간에 쫓겨 안전통로를 이용하지 않고 임의로 건물과 발판을 오가다가 사고가 난다”고 말했다. 산업안전에는 ‘정상 사고(Normal Accident)’라는 개념이 있다.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복잡한 기술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하는 피할 수 없는 사고를 말한다. 이런 유형의 사고는 예방하기가 매우 어렵다.법 아랑곳 않고 되풀이되는 산업재해 중대재해법이 통과되던 당일 충북 청주시 서원구의 한 폐기물 처리 사업장에서는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근로자 1명이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 끼임 사고는 제조업 근로자가 가장 많이 사망하는 유형의 사고다. 2019년 제조업 사고 사망자 206명 중 66명(32.0%)이 끼임 사고로 사망했다. 12일에는 부산 수영구 광안동의 한 주상복합 신축공사장 9층의 비계에서 창틀 주변 방수작업을 하던 인부 1명이 자재 반입을 위해 난간을 풀어 놓은 곳으로 떨어져 사망했고, 13일에는 경기 파주시 LG디스플레이 공장에서 유해화학물질이 새어 나와 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사망자가 없더라도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2명 이상이면 중대재해법 적용 대상이다. 2016∼2018년 자료로 ‘중대재해 유형별 현황 분석 연구’를 한 조윤호 한국산업안전연구원 연구위원은 “사고를 예측하거나 완벽하게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사후처벌보다는 안전 관련 시스템 전체를 향상시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자연인 처벌은 비합리적” 중대재해법은 안전 조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을 1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하한선이 있는 징역형은 고의가 있는 방화나 상해치사죄에 적용하는 것이어서 헌법상 과잉금지 원칙 위배의 가능성이 있다. 법이 이대로 시행된다면 건설업에서 발생하는 사고 사망자 규모를 감안할 때 수백 명의 기업인이 징역을 살 수도 있다. 경총은 회원사를 상대로 구체적인 보완 입법 방향에 대한 의견을 수렴 중이다. 노동계는 원안보다 처벌 수위가 낮아진 데다가 ‘안전보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경영책임자 등에 포함돼 오히려 사업주가 법망을 빠져나갈 우려가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중대재해법의 모태인 영국의 법인과실치사법은 물론 어느 나라도 산업안전을 이유로 개인을 형사처벌을 하는 사례는 없다. 처벌은 산업재해 예방활동에 참여할 동기를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전예방의 한계가 분명하니 법적 다툼으로 해결하려는 요인만 생기는 것이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중대재해법은 자연인 처벌 조항으로 인해 법을 빠져나갈 방안에 더 골몰하게 만들고 있다”며 “법인에 징벌적 과징금을 매기는 것이 사고 예방에는 더 효율적”이라고 제안한다.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연구소장을 지낸 조기홍 대한산업보건협회 직업환경연구실장은 “한국에선 사업주의 한마디가 큰 영향력이 있다는 정서가 반영돼 사업주 처벌이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사후 처벌에 초점이 맞춰져 로펌만 살찌우는 법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라며 “사고 예방의 책임이 큰 정부의 역할을 더 키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방식은 효율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이런 식이라면 군대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군 통수권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5인미만 사업장 근로자도 보호해야” 중대재해처벌법 입법 막바지에 5인 미만 사업주는 처벌 대상에서 빠졌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소상공인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영세사업장의 근로자는 고용과 임금, 복지 등에서 차별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중대재해 보호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차별의 가중은 불가피해졌다. 노동계는 크게 반발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5인 미만 사업장은 전체 사업장의 80%를 차지한다”며 “노동조건에서 차별을 받는데 이제 죽음마저도 차별을 당할 처지에 내몰렸다”는 입장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을 처벌이 아닌 사전예방에 초점을 맞추면 해결의 실마리는 보인다. 중기부는 소상공인이 많은 5인 미만 사업주를 가혹한 처벌 대상에 선뜻 포함시키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재철 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장은 “중대재해처벌법은 사업주와 경영책임자가 산재 예방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바꾸면서 5인 이하 사업주도 반드시 법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했다. 5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산업재해 전체 피해자는 2019년의 경우 3만2568명으로 전체 10만2305명의 31.83%를 차지했다. 5∼49명 사업체의 피해자 4만7554명(46.48%)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규모다. 5인 미만 사업장이 예외로 남으면 사업체를 4명 이하로만 잘게 쪼개는 편법이 활개를 칠 가능성도 높다. 비정규직으로 2년 이상 고용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토록 했더니 2년이 되기 전에 비정규직 자리마저 빼앗는 일이 발생하듯 안전의 사각지대만 늘어날 수 있는 것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학계에서도 누더기 입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권이 중대재해를 줄일 방안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입법 시한을 못 박으며 여론을 잠재우는 데만 신경을 썼다는 비판도 나온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산재 예방 인프라를 개선하거나 산재예방행정시스템을 혁신할 진정성은 보이지 않고 여론에 밀려 처벌 만능주의에 빠진 법을 만들었다”고 했다.모든 위험 살피는 ‘시스템 안전’ 필요 지금은 산업재해 예방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때이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위험을 제거한다고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 전 원장은 “단순 시설로 대량 생산을 하던 때에는 간단한 안전장치로도 재해 예방 효과가 컸지만 산업환경이 복잡해진 지금은 설계와 생산순서, 예산, 의사결정체계 등 상호간섭을 일으킬 수 있는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 안전’ 개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컨대 크레인 붕괴 사고를 예방하려면 안전교육은 물론이고 재하청의 재하청으로 인한 예산 부족, 공기 단축에 따른 시간 부족, 동료와의 불화 문제는 없는지를 종합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건설 현장에선 아직도 시공 순서를 현장에서 임의로 결정하면서 발생하는 사고도 많다. 다행히 중대재해처벌법은 정부의 책무에 대해선 유예 없이 공포 즉시 시행토록 하고 있다. 사업주 지원 및 종합 예방대책 수립·시행에 관한 것이다. 정부의 산업재해 예방 대책을 눈여겨 지켜볼 일이다. 논란 속에 탄생한 중대재해처벌법은 어찌 됐든 우리 사회에 영향을 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중대재해처벌법이 실제 사고를 줄일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법 제정은 종착지가 아니라 지혜를 모을 출발선이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 2021-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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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콕시대 층간소음[횡설수설/허진석]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침실의 소음 기준선은 35dB(데시벨)로 조용한 공원 소리 정도다. 최근 지어진 신축 아파트에서 배경 소음을 측정하면 20dB(나뭇잎 부딪치는 소리)이 나온다고 한다. 창문과 벽면의 소음차단 기술이 진보한 덕분이다. 하지만 구축이든 신축이든 위층이나 아래층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신경을 건드리는 일은 더 잦아졌다. ▷한국환경공단 층간소음이웃사이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상담 건수가 월 6145건으로 2012년 센터 개소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집콕’을 하는 시간이 크게 늘어난 것이 주된 원인으로 지목된다. 유명 연예인인 이휘재 씨 부부가 최근 층간소음 문제로 이웃에 사과를 한 사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코로나 스트레스가 높아지면서 소음 문제로 다툼이 생기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의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발판 소리가 시끄럽다”는 등의 이유로 이웃을 칼로 찌르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우리나라에서 층간소음을 둘러싼 갈등이 많은 데는 아파트 구조 탓도 있다. 아파트 대부분은 벽식 구조로 돼 있는데, 위층의 바닥을 아랫집의 벽면들이 지지하는 방식이다. 벽식은 위층 바닥의 진동을 아랫집 여러 벽면을 통해 잘 전달하는 특성이 있다. 보와 기둥으로 지지하는 기둥식은 주상복합 아파트 등에 적용되는데, 진동의 발생과 전달 면적이 작아 층간소음에선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1기 신도시를 지으면서 공사 기간이 짧고 비용도 적게 드는 벽식 구조가 일반화됐다. ▷오래된 아파트의 구조는 당장 바꿀 수 없으니 층간소음을 잘 이해하고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 층간소음의 73%는 이른바 ‘발망치’다. 아이들 뜀박질이나 성인의 걸음걸이 같은 중량충격소음이 주범이라는 얘기다. 이는 50Hz 이하의 저주파로 콘크리트 벽체를 타고 잘 전달된다. 음악이나 말소리는 고주파여서 상대적으로 멀리 못 간다. 발망치의 경우 매트를 너무 믿어서도 안 된다. 발바닥의 충격을 흡수하지 않고 바닥으로 그대로 전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매트를 깔더라도 슬리퍼를 신는 게 좋다. ▷내년 7월이면 공동주택을 다 짓고 나서 현장에서 바닥충격음을 측정해 부족하면 지자체가 건설사에 보완을 권고하는 사후 확인 제도가 시행된다고 한다. 아파트 바닥을 두껍게 하고, 완충재를 넣으면서 경량충격소음(구슬 굴리는 소리 등)은 어느 정도 잡았다. 하지만 발망치는 여전히 기술적 난제로 남아 있다. 다양한 편의성을 갖춘 아파트가 갈등과 공포의 공간이 되지 않게 하는 데는 이웃 간의 배려가 아직까지는 최선책이라는 말이다.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 2021-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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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시의 축소판, 공항[오늘과 내일/허진석]

    공항은 있는데 비행기가 제대로 뜨고 내리지 못하고 있다. 12일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김포공항 국제선 부문이 무용지물이 돼 버렸다. 근근이 한두 편씩 뜨던 중국행 비행기가 이날은 한 편도 뜨고 내리지 못한 것이다. 같은 날 알려진 미국 정부의 유럽인 입국제한 조치는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경제 풍파를 앞서 맞고 있는 항공 산업 생태계에 더 혹독한 시련을 줄 것으로 보인다. 정장 차림의 비즈니스맨과 여행객들로 늘 북적이던 인천국제공항은 지금 완전 딴판이 됐다. 발권 카운터가 텅텅 비고, 보안검색을 위해 줄을 서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미주 출발 비행기가 있을 때나 잠깐 사람들이 비쳤다가 이내 고요의 바다에 잠긴다는 것이 공항 관계자의 전언이다. 상점은 물론이고 병원과 호텔, 세관과 경찰 기능까지 갖추고 7만 명이 근무하는 인천공항은 도시의 축소판이다. 작년에 인천공항의 하루 여객 평균은 20만 명이 넘었다. 최근에는 그 수가 1만 명대로까지 떨어졌다. 공항 운영을 위해 상주하는 것으로 알려진 근무자보다 손님이 훨씬 더 적어진,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항공 산업의 핵심인 항공사들의 어려움은 익히 알려진 대로다. 국내 주요 항공사들의 직원들이 3명 중 1명꼴로 휴직을 하고 있을 정도다. 날지 못하는 비행기를 둘 곳이 없어 활주로 곳곳에 비행기를 세워두고 있다. 타격을 먼저 받은 항공사들을 위해 정부는 이미 지난달 중순에 3000억 원 규모의 긴급자금 지원책을 발표했다. 비행기를 빌린 비용과 인건비, 정비비 등은 계속 나가는데, 수입이 없으니 적절한 금융 지원 없이 이런 상태가 오래간다면 버텨낼 재간이 없는 상황이다. 항공사와 공항을 둘러싼 어려운 상황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국가들이 겪고 있는 상황의 축소판이다.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사람들의 교류가 줄면 경제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유심히 봐야 할 것은 바이러스 자체의 위험과 그로 인한 경제적 위험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코로나19 확진자 중 많은 이들의 동선에 인천국제공항이 있었지만 아직 인천국제공항 상주 직원 중에서는 확진자가 나오지 않았다. 방역을 위한 노력이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는 않더라도 두려움 때문에 공항 경제의 불황은 계속되고 있다. 유동인구가 줄다보니 공항 내 전반적인 소비가 감소한 것이다. 이를 국가적인 차원으로 확대해 보면 방역에 성공하더라도 경제적 피해는 더 오래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역 성공이 경제 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경제적 피해는 언제쯤 수그러들까. 아마도 경제적 회복의 신호는 코로나19에 대한 치료제나 백신의 개발 소식이 들려야 할 때쯤인 것으로 예상된다. 두려움을 없애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그것들이기 때문이다. 항공사와 공항을 둘러싼 경제적 생태계는 결코 작지 않고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상징성도 작지 않다. 어려움에 처한 항공사들을 대·중소기업 가리지 않고 정부가 지원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방역은 중요하다. 그리고 경제 주체들이 전환점을 맞이하기 전까지 정부가 체력을 유지토록 돕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허진석 산업2부장 jameshur@donga.com}

    • 2020-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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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측이 어려우면 불안이 가중된다[오늘과 내일/허진석]

    북위 5도 이상에서 발생하는 태풍은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발생하는 순간부터 기상 전문가들의 추적과 예측의 대상이 된다. 태풍이 어느 시기에 어디로 상륙하는지에 따라 피해 지역이 갈리기 때문이다. 센 바람을 몰고 온 13호 태풍 ‘링링’은 남한으로 상륙하지는 않았는데도 28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10일 집계됐다. 당초 상륙 확률이 높았던 수도권으로 상륙했다면 진행 방향의 오른쪽 반경에 있는 지역은 바람 피해뿐만 아니라 폭우 피해도 입었을 것이다. 태풍의 예상 진로에 큰 관심이 쏠리는 것은 불확실성 때문이다. 불확실성은 불안을 야기한다.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은 온통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에 관심이 쏠려 있는 듯하다. 언제 어디부터 적용되는지에 따라 해당 아파트를 분양하는 주체에는 부담금이 벼락처럼 떨어질 수 있고, 아파트를 분양받으려는 사람들도 그 시행 시기와 대상을 알아야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는 아파트 가격을 사실상 정부가 책정해 싸게 공급하도록 하는 정책이다. 아파트 가격이 낮아지면 디플레이션 때 나타나는 현상처럼 공급자들이 상품을 공급할 유인이 줄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파트 공급은 감소할 확률이 크다. 이는 정작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파트를 제때 공급받기 힘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달 14일 주택법 시행령에 담겨 입법예고된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는 아직 입법예고 기간이다. 이달 23일까지 의견을 접수하고 국무회의를 거쳐 의결·공포되면 바로 실시된다. 시행이 임박했지만 아직도 언제, 어디부터 적용될지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는 법제처 심사 등을 거쳐 10월 초에 국무회의 상정 후 실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심사 기간이 길어지고 국무회의 상정 자체도 더 늦어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당장 10월 초에 작동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2일 국회에서 한 것이 알려지면서 미묘하지만 더 늦춰질 수 있다는 기대가 시장에서 생기는 듯하다.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 실시를 담은 주택법 시행령이 발효되더라도 구체적인 적용 대상과 적용 시기는 국토부가 여는 ‘주거정책심의위원회’에서 결정토록 돼 있다. 그런데 이 회의가 개최되는 요건 등이 규정된 바가 없어 언제 열릴지를 예측하기는 힘들다. 사실상 정책 당국의 의지에 모든 게 달려 있는 셈이다. 서울의 반포주공1단지 재건축 사업은 새 아파트를 짓기 위해 기존 입주민들이 아파트를 비우는 이사 시작 2개월을 남기고 서울행정법원으로부터 ‘관리처분 무효’ 판결을 받아 혼란에 빠져 있다. 현 조합과 이 조합에 반대하는 일부 조합원의 다툼이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정부 부동산 정책의 예측 불가능성 때문이라는 전문가 지적도 나온다. 2017년 정부가 6·13부동산대책과 8·2부동산대책을 연달아 내놓으며 초과이익환수제를 당장 2018년 1월부터 시행한다고 밝히자 조합이 이를 피하기 위해 서두른 것이 다툼의 원인이 됐다는 분석이다. 집값을 잡겠다는 것이 정책 당국이 원하는 바지만 불안이 가중된 시장은 기존 아파트의 신고가 속출로 반응하고 있다. 지어진 지 오래되지 않은 아파트를 중심으로 강남은 물론 강북에서도 신고가 거래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청약경쟁률도 수백 대 1이 나오는 등 높아지고 있다.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가 실시되더라도 청약 가점이 모자라 기회를 잡기 힘든 소비자들이 공급 부족이 예상되는 아파트를 미리 사두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집은 국민들의 전 재산과 다름없다. 불안을 가중시키지 않는 예측 가능성이 더 강조돼야 하는 정책이 부동산 정책 아닐까. 허진석 산업2부장 jameshur@donga.com}

    • 2019-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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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이득을 보는가[오늘과 내일/허진석]

    당뇨와 고혈압은 노인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만성질환이다. 다리가 불편한 시골 노인이라면 읍내 병원에 약을 타러 가는 것도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불편을 앞으로 강원도에 사는 노인들은 덜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중소벤처기업부가 규제자유특구를 최근 발표했는데, 강원도가 당뇨와 고혈압에 한해서 제한적인 원격진료 허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처음 진단은 병원에 가서 받고, 재진은 환자의 집에 간호사가 있을 때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환자들의 편익이 증대되는 방향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이번 규제자유특구 발표 때 원격의료가 기술적으로는 얼마나 비상식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지가 새삼 관심을 끌었다. 현재는 원격모니터링만 가능한 상황이다. 혈당이나 혈압을 환자가 집에서 기기를 이용해 측정하면 의사가 병원에서 그 측정값만 지켜볼 수 있다. 측정 상태를 보고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요즘 식습관이 어떤지, 약은 제대로 복용하고 있는지 등을 물으면 불법이 될 수 있다. 세계적인 통신망이 깔린 나라에서 데이터를 주고받으며 동시에 통화를 하는 데 아무런 애로가 없는데도 그 사용을 막아 놓은 것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증기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마차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리지 못하도록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이 증기자동차를 관리했다는 적기(Red Flag)법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규제는 사전적으로는 ‘규칙이나 규정에 의해 일정한 한도를 정하거나 한도를 넘지 못하게 막는 것’을 의미한다. 등장 속도를 빨리하는 신기술과 사회적 안정성을 전제로 하는 규칙(법)의 충돌은 더 잦아질 수밖에 없다. 최근 정부가 택시업계와 모빌리티업계 간의 문제를 정리한 ‘택시-모빌리티 상생 방안’에서도 기술과 규칙의 충돌이 있다. 모빌리티업계는 기존 법 제도 안에서 소비자들에게 승합차를 초단기로 렌트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개척한 측면이 있다. 휴대전화를 통해 실시간으로 위치 파악이 가능해지고, 역시 실시간으로 결제가 가능해졌기에 그런 사업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으로 운송 서비스라는 정책당국의 해석에 따라 모빌리티업계는 사업을 다시 설계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신기술과 기존 규칙이 충돌할 때 어떤 방향을 선택해야 선(善)이 될 것인가. 발표된 정책이 복잡해 보이고 이해관계자의 목소리가 클수록 더 차분하게 장기적 안목을 갖고 대해야 한다. 이때 요긴한 질문이 ‘누가 이득을 보는가’이다. 정책의 수혜 대상은 국민이기에 국민의 편익을 최우선시하는 결정이 나와야 한다. 좋은 규제는 건전한 경쟁을 낳고, 나쁜 규제는 독과점을 유발한다는 얘기도 공동체 구성원의 편익을 염두에 두고 나온 말이다. 강원도에서 원격의료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방안이 발표된 뒤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원격의료가 일반화된다면 대형 의료기관으로 환자가 몰리고, 원격의료에 필요한 기기들을 만드는 의료 대기업들의 배만 불릴 수 있다는 우려다. 택시-모빌리티 상생 방안이 발표되고 나서는 택시업계는 환영했고, 모빌리티업계는 신산업의 싹을 죽였다는 반응들이 나왔다. 두 사안 모두 국민의 편익 측면에서 고려하면 최선의 선택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선택한 방향으로 가는 길에 예상되는 이해 상충이나 안전, 재산권 침해 등은 정부가 나서서 보완해야 할 문제일 뿐이다. 기술은 시간과 공간의 축약을 의미한다.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고 그만큼 새 사업의 출현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신산업의 등장을 국민 편익과 공동체의 풍요로 이끌어야 하는 것은 정부의 막중한 임무다. 그게 ‘진보’다.허진석 산업2부장 jameshur@donga.com}

    • 20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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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이 만든 현상들[오늘과 내일/허진석]

    “46년을 일궈 온 회사가 올해 처음으로 2개 분기 연속 적자를 냈습니다.” 중소기업 사장 A 씨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좌절도 배어 있는 듯했다. 1998년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던 시기도 이겨내며 적자를 면해 왔는데, 지금은 더 힘들다고 했다. 그는 자사 최저임금 대상자에게 지급되는 총지급액을 계산한 종이를 한 장 보여줬다. 시급은 8350원이지만 여기에 유급 휴무일수와 상여금, 4대 보험, 퇴직금, 기타 수당을 포함한 기업의 시간당 부담금은 약 1만6800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최저임금이 지난 2년간 29%나 오르고, 적용 시간도 길어지면서 경제 현장에선 피로감이 가중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A 씨는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신입 직원뿐만 아니라 기존 직원들의 월급도 조금씩 올려줘야 했다. 그 결과 2년 전 매년 50억 원 가까이 지급되던 임금 총액이 지금은 55억 원으로 5억 원이나 늘어났다. 2년 전 회사의 연간 이익은 5억∼10억 원 수준이었다. 2개 분기 연속 적자의 원인이 최저임금 인상 때문만은 아니지만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원가비 등 다른 비용 부담도 늘었고, 불경기로 매출이 시원찮아진 측면도 적자의 원인이다. A 씨는 “인건비 부담은 앞으로도 매년 져야 하는데 생산성은 그만큼 빨리 늘지 않아 평생 처음 ‘사업을 접어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A 씨의 물건을 매입하는 곳도 여유가 없는 중소기업이어서 납품 가격을 크게 올리기도 힘든 여건이다. A 씨 주변에는 사업 포기를 고민하는 사장이 많다. 그는 “요즘은 지인들이 모였을 때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하소연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사업을 접을 수 있을까’를 화제에 올린다”고 전했다. 누군가 사업을 접었다고 하면 박수를 치며 축하까지 해 주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A 씨는 “올해 적자가 나면 매년 내던 수억 원의 세금을 한 푼도 못 내게 될 것 같다. 만약 내가 사업을 접으면 우리 직원들 일자리는 어떻게 될지가 걱정이다”고 했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은 자영업자를 ‘고용 없는 사업자’로도 내몰고 있다. 경기 남양주시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B 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보조직원을 두고 있었지만 지금은 인건비 부담 탓에 ‘1인숍’으로만 운영 중이다. 올해 초 잠깐 직원을 뒀다가 마음의 상처만 입었다. 최저임금과 주휴수당을 맞춰주지 않아도 되니 기술만 가르쳐 달라고 했던 직원이 한 달만 일하고 관두더니 고용노동부에 신고를 한 것이다. B 씨는 최저임금과 주휴수당을 다 물어주고 벌금까지 내야 했다. 그는 “적게 일하고 적게 버는 게 낫지 이제 다신 직원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기업의 한 최고경영자(CEO)는 지나간 일이니 해주는 말이라며 대규모 공장을 짓다가 자동화로 전환한 사례를 들려줬다. 그는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최저임금을 급격하게 올리는 정책을 보면서 경영 리스크를 줄여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사람 대신 자동화 설비를 늘렸다”고 했다. 최저임금은 한번 오르면 내리기 힘든 데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매년 어떤 부담을 지게 될지 불확실한 반면 자동화 설비에 드는 비용은 예측이 가능해 경영에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는 논리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일자리’는 통계에 잡히지도 않는다. 최저임금 인상은 지나간 이슈가 아니다. 한번 결정된 최저임금이 1년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위원회가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을 위해 고심 중이다. 앞서 열거된 현상에서 보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익은 힘이 세다는 사실이 그 결정 과정에 ‘정상적으로’ 반영돼야 할 것이다.허진석 산업2부장 jameshur@donga.com}

    • 2019-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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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허진석]땔감으로 사라질 수 있는 ‘국보급 일자리’

    일제강점기 사재를 털어 국보급 문화재들을 지켜낸 간송 전형필(1906∼1962)은 시장에서 잘 알려진 ‘큰손’이었다. 가치 있는 물건은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매입을 했기에 좋은 물건이 시장에 나오면 골동품상들은 간송에게 먼저 가져갔다. 골동품상 박형수가 1933년 친일파 송병준의 집에서 변소 가는 길에 머슴이 군불 때려고 쌓아둔 더미에서 발견한 초록색 비단보에 쌓였던 화첩이 간송에게 간 것도 그의 명성과 네트워크 덕분이었다. 한발만 늦었어도 땔감으로 사라질 뻔했던 화첩은 겸재 정선(1676∼1759)의 작품 모음집이었다.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보물 제1949호)’으로 지금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전시되고 있다. 큰손의 명성과 네트워크, 미래 가치를 보는 눈이 똑같이 작동하는 곳이 벤처기업 투자 시장이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가 투자에 성공하는 것도 큰손으로서의 덕이 적지 않다. 골동품 시장에서 ‘누가 소유했던 물건’이었냐가 골동품의 가치를 올리듯, 그의 투자 자체가 투자받은 기업의 가치까지 올리고 있다. 지금 국회에 계류 중인 공정거래법 전면 개편안에는 ‘벤처지주회사 설립 요건을 완화’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큰손인 대기업을 벤처투자 시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안이다. 자산총액 요건을 5000억 원에서 300억 원으로 크게 줄이려는 계획이니 대기업의 참여가 늘어날 것처럼 보이지만, 뜯어보면 이 조항은 작동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 펀드 조성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시장의 투자 형태는 여러 기관이 돈을 모아 투자를 하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펀드 조성을 금지하고 대기업이 자기의 자본금만으로 투자를 하라고 하면 최소 7∼8년 동안 매년 수십억 원의 손실을 감내해야 한다. 손실이 나는 기업에 계속 돈을 쏟아 붓는 대표이사는 배임죄로 걸려들기 십상이다. 감옥 갈 위험을 감수하면서 실패 확률이 높아 이름이 ‘벤처(venture·모험)’인 기업에 돈을 대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벤처지주회사 제도가 2001년에 만들어졌지만 지금 단 1개의 벤처지주회사도 없는 배경이기도 하다. 벤처기업뿐만 아니라 여러 여당 의원과 중소벤처기업부 등이 원한 것은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이었다. 시장의 큰손인 대기업이 자신들의 사업전략과 연관된 벤처기업에 바로 투자를 하고, 대기업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벤처기업을 키우는 형태다.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할 가능성이 큰 방안이다. 그러나 금산분리의 벽을 넘지 못하고 벤처지주회사 요건 완화로만 갈음하려는 중이다. 금산분리의 취지가 산업자본이 일반 예금자의 돈으로 자기 사업을 키우는 것을 막자는 것인데, 벤처기업의 가치를 알아보는 기업이 몇몇 투자 주체의 돈을 모아 투자하는 것까지 막아야 할지는 사회적 합의를 거쳐 다시 논의해볼 만한 사안이다. 가치 있는 골동품처럼 양질의 벤처기업이나 스타트업은 미래에 든든한 일자리를 만들어낼 ‘국보급 자산’이기 때문이다. 시장에 큰손이 많이 들어오면 벤처기업은 비싼 값에 팔려 젊은 스타 창업가가 나올 확률도 높아진다. 창업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지금처럼 일일이 신경을 써가며 정책을 만드는 수고의 상당 부분이 필요 없을 수 있다. 이왕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글로벌 기업의 명성과 네트워크를 애써 버릴 이유는 없다. 산업의 발전과 기업들의 경쟁 상황을 감안할 때 적절한 때에 제도적 발판을 마련해주는 일이 어느 시대보다 중요해졌다. 우리의 글로벌 기업들은 해외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에만 투자를 하고, 청년 창업가들은 외국에서 먼저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한발만 늦어도 국보급 자산들이 땔감으로 사라질 수 있다. 허진석 산업2부장 jameshur@donga.com}

    • 2019-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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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재돈 前 서울지검 부장검사, 변호사 활동 시작

    심재돈 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수2부 부장검사(51·사진·사법연수원 24기·사시 34회)가 최근 서울 서초구에 사무실을 열고 개업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경기 김포 출신으로 인천 선인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심 변호사는 1995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서부지원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창원지검과 인천지검, 청주지검, 서울지검(특수부) 등을 거쳐 대검찰청 중수부 연구관, 수원지방검찰청 부부장 검사, 대전지방검찰청 공주지청장, 대검찰청 첨단범죄수사과장,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수3부 부장검사 등으로 활약했다. 2013년부터 최근까지 김앤장법률사무소 재직 기간에는 주로 기업형사 사건을 담당했다.}

    • 2018-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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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진단]떡잎은 보호받아야 한다

    “나는 사업을 잘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계속 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는 기업인이 있다면 사람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식자(識者)는 자본주의와 경영의 냉혹함을 얘기하며 그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고, 대중(大衆)은 그 실천을 보지 못하니 그 말의 진정성 자체를 의심할지 모른다. 요즘 대학가(大學街)는 장학금 신청의 계절이다. 얼마 전 한국장학재단이 내년 1학기 국가장학금 신청을 마감했다. 16일 서울 강서구의 송원김영환장학재단에서도 내년 신규 장학생을 뽑는 면접이 있었다. 장학회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눈여겨볼 스토리가 있는 곳이다. 우선 장학금 지원 기준이 유독 고학생에게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낮에는 공장을 다니고, 건빵으로 끼니를 때우며 9남매 형제들을 돌보며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지금은 고인이 된 재단 설립자의 경험 때문이다. 송원그룹 창업주인 고 김영환 회장은 창업 3년 뒤인 1977년부터 당시 중소기업으로서는 드물게 사내 장학금을 마련했고 9년이 되는 1983년에 지금의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한 번 선발이 되면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학생들에게 연간 1000만 원을 지원한다. 조건 없이 대학원까지 지원한다. 주거지가 없으면 기숙사를 제공한다. 이는 모두 ‘나처럼 고생하며 공부하는 학생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설립자의 바람이 실현된 결과다. 면접장은 가끔 눈물바다가 된다. 자기소개서에는 차마 적지 못한 어려운 사연을 털어놓다가 벌어지는 일이다. 아버지의 오랜 가출로 인해 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 등 서류를 제출하지 못해 국가장학금을 신청조차 못한 학생이 발견돼 선발되기도 했다. 16일 면접에서는 옆자리 학생의 딱한 처지를 듣고 자신은 장학금을 양보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학생도 있었다. 이 장학회는 2013년 30주년이 되기 전까지 장학회 활동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설립자가 살아계실 때는 장학금 증서 수여식도 갖지 않고 통장으로 조용히 학비를 보냈다. 고인은 생전에 “떡잎은 보호받아야 한다”며 장학사업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이렇다 보니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때 장학금을 오히려 더 지급하는 용단도 내릴 수 있었다. 장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투명한 경영을 지향했고, 주변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세무조사를 나왔던 담당자의 추천으로 2005년 재정경제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 장학회는 다만 장학생들이 서로 알고 지내기를 원해서 매년 졸업한 회원의 가족까지 참여하는 수련회를 간다. 나중에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때도 힘을 합쳐 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다른 여러 장학재단도 훌륭한 정신을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을 것이다. 삼성 같은 대기업이 운영하는 곳은 물론이고 중소·중견기업들이 운영하는 곳도 적지 않다. 요즘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은 더 절실해 보인다.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는 흐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 놓고 낭만을 즐긴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는 듯하다. 해가 갈수록 면접에 응하는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공부할 시간을 뺏기는 것을 안타까워한다고 한다. 소득 불평등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소식도 드물다. 겨울 한파 속에서 얼마나 많은 젊은이가 다음 학기 학비와 생활비를 걱정하고 있을지 걱정스럽다. 학생이 최소한 대출을 안고 사회에 진출하지는 않도록 기업의 장학재단 참여가 더 늘기를 고대한다. 허진석 산업부 차장 jameshur@donga.com}

    • 201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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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진단]실험실 결과를 돈과 일자리로

    제약사 동아ST는 올해 2월 미국의 세계적 제약기업 애브비로부터 480억 원을 받았다. 임상시험 단계에 한참 미치지 못한 ‘초기물질’을 넘기고 6350억 원이라는 거금을 받기로 지난해 말 계약한 대금이다. 이 회사가 초기물질을 찾아내 넘긴 과정은 실험실 결과가 경제적 가치로 이어진 전형적인 사례다. 이 회사가 찾아낸 바이오 물질은 ‘DA-4501’이라는 머티케이(MerTK) 억제 물질이다. 암은 똑똑해서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속이는데, 이때 머티케이를 활용한다. 머티케이는 자연사하는 세포를 인지해 면역체계에 공격할 필요가 없다는 신호를 보내는데, 암 세포는 자기 주변에 이 머티케이를 깔아둠으로써 면역체계를 속이는 것이다. 암 종양 주변의 머티케이를 걷어낼 수 있다면 우리 몸의 면역 기능을 활용해 암 세포를 없앨 수 있다. 특정 암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우리 면역체계를 활용하기에 그만큼 잠재력이 크다. 동아ST는 DA-4501의 특성을 발견한 뒤 지난해 4월 미국암학회(ACCR)에 참석했다. 신약 개발 초기 단계 물질을 찾은 정도여서 현장에서 발제와 토론을 하는 간이 발표 형식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애브비 관계자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동아ST 홍보 업무를 겸하고 있는 동아제약 관계자는 “애브비도 내부에서 머티케이 억제 물질을 연구하고 있었지만 진척이 없다가 동아ST 연구 결과를 듣고 현장에 미리 와 있었던 것”이라고 전했다. 이는 8개월 뒤 기술 이전 계약으로 이어졌고, 애브비는 지금 이 물질을 갖고 신약 개발을 추진 중이다. 학술 결과 발표 현장인 학회에서 사실상의 기술 거래가 이뤄지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다. 적어도 신약 개발 분야에서는 그렇다. 기술과 자본의 고도화로 신제품 개발 경쟁이 격해질수록 이런 현상은 일반화될 공산이 크다. 과학과 상품 간 거리가 짧아지는 것이다. 분자생물학 분야의 과학적 연구가 축적되면서 지금은 매출액 기준 세계 1∼10위의 제약사가 모두 바이오의약품을 만들고 있다. 단일 의약품으로 판매액 1위(143억 달러·2015년 기준)를 차지하는 것도 류머티스 관절염을 치료하는 ‘휴미라’라는 바이오의약품이다. 바이오의약품은 화학의약품보다 정교하게 병을 치료하고 부작용도 적은 편이다. 바이오신약 개발은 수조 원의 연구비는 물론이고 십수 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한국 기업들은 섣불리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는 말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도 대처하기 나름이다. 글로벌 제약 기업들은 개발에 따른 위험 부담을 줄이고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실험실 결과도 흡수하고 있다. 오히려 작고 유연한 기업일수록 연구개발로 성과를 올리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동차와 조선, 석유화학과 반도체 산업에 기대 돈과 일자리를 만들어 왔다. 지금은 그 분야가 바뀌는 전환기에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가 졸업생 창업 분야를 조사했더니 2010년대까지 바이오테크와 의약품, 에너지 분야가 꾸준히 늘고 있고 제조업과 엔지니어링은 줄고 있다. 소프트웨어 분야는 절대적 비중은 높지만 2000년대 들어 정체하고 있다. 대한민국 성장기에 강조되었던 ‘과학과 기술의 중요성’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시대별로 집중해야 하는 분야가 다를 뿐이다. 정부의 과감하면서도 효율적인 과학·기술 투자가 중요한 이유다. 실험실 과학자가 성공하는 사회에서는 과학의 중요성을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허진석 산업부 차장 jameshur@donga.com}

    • 2017-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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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바이오로직스, 바이오 제약 시장 ‘게임 체인저’ 될것”

    “세계 바이오의약품 생산 관행을 바꾸는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다.”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사장이 23일(현지 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세계의약품전시회(CPhI) 사전 콘퍼런스’에서 기조강연에 나섰다. 비서구권 기업 최고경영자로서 CPhl 기조강연을 한 것은 김 사장이 처음이다. 그는 ‘바이오의약품 제조 수요의 성장과 신뢰도 높은 공급 능력’을 주제로 세계 바이오 및 합성의약품 기업 최고경영자와 임직원 100여 명을 상대로 강연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다음 달 10일로 상장 1년을 맞는다. 김 사장이 언급한 ‘게임 체인저’는 세계적 제약사들이 자사 개발 바이오신약의 70∼80%를 직접 생산하는 관행을 바꾸겠다는 의미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개발회사의 직접 제조비용보다 더 싸게 공급함으로써 바이오시밀러뿐만 아니라 신약도 위탁해 생산하는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11월 말 3공장을 준공한다. 1, 2공장과 합쳐 전체 생산 능력이 36만 L(배양기 기준)가 돼 세계 최대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된다. 경쟁 기업인 론자가 26만 L, 베링거인겔하임이 25만 L 정도다. 생산능력이 크면 제조단가를 낮출 수 있는 여지도 많다. 김 사장은 “공장 건설 기간을 단축하고 공정관리를 효율화함으로써 론자나 베링거인겔하임보다 싸게 공급하고 있다. 3공장의 가동률이 높아지면 가격경쟁력이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바이오의약품 생산의 ‘씨앗’이 되는 세포주 개발과 임상의약품 생산을 해주는 위탁개발사업자(CDO)로 외연을 넓히는 것에도 착수했다. 곧 세계적 제약회사와 협업해 첫발을 내디딜 예정이다. 김 사장은 “세계 바이오의약품 개발 현장에서는 신약 물질을 개발하고도 임상의약품을 제때 만들지 못해 애로를 겪는 경우가 많다”며 “바이오 벤처들에게는 안정적인 개발 인프라를 제공하고 우리는 그들을 미래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후발 기업들의 추격 가능성에 대해서는 “제약산업에서도 시간은 곧 돈이다. 우리는 공장 건설 기간을 줄일 수 있는 노하우와 고품질을 고르게 유지할 수 있는 기술을 가졌다. 이들 기술은 일이 급하면 야근도 마다하지 않는 한국의 문화와 정확한 공정관리 기술 때문에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4공장 부지를 인천 송도 본사에 확보하고 있지만 아직 투자 결정은 내리지 않은 상태다. 김 사장은 “2020년경 알츠하이머병 치료용 바이오신약의 성패가 가늠될 것으로 예상된다. 신약 개발 회사들이 성공적인 결과를 내놓으면 4공장을 바로 착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알츠하이머병용 바이오의약품은 고령화로 환자 수가 급증하고 있는 데다 정기적 투여로 생산량이 많기 때문에 설비투자를 미래 해둬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공장 준공 후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받는 생산 승인 기간이 경쟁사들은 통상 4년이 걸리지만 우리는 2년 5개월이면 받아낼 정도로 품질관리 능력이 뛰어나다. 알츠하이머병용 같은 대형 신약이 개발되면 상당수 물량이 삼성바이오로직스로 몰리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4공장 이후의 공장은 미국이나 유럽 등에 직접 설립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세계 바이오의약품 시장은 2021년까지 5년간 연평균 9.4% 성장해 약 3440억 달러의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전망된다.프랑크푸르트=허진석 기자 jameshur@donga.com}

    • 201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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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진단]정책도 ‘벤처’처럼 거침없어야

    독일 뮌헨공대에는 아주 놀라운 학사 정책이 있다. 박사학위 수여 여부를 사실상 대기업이 결정한다. 세계적인 자동차 제조회사 BMW와의 산학협력 프로그램이 그런 식이다. BMW는 미래 자동차에 필요한 여러 기술을 뮌헨공대에 연구과제로 제안한다. 대학은 박사학위를 줄 만한 과제를 골라 대학원생들에게 공지하고, 학생들은 자신의 전공과 관심에 따라 적절한 과제를 선택한다. 놀라운 건 그 다음이다. 학생들이 과제 해결을 위한 연구를 마치면 BMW가 그 성패를 판별한다. 학위 수여 방식의 혁신이다. 더 놀라운 점은 BMW가 그 학생을 채용해 사내벤처까지 설립하는 점이다. 미래 기술을 상용화할 수 있도록 자본과 연구시설, 인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상용화에 성공하면 정식 기업으로 독립시키게 되니 학생의 연구 결과물을 심사할 때부터 허투루 할 수 없는 구조다. 뮌헨공대는 학생이 설립하는 기업에 자본금을 출자해 돕고, 향후 상업화에 크게 성공하면 자본을 회수해 교육에 재투자한다. 학생과 대기업과 대학이 얻는 몫은 명확하고, 일자리를 늘리는 튼튼한 벤처기업도 탄생한다. 학생이 대기업 사내벤처를 거쳐 벤처기업까지 차릴 수 있는 기회가 부러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영국은 주도권을 잡고 있는 금융산업에서 미국 등의 위협이 느껴지자 핀테크 산업을 밀어붙이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겠다고 한 ‘규제 샌드박스(제품, 서비스를 내놓을 때까지는 규제를 미적용하는 정책)’가 바로 영국이 핀테크 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키우기 위해 선택한 과감한 정책이다. 사실 벤처기업 육성 정책으로 먼저 세계의 부러움을 산 나라는 한국이다. 1997년 8월 제정된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벤처기업법)이 벤처기업 지원을 위해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마련되는 등 정부가 발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후 벤처 거품 등으로 부작용이 있기는 했지만 지원 정책이 벤처기업의 특성에 맞춰 신속하게 마련된 점은 평가하고 싶다. 당시 벤처기업협회에서 일했던 인사는 “미국과 캐나다, 일본 등에서 온 의원과 관료들은 한국이 어떻게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벤처기업육성법을 만들게 됐는지, 벤처기업은 어떻게 정의하는지, 지원 정책은 뭐가 있는지 전방위적으로 알아낸 뒤 돌아가곤 했다”고 회상했다. 벤처기업법이 신속하게 마련되던 당시는 실직자가 급증해 경제 회생과 일자리에 대한 수요가 높은 상황이었다. 지금 한국 사정도 다르지 않다. 18일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는 정책금융에서 연대보증 제도를 내년 말까지 폐지하기로 했다. 벤처기업계는 꾸준히 연대보증 폐지를 주장해왔지만 정부는 기술신용 등급과 신생 기업 위주로만 이를 적용해 왔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찔끔찔끔 대상을 넓히다가 이번에 아예 제한 없이 폐지하기로 했다. 벤처업계에서는 이를 반기면서도 좀 더 일찍 과감하게 시행했더라면 많은 젊은이가 새 기회를 가졌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한다. 뮌헨공대와 영국 정부처럼 말이다. 콩 심은 데 콩 난다. 벤처(모험) 기업을 지원하는 정책 결과도 모험적일 수밖에 없다. 기술을 평가해 자금을 제공하는 기술보증기금에 적자를 용인하지 않거나 연구개발 자금을 지원하면서 100% 회수를 바라는 것은 모순이다. 모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면 여느 정책과는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허진석 산업부 차장 jameshur@donga.com}

    • 2017-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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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진단]박성진 청문회, 이념보다 능력을 보고 싶다

    면접을 준비 중인 A 씨는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동종 기업 고위직으로 스카우트를 제안 받아 응했는데,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 시대에도 업적은 있다’는 취지로 평가한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A 씨를 스카우트하기로 한 기업 이사회에서 ‘어떻게 노무현 코드에 맞는 사람을 스카우트할 수 있느냐’며 반발하고 있고, 아예 면접도 보러 오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까지 전해 듣고 있다. 그런데 이 회사는 ‘부당한 차별 없이 능력만 보고 인재를 뽑아야 한다’며 블라인드 채용을 확대하고 있다. 최종 학력이나 출신, 사진 등을 보지 않고 채용을 하는 것이다. A 씨를 둘러싼 논란은 그런 의미에서 자가당착(自家撞着)이 아닐 수 없다. 한 사회의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는 여럿 있다. 계층 간 이동의 용이성, 많으면서도 고른 소득 분포, 높은 여성의 사회진출 비중, 사상과 언론의 자유, 관용성과 포용성 등이다. 우리는 이런 특성이 잘 갖춰진 사회를 선진국이라고 부러워하며 쫓아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특히 이런 지표들이 강조되고 있다. 문제의 회사는 ‘대한민국’이다. 노무현을 박정희로 바꿔치면 A 씨는 다름 아닌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다. 노무현이 아니라 박정희와 이승만의 긍정적인 면을 평가했다고 해서 정의당과 국민의당은 박 후보자가 청문회감도 아니라며 펄쩍 뛰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집권 여당이라 어정쩡한 태도다. 자유한국당은 야당이면서도 자신들과 코드가 비슷하다고 여겨서인지 잠잠하다. 코드가 주요 판단 기준이어서 야기된 요상한 구도다. 대한민국이 얼마나 이념 과잉에 빠져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박 후보자의 임명 타당성에 대해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많은 국민이 바라는 ‘상식과 이성’에 관한 얘기다.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인선에서 짚어야 할 핵심은 이념을 둘러싼 이런 것이 아니다. 중소벤처기업 분야는 이 정부가 거의 유일하게 성장에 중점을 두고 있는 분야다. 100대 국정과제에서 경제 부문은 대부분 ‘소득을 재분배하면 성장할 수 있다’는 기조에 맞춰져 있는데, 중소벤처기업 분야만은 전략적 접근을 통해 파이 자체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 정부 성장 전략의 핵심인 셈이다. 자동차 철강 조선 반도체 석유화학 등 기존 5대 주력 산업에 대한 위기감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그런데도 앞으로 100년, 200년 한국경제를 먹여 살릴 새로운 사업 분야에서의 성과는 좀처럼 들려오지 않고 있다. 일본과의 격차가 여전한 가운데 추격자이던 중국은 이미 상당수 분야에서 한국을 앞지르고 있다. 중소벤처기업 분야를 키우겠다는 것은 주식회사 대한민국이 살아남기 위한 미래 산업을 새로 만드는 ‘빅 픽처’의 영역이다. 독일의 강소(强小)기업들처럼 세계시장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도록 돕는 전략과 지원이 필요하다. 장관 후보자의 능력과 자질에 관한 논란은 이런 것들이어야 한다. 박 후보자는 ‘기술의 사업화’에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기술 창업’이다. 세계에서 독보적인 기술로 기업을 만들면 양질의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복지 격차가 줄게 된다. 청문회는 11일 열린다. 그날 박 후보자의 코드가 아니라 한국 경제의 미래를 밝힐 능력을 알고 싶다. 그를 내치려면 이념이나 종교가 아니라 능력과 관련한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게 대한민국이 갖춰야 하는 최소한의 양식(良識)이라고 생각한다. 허진석 산업부 차장 jameshur@donga.com}

    • 2017-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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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오토에버, 대구 복지지설에 멀티학습방 지원

    현대자동차그룹의 정보기술(IT) 회사인 현대오토에버(대표이사 장영욱)가 대구지역 아동관련 사회복지시설 5곳에 멀티학습공부방을 지원키로 하고 16일 대구시 북구 가정종합사회복지관에서 전달식을 가졌다. 현대오토에버는 노트북과 같은 하드웨어는 물론 멀티학습에 필요한 학습비도 함께 지원한다. 멀티학습공부방은 2013년부터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현대오토에버 대표 사회공헌사업이다. 현대오토에버 융합IT사업부 김종진 이사는“앞으로도 아동들의 교육 기회를 개선하기 위해 계속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허진석기자 jameshur@donga.com}

    • 2017-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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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진단]전기차 위협하는 탈원전

    지금은 산업의 격변기다. 앞으로 10년을 더 탈 자동차를 사려고 하면 금방 느낄 수 있다. 예전 같으면 성능과 디자인, 주머니 사정 정도만 고려하면 됐다. 지금은 에너지원까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볼보자동차는 최근 내연기관 신차 개발 중단을 선언했다. 당장 2019년부터 볼보의 내연기관 신규 자동차는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 기존 차량은 당분간 유지되겠지만 10여 년이 더 지나면 세상에서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자동차 산업에 던지는 상징적 의미가 작지 않다. 전기차로 출발한 테슬라의 시가총액이 포드자동차를 앞지른 것에 이어 전기를 에너지로 한 자동차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알리는 견고한 신호다. 세계 최초의 내연기관 자동차인 카를 벤츠의 ‘페이턴트 모터바겐’이 1888년 프랑스에서 양산되기 시작한 지 131년 만의 일이다. 1903년 자동차가 도입된 한국은 116년 만에 맞는 신물결의 파도다. ‘말 없이 달리는 마차’의 시대가 ‘기름 없이 달리는 자동차’의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 구매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전기가 대세인 것 같아 전기자동차를 선택하고 싶지만 순수 전기차는 아직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현대차의 아이오닉과 기아차의 쏘울, 르노삼성의 SM3ZE, 한국GM의 스파크와 볼트 등이 시장에 나와 있는 정도다. 최근 테슬라도 들어오긴 했다. 격변기 가운데 소비자는 이런 적은 종에서 선택해야 한다. 선택의 폭은 좁지만 연료비가 적게 들어 마음이 흔들린다. 기존 내연기관 차량에 비해 연료비가 10∼20% 수준이다. 아반떼1.6 휘발유가 연 157만 원의 유류비가 들 때 전기차 아이오닉을 사용하면 16만∼38만 원 정도면 된다. 근데 고민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전기차는 10년 정도 사용하면 배터리를 갈아야 하는 변수가 있다. 지금은 배터리가 전기차 제조원가의 30∼40%로 1000만 원이 넘는 가격대이지만 기술 발달로 가격이 떨어지고 있어 이 점도 살펴야 한다. 최근에는 또 다른 변수가 생겼다. 바로 탈원전 이슈다. 전기차 선택 배경에는 친환경과 낮은 충전비가 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신고리 5, 6호기 공사 중단에 이어 독일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도 원전을 줄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원전이 줄면 전기료가 인상될 공산이 크다. 1kWh를 생산하는 데 원전은 40원이면 되지만 신재생에너지로는 240원이나 든다. 2016년 말 기준으로 한국의 전기 생산에서 원자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30.7%나 된다. 기후변화를 염려해 전기차를 선택하려던 소비자도 멈칫하게 한다. 원자력을 줄이고 정부 방침대로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을 늘리면 탄소 배출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이 최근 미국을 방문했을 때 유명 환경보호론자와 과학자 27명이 탈원전 정책을 재고해 달라는 서한을 공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격변기의 정책은 더 정교해야 한다. 싼 가격에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은 한국이 수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중요한 힘이기도 하다. 소규모 개방경제를 가진 한국에 수출 경쟁력은 일자리 문제와도 직결된다. 안전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작용이 없도록 타이밍을 현명하게 살펴야 한다. 허진석 산업부 차장 jameshur@donga.com}

    • 2017-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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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진단]어느 기업의 ‘정규직 채용 투자’

    안마의자로 유명한 바디프랜드의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본사는 독특했다. 근무시간 중에도 이용이 가능한 피트니스클럽과 카페, 미용실, 네일아트 전문숍, 꽃집, 고급 레스토랑, 병원 등이 회사 안에 있었다. 유니폼과 셔츠를 맞춰주는 옷 가게와 업무 공간에 걸어둘 그림을 그리는 화가까지 두고 있었다. 놀라운 점은 이런 복지시설에 근무하는 피트니스클럽 강사와 카페 직원, 미용사, 네일아티스트, 원예사, 요리사, 영양사, 홀 서빙 직원 등이 모두 정규직이라는 점이다. 이 덕분에 고급 레스토랑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설이 무료다. 미용실과 네일아트 전문숍에서는 시중가 10만 원대의 서비스를 재료비 2만 원 정도만 내고 이용한다. 바디프랜드는 회사가 성장하면서 2015년 10월 지금의 큰 사옥으로 이사했다. 다양한 복지시설도 처음으로 갖췄다. 이때 구내식당과 레스토랑, 카페·베이커리 운영 인력 30명, 피트니스클럽 운영 인력 10명 등 약 50명을 모두 정규직으로 뽑았다. 바디프랜드는 왜 복지시설 인력까지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걸까.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이슈인 한국 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이 적지 않을 것이다. 2007년 출범한 바디프랜드는 창업 초기부터 전 직원 정규직 채용을 원칙으로 삼았다. 안마의자라는 당시로서는 낯선 제품을 소비자에게 설명하고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영업이나 배송 담당 직원, 콜센터 직원이 자주 바뀌어서는 사업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정규직 채용 원칙은 2014년 서울 강남구 뱅뱅사거리에 처음으로 작은 사옥을 가졌을 때 미화원과 경비원을 정규직으로 뽑는 것으로 이어졌다. 현재 바디프랜드의 직원 약 1100명은 모두 정규직이다. 본사에서 일하는 약 500명은 물론이고 전국 110곳의 직영매장(전시장)과 콜센터,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직원도 모두가 그렇다. 모든 매장을 정규직 직원으로 운영함으로써 ‘낯선 제품’의 유통 가격이 흐려지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이동환 부사장은 “한때 대리점 체제로 운영을 했는데, 대리점주의 사정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고 애프터서비스도 일관되지 않아 금방 접었다”고 말했다. 업무 효율성도 높아져 안마의자를 배송할 때 타사는 3, 4명이 움직이지만 바디프랜드는 2명이 해낸다고 덧붙였다. 복지시설 운영 인력까지 정규직으로 채용한 것은 원칙과 관행 때문이지만 회사는 여전히 ‘전 직원 정규직 채용’이라는 ‘투자’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이 부사장은 “회사가 급속히 성장하고 있어 경험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 직원 정규직 채용의 가장 큰 원동력은 성장세다. 2014년 1438억 원이던 바디프랜드 매출액은 2015년 2636억 원, 2016년 3665억 원으로 해가 바뀔 때마다 1000억 원 이상씩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영업이익은 930억 원으로 알려졌다. 바디프랜드같이 정규직 직원을 많이 갖춘 기업을 누가 싫어하겠는가. 문제는 지속성이다. 한국은 최근 ‘쿠팡맨 사태’도 겪고 있지 않나. 바디프랜드도 단순한 선의로 전 직원 정규직 채용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다. 기업 성장 정책을 우선시하지 않는 일자리 추구 정책은 환상에 불과하다. 씨도 뿌리지 않고 수확을 기대하는 것과 다름없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중요하지만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된다. 허진석 산업부 차장 jameshur@donga.com}

    • 201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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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진단]정규직 전환의 성공조건

    통신업을 한 지 20년이나 되는 SK브로드밴드가 문재인 대통령 당선 이후 유례없는 정치적 주목을 받고 있다. 인터넷과 인터넷TV(IPTV), 전화 등의 애프터서비스(AS)와 신규 고객 유치 업무를 하는 103개 고객센터 소속 위탁업체 직원 5189명 전부를 내년 7월까지 모두 자회사 정규직으로 바꾸겠다고 21일 밝혔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주창하는 ‘공공기관 비정규직 제로(0)’의 슬로건이 대기업에도 영향을 미쳐 이런 조치가 발표된 것 아니냐는 해석 때문에 시선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새 정부가 출범한 것이 5월 10일인데, 열하루 만에 이른바 ‘코드’를 맞추기 위한 목적으로 이런 발표를 했다고 여기는 것이 상식적인 해석일까. 경과만 살펴봐도 이런 해석은 무리다. SK브로드밴드는 고객센터를 자회사에 의한 직영 체제로 전환하는 전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올해 1월에 이미 태스크포스(TF)를 꾸렸다. 그 이전인 2015년 5월에는 고객센터의 안정적 운영을 돕는 방안과 고객센터의 구조를 혁신하는 방안을 뼈대로 하는 종합개선 방안도 마련했다. 2014년 3월 민주노총 산하에 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지부가 생기고, 이후 부분·순환·전면 파업 등으로 고객 서비스가 불안정해진 것이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시장 상황은 핵심적 영향을 끼쳤다. 인터넷 가입 가구가 거의 포화상태에 있고, 통신사별로 상품 차별화가 힘든 상황이어서 고객센터의 응대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고장 나 신고를 했는데도 늦장 출장이 잦다면 통신사를 바꾸지 않을 고객이 몇이나 되겠는가. 통신사업자를 바꾸는 가구가 늘어나면 회사는 황금알을 낳아 줄 거위도 잃게 되는 게 현재의 시장 상황이다. 가구별로 지금은 인터넷과 IPTV, 전화 서비스 정도를 사용하고 있지만 4차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 그 서비스는 사물인터넷(IoT)과 헬스케어 인공지능비서 헬스케어 에너지관리 등으로 크게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SK브로드밴드는 이에 자회사 ‘홈앤서비스’(가칭)를 만들어 고객 서비스의 질을 높임으로써 홈토털 서비스의 허브로 육성한다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올해 3월 이형희 사장이 기자간담회에서 “향후 5년간 5조 원을 투자해 국내 제1의 유무선 플랫폼이 되겠다”고 밝힐 때 ‘유통 경쟁력 강화’도 얘기했다. 정규직 전환은 이전 정부에서도 있어 왔다. SK텔레콤은 2013년 5월 통신망 유지 보수 업무를 하는 인력과 고객 상담과 불만 접수 등의 일을 하는 인력 약 4300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기술 변화 속도에 맞춰 효율적으로 지역별 기지국을 통합 관리하고 고객 눈높이에 맞춘 응대로 가입자를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정규직 전환 후 고객상담센터 직원들의 퇴사율이 2011년 6.5%에서 2016년에는 1.9%로 크게 낮아져 내부에서도 성공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얘기를 최근에 들었다. 새 정부는 최근 한국경영자총협회 김영배 상임부회장의 발언을 반박하면서 정부가 민간기업에 정규직 전환을 강요하는 것으로 오인하는 것을 질타했다. ‘강요가 아닌 필요’에 의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건강한 일자리를 만드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정부와 재계는 시선이 다르지 않다. 본질은 양질의 일자리다. 정부와 재계가 마음을 모아 지속 가능한 양질의 일자리를 늘려 주기를 국민은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허진석 산업부 차장 jameshur@donga.com}

    • 2017-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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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진단]새 시장 개척하는 ‘기찬’ 상품들

    일본 유니클로는 최근 소비자의 취향이나 몸 사이즈에 딱 맞는 맞춤형 의류를 열흘 이내에 제공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이는 기존에는 1년이 걸리던 옷의 기획과 생산 판매를 2주 이내로 단축하겠다는 ‘아리아케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판매점에서 팔리는 옷이나 소비자의 취향은 전자태그와 인공지능(AI) 기술을 기반으로 디자이너에게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돼 생산 기획에 활용된다. 그만큼 생산 시간을 줄일 수 있고, 시장 수요를 잘못 판단해 생기던 재고도 줄일 수 있게 됐다. 상품을 만든 뒤 팔겠다는 게 아니고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을 만들어서 팔겠다는 제조업체로서는 획기적인 발상이다. 유니클로는 반년이나 1년 전에 상품을 기획해 파는 방식을 적용하고 있었는데, 이마저도 따뜻한 겨울 같은 예기치 못한 상황을 피할 길은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이다. 야나이 다다시 패스트리테일링 회장은 아리아케 프로젝트를 발표하면서 “시대가 의류제조업에서 정보제조소매업으로 바뀌고 있다”며 구글이나 아마존을 경쟁자로 지목하기도 했다. 늘 입어 오던 옷뿐만 아니라 주방에서 사용하던 오래된 제품인 믹서에도 신제품이 등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 가구 업체 한샘이 처음으로 만들어 팔고 있는 진공 믹서 ‘오젠’이 그 주인공이다. 진공 상태에서 과일을 갈아 재료와 공기의 접촉을 차단함으로써 산화를 방지하고, 원재료의 색과 영양소를 더 많이 살려 준다는 제품이다. 믹서 시장에서 진공 상태에서 과일을 간다는 아이디어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즙이 층층이 분리되는 현상도 줄고, 맛도 한층 더 진하다는 게 써 본 사람들의 평가다. 평범한 믹서에 혁신을 불어넣은 이 제품은 지난해 제네바 국제 발명품 전시회에서 금상과 함께 전시 주최 측이 수여하는 특별상도 동시에 받았다. 한샘 측은 “오젠을 발판 삼아 해외 시장도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있다”고 밝혔다. 평판 TV도 평범하게 보인 지 오래인데 최근 이 시장에도 획기적인 제품이 등장했다. LG전자가 올해 내놓은 ‘LG 시그니처 올레드 TV W’다. 이 제품은 두께가 4mm에 불과하고 광고에서 무용수들이 하는 것처럼 벽에 밀착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제품이다. 화면만 남기고 모든 것을 다 들어내는 단순함으로 TV를 예술품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런 획기적인 제품력 덕분에 1400만 원이라는 고가에 판매하고 있다. 이런 고가 신제품에 힘입어 LG전자에서 TV 사업을 하는 HE사업본부는 1분기 영업이익으로 3822억 원의 실적을 올렸다. 분기 기준으로는 역대 최고 기록이다. 영업이익률도 8.8%로 1분기 실적으로는 최고였다. 세계 경기는 회복되고 있다는데 내수 시장에는 아직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지난달 일제히 매출 감소를 겪었던 백화점들은 이번 황금연휴에 매출 증가를 기대했지만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큰 재미는 보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세먼지 등의 영향이 있었다지만 소비자들은 여전히 지갑을 닫고 있는 것이다. 시장은 항상 어렵고 소비자들은 늘 쓸 돈이 부족하다. 그러나 해답은 언제나 돈보다 뛰어난 가치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최근에 등장한 신제품들은 웅변하고 있다. 기업은 결국 ‘신상품’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허진석 산업부 차장 jameshur@donga.com}

    • 2017-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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