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야

최고야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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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최고야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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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4-03-27~20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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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가정27%
문화 일반10%
건강10%
학술7%
사회일반3%
산업3%
경제일반3%
  • 현대적 감각 더한 이문열의 ‘세계명작’

    현대 소설의 전범(典範)이 될 만한 작품을 소설가 이문열 씨(72)가 묶은 ‘이문열 세계명작산책’(무블)이 최근 다시 나왔다. 1996년 이 작가가 해외 중단편 명품 100편을 주제별로 10편씩, 모두 10권의 전집으로 출간한 것을 판형을 바꾸고 시대에 맞게 번역도 바꿨다. 기존 100편 가운데 12편을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이나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교체했다. 일본어 중역(重譯)이 포함된 옛 번역도 원전의 언어에서 바로 번역했다. 이렇게 바뀌거나 새롭게 번역된 것이 전체 작품의 30%에 이른다. 이번 개정판 역시 전체 10권으로 기획됐으며 1권 ‘사랑의 여러 빛깔’(왼쪽 사진)과 2권 ‘죽음의 미학’(오른쪽 사진)이 먼저 나왔다. 사랑의 본질이나 속성을 다룬 작품을 모은 1권에서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슌킨 이야기’와 오 헨리의 ‘잊힌 결혼식’이 보태졌다. 이 작가는 “어릴 때 (안톤) 체호프, 모파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단편작가로 외운 오 헨리에 대한 예우”라고 했다. 2권은 ‘고대로부터 문학의 가장 진지한 주제이면서 또한 가장 감동적인 장치’인 죽음을 다룬 작품을 모았다. 매 작품 끝에 달린 이 작가의 작품 해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좋은 글이다. 특히 새로 쓴 ‘슌킨 이야기’ 해설은 흥미롭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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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에도 ‘현대판 택배기사’ 있었다

    ‘태상(太上) 4년 고구려가 다시 사신을 보내 천리인 열 명과 천리마 한 필을 바쳤다.’(‘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5호 16국 시대 중국 남연(南燕)의 왕인 모용초(慕容超)에게 ‘천리인’과 천리마를 선물로 보냈다. 천리인은 먼 길을 빠르게, 잘 뛰는 사람이다. 말은 당연히 사람보다 빠르지만 유지비가 비싼 게 문제였다. 말을 대신해 달리는 직업이 생겨났고, 조선시대에는 이들을 보장사(報狀使)라고 불렀다. 폭설이 오거나 밥을 굶어 제대로 달리지 못해 하루라도 늦으면 벌금을 물었다. 최근 택배 종사자의 과로사로 문제가 되는 상황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업(業)의 고단함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신 연구자 4명이 현재와 다른 듯 같은 조선시대의 ‘잡(job·일)’에 집중한 ‘조선잡사(朝鮮雜史)’(민음사)를 펴냈다. 동아일보에 2017년부터 1년 3개월 동안 기고한 칼럼에 살을 붙였다. 연고 없는 시신을 처리하는 매골승(埋骨僧)은 고독사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1614년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굶주린 백성이 대낮에 서로 잡아먹고 역병까지 겹쳐 죽은 자가 이어졌다. … 승려들을 모집하여 그들을 매장하니 이듬해에 끝났다”는 기록이 있다. 매골승은 가족 없는 시신을 찾아 불교식 장례를 지내주고 묏자리를 봐줬다. 나라에서 주는 곡식을 받아 생계를 꾸린 매골승은 준공무원 신분이었다. 군 면제를 받으려고 멀쩡한 치아를 뽑거나, 의료 기록을 조작하는 등 편법이 난무하는 요즘과 같이 조선시대에도 병역 기피 현상이 있었다. 다만 당시에는 가난한 백성이 생계를 이유로 군대를 못 가는 이유가 컸다. 군역(軍役)을 대신 해주는 품팔이들을 대립군(代立軍)이라 불렀다. 양반은 대립군을 불법 행위에 악용하기도 했다. 1700년 이세종은 과거시험장을 지키는 군졸을 매수한 뒤 자신의 종을 대립군으로 대신 들여보내 그 틈에 부정 행위를 해서 급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관직에 오른 뒤 이 사실이 탄로나 지방으로 쫓겨났다. 해외에서 인기인 K뷰티의 DNA를 짐작해볼 수 있는 직업도 있다. 조선시대 왕실과 사대부 여성들은 화장에 관심이 많았다. 유일한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는 ‘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 얼굴 화장과 머리 모양의 실상을 상세히 서술했다. 이때 활동한 이들이 화장품 판매상 매분구(賣粉嫗)다. 이들은 도매와 방문판매를 도맡았고 19세기에는 약방 형태의 화장품 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다. 자영업 창업이 치킨집에 쏠리는 것처럼 과거엔 만만한 게 짚신, 돗자리 장사였다. 재료비가 저렴한 짚신은 ‘끝없이’ 소비되는 소비재였고, 돗자리 역시 별 기술 없이도 쉽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필진인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교수는 “기술이 발전해도 먹고사는 문제는 형태만 달라질 뿐 근본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다”며 “어느 직업이든 각 분야 1등은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지금과 유사하다”고 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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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목숨 걸고 취재하는 AP 기자들

    신뢰와 조롱 사이를 외줄타기하듯 오가는 언론의 지위는 언제부터 출렁이기 시작했던가. 현장 기자들이 정도(正道)를 가기 위해 여전히 고군분투하는 것에 비해 ‘기레기’라는 말로 ‘기자’라는 이름의 무게가 속절없이 가벼워져 버린 요즘이다. 언론의 존재 이유에 많은 이가 의문을 제기하는 가운데, 저자는 세계적 통신사인 AP 특파원 61명을 인터뷰해 기자들이 마주하는 취재 현장 이야기를 담았다. 때로는 욕받이가 되면서도 왜 언론은 존재해야 하며, 관찰자의 사명감을 가진 기자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1864년 미국 뉴욕에서 설립된 이후 AP는 6·25전쟁, 베트남전쟁, 9·11테러, 시리아 내전 등 전 세계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함께해 왔다. 책에는 5·18민주화운동을 취재한 특파원 테리 앤더슨 이야기도 등장한다. 1980년 앤더슨은 광주에서 군인들이 시위대를 향해 총부리를 겨눴던 참혹한 현장을 9일간 취재했다. 그가 묵던 호텔 방 벽에 총탄이 박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지만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거리에 나가 방치된 시신 수를 셌다. 그날 군부가 발표한 사망자는 3명이었지만 그가 본 시신은 179구였다고 한다. ‘라떼는 말이야’ 같은 모험담도 당연히 포함돼 있다. 중국 톈안먼(天安門) 사태를 취재하다 중국 인민군에게 총살 위협을 당했다거나,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정권의 양민 학살 현장에서 헬기로 탈출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 진실을 보도했다거나,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로 진격하는 탈레반의 심장으로 들어가 처형당한 전 대통령의 시신을 목격했다는 얘기 등이다. 역사의 현장에 있던 기자들의 무용담이 대부분이라 현실 기자의 삶과는 괴리가 있다. 대부분의 기자는 책에 소개된 사례들과 달리 (가끔 살해 협박을 받을 순 있어도) 생명을 걸고 취재하는 경우는 드물며, 데스크(상사)가 특파원 부임 통보를 하면서 “죽으면 네 시체는 찾으러 갈게”라고 말하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0-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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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 등 ‘학문의 뿌리’ 세우기 40년, 고전-기초학문 계속해서 지원할 것”

    우보천리(牛步千里). 서두르지 않고 우직한 걸음을 차근차근 내디뎌 온 대우재단의 학술사업이 올해 40주년을 맞았다. 주목도 높은 응용학문 대신에 당장 빛을 보지 못하더라도 기초학문에 꾸준히 지원해 국내 학계의 기초체력을 튼튼히 하자는 게 40년간 지켜온 운영 철학이었다. 서울 용산구 대우재단 사무실에서 23일 만난 김광억 대우재단 학술사업운영위원회 위원장(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73)은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뿌리와 줄기가 튼튼해야 한다. 학문의 뿌리를 세워 간다는 자부심이 40년을 이끌었다”고 했다. 대우재단의 학술사업은 1980년 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200억 원을 출연하면서 시작됐다. 국가 차원에서 투자가 잘 이뤄지지 않는 기초과학, 인문학 등 순수학문에 지원하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현재까지 1547건의 연구 지원이 이뤄졌고, 연구 저서는 784권이 출간됐다. 40년간 학술사업에 들어간 투자비용은 445억 원에 이른다. 2018년 취임한 김 위원장은 1981년부터 자문을 맡으며 재단과 오랜 인연을 맺어왔다. 그는 “기초학문 분야에 특히 주목한 것은 국내 학계가 ‘지식 식민지’ ‘지식 수입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외 석학의 연구 결과를 수입해 들여오기만 하는 풍토에서 벗어나려면 지식 생산 기반인 기초학문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우리 학계에선 왜 노벨상 수상자가 안 나오느냐는 비판이 많은데, 학문적 자생력이 튼튼한 나라여야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대우재단이 펴낸 고전 학술총서를 보면 재단이 추구하는 운영 철학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철학, 윤리학, 교육학 등 다양한 분야의 동서양 고전을 현대적 관점에서 번역한 시리즈다. 김 위원장은 “서양에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반으로 현대철학이 계속 발전해 가는데, 우리 학계는 과거를 잊고 앞만 보며 달려간다”며 “이 책이 필요한 사람이 국내에 100명도 안 될지라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고전 연구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재단에서는 모든 연구 결과를 책으로 낼 수 있도록 출판비용까지 지원한다. 수요가 적어 빛을 보기 어려운 학술서 특성상 출판사에 손해를 보전해 주고서라도 연구 결과를 세상에 내놓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대우그룹 해체 후에는 자산 매각 등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고 있어 지원 대상이 축소돼 안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출간을 위해 학문적 관점에서 연구 진행에 문제는 없는지, 결과물이 나오면 더 보강할 것은 없는지 중간, 마무리 평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올해 발간한 학술서 15권 중 8권이 정부에서 선정하는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됐다. 지난해에는 16권 중 9권이 선정됐다. 대우재단은 4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으로 ‘인간·새로운 지평: 융합적 성찰, 의제와 전망’을 30일 진행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변화하는 학문 생태계에서 융합학문의 차원으로 기초학문 연구를 확장시켜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행사다. 김 위원장은 “과학기술 사회에서 인간의 소외현상이 심화되는데, 이럴 때일수록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며 “인간과 자연, 사물에 대한 융합적 연구를 위해 동양적 세계관이나 동서양 철학 융합연구에도 앞으로 많은 지원을 하겠다”고 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0-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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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사시절 과학동아 연재… ‘글쓰는 과학자’ 첫발 내디뎌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48)가 중학교 1학년 시절 물리 선생님은 매달 과학동아가 학교에 배달될 때마다 정 교수를 따로 불렀다. 마음에 드는 기사나 칼럼을 하나 정한 뒤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변화할 미래의 모습을 상상해 글짓기를 해오는 숙제를 내줬다. 최근 서울 용산구 사무실에서 만난 정 교수는 “교과서 수식을 외워 문제를 푸는 것보다 과학자들이 개발한 기술로 우주와 자연의 신비를 밝히는 기사를 읽는 게 훨씬 재밌었다. 과학동아를 보면서 과학자의 꿈을 키웠다”고 했다. 정 교수는 KAIST 석사 과정을 밟던 1995년 과학동아와 인연의 끈이 다시 이어졌다. 영화 동아리 회장이었던 정 교수가 학내 신문에 영화 칼럼을 연재하던 것이 대학 선배인 당시 곽수진 과학동아 기자의 눈에 띄었던 것. 이를 인연으로 정 교수는 과학의 눈으로 영화를 분석하는 ‘시네마 사이언스’라는 칼럼 연재를 시작했다. 정 교수는 “어렸을 때 과학동아를 보면서 과학자의 꿈을 키웠는데, 원고 청탁을 받으니 감격스러웠다. 첫 회가 나간 달 과학동아가 완판됐다고 한 게 기억난다”고 했다. ‘시네마 사이언스’는 원래 6개월만 연재할 계획이었지만 5년 6개월간 이어졌다. 당시 정 교수는 칼럼 원고 첨삭을 담당했던 기자들에게 다양한 글쓰기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연재하는 동안 정 교수의 원고를 담당한 ‘글쓰기 선생님’은 6명이었는데, 원하는 글쓰기 스타일이 전부 달랐기 때문. “누구는 짧고 명료한 글쓰기를 원했고, 누구는 예시를 들어 쉽게 설명하길 원했어요. 대중적 눈높이에서 과학적 글쓰기를 할 수 있도록 ‘과외’를 받은 거죠.” 정 교수는 동아일보에서 2001년 ‘정재승의 음악 속의 과학’, 2009년 소설 ‘눈먼 시계공’을 연재했다. 2011년 출간 이후 120만 권 가까이 팔린 저서 ‘정재승의 과학콘서트’에도 그동안 연재한 칼럼 일부가 들어갔다. 소설가 김탁환과 함께 동아일보에 연재한 SF소설 ‘눈먼 시계공’은 2010년 단행본 출간 이후 10만 권 가까이 팔렸다. ‘다윈 지능’ ‘통섭의 식탁’ 등을 펴낸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도 정 교수와 비슷한 시기인 1999∼2001년 ‘최재천의 책꽂이’라는 동아일보 칼럼을 연재했다. 정 교수는 “동아일보가 2000년대 이후 국내 과학계 저자들을 발굴하면서 해외 석학의 책을 그대로 번역하던 국내 과학출판계 문화를 바꿔놨다”며 “우리 과학자가 우리말로 과학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고 했다. 정 교수는 글쓰기를 배운 것이 과학자로서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지난해 영국 네이처지에 3년 반 동안 연구한 내용을 4, 5쪽 분량의 논문으로 압축해야 했는데, 칼럼을 쓴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는 것. “과학자가 실험을 설계하고 데이터를 분석해 원하는 결과를 얻더라도 그걸 세상에 알리려면 글쓰기를 통해야 합니다. 동아일보와 함께 쌓은 글쓰기 경험이 결국 더 나은 과학자가 되도록 도움을 준 거죠.”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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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도 저출산 걱정… 혼기 놓친 양민에게 500냥 지원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김연자 ‘아모르 파티’) 유행가 가사처럼 이제 결혼은 선택의 영역이 됐다. 조선시대에는 자식을 낳아 노동력을 확보하고 대(代)를 이어야 했기에 결혼은 필수였다. 신분과 상관없이 결혼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사업팀이 펴낸 ‘조선의 결혼과 출산문화’(은행나무)를 통해 익히 알려지지 않은 조선의 결혼 문화를 살펴봤다. ○ 하층민, 노동력 확보 위해 나라에서 중매 ‘하늘과 같은 성덕과 바다와 같은 은혜로/좋은 날로 이미 혼인날을 정하였으니/예전에는 옷도 먹을 것도 없는 가난을 한탄하는 소리만 있었지만/오늘은 신랑 신부의 좋은 일을 즐겁게 여기는 소리만 있네.’(작자 미상 ‘동상기(東廂記)’)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지금의 ‘N포 세대’가 있듯, 18세기 조선에도 가난 때문에 혼기를 놓친 이들이 있었다. 이때 관리들이 나서 미혼 남녀를 조사해 중매하고, 결혼자금 500냥과 혼수를 나눠줬다. 출산으로 인한 양민의 증가는 곧 노동력 증가를 의미하고, 이는 국가 경쟁력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사족(士族)의 딸로 서른 살이 넘어서도 결혼하지 못하는 사람은 호조(戶曹)에서 왕의 허락을 받아 혼수를 제공한다”는 기록이 있다. 법전인 속대전에도 “혼기를 넘긴 자에 대해 한성부와 각 도에 명령해 이들을 찾아내 호조 및 영읍(營邑)에서 혼인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다. 하층민 사이에서는 열 살 미만 여자 어린이를 데려가 15세 전후에 결혼시키는 예부제(豫婦制)도 성행했다. ‘꼬마 며느리’를 키워 노동력에 보탰고, 나중에 물품으로 친정에 대가를 치렀다. 이는 혼례에 드는 비용을 줄이는 효과도 있었다. ○ 아들 낳으려… 연상연하 커플 많았던 양반층 양반층에게 혼인은 가문의 존속이 달린 문제였다. 여성의 혼인 연령은 임신이 가능한 17세 전후로 고정됐지만 빨리 후손을 얻기 위해 양반 남성의 혼인 연령은 점점 내려갔다. 1500년대 후반 양반 남성의 평균 혼인 연령은 18.3세에서 꾸준히 낮아져 1800년대 후반에는 15.5세가 됐다. 경남 산청 지역의 호적 기록(1686∼1799년)을 보면 당시 연상연하 부부의 비율이 중·하층민에서는 각각 36.2%, 36.4%였는데, 상류층은 44%에 달했다. 양반가 여성들은 남편이 일찍 죽더라도 재혼을 금지당했다. 정절을 중시한다는 명목도 있었지만 자녀들이 새아버지의 성을 따르게 되면 대가 끊길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중매로 힘겹게 혼인하는 경우도 있었던 하층민과 달리 상류층에서는 집안끼리 마음만 맞으면 청혼서 발송부터 혼례까지 10일 안에 끝났다. 결혼 성수기는 날씨가 좋은 봄, 가을이 아니라 농번기와 식중독 위험을 피한 겨울이었다. 책을 집필한 박희진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는 “현재의 출산, 혼인 등 인구지표는 과거의 (남아 선호 등) 사회문화적 현상에 영향을 받은 결과”라며 “한국 사회에 연속적으로 작용하는 조선의 제도문화적 맥락과 인구 동태 사이의 연관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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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조상들에게 배우는 ‘생존의 지혜’

    전염병의 대유행, 환경오염에 의한 기후변화, 핵전쟁 위협…. 현재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는 수없이 많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전 세계 누적 확진자 4100만 명을 기록하고 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맨얼굴이 ‘비정상’인 시대가 끝날 기약이 없다. 하지만 저자는 “조상들보단 우리가 좀 더 낫지 않느냐”며 인류가 견뎌온 비참한 역사적 현장들로 독자를 데려간다. 언론인 출신이자 종말론을 주제로 한 미국 팟캐스트 ‘하드코어 히스토리’를 진행해온 저자는 역사에서 반복된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짚어보고, 앞으로 벌어질 위기 시나리오를 논한다. 먼저 수많은 사망자를 낸 전염병의 역사에 주목했다. 가장 심각했던 전염병은 1300년대 중세 유럽에서 유행한 흑사병이다. 전염병에 대한 기본적 의학 지식조차 없었던 시절 유럽인들은 “세계 종말이 왔다”고 믿었다. 쥐를 숙주로 하는 페스트균이 인간에게 전염돼 반세기 동안 7500만 명 정도가 죽었다. 치료제가 개발돼 더 이상 인류를 위협하지 않게 됐지만 저자는 흑사병 이후 무너진 국가 시스템과 종교의 권위에 대해 설명하며 우리가 이제부터 대비해야 할 사회문화적 후유증 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류는 로마 등 거대 제국의 몰락, 세계대전, 대공황 같은 위기를 겪었다. 미국의 일본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이후 핵무기 위협은 현재진행형이다. 저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전쟁 위험을 안고 사는 상황을 ‘지옥으로 가는 길’에 빗대 경고한다. 현재 상황이 ‘조상들보단 낫다’고 말하면서도 이 책은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다. 미국에서 발간된 책의 원제 ‘The End is Always Near(종말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처럼 위협은 늘 있어 왔고, 우리는 이에 맞서 싸워 이겨야 할 태세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대기 순, 주제별 분류 등이 일목요연하지 않고 산발적이어서 전달력이 부족한 것은 아쉽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0-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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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건 신부가 그린 조선전도에 ‘동해’ 있었다

    19세기 한반도 지도에 라틴어로 ‘동해’를 명기한 김대건 신부(1821∼1846)의 ‘조선전도’ 사본이 추가로 공개됐다. 미국 해군에서 당시 조선의 지리를 파악하기 위해 사용한 지도다. ‘19세기부터 ‘일본해’ 표현이 국제적으로 정착됐다’는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종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20일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이 소장한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 사본을 국내 처음으로 공개했다. 지도 이름은 프랑스어로 ‘Carte de la Coree’, 우리말로 ‘한국 지도’라는 의미다. 김 신부가 1840년대에 포교를 위해 그려서 해외로 보낸 여러 장의 한국 지도를 통틀어 ‘조선전도’라고 부른다. 이번에 공개된 조선전도는 1868년 3월 미 해군 J R 펠란 장교가 김 신부의 지도를 모사한 것으로, 원작자가 ‘김대건 신부’라고 명기돼 있다. 미국 정부는 1866년 조선인들이 미국 상선을 불태운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해군을 파견했다. 이 지도는 미 해군의 항해를 위한 지리 정보 파악을 위해 사용됐다. 김 연구위원은 “지도 원본은 김 신부가 포교를 위해 1845년 작성해 마카오의 천주교 파리외방전교회 지부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의 지리에 대한 정보가 없던 미 해군에서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번에 공개된 조선전도에는 동해라는 뜻의 라틴어 ‘MARE ORIENTALE’와 독도가 표기돼 있다는 점에서 김 신부가 작성한 다른 지도들과 다르다. 앞서 공개된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BnF)에 소장된 김 신부의 또 다른 조선전도에는 울릉도 동쪽에 독도의 옛 지명인 우산도를 로마자로 ‘Ousan’이라고 표기했으나 동해라는 표기는 따로 없었다. 김 연구위원은 BnF에서 라틴어로 ‘동해’ 표기가 된 또 다른 조선전도도 발견했다. 역시 김 신부가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김 연구위원은 “작자 미상의 라틴어 지도지만 지명 일부에 한글 표시가 있고, 김 신부의 다른 지도와 하천, 해안선 등이 대부분 일치한다”며 “미국 프랑스에서 사용한 지도에 ‘동해’가 명기됐다는 것은 19세기부터 ‘일본해’ 표현이 정착됐다는 일본의 주장을 반박할 근거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같은 내용을 동북아역사재단이 독도의 날(25일)을 맞아 22일 여는 ‘독도 주권 연구의 역사·지리적 성과와 과제’ 포럼에서 발표할 예정이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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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은 도서관에 날개를]버스에서 책 읽고 퀴즈 풀고… “캠핑 재미가 2배”

    “친구들, 모여라!” 움직이는 작은 도서관 ‘책 읽는 버스’가 16일 경기 파주시 임진각평화누리 캠핑장에 멈춰 섰다. 보라색 머리의 마녀로 분장한 구연동화 선생님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마스크를 쓴 아이 20여 명이 버스 앞에 모여들었다. “쿵덕쿵덕 시소 타며 박수쳐 봐요, 짝짝짝, 이제 바닷속으로 들어가 볼게요.” 구연동화가 시작되자 아이들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구연동화 선생님이 가방에 있던 쓰레기를 바다에 휙휙 버리는 시늉을 하자 아이들은 “안 돼! 버리는 거 다 봤어요!”라며 함께 쓰레기를 주웠다. 45인승 버스를 개조한 ‘책 읽는 버스’는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대표 김수연 목사)이 운영하고 KB국민은행이 후원하는 이동식 도서관이다.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은 도서관을 이용하기 어려운 환경의 농어촌을 찾아가거나, 전국의 지역축제나 캠핑장 등을 찾아다니며 책 읽기 문화 확산에 앞장서고 있다. 책 대여도 해주고 구연동화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책 읽는 버스’는 올 추석 연휴 이곳에 시범 삼아 왔을 때 캠핑객들의 반응이 좋아 25일까지 연장 운영하고 있다. 7, 8월 휴가철에 강릉 연곡해변 솔향기캠핑장에 다녀간 ‘책 읽는 버스’ 기사를 보고 캠핑장이 먼저 초청했다. 최민희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사무국장은 “부모님들이 주로 텐트를 치거나 요리하는 시간에 아이들이 버스에 와서 책을 읽고 놀다간다”고 했다. 아이들이 드나드는 만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을 위해 하루에 수차례 버스 안팎을 소독하는 등 방역을 하고 있다. 이번에 환경 관련 퀴즈가 적힌 보드에 ○, X 칸 중 맞는 답에 스티커를 붙이는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미세먼지 크기는 사람의 머리카락 지름과 같다’ ‘플라스틱 포장 같은 일회용품은 분해되기까지 수세기가 걸린다’ 등 어린이가 풀기엔 쉽지 않은 문제였지만 엄마 아빠와 상의하고 정답 칸에 스티커를 붙이는 어린이들이 많았다. 구연동화를 본 강지우 군은 “캠핑장에 쓰레기가 있으면 주워서 버리겠다”며 “내일도 구연동화 선생님이 오면 좋겠다”고 했다. 동생과 함께 책 버스에 오른 김은영 양은 “버스에 도서관이 있어서 신기하다. 날씨가 추워졌는데 버스 안에서 따뜻하게 책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엄마 손을 잡고 책 버스를 찾은 안해윤 군은 “아직 한글을 모르지만 엄마가 집에 있는 책 말고 다른 책을 읽어주니까 좋다”고 했다. 어른들의 반응도 좋았다. 이날 휴가를 내고 5세 딸과 함께 캠핑장을 찾은 구태훈 씨(44)는 “버스 도서관은 처음 봤다. 소외지역이나 캠핑장을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책 읽을 기회를 주니 굉장히 뜻깊어 보인다”고 말했다. 딸을 데리고 구연동화를 들은 조혜정 씨(37)는 “아이들이 무료해지면 스마트폰을 달라고 조르는데 책을 읽을 기회가 생겨서 좋다”고 했다.파주=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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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책 속으로 ‘글로벌 오두막 집들이’ 떠나볼까!

    잉글랜드 시골마을의 숲이 꽉 차게 보이는 통창을 가진 오두막, 카리브해 바하마에 지은 바다가 보이는 2층 집, 인도네시아 발리의 사방이 트인 대나무집…. 자연 속에 지은 집에 대한 모든 로망을 담은 이 책은 2017년 세계 200여 곳의 통나무집을 소개한 ‘캐빈 폰’의 후속편이다. 캐빈 폰은 오두막을 뜻하는 캐빈(cabin)과 포르노(pornography)를 합친 말. 책 속 사례들은 동영상 웹사이트 비메오(Vimeo)의 공동 창업자인 저자가 2010년부터 운영하는 오두막집 짓기 정보 공유 사이트 캐빈 폰에 소개된 것들이다. 전편에서 소개하지 못한 세계 30개국 80여 채 오두막의 안과 밖 모두에 주목했다. 작고 소박한 오두막 내부는 외관만큼이나 자연친화적이다. 사슴이 종종 찾아온다는 칠레 프루티야르의 호숫가 오두막은 바닥과 벽을 100% 재활용 나무로 했다. 호주 브리즈번의 통나무집도 무너진 건물을 뒤져 찾아낸 폐(廢)건축자재로 지었다. 대부분 오두막은 태양광 패널로 전기를 얻는다. 싱크대 선반 위의 침대, 1층 부엌에서 바깥 테라스까지 이어진 기다란 일체형 테이블 등 좁은 공간을 기막히게 활용한 인테리어 아이디어를 보는 재미도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집에 ‘갇힌’ 우울한 현실은 잠시 잊고 책 속으로 글로벌 집들이를 떠나보면 어떨까.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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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평양이 꿀”… 정부지원 전시에 北미화 서적 버젓이

    정부 예산을 지원받아 열리는 전시회에 북한 정권을 미화하는 듯한 전시품이 다수 공개돼 논란이 예상된다. 북한의 해양수산부 공무원 사살,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공개 등 적대 행위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출판도시입주기업협의회는 경기 파주시 출판단지의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에서 남북 문화교류 행사의 하나로 ‘Book(北)녘의 책 읽는 풍경’ 전시를 9일부터 18일까지 열고 있다. 15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국민의힘 배현진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문화체육관광부와 출판진흥원은 이 전시에 국고 보조금 9200만 원을 지원했다. ‘걸어서 개성공단 가자’ 같은 걷기 운동을 벌이는 단체 ‘평화의길’이 북한 사진, 도서 등 350여 점의 저작물 대여 및 행사 관리를 맡았다. 15일 전시장에 배치된 ‘남북통일 팩트체크 Q&A’라는 어린이 책에는 6·25전쟁이 북한의 남침임에도 “(광복 후 남북이) 서로 고집만 피우다 싸웠다” 등 남한의 책임을 강조하는 대목이 있다. 서울의 인구 과밀을 지적하며 “평양이 (살기에) 꿀이구나”라는 표현도 보인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대해 “나름 잘 생기지 않았냐”거나 동요 ‘곰 세 마리’를 개사해 “김정은은 뚱뚱해/문재인은 날씬해/서로 웃네, 너무 귀여워”라는 대목도 있다. 또 다른 책 ‘맛있게 읽는 북한 이야기’에는 “김정일 장군님께서는 소년단원들이 당과 수령에 충성하고”라고 말하는 북한 어린이 일러스트가 실려 있다. 신식 전자도서관에서 바라본 주체사상탑, 포토샵 교육을 받는 북한 어린이들, 새로 지은 과학기술전당 등 북한의 이른바 ‘발전된 생활상’을 홍보하는 사진도 많다. ‘경애하는 김정은 장군님 고맙습니다’라는 간판 앞에서 찍은 유치원생 기념사진도 눈에 띄었다. 전시 관계자는 “과거 불온서적 등으로 분류됐을 법한 내용들이 남북 교류로 전시가 가능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배 의원은 “우리 국민을 사살한 북한 미화를 위해 국민 혈세를 낭비하는 꼴”이라고 말했다.파주=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0-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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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슴속 불’부터 ‘발암’까지… 한국인의 恨 담긴 ‘화병’의 진화

    분노가 쌓여 답답한 기운이 누적된 질병을 뜻하는 화병(火病)은 근대소설에서 묘사한 ‘가슴속의 불’에서부터 최근 ‘암 걸릴 것 같다’는 표현까지 시대에 따라 변주됐다. 우리 민족 특유의 한(恨)과 맞닿은 화병이 사회와 함께 진화해온 것이다. 한때 미국의 정신질환 진단 분류체계인 DSM-4에서는 화병이 한국에만 있는 질병이라며 ‘Hwa-byung’으로 표기했다. 경희대 인문학연구원 산하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 박성호 최성민 교수는 의료와 문학의 융합연구를 통해 근현대의 화병 변화 양상을 분석한 ‘화병의 인문학’(사진)을 최근 펴냈다. 1900년대 이후 문학작품, 기사, 잡지 등을 분석했다. 근대소설에서는 고된 시집살이를 참는 여성들이 화병에 걸린 것으로 묘사됐다. ‘안의성’(1912년)의 주인공 정애는 시어머니가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가 시누이들의 모함을 받고 친정으로 쫓겨나 화병에 걸린다. 일제강점기 우국충정으로 생긴 화병은 남성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최남선은 1909년 잡지 ‘소년’에 “신경쇠약이라는 병에 걸렸다”고 발표했다. 박 교수는 “속 편하게 살면 앓지 않을 병인데, 세상을 근심하는 글을 읽고 쓴 결과로 표현한 것”이라며 “화병이 우국지사의 자부심으로 거듭난 것”이라고 했다. 이는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 나도향의 ‘젊은이의 시절’ 주인공이 신경증에 걸리는 설정에도 나타난다. 산업화, 민주화 시대에는 사회와 권력에 대한 분노로 확대됐다. 1920∼1997년의 신문 기사를 분석한 결과 화병이라는 단어는 1988년에 가장 많이 쓰였다. 1987년 1월 경찰의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씨의 부친 박정기 씨는 동아일보 1988년 1월 13일자 ‘철아, 아부지가 다시 왔대이’라는 기사에서 “정권의 추태를 보다 못해 울홧병까지 생겼다”고 말한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취업난이 심해지면서 화병에 걸린 듯한 젊은 세대의 묘사도 나타났다. 김영하 소설 ‘퀴즈쇼’(2007년)에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가장 똑똑한 세대’인 젊은 주인공이 “우리는 왜 다 놀고 있는 거야? 왜 모두 실업자인 거야?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라며 울분을 토한다. 연구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2017년 대통령 탄핵 등을 거치며 화병의 진화는 세대별 계층별로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끝을 맺는다. 최 교수는 “문학을 분석하는 연구로 출발했는데 사회상과 맞물린 일종의 문화연구가 됐다. 화병은 우리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설명하는 키워드”라고 말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0-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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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보 경복궁 근정전이 아파트 한채 값?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돈화문 등 국보 및 보물로 지정된 주요 목조 문화재의 재산 가치가 턱없이 낮게 책정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12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김승수 의원이 문화재청으로부터 제출받아 공개한 ‘주요 궁·능 문화재 국유재산가액’ 자료에 따르면, 조선시대 국왕 즉위식이나 대례를 거행했던 근정전의 국유재산가액은 32억9110만 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복궁 내 자경전은 12억6904만 원, 사정전은 18억7524만 원, 수정전은 8억7670만 원이었다. 창덕궁의 정문이자 현존하는 궁궐 대문 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돈화문의 국유재산가액은 14억4670만 원이었다. 국유재산가액은 문화재의 화재보험 가입 기준이 되는 금액으로 문화재청이 자체적으로 책정한다. 가액이 낮게 책정되면 화재가 났을 경우 받을 수 있는 보험금도 적다. 김 의원은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 시스템에 따르면 서울 압구정 현대아파트(11차)의 평균 거래가격이 44억 원이 넘는다. 문화재 재산 가치가 강남 아파트 한 채 값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문화재청은 “문화재 가치를 반영해 가액을 매길 경우 보험료가 비싸지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해명했다.최고야 best@donga.com·김민 기자}

    • 202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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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안부 피해 그린 김금숙 만화 ‘풀’, ‘만화계 오스카상’ 하비상 수상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을 그린 김금숙 작가(49)의 만화 ‘풀’(사진)이 미국 하비상(Harvey Awards) 최고의 국제도서 부문을 수상했다고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12일 밝혔다. 저명한 만화가이자 편집자인 하비 커츠먼(1924∼1993)을 기려 제정된 하비상은 ‘만화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린다. 수상작은 9일(현지 시간) 뉴욕에서 온라인으로 열린 만화 콘텐츠 행사 코믹콘에서 발표됐다. ‘풀’은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의 증언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2016 스토리 투 웹툰 지원사업’에 선정돼 제작됐고 해외에서 영어 프랑스어 등 12개 언어로 출간됐다. 지난해 미 뉴욕타임스와 영국 가디언의 ‘최고의 만화’와 ‘최고의 그래픽노블’에 각각 선정됐고 프랑스 일간지 ‘휴머니티’가 만든 ‘휴머니티 만화상’의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김 작가는 “풀이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 세계 모든 곳에서 억압받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김 작가는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로 떠나 조각가와 만화가로 20년 가까이 활동했다. 2011년 한국에 돌아온 그는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아버지의 노래’를 비롯해 제주4·3사건을 다룬 ‘지슬’, 우리나라 원폭 피해자를 다룬 ‘할아버지와 보낸 하루’를 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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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복궁 근정전 재산가치 33억, 압구정 아파트보다 싸다고?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돈화문 등 국보 및 보물로 지정된 주요 목조 문화재의 재산가치가 턱없이 낮게 책정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12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김승수 의원이 문화재청으로부터 제출받아 공개한 ‘주요 궁능문화재 국유재산가액’ 자료에 따르면, 조선시대 국왕 즉위식이나 대례를 거행했던 근정전의 국유재산가액은 32억9110만 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복궁 내 자경전은 12억6904만 원, 사정전은 18억7524만 원, 수정전은 8억7670만 원이었다. 국유재산가액은 문화재의 화재보험 가입 기준이 되는 금액으로 문화재청이 자체적으로 책정한다. 가액이 낮게 책정되면 화재가 났을 경우 받을 수 있는 보험금도 적다. 창덕궁의 정문이자 현존하는 궁궐 대문 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돈화문의 국유재산가액은 14억4670만 원이었다. 창덕궁 내 인정문은 23억5319만 원, 부용정은 8815만 원이다.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던 창경궁 명정전은 12억5510만 원, 왕비의 침전인 통명전은 10억3519만 원이다. 덕수궁 중화전 및 중화문은 23억6382만 원, 함녕전은 10억1699만 원 등이었다. 김 의원은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서울 압구정 현대아파트(11차)의 평균 거래가격이 44억 원이 넘는다. 문화재 재산가치가 강남 아파트 한 채 값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문화재청은 “문화재는 사실상 값으로 매길 수가 없기 때문에 일반 화재보험 논리와는 맞지 않는다. 문화재 가치를 반영해 가액을 매길 경우 보험금액이 높아지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해명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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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류 팬에서 한국어 선생님으로…“소중하고 예쁜 한글 사랑합니다”

    지난달부터 세종학당 현지 한국어 보조교사가 된 인도네시아 캐서린 이벤절린 씨(22)와 베트남 호앙민녓헌 씨(20)는 학창시절부터 한국 대중문화를 접한 K팝, K드라마 팬이다. 한국 가수와 배우가 좋아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이제 현지인들을 가르칠 정도의 실력자가 됐다. 74개국에서 한국어 교육 사업을 하고 있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세종학당재단은 현지 한국어 교육과정 우수수료자 중에서 보조교사를 채용하는 프로그램을 올해 시작했다. 이벤절린 씨와 호앙 씨가 수료생 출신 1기 수습 선생님인 셈이다. 최근 이들을 e메일과 전화 인터뷰로 만났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의 기본 원리만 알면 배우기 쉬운 글이에요. 어느 글자보다 소중하고 예쁜 한글을 사랑합니다.” e메일 인터뷰로 만난 이벤절린 씨는 유창한 작문 솜씨로 한글 사랑을 드러냈다. 2012년 드라마 ‘꽃보다 남자’를 보고 한국어 독학을 결심했고, ‘풀하우스’ ‘내 이름은 김삼순’ ‘시크릿 가든’ 배우들의 대사를 따라하며 회화를 공부했다. 세종학당에서는 2018년부터 문법, 작문, 말하기 교육을 받았다. 그는 자카르타에서 부모님을 도와 제빵사로 일하고 있지만, 최종 꿈은 정식으로 한국어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한류 인기가 높지만 한국어 학과가 개설된 대학은 4곳에 불과해 한국어 교수법을 배울 기회가 드물다. 그는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한류가 세계로 나가면서 한국어 학습자가 늘어나고 있지만, 인도네시아에는 한국어 교육자가 매우 부족하다. 한국어 보급에 힘을 보태고 싶다”고 했다. 호앙 씨는 방탄소년단, 아이유, 알리의 노래를 들으면서 한국어에 관심을 가졌다. 2017년부터 세종학당에서 본격적으로 공부해 3년 만에 선생님이 됐다. 호앙 씨는 “한국어는 형용사가 풍부해 감정을 쉽게 표현할 수 있고, 발음이 듣기에 좋다”며 “아름다운 한국어 가사를 번역하면서 한국어 실력이 늘었다”고 했다. 다만 “존댓말을 반말과 구분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선생님에게 ‘요’를 붙이지 않고 반말을 하는 실수도 했다”고 말했다. 호앙 씨는 “한국어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희망’”이라고 했다. 현재 호치민의 한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는 그는 막연히 ‘한국 기업에 취업하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을 뿐 구체적인 꿈이 없었다는 것. 호앙 씨는 “한국어 선생님이라는 진짜 꿈을 찾았다”며 “공부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한국어 문법을 베트남 학생들에게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0-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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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회 인촌상 시상식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제34회 인촌상 시상식이 8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렸다. 인촌상은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경성방직과 고려대를 설립한 민족 지도자 인촌 선생의 유지를 이어 나가기 위해 1987년 제정됐다.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이사장 이용훈)와 동아일보사는 인촌 선생의 탄생일인 10월 11일에 맞춰 시상식을 매년 진행하고 있으나, 올해는 휴일인 관계로 8일에 시상식이 진행됐다. 이날 수상자는 △한동대학교(교육) △봉준호 영화감독(언론·문화) △차국헌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과학·기술)로, 각각 상장과 메달, 상금 1억 원을 받았다. 인촌상은 총 4개 분야에 대한 수상자를 선정하지만 올해는 인문·사회 분야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수상자 공적은 9월 4일자 참조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00904/102786872/1 이용훈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일제 식민지 시기 인촌 선생은 일본을 돌아보고 ‘일본의 발전은 별것 아니다. 우리도 하자’라고 말씀했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여러 분야에서 일본뿐 아니라 많은 나라들을 능가하고 있다”며 “이 자리의 주인공들이 인촌상 수상으로 더 큰 성과를 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안병영 인촌상 운영위원장은 수상자 선정 경위를 보고했다. 운영위원회는 외부 심사위원 16명을 위촉하고 후보군을 추린 뒤 7월부터 8월 말까지 수차례 회의를 열어 최종 수상자를 확정했다. 한동대는 국내 대학 중 최초로 ‘자유학기제’와 ‘국제법률대학원’ 등을 도입해 고등교육계에 혁신을 선도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았다. 장순흥 한동대 총장(66)은 수상 소감에서 “한동대는 1995년 개교부터 지금까지 지방 강소대학으로 입지를 다져 왔다”며 “무너지는 이 세대를 다시 일으키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인재 양성에 더욱 힘쓰겠다”고 했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 한국 영화를 빛낸 봉준호 감독(51)은 영화 ‘기생충’ 제작사인 바른손이앤에이 곽신애 대표가 대리 수상했다. 봉 감독은 곽 대표가 대독한 수상 소감에서 “평소 존경해 온 예술가인 박경리, 박완서 선생이 과거 수상하셨던 상을 제가 받게 돼 영광”이라며 “영화인 최초의 인촌상 수상인 만큼 모든 창작을 함께한 영화인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고 전했다. 곽 대표는 “봉 감독은 차기작 구상에 전념하느라 대리 수상하게 됐다”며 “봉 감독이 상금을 후학 양성을 위해 사용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고분자 재료 관련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 석학 반열에 오른 차국헌 교수(62)는 “동고동락하며 불철주야 노력해 준 훌륭한 제자들이 있어 이 모든 것이 가능했다”며 “과학계의 꾸준한 노력이 축적된다면 인촌 선생이 강조했던 국가 부강을 이뤄 나가는 데 바탕이 될 것”이라고 했다.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은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한국의 새: 동아 백년 파랑새’ 오브제를 수상자들에게 증정했다. 이날 시상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수상자 등 최소한의 인원만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0-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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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 Japan’ 사그라들자… 일본책 출간 기지개

    지난해 7월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 맞대응으로 벌어진 ‘노 저팬(No Japan)’ 운동 영향으로 뜸하던 일본 서적 출간에 물꼬가 트이는 분위기다. 지난해 나왔어야 하지만 한일 외교관계 악화로 수개월 이상 출고를 미루던 소설들이 풀리고 있다. 민음사는 지난달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1925∼1970)의 소설 ‘봄눈’을 국내 처음으로 출간했다. 미시마는 소설 ‘금각사’(1957년)로 세계 문단의 인정을 받으며 노벨 문학상 후보로 수차례 거론됐지만 천황 통치를 주장하는 등 극우 성향으로 국내 출간된 책은 많지 않다. 그는 1970년 11월 육상자위대 주둔지에 잠입해 건물 옥상에서 자위대의 궐기를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할복자살해 충격을 줬다. 민음사 관계자는 “봄눈은 번역이 까다로워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도 있지만 일본산 불매운동까지 겹쳐 2017년 계약 이후 3년 만에 출간했다”며 “작가 성향 때문에 판매를 우려했지만 독자 반응은 나쁘지 않다. 불매운동 1년이 지나면서 ‘문학은 문학일 뿐’이라고 인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국내 팬 층이 두꺼워 올해도 작품이 꾸준히 나온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이외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일본 작가의 소설이 독자를 만나는 기회도 차츰 늘고 있다. 올 8월만 해도 ‘수의 여왕’(가와조에 아이 지음·청미래) ‘그녀들의 범죄’(요코제키 다이 지음·샘터) ‘멸망의 정원’(쓰네카와 고타로 지음·고요한숨) ‘팅커벨 죽이기’(고바야시 야스미 지음·검은숲) ‘이별의 수법’(와카타케 나나미 지음·내 친구의 서재) 등이 잇달아 출간됐다. 교보문고 입고도서 기준 매월 신간 일본 소설은 지난해 1월 121권에서 꾸준히 줄어 올 3월에는 61권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6월에는 86권으로 소폭 오르는 등 상승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일본 소설의 국내 ‘진입장벽’은 여전히 높다고 출판계는 분석한다. 2004년부터 일본 추리소설을 내고 있는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 북스피어는 올 7월과 지난달 각각 미나미 교코의 ‘사일런트 브레스’, 미야베 미유키의 ‘눈물점’을 출간했다. 이 책들은 지난해 말 독자와 만나야 했지만 일정이 반년 이상 미뤄진 것이다.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는 “일본 문학 붐이 일던 2008∼2010년에는 판권 경쟁이 붙어 ‘선인세 거품’ 논란도 벌어졌지만 이번 불매운동 사태를 거치면서 전세가 역전됐다”며 “반일감정의 영향을 크게 받는 독자 특성상 한일 관계에 따라 일본 책 판매는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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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비자 위해 책값 할인폭 확대” vs “창작 위축돼 독자 되레 손해”[인사이드&인사이트]

    2014년 개정된 도서정가제의 일몰 시점이 내달 20일로 다가왔다. 전국 어디서나 균일한 가격으로 책을 살 수 있도록 해 출판생태계를 안정화하고자 한 것이 현행 도서정가제의 취지다. 출판문화산업진흥법은 변화하는 출판 환경을 반영해 3년에 한 번씩 도서정가제를 개정하도록 하고 있다. 2017년에는 법 개정 없이 현행을 유지하기로 했지만, 이번에는 어느 때보다 출판업계 안팎이 시끄럽다. 매번 불거지는 할인율 완화를 통한 소비자 권익 문제와 함께 몇 년 새 크게 성장한 웹툰, 웹소설 등 전자 콘텐츠 업계의 이해관계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정부와 범출판계, 그리고 종이책 업계와 전자 콘텐츠 업계 간 여러 갈등 양상 속에 어떻게 해야 서로 ‘윈윈’하는 도서정가제를 정립해갈 수 있을까. ○ 도서정가제 어떻게 변해왔나도서정가제는 2003년 2월 법제화된 이후 두 차례 변화를 겪었다. 2003년 출판 및 인쇄 진흥법은 온라인 서점에서만 신간(발간 1년 이내)을 10% 할인하도록 했다. 발간 1년이 넘은 책에 대해선 출판사가 자율적으로 할인율을 정하도록 했다.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할인이 불가했다. 2007년 10월 출판문화산업진흥법으로 개정되면서 신간의 정의를 ‘1년 이내’에서 ‘1년 6개월 이내’로 바꾸고 오프라인 서점에도 할인을 허용했다. 그러자 출판사들이 발간 1년 6개월 이상 책들을 무제한 할인하는 출혈경쟁을 벌였고, 이에 따른 부작용을 막기 위해 2014년 현행 도서정가제를 도입했다.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모든 책을 최대 15%만 할인(직접할인 10%, 포인트 적립 등 간접할인 5%)하도록 했다. 출간 1년 6개월 이상 구간은 출판사가 정가를 낮출 수 있는 재정가 제도를 뒀다. 도서정가제 일몰 기한이 다가오자 정부는 업계와 지난해부터 약 1년간 16차례에 걸친 협의를 거쳤다. 협의안은 현행 제도를 대부분 유지하되 △구간의 재정가 기한을 기존 출간 1년 6개월에서 1년으로 단축 △도서관 구매도서 할인율은 10%만 허용 등이었다. ○ “소비자 권익 우선” VS “출판 생태계 지켜야”협상안대로 개정이 이뤄지나 싶었지만, 7월 말 문화체육관광부는 소비자가 책을 싸게 살 수 있도록 하자며 논의를 재개하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지난해 도서정가제 폐지를 주장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20만 명 이상이 서명한 여파가 이어지면서다. 소비자의 권익을 주장하는 ‘완반모(완전 도서정가제를 반대하는 생태계 모임)’의 국민권익위원회 청원 활동 등도 여론에 영향을 줬다. 문체부는 9월 3, 18일에 걸쳐 출판업계와 비공개 간담회를 갖고 △문체부가 인정하는 도서전에서 판매하는 도서는 정가제 적용 제외 △전자책 할인율 기존 15%에서 20%로 완화 △전자 콘텐츠(웹툰, 웹소설 등)는 완결된 것만 도서정가제 적용 △출간 3년이 지나고 최근 1년간 1권도 팔리지 않은 책은 무한 할인 적용 등을 제안했다. 그러자 이번엔 36개 출판 단체가 참여한 ‘도서정가제 사수를 위한 출판·문화계 공동대책위원회’가 “졸속 개정안에 반대한다”며 반발했다. 고흥식 한국출판인회의 사무국장은 “전자책 할인, 도서전 판매 도서 할인 등은 1년간 협의 과정에서 허용하지 않기로 이미 정리된 얘기들”이라고 비판했다. 최근 1년간 유통되지 않은 책의 할인율을 높이는 것 또한 재정가 제도가 있어 무용하다는 입장이다. 도서정가제를 반대하는 측은 시장논리에 따라 상품 가격은 수요와 공급, 공급자들의 경쟁에 따라 정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배재광 완반모 대표는 “앞서 개정안을 논의한 민관협의체는 사실상 출판 이익단체로만 구성됐다. 소비자 권익을 고려해 원점 재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출판계는 책은 시장논리만 적용하는 상품이 아니라 문화적 공공재의 특수성을 가진다는 점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4년 이전에는 구간의 무한 할인율 적용으로 신간이 아닌 구간들이 베스트셀러를 점령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이는 신간 출간 위축으로 이어졌고, 결국 출판시장의 다양성이 사라지면 손해는 독자들에게도 돌아간다”며 “또 길에서 책을 쌓아놓고 1000원, 2000원에 파는 과거로 돌아간다면 책에 대한 독자들의 신뢰가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 2014년 개정 도서정가제, 효과 있었나?도서정가제 폐지를 주장하는 소비자단체 등은 도서정가제가 책값 상승을 부추긴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출판계는 지난 6년간 책값이 우려했던 것만큼 많이 오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인 2015∼2019년 책의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4.18%였다. 같은 기간 전체 소비자물가가 4.85% 오른 것보다는 적게 올랐다. 그러나 도서정가제 강화에도 불구하고 온오프라인 대형서점 쏠림 현상이 드라마틱하게 완화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의 서점 통계(2년마다 조사)에 따르면 지역서점은 2013년 2331곳에서 2019년 1968곳으로 줄었다. 다만 다양성의 상징인 독립서점이 2015년 49개, 2017년 301개, 2019년 344개로 늘어난 것은 고무적이다. 도서정가제 개정 효과는 독서인구 감소세로 인한 전체 도서시장의 침체, 디지털 매체 다변화 등 다양한 요인이 있어 성공과 실패를 단언하기는 어렵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 따르면 2017년 출판사 매출은 3조9122억 원, 오프라인 서점은 1조3090억 원으로 각각 전년대비 1.3%, 5.5% 감소했다. 2014년 법 개정 전 일부 서점과 출판사가 할인율 제한으로 매출이 줄어들 것을 우려해 법 개정을 반대하기도 했다. 다만 온라인 서점의 같은 기간 매출은 1조4846억 원으로 전년대비 8.4% 증가했다. ○ 웹툰·웹소설…복잡한 전자 콘텐츠 업계 속내현행 도서정가제 유지와 완화를 두고 정부와 출판업계의 줄다리기가 팽팽한 상황이지만, 출판계 내부 의견이 갈리는 점도 큰 난관이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전자책 매출은 2018년 2702억200만 원으로 전년 대비 23.2% 성장했다. 산업이 빠르게 성장한 것에 비해 웹소설, 웹툰 등의 분야에서 도서정가제에 대한 준비가 제대로 안 돼 있다. 전자 콘텐츠도 현행법상 출판물이어서 도서정가제 적용을 받는다. 출판물은 국제표준도서번호(ISBN)를 발급받는데, 회차마다 웹에 업로드 되는 전자콘텐츠 특성상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종이책 업계에서는 ISBN 발급을 제대로 받지 않으면 과태료를 엄중 부과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웹툰 업계는 이참에 산업 특성에 맞춰 도서정가제 대신 웹툰만의 별도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사)웹툰협회 관계자는 “만화진흥법을 개정해 웹툰이라는 창작물의 정의를 세우고, 웹툰만의 고유 식별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현행 도서정가제를 따르면 미리보기, ‘기다리면 무료’ 서비스도 적용 불가능한 만큼 별도 제도가 시급하다는 주장이다. 웹소설 업계의 경우 중소형 플랫폼 업체와 웹소설 작가들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중소형 전자책 플랫폼 업체 관계자는 “웹소설은 분명한 출판물이므로 도서정가제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 할인율 폭을 늘리는 것은 네이버, 카카오 등 거대 플랫폼 업체들의 덩치만 키울 뿐”이라고 했다. 또 웹툰업계가 ISBN을 받지 않으려면 출판물에 적용되는 부가세 면세 혜택도 포기하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웹소설 작가들 모임인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는 최근 성명서를 내고 “웹소설은 종이책과 시장 자체가 다르다”며 도서정가제 적용을 반대했다. 이들은 “규제에 밀려 마케팅 할인을 하지 못하면 작가의 수익이 현저히 줄어들고, 신진 작가의 시장 진입도 어려워진다”고 강조했다. 주요 전자콘텐츠 플랫폼인 네이버나 카카오 등은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일몰까지 50일 남짓…“주체 간 협의가 최선”전문가들은 정부, 업계, 소비자가 모두 참여한 협의체 안에서 최소한의 합의부터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한다. 책을 상품과 문화적 공공재 중 어느 만큼씩 비중을 둬서 볼 것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대를 만들고, 이에 따라 정가제의 적용 방식과 범위를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 입장이 다른 전자콘텐츠 업계 내 의견 정리도 시급하다. 문체부가 지난해 실시한 출판인 대상 설문조사에서는 전자책 사업자 응답자(308명) 중 63.6%가 ‘모든 전자책에 도서정가제를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답했지만, 그러면 어떤 제도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업계 내 추가적 의견수렴은 진행되지 않았다. 해외사례를 참고한 연구와 분석도 필요하다. 도서정가제를 도입한 전 세계 16개국 중 프랑스와 독일은 종이책 신간(각 2년, 1년 6개월 기준)과 전자책 모두에 도서정가제를 실시하고 있다. 구간은 무제한 할인이 가능하다. 반면 법이 아닌 업계협약에 따라 종이책 도서정가제를 실시하고 있는 일본은 전자책은 적용대상에서 제외했다.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을 지낸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소장은 “전자책은 종이책과는 전혀 다른 웹 생태계가 이미 구축돼 있다. 종이책 관점의 규율을 강조해선 안 된다”며 “소비자 권익 문제 역시도 얼마든지 논의가 가능한 만큼 업계에서 최소한의 방향성과 제도 적용범위 등을 먼저 합의하고 대화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최고야 문화부 기자 best@donga.com}

    • 20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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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빛 가야금에 기러기 다가오네” 한시로 명창을 기리다

    ‘소리 짜서 마음에 맞으니 봄 향기가 대단하였네(構歌會心春香劇·구가회심춘향극).’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무형유산학과 교수(58)가 동편제의 거장 김세종 명창(1825∼1898년 추정)을 소재로 지은 한시의 한 구절이다. 춘향가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김 명창의 소리를 춘향의 이름에서 따온 ‘봄 향기’로 표현한 것. 최 교수는 15일 발간되는 저서 ‘판소리 명창, 한시로 읊다’에서 한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한국유학 2000년 역사를 집대성한 ‘한국유학통사’를 펴내고 한국 고대사상을 연구해 온 최 교수가 이번에는 300년 판소리사에 눈을 돌렸다. 18세기부터 활동해 온 명창 64인을 꼽아 관극시(觀劇詩)를 엮은 독특한 책을 낸 것. 최 교수는 29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판소리 본고장인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판소리를 좋아한 할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고 자랐다”고 했다. 라디오밖에 없던 1960년대, 국악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라디오를 들고 할아버지를 찾아 논이든 밭이든 달려갔다. 최 교수는 “오랫동안 판소리를 취미로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국악계 지인이 늘었다. 이들에게 한시를 지어주기 시작한 게 책의 발단이 됐다”고 했다. ‘주역’의 육십사괘(六十四卦)에서 착안해 명창 64인을 꼽았다. 활동 시기, 역사적 위상, 시재 등을 적절히 안배했다. 현재 활동하는 명창은 공연을 직접 보고, 세상을 떠난 명창들은 음반을 듣고 시를 지었다. 조선시대 명창들은 ‘조선창극사’(1940년) 등 문헌 자료를 참고했다. 64인에는 가수 수지가 주연을 맡은 영화 ‘도리화가’의 실제 주인공인 진채선(1847∼미상), 양반 출신으로 소리판에 뛰어들어 족적을 남긴 권삼득(1771∼1841), 전남 보성에서 농사를 지으며 제자를 기른 정응민(1896∼1964) 등이 포함돼 있다. 책은 최 교수가 64개 한시마다 명창의 예술세계 해설, 전공자들의 한시 감상평을 곁들여 한 세트로 묶었다. 대부분의 시는 일곱 글자씩 네 구절이 있는 7언 4구 방식을 택했다. 최 교수는 가야금의 백인영 명인(1945∼2012)을 기린 시를 가장 자신 있는 작품으로 꼽았다. ‘달밤에 가야금 타면 가던 기러기 다가올 듯(月夜彈絃回雁臨·월야탄현회안림) … 소나무 숲의 맑은 바람처럼 시끄러운 속을 확 씻어준다(松間淸風滌煩襟·송간청풍척번금).’ 최 교수는 “인간과 자연에도 울림을 줄 정도의 가야금 소리라는 점을 표현했다”고 했다. 최 교수는 “코로나19로 인해 공연이 아예 취소되거나 무관객 녹화 공연으로 겨우 맥을 이어가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이 끝나고 국악의 흥을 찾는 날이 속히 오길 바란다”고 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20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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