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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에 살고 있던 예술가 루이즈 부르주아(1911∼2010)가 93세이던 2004년. 그의 집 한구석에서 낱장의 종이 꾸러미가 가득한 상자가 발견됩니다. 그 속에는 부르주아가 정신분석을 받으며 적었던 메모가 가득했죠. 약 50년 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을 때의 기록입니다. 호암미술관에서 지난달 30일 개막한 25년 만의 부르주아 대규모 회고전 ‘덧없고 영원한’ 전시장에 가면 벽면에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고정된 메모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메모는 바로 상자 속에 들어 있던 종이의 일부입니다. 이 기록을 연구하고 책으로 출간했으며, 지금은 미국 뉴욕 이스턴재단의 큐레이터로 세계에 부르주아의 작품 세계를 알리는 필립 라랏스미스와 지난달 29일 만났습니다. ―부르주아의 메모는 어떻게 발견됐습니까.“제리 고로보이(부르주아의 조수)가 높은 곳에 있던 상자를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2004년 커다란 상자가 먼저 발견되고, 2010년엔 두 번째 상자가 발견됐죠. 루이즈는 버림받는 것에 대한 커다란 두려움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어린 시절 사진부터 옷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았어요. 이 기록도 그중 하나입니다.” ―부르주아는 이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줄 몰랐다고요.“맞아요. 어떤 사람들은 그가 과거에 집착한 예술가라는 인상을 갖고 있는데, 제가 본 부르주아는 늘 ‘지금’을 사는 사람이었어요. 기억을 재료로 작업해도, 그는 작품을 만들고 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갔죠. 예술가들은 자기 문제를 작업으로 풀어내고 나면 일종의 해소를 겪어요. 제가 이걸 아는 이유가 있어요. 2005년에 전시 준비를 하며 루이즈에게 35년 전 만든 조각을 보여줬는데, 자기 작품인지 기억을 못 하고 ‘이거 좋네’라고 했거든요.” ―당신은 어떻게 부르주아와 일하게 됐나요.“처음에는 제리의 부탁으로 일을 시작했어요. 저는 하버드대에서 그리스 라틴 문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부르주아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술을 잘 모르고, 문학을 한다는 걸 부르주아는 더 좋아했어요. 그는 예술가보다 문학가가 뛰어나다고 생각했거든요.” ―부르주아의 첫인상은 어땠습니까.“2001년 부르주아를 만났을 땐 연약하지만 매혹적이고 지적 호기심이 강렬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22세였던 저는 그때 독일 베를린으로 갈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결국 지금까지 그의 예술 세계와 함께하고 있네요. 그가 세상을 떠난 2010년까지는 기록을 정리하고 연구했습니다.” ―그 연구를 바탕으로 책 ‘억압의 귀환’(‘The Return of the Repressed’·2012년)를 냈군요.“저와 제리는 부르주아의 메모가 문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사생활에 관한 내용도 있으니 허락이 필요했죠. 당시 90대였던 부르주아는 작품에서 이미 모든 걸 고백했고, 더 이상 숨길 게 없으니 책을 내도 좋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비밀 없는 여자가 되고 싶다’고요.” ―물론 이 책은 부르주아의 비밀을 밝히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이 기록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문학적 가치는 물론이고 정신분석학, 페미니즘 연구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반 고흐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나, 16세기 조각가 첼리니의 자서전과 달리 이 글은 정신 분석 상담을 위해 쓴 글이거든요. 그래서 작가의 마음 상태를 순수하게 반영하고, 부르주아가 초기 작품에서 변화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죠. 또 부르주아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예술가가 됐다는 단순하지만 정확하지 않은 신화를 바로잡아 준다는 것도 중요합니다.”―부르주아 예술이 주는 감동은 우리가 흔히 외면하는 인생의 문제를 깊이 파고드는 데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그의 글엔 부모님에 대한 복잡하고 양가적인 감정이 들어 있어요. (어머니와 아버지, 부드러움과 단단함 같은) 대립하는 요소들이 양립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모습이 호암미술관 전시의 뼈대를 이루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는 호주 시드니에서 시작한 아시아 태평양 순회전의 마지막인데, 호암 전시는 어떻게 구성됐나요.“2023년 시드니, 지난해 일본 도쿄와 대만 타이베이를 거쳐 한국이 네 번째 방문지입니다. 주요 작품은 같지만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호암 전시는 양가적 요소, ‘무의식’과 ‘의식’의 공간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재밌는 건 통념과 달리 2층이 무의식과 관련된 장소라는 점이에요. 또 전시에는 미술관 소장품도 다수 포함됐는데, 리움이 아시아에서 부르주아의 가장 좋은 컬렉션을 갖고 있습니다. 미술관 이진아 큐레이터의 도움으로 좋은 전시를 만들 수 있었어요.” ―이제 부르주아의 작품이 한국 관객을 만날 차례입니다. 어떤 기대를 하십니까.“일본에서는 관객들이 오랜 시간을 들여 텍스트를 꼼꼼히 읽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거든요. 한국 관객은 어떨지 저도 기대가 됩니다. 25년 만의 전시이니 젊은 관객에겐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고, 나이 든 관객에게도 그동안 많은 변화를 겪은 부르주아의 예술 세계를 보여드릴 수 있겠습니다.”‘루이즈 부르주아: 덧없고 영원한’전은 내년 1월 14일까지 열립니다.※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을 하시면 e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책장에서 조용히 꺼내 보는 필사본은 아주 내밀한 예술품이에요. 수백 년 전 장인이 만든 책을 만져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 필사본만의 매력입니다.”프리즈 아트페어에서 고미술품을 다루는 ‘프리즈 마스터스’ 섹션에 꾸준히 중세 유럽 책을 가져와 눈길을 끄는 갤러리가 있다. 30년 전 프랑스 파리에 설립돼 미국 뉴욕에 지점을 둔 ‘레장뤼미뉘르’다. 이 갤러리를 이끄는 산드라 하인드만 대표(81)를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북촌의 한옥에서 만났다.하인드만 대표는 50대에 갤러리를 열기 전까진 대학에서 중세 미술사와 필사본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그는 “중세 필사본 분야는 매우 특수해 고미술 상인이 도움을 요청할 때가 많았다”며 “필사본을 감정하고, 고객 연결을 도와주며 갤러리 운영의 꿈을 갖게 됐다”고 했다.그가 올해 프리즈 마스터스에 가져온 건 14세기 필사본 ‘장미 이야기(Le Roman de la Rose)’와 중세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기도서 ‘시간의 서’ 등이다. 그는 “장미 이야기는 중세의 사랑과 모험을 담은 것으로 1350년경 기욤 드 로리스와 장 드 몽이 제작했다”라며 “총 19권 중 18권은 공공기관이 소장하고 있고, 외부로 나온 유일한 한 권”이라고 설명했다. 청금석과 공작석, 송아지 가죽을 다듬은 양피지로 만든 이 책은 중세 왕족이나 귀족이 주문 제작했다.하인드만 대표는 중세 필사본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극소수의 딜러 가운데 하나다. 미술품도 수집한다. 피카소의 연인이었던 예술가 도라 마르의 작품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갖고 있다고 한다. 하인드만 대표는 “여성으로 일하며 자연스레 중세는 물론 모든 시대 여성 미술가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며 “프리즈 서울에 참가하며 한국 작가 노은님(1946~2022)의 작품도 소장하게 됐다”고 했다.미국 노스웨스턴대 미술사학과 명예교수이기도 한 하인드만 대표는 2023년 서울대에서 ‘중세 필사본의 과거 현재 미래’를 주제로 특별 강연을 하는 등 세계에서 이 분야를 알리려 노력한다. 그는 “중세 필사본은 틈새시장이지만 미국, 유럽은 물론 중동의 아부다비와 일본까지 세계 곳곳에 열정적인 컬렉터들이 있다”며 “파리엔 ‘시간의 서’ 수십 권을 수집하고 매일 밤 한 권씩 꺼내 감상한다는 소장가도 있다”고 소개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글로벌 갤러리인 페이스가 10월 30일부터 서울 용산구 페이스 갤러리 서울에서 한국 미술사의 유명 작가인 김환기와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아돌프 고틀리브의 2인전을 개최할 예정인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 수년간 해외 갤러리들의 서울 진출이 이어졌지만, 한국 작가 전시 개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상황에서 미술계에 반가운 소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프리즈 서울 2025’를 맞아 최근 방한한 마크 글림셔 페이스 갤러리 대표(62)는 1일 동아일보와 만나 “5년 전 페이스 갤러리 서울의 이영주 디렉터가 처음 김환기 전시를 제안했고, 고틀리브 재단을 설득해 전시가 성사됐다”라며 “강한 울림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고틀리브는 추상표현주의 화가이자 마크 로스코의 절친이었습니다. 특히 추상표현주의 이론 형성에 중요한 작가로 꼽히죠. 시장에서는 잭슨 폴록, 로스코보다 고틀리브를 낮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그가 없었다면 추상표현주의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김환기는 뉴욕 체류 시절 고틀리브의 작품을 보고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림셔 대표는 “두 작가가 특히 말년에 급진적 변화를 보였으며, 시적인 모습이 유사성이 보인다”고 했다. 이 전시는 페이스 갤러리와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의 오랜 관계 덕분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글림셔 대표의 아버지인 아니 글림셔 회장은 미네소타 시골 목장에서 태어나 미대에 진학했다가, 가난 탓에 작가를 포기하고 갤러리를 설립해 미국의 대표 화랑으로 만든 입지전적인 인물. 그런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부터 예술가와 가까이 지낸 글림셔 대표는 가업을 물려받아 페이스를 뉴욕, 런던, 제네바, 홍콩, 서울 등에 지점을 둔 글로벌 갤러리로 만들었다. 그는 “아버지가 갤러리를 설립하고 이끌었던 1960, 70년대 뉴욕에선 저녁 식사에서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했다.“제임스 터렐이나 서울 청계광장에 조각이 있는 클라스 올든버그, 애그니스 마틴 등 수많은 작가와 함께 저녁을 하면 심야까지 열띤 토론이 이어졌어요. 로버트 어윈이 책상을 쾅쾅 치면서 열변을 토했던 기억이 납니다.” 글림셔 대표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손님들이 떠난 뒤 아버지께 꾸지람을 들었다”면서 “그때 제 나이가 열 살”이라며 웃었다.“대화 주제는 과학, 철학, 정치부터 인간관계까지 다양했고, 저도 이 토론에 참여해 배워야 한다는 의미였죠. 그 자리에서 예술가들이 얘기하지 않은 게 있다면 미술 시장이에요. 작품 가격이 어떻고 마케팅이 어떠하며 경력이 어떻고… 그런 얘기로 시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가가 원하는 것을 존중하며 그 예술 세계를 사람들과 연결해 주는 일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글림셔 대표는 말했다.“지금 서울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터렐 개인전(27일 폐막 예정) 역시 갤러리와 작가, 스튜디오가 수년 동안 긴밀한 협업으로 만든 전시입니다. 로스코가 ‘예술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 이해되는 일’이라고 했는데, 우리 갤러리가 경계하는 게 바로 그런 겁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뾰족한 첨탑이 있는 커다랗고 오래된 성당에 처음으로 들어설 때. 강한 지진에 주변의 모든 것이 흔들리고 무너질 때. 뜨거운 용암이 화산에서 분출하고 잿더미에 휩싸여 시간이 멈춘 듯 굳어버린 폼페이 유적의 사람들을 마주할 때. 이렇게 시공간을 넘어 지금 내가 언제, 어디에 있는지 모를 감각을 자극하는 작품을 만들어 온 프랑스 현대 미술가 로랑 그라소가 한국을 찾았다. 그라소 작가는 31일 대전 헤레디움에서 개막한 개인전 ‘미래의 기억들’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는 미디어아트 페스티벌 ‘서울라이트 DDP 2025 가을’(8월 28일∼9월 7일)에 참여한다. ‘서울라이트 DDP 2025 가을’에선 태양풍, 자기폭풍, 코로나 질량 방출 등의 데이터를 컬러 파동으로 시각화한 ‘솔라윈드’와, 그리스 신화 속 거인 아르고스 파노프테스에서 영감을 얻은 대형 디지털 애니메이션 ‘파노프테스’를 공개했다.헤레디움 전에는 대만 란위섬에서 촬영한 영상을 토대로 한 작품 ‘오키드섬’과 루이뷔통과 협업한 회화 연작 ‘과거에 대한 고찰’ 등 20여 점을 선보였다. 그라소 작가는 “관객이 전시장으로 들어오면 영상 속의 세계를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모든 것을 계산하고 제어했다”고 했다. 작품 ‘오키드 섬’에 대해서는 “휴양지로 보이는 란위섬에 실은 핵폐기물 저장소가 건설돼 20년 넘게 사용되며 사회적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며 “영상 속 사각형 물체는 전쟁이나 정치적 문제, 기후 등 이 섬에 도사리고 있는 위협을 시각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라소 작가는 한국과의 인연이 오래됐다. 대학에서 처음엔 사회학과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예술가 친구들과 어울리곤 했다. 이 무렵 학교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가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이었던 박만우 큐레이터다. 그가 2004년 부산비엔날레 예술감독을 맡자 그라소 작가도 한국에서 전시를 시작했다. 리움미술관 정면에 설치된 네온사인 작품 ‘미래의 기억들’도 그의 작품이다.“예술에 대한 갈망은 늘 있었지만 망설이고 있었는데, 우연히 한 점성술사가 ‘당신은 위대한 예술가가 될 것’이라고 말해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 뒤 파리 보자르에 입학했고 당시 행복했지만 1년 만에 쫓겨났죠. 저를 쫓아냈던 선생님들이 지금은 후회하실 겁니다, 하하.” 그라소 작가는 2008년 마르셀 뒤샹 프라이즈를 수상하고, 2015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도 수훈했다. 2020년 오르세미술관에서 영상 작품 ‘인공물’을 발표했는데, 헤레디움 전시장 2층에서도 볼 수 있다. 해당 작품에 대해 그라소 작가는 “팬데믹으로 봉쇄됐던 시절 만든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음파를 쏴서 물체의 보이지 않는 내부를 촬영하는 ‘라이다 스캐너’를 이용한 영상 등을 활용했어요. 우리의 지구에서 과연 어떤 것이 자연이고 어떤 것이 인공인지, 이 시대에 그것을 명확히 구분하는 게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을 담았습니다.” 전시는 내년 2월 22일까지.대전=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시신을 부검하며 죽음의 비밀을 밝히는 장면은 범죄 수사 드라마에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런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죽음의 이야기를 30여 년간 직접 목격한 법의학자가 현장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다. 의문사, 범죄, 자살, 시신 실종 등 다양한 죽음의 현장을 다루며 때로는 충격을 주고, 때로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저자가 마주한 시신들의 사연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 발이 아닌 30발의 총격을 맞고도 살아있던 남자, 목을 매려다 머리 골절로 숨진 자살 시도자, 시체인 줄 알았는데 살아있는 사람 등 여러 가지 사례를 펼쳐 보여준다. 이 모든 이야기는 이름이나 개인 정보만 가렸을 뿐, 모두 실제 경험에 바탕을 뒀다는 점에서 몰입감이 커진다. 자극적인 에피소드만 나열하진 않았다. ‘고인에 대한 존중은 시신을 열어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고인이 권리를 인정받도록 모든 일을 하는 것이며 부검은 그중 하나’라는 생각은 인상적이다. 아동을 부검할 때 감정에 휩쓸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상황, 가족을 부검에 참관시키지 않아야 하는 이유 등 죽음의 경계선이란 극단적인 상황에서 마주한 고찰들이 잘 담겨 있다. 사망 시간 측정에 곤충학을 이용한다거나 유럽과 미국의 다른 부검 방식, 총구의 모양으로 타살과 자살을 구분하는 방법 등 법의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벨기에 리에주대 교수이자 법의학자인 저자가 쓴 이 책은 프랑스 아마존에서 논픽션 분야 1위에 오르기도 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최근 블랙핑크 리사는 영국 런던에서 월드투어 공연을 마친 뒤 ‘인간 라부부’가 된 인증샷을 소셜미디어에 업로드했다. 북슬북슬한 핑크색 털, 기다란 귀와 동그란 눈, 그리고 허리춤엔 자기와 똑같은 ‘라부부’ 인형을 달고 있었다. 리사뿐만이 아니다. 67세 팝스타 마돈나는 생일 축하 파티에서 라부부를 패러디한 모양의 ‘마두두’ 케이크를 받고 촛불을 부는 모습을 역시 소셜미디어로 공개했다.최근 세계에서 중국의 인형 캐릭터 하나가 엄청난 광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름하여 ‘라부부(Labubu·拉布布).’ 2015년 홍콩 작가 룽카싱이 북유럽 신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었다는 이 캐릭터는 2019년 상품화됐다. “못생겼지만 귀엽다”며 중국과 동남아 시장에서 인기를 얻더니, 최근 북미와 유럽에서도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귀한 몸이 됐다.● 라부부 절도에 판매 중단까지구글 트렌드에 따르면 올 4월 글로벌 ‘라부부’ 검색량은 일본이 자랑하는 인기 캐릭터 ‘헬로키티’를 추월했을 정도다. 라부부의 독점 라이선스를 계약하고 상품을 유통 중인 중국 기업 팝마트의 실적도 수직 상승했다. 2020년 홍콩 증시에 상장한 팝마트 주가는 지난해 연초 대비 13배 상승했고, 시가총액은 현재 3600억 홍콩달러(약 64조 원)에 이른다. 늘씬한 바비도 아니고, 귀여운 동물도 아닌 날카로운 이빨의 털북숭이가 왜 이렇게 인기를 끄는 걸까. 해외에선 장기간 이어진 팬데믹 영향이 컸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리서치 회사 ‘초잔’의 설립자 애슐리 두다레녹은 영국 BBC에 “2022년 말 중국이 팬데믹을 벗어날 때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도피하고 싶어 했는데, 완벽주의와는 정반대의 캐릭터인 라부부가 딱 들어맞았다”고 분석했다.서서히 동남아로 인기가 확산되던 라부부가 ‘글로벌 스타’가 된 건 리사의 공이 크다. 자칭타칭 라부부 마니아인 그가 지난해 4월부터 라부부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하자, 서구에서도 관심이 폭발했다. 이후 가수 리애나와 인플루언서 킴 카다시안,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 등이 라부부 인형을 들고 있거나 선물하는 모습이 포착되며 인기에 불을 붙였다.이러다 보니 라부부 사건도 벌어진다. 영국에선 라부부를 사려고 팝마트 매장 앞이 혼잡해지고 다툼까지 발생하는 등 안전 문제가 이어지자, 5월부터 모든 팝마트 오프라인 매장에서 라부부 판매를 중단시켰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선 시가 3만 달러(약 4000만 원) 상당의 라부부 인형을 훔쳐서 팔려고 했던 창고 직원 2명이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과한 집착은 도박 중독과 비슷라라부의 인기는 판매 방식도 한몫했다. 라부부가 ‘블라인드 박스’로 판매돼 MZ세대의 ‘인증샷’과 수집 욕구를 자극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라부부는 다양한 모양으로 출시되는데, 포장을 뜯기 전까진 어떤 종류인지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새로 산 라부부 박스를 열며 만족이나 실망을 표하는 ‘언박싱’ 영상이 소셜미디어에서 유행했다. 가수 이영지가 라부부를 구매해 상자를 열어봤는데 짝퉁이 나와 실망하는 영상은 대만 뉴스에도 보도됐을 정도다. 이러한 판매 전략은 중독적 소비 심리를 자극하는 ‘도파민 경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원하는 라부부 인형이 나올 때까지 중복적으로 구매하는 이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131cm 크기 민트색 라부부 인형은 한 경매에서 108만 위안(약 2억 원)에 낙찰돼 ‘투기 조장’이란 비난마저 일었다.전문가들은 라부부를 언박싱하면서 느끼는 설렘이 ‘도박 중독’과 비슷하다고 경고한다. 최지혜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라부부의 인기는 MZ세대의 셀럽에 대한 선망과 랜덤 판매에 따른 소비 갈망 심리 등이 만들어 낸 결과”라며 “과열 양상이 계속될 경우 사회적 피로도나 경각심이 커지면서 지금 같은 열기는 가라앉을 수 있다”고 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최근 블랙핑크 리사는 영국 런던에서 월드투어 공연을 마친 뒤 ‘인간 라부부’가 된 인증샷을 소셜미디어에 업로드했다. 북슬북슬한 핑크색 털, 기다란 귀와 동그란 눈, 그리고 허리춤엔 자기와 똑같은 ‘라부부’ 인형을 달고 있었다. 리사뿐만이 아니다. 67세 팝스타 마돈나는 생일 축하 파티에서 라부부를 패러디한 모양의 ‘마두두’ 케이크를 받고 촛불을 부는 모습을 역시 소셜미디어로 공개했다.최근 세계에서 중국의 인형 캐릭터 하나가 엄청난 광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름하여 ‘라부부(Labubu·拉布布).’ 2015년 홍콩 작가 룽카싱이 북유럽 신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었다는 이 캐릭터는 2019년 상품화됐다. “못생겼지만 귀엽다”며 중국과 동남아 시장에서 인기를 얻더니, 최근 북미와 유럽에서도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귀한 몸이 됐다. ● 라부부 절도에 판매 중단까지구글 트렌드에 따르면 올 4월 글로벌 ‘라부부’ 검색량은 일본이 자랑하는 인기 캐릭터 ‘헬로키티’를 추월했을 정도다. 라부부의 독점 라이선스를 계약하고 상품을 유통 중인 중국 기업 팝마트의 실적도 수직 상승했다. 2020년 홍콩 증시에 상장한 팝마트 주가는 지난해 연초 대비 13배 상승했고, 시가총액은 현재 3600억 홍콩달러(약 64조 원)에 이른다. 늘씬한 바비도 아니고, 귀여운 동물도 아닌 날카로운 이빨의 털북숭이가 왜 이렇게 인기를 끄는 걸까. 해외에선 장기간 이어진 팬데믹 영향이 컸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리서치 회사 ‘초잔’의 설립자 애슐리 두다레녹은 영국 BBC에 “2022년 말 중국이 팬데믹을 벗어날 때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도피하고 싶어 했는데, 완벽주의와는 정반대의 캐릭터인 라부부가 딱 들어맞았다”고 분석했다.서서히 동남아로 인기가 확산되던 라부부가 ‘글로벌 스타’가 된 건 리사의 공이 크다. 자칭타칭 라부부 매니아인 그가 지난해 4월부터 라부부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하자, 서구에서도 관심이 폭발했다. 이후 가수 리한나와 인플루언서 킴 카다시안,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 등이 라부부 인형을 들고 있거나 선물하는 모습이 포착되며 인기에 불을 붙였다.이러다보니 라부부 사건도 벌어진다. 영국에선 라부부를 사려고 팝마트 매장 앞이 혼잡해지고 다툼까지 발생하는 등 안전 문제가 이어지자, 5월부터 모든 팝마트 오프라인 매장에서 라부부 판매를 중단시켰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선 시가 3만 달러(약 4000만 원) 상당의 라부부 인형을 훔쳐서 팔려고 했던 창고 직원 2명이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과한 집착은 도박중독과 비슷라라부의 인기는 판매 방식도 한몫했다. 라부부가 ‘블라인드 박스’로 판매돼 MZ세대의 ‘인증샷’과 수집 욕구를 자극했다는 해석이다. 라부부는 다양한 모양으로 출시되는데, 포장을 뜯기 전까진 어떤 종류인지 알 수 없다. 때문에 새로 산 라부부 박스를 열며 만족이나 실망을 표하는 ‘언박싱’ 영상이 소셜미디어에서 유행했다. 가수 이영지가 라부부를 구매해 상자를 열어봤는데 짝퉁이 나와 실망하는 영상은 대만 뉴스에도 보도됐을 정도다. 이러한 판매 전략은 중독적 소비 심리를 자극하는 ‘도파민 경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원하는 라부부 인형이 나올 때까지 중복적으로 구매하는 이들이 늘고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131cm 크기 민트색 라부부 인형은 한 경매에서 108만 위안(약 2억 원)에 낙찰돼 ‘투기 조장’이란 비난마저 일었다.전문가들은 라부부를 언박싱하면서 느끼는 설렘이 ‘도박 중독’과 비슷하다고 경고한다. 최지혜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라부부의 인기는 MZ세대의 셀럽에 대한 선망과 랜덤 판매에 따른 소비 갈망 심리 등이 만들어낸 결과”라며 “과열 양상이 계속될 경우 사회적 피로도나 경각심이 커지면서 지금 같은 열기는 가라앉을 수 있다”고 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독특한 상상력으로 팬층이 두꺼운 플랑드르의 16세기 거장 히로니뮈스 보스, 극적인 표현으로 시선을 사로잡은 엘 그레코, 영국 왕실 초상화가로 유명한 안토니 반 다이크…. 국내에서 쉽게 볼 수 없는 20세기 이전 유럽 미술 거장들의 작품이 올가을 한국을 찾는다.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모더니즘까지 조망하는 특별전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 샌디에이고 미술관 특별전’이 11월 5일 서울 종로구 세종미술관에서 개막한다. 이 전시는 1925년 개관해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미국 서부의 명문 ‘샌디에이고 미술관(San Diego Museum of Art·SDMA)’의 소장품 65점을 소개한다.● 보스부터 모네까지 화려한 라인업 특히 이번 전시에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로코코 등 서양 미술의 주요 흐름을 아우르는 보스, 베로네세, 틴토레토, 엘 그레코, 페테르 파울 루벤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반 다이크 등의 작품이 대거 출품됐다. 19세기 이후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프란시스코 고야, 클로드 모네, 에드가르 드가, 툴루즈 로트레크, 메리 커샛, 피에르 보나르, 쉬잔 발라동,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등 총 60명 작가의 유화 63점과 조각 2점도 만날 수 있다. 주요 전시작으로는 보스가 1515년경 그린 종교화 ‘그리스도의 체포’를 꼽을 수 있다. 높이 50cm, 폭 80cm의 템페라 유화로, 예수가 로마 병사들에게 체포되는 순간을 묘사했다. 왼쪽에는 단검을 뽑는 병사가, 오른쪽에는 붉은 옷을 입은 성 베드로, 예수 바로 옆 유다와 그 외 병사들의 표정과 몸짓이 드라마틱하다. 반면 체포를 당하고 있는 예수는 오히려 체념한 듯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다.엘 그레코의 ‘목자들의 경배’도 주목할 작품. 24X20cm 유화로 비교적 작은 사이즈이나, 신비로운 분위기를 역동적으로 표현했다.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며 초라한 마구간에 모여든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밝게 표현된 아기 예수와 하늘에서 번개처럼 빛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고야와 반 다이크가 왕실과 귀족의 의뢰를 받아서 그린 초상화도 전시된다. 고야가 1795년경 그린 ‘라 로카 공작 비센테 마리아 베라 데 아라곤의 초상’(108.7X82. 55cm)과 반 다이크가 1638년경 그린 ‘영국 왕비 헨리에타 마리아의 초상’(107.32X85.09cm)이다. 두 작가 모두 인물의 성격과 분위기를 잘 살린 섬세한 초상화의 대가들로, 실물이 기대되는 작품들이다. 모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건초더미 연작에서 노을이 지는 모습을 담은 ‘샤이의 건초더미들’이나 신고전주의 작가인 윌리엄아돌프 부그로의 ‘양치기 소녀’ 등 19세기 작품도 전시된다.● SDMA 상설 컬렉션 25점, 해외 첫 전시 샌디에이고 미술관이 개관 100년 동안 한 번도 해외로 반출하지 않았던 주요 상설 컬렉션 25점도 서울에서 처음으로 공개된다. 반 다이크의 영국 왕비 초상이 대표적이다. 미술관 최고 경영자 겸 총괄 디렉터인 록사나 벨라스케스는 “상설 전시로만 선보였던 소장품들을 대거 해외에서 선보이는 건 처음”이라며 “이후로도 미국 밖에선 다시 보기 힘들 수 있다”고 했다.이 전시는 일본 도쿄 국립서양미술관과 교토시 교세라 미술관을 순회해 서울에서 열린다. 서울 전시는 일본 전시에선 선보이지 않았던 인상주의 이후 작가들의 작품도 포함됐다. 모네 ‘샤이의 건초더미들’을 비롯해 모딜리아니 ‘푸른 눈의 소년’, 발라동 ‘창문 앞의 젊은 여인’ 등이다. 전시 기획은 애니타 펠드먼 샌디에이고 미술관 부관장이 맡았고, 17∼18세기 스페인 미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마이클 브라운 박사가 큐레이터로 참여했다.‘샌디에이고 미술관 특별전’은 샌디에이고 미술관과 문화콘텐츠 기업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가 공동 주최한다. 김대성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대표는 “서양 미술사의 주요 작가들을 총망라해 작품과 희소성 측면에서 독보적인 전시”라고 자신했다. 11월 5일 개막해 내년 2월 22일까지 열린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사진)가 북미 지역 박스오피스에서 ‘깜짝 1위’에 올랐다. 미국 매체 버라이어티는 “케데헌이 23, 24일(현지 시간) 주말 동안 북미 극장가에서 최대 2000만 달러(약 277억 원)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추산된다”고 24일 보도했다. 이는 개봉 3주 차인 공포 영화 ‘웨폰’의 1560만 달러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특히 이번 ‘케데헌’의 박스오피스 1위는 정식 개봉이 아니어서 더 이례적이다. 넷플릭스는 ‘케데헌’이 6월 공개 뒤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북미와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에서 ‘싱얼롱(sing-along·따라 부르기)’ 스페셜 이벤트 상영회를 개최했다. 이번 이벤트에 북미에서만 1700개가 넘는 영화관이 참여했으며, 1000여 회차 분량의 티켓이 매진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케데헌’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르며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은 미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 ‘빌보드 200’에서 4주 연속 2위를 차지했다. 해당 차트에 8위로 데뷔한 케데헌 OST 앨범은 9주 연속으로 톱10에 들기도 했다. 빌보드에 따르면 지금까지 이 차트 톱10에 9주 이상 머물렀던 OST는 2015년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14주)가 유일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국 팝아트 작가 조엘 메슬러(51)의 개인전 ‘파라다이스 파운드(Paradise Found)’가 다음 달 2일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의 예술전시공간 ‘파라다이스 아트 스페이스’에서 개막한다. 메슬러는 이번 전시에서 ‘파라다이스’를 주제로 한 다양한 회화와 설치 작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이 중 19점은 처음 공개되는 신작으로, 파라다이스를 ‘내면에서 발견하는 자유와 평온의 상태’로 재해석했다. 전시는 Earth(땅), Water(물), Sky(하늘) 등 총 세 가지 테마로 메슬러의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파라다이스 아트 스페이스 리셉션 공간에서 시작하는 첫 번째 테마 ‘Earth’는 생명의 시작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야자수를 소재로 생명의 원천을 표현한 3m 규모 회화 작품 ‘Tree of Life(생명의 나무)’와 자연의 생명력을 표현한 회화 ‘Play the Hits(히트곡을 틀다)’, 설치 작품 ‘Flag(깃발)’가 관객을 맞는다.이어지는 1층 전시장의 주제는 ‘Water’다. 물처럼 유연하고 평화로운 감정을 담은 ‘Sunshine Daydream(낮에 꾸는 꿈)’ 같은 회화 작품, 물을 모티프로 한 벽면 장식, 대형 비치볼을 그린 회화 2점이 전시된다. 마지막 2층 전시장은 ‘Sky’가 테마다. 메슬러가 중년을 지나며 탐구한 존재의 의미에 대해 다룬 공간이다. 금박 풍선으로 파라다이스를 표현한 회화 작품 ‘Paradise with Blossoms(꽃이 가득한 낙원)’는 작품을 앉아서 볼 수 있는 안락의자를 설치한다. 존재하는 순간에 대한 명상과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얻는 용기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메슬러는 미 로스앤젤레스(LA)에서 태어나 LA, 뉴욕, 햄프턴 등에서 아트 딜러 및 갤러리를 운영하는 경험을 쌓은 뒤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다. 그의 회화는 바나나 잎, 수영장, 풍선, 도넛 등 LA의 풍경과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요소들이 자주 등장한다. 또 ‘너는 혼자가 아니야’, ‘좋은 일이 꼭 올 거야’ 같은 감성적인 문구를 자주 활용하는 것도 특징이다. 이는 알코올·약물 중독, 예술가로서의 실패 등 여러 어려움을 겪었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인생의 고통과 회복, 치유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자 하는 의도다. 파라다이스시티는 리조트 전 구역에 3000여 점에 이르는 미술 작품을 배치하고 글로벌 아티스트들의 공연이나 K컬처 콘텐츠를 제공하는 복합 리조트다. 이번 전시는 내년 2월 22일까지 열린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가 북미 지역 박스오피스에서 ‘깜짝 1위’에 올랐다. 미국 매체 버라이어티는 “케데헌이 23, 24일(현지 시간) 주말 동안 북미 극장가에서 최대 2000만 달러(약 277억 원)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추산된다”고 24일 보도했다. 이는 개봉 3주 차인 공포 영화 ‘웨폰’의 1560만 달러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특히 이번 ‘케데헌’의 박스오피스 1위는 정식 개봉이 아니어서 더 이례적이다. 넷플릭스는 ‘케데헌’이 6월 공개 뒤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북미와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에서 ‘싱어롱(sing-along·따라부르기)’ 스페셜 이벤트 상영회를 개최했다. 이번 이벤트에 북미에서만 1700개가 넘는 영화관이 참여했으며, 1000여 회차 분량의 티켓이 매진됐던 것으로 알려졌다.한편 ‘케데헌’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르며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은 미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 ‘빌보드 200’에서 4주 연속 2위를 차지했다. 해당 차트에 8위로 데뷔한 케데헌 OST 앨범은 9주 연속으로 톱10에 들기도 했다. 빌보드에 따르면 지금까지 이 차트 톱10에 9주 이상 머물렀던 OST는 2015년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14주)가 유일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국 팝아트 작가 조엘 메슬러의 개인전 ‘파라다이스 파운드(Paradise Found)’가 다음 달 2일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의 예술전시공간 ‘파라다이스 아트 스페이스’에서 개막한다. 메슬러는 이번 전시에서 ‘파라다이스’를 주제로 한 다양한 회화와 설치 작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이 중 19점은 처음 공개되는 신작으로, 파라다이스를 ‘내면에서 발견하는 자유와 평온의 상태’로 재해석했다.전시는 Earth(땅), Water(물), Sky(하늘) 등 총 세 가지 테마로 메슬러의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파라다이스 아트 스페이스 리셉션 공간에서 시작하는 첫 번째 테마 ‘Earth’는 생명의 시작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야자수를 소재로 생명의 원천을 표현한 3m 규모 회화 작품 ‘Tree of Life(생명의 나무)’와 자연의 생명력을 표현한 회화 ‘Play the Hits(히트곡을 틀다)’, 설치 작품 ‘Flag’(깃발)가 관객을 맞는다.이어지는 1층 전시장의 주제는 ‘Water’다. 물처럼 유연하고 평화로운 감정을 담은 ‘Sunshine Daydream(낮에 꾸는 꿈)’ 같은 회화 작품, 물을 모티프로 한 벽면 장식, 대형 비치볼을 그린 회화 2점이 전시된다. 마지막 2층 전시장은 ‘Sky’가 테마다. 메슬러가 중년을 지나며 탐구한 존재의 의미에 대해 다룬 공간이다. 금박 풍선으로 파라다이스를 표현한 회화 작품 ‘Paradise with Blossoms(꽃이 가득한 낙원)’는 작품을 앉아서 볼 수 있는 안락의자를 설치한다. 존재하는 순간에 대한 명상과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얻는 용기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메슬러는 미 로스앤젤레스(LA)에서 태어나 LA, 뉴욕, 햄프턴 등에서 아트 딜러 및 갤러리를 운영하는 경험을 쌓은 뒤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다. 그의 회화는 바나나 잎, 수영장, 풍선, 도넛 등 LA의 풍경과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요소들이 자주 등장한다. 또 ‘너는 혼자가 아니야’, ‘좋은 일이 꼭 올 거야’ 같은 감성적인 문구를 자주 활용하는 것도 특징이다. 이는 알코올·약물 중독, 예술가로서 실패 등 여러 어려움을 겪었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인생의 고통과 회복, 치유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자 하는 의도다.파라다이스시티는 리조트 전 구역에 3000여 점에 이르는 미술 작품을 배치하고 글로벌 아티스트들의 공연이나 K컬처 콘텐츠를 제공하는 복합 리조트다. 이번 전시는 내년 2월 22일까지 열린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때에도/그대(술병)가 상에 놓이지 않으면/어떻게 손님을 즐겁게 하랴!(花月令辰/非爾在牀/曷以娛賓) … 쓰기에는 아름답지만/모든 허물이 여기서 비롯된다(用之斯美/百咎攸自).’ 표주박처럼 둥근 몸에 가늘고 긴 입을 가진 백자 위에 푸른색 글씨로 한시가 적혀 있다. 손님을 대접하는 상에 올랐을 이 백자는 술의 정취를 노래하면서도, 절제하지 않으면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옛 시절의 낭만이 가득한 이 술병부터 기울어진 달항아리, 깊은 검은색의 흑자(黑瓷)와 분청사기까지 조선 시대 도자기와 한국 현대미술 작품을 함께 선보이는 기획전 ‘흙으로부터’가 20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에서 개막했다. 전시는 분청사기와 박영하의 회화 작품 ‘내일의 너’로 시작한다. 분청사기의 투박한 질감과 회화 작품 속 거친 천연 안료가 교차하는 가운데, 달항아리 도자기 옆에는 한국 어디에서나 보이던 항아리를 그린 송현숙의 연작이 전시됐다. 송현숙은 1970년대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건너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말뚝, 항아리, 명주실 등의 사물로 표현하고 있다. 김환기가 백자를 그린 회화 ‘항아리’ 앞에는 칠흑처럼 까만 ‘흑자 편호’가 자리한다. 흑자는 철분이 다량 함유된 유약을 칠해 만든 것으로, 고려 초기 등장해 조선 말까지 제작됐다.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흑자는 15∼16세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전시장 맞은편에는 백자 술병인 ‘표형문자입주병’이 전시됐다. 이 병 좌우로 김환기가 한글을 연상케 하는 문자를 그린 추상 ‘무제’(1960년대)와 작은 활자들을 모아서 제작한 이진용 작가의 ‘컨티뉴엄’ 연작이 벽면을 가득 채운다. 이렇게 전시는 흙으로 빚은 도자기에서 시작해 흙을 재료로 하거나 이것을 연상케 하는 회화, 설치 작품으로 확장된다. 학고재 신관에서는 박광수, 로와정, 지근욱 등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이어진다. 박광수 작가는 ‘땅과 화살’을 비롯해 ‘땅의 표면에 닿는 느낌’에서 영감을 얻은 회화 연작을, 로와정은 못을 이용한 개념 설치 작품 ‘N’을 선보인다. 지근욱 작가는 우주의 형상을 상상하며 색연필로 규칙적인 선을 긋거나 프린트로 미세한 망점을 새겨 만든 회화 연작 ‘스페이스 엔진’을 공개했다. 신리사 학고재 기획팀장은 “흙을 따라 전통과 현대, 물질과 정신, 기억과 감각 사이 연속성을 하나의 장에 펼쳐보고자 했다”며 “흙이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니듯 한국성 역시 시대와 맥락 속에서 유연하게 변주되는 개념임을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통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 달 13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때에도/ 그대(술병)가 상에 놓이지 않으면 어떻게 손님을 즐겁게 하랴!(花月令辰/ 非爾在牀/ 曷以娛賓) (…) 쓰기에는 아름답지만/ 모든 허물이 여기서 비롯된다.(用之斯美/ 百咎攸自)’표주박처럼 둥근 몸에 가늘고 긴 입을 가진 백자 위에 푸른색 글씨로 한시가 적혀 있다. 손님을 대접하는 상에 올랐을 이 백자는 술의 정취를 노래하면서도, 절제하지 않으면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옛 시절의 낭만이 가득한 이 술병부터 기울어진 달항아리, 깊은 검은색의 흑자(黑瓷)와 분청사기까지 조선시대 도자기와 한국 현대미술 작품을 함께 선보이는 기획전 ‘흙으로부터’가 20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에서 개막했다.전시는 분청사기와 박영하의 회화 작품 ‘내일의 너’로 시작한다. 분청사기의 투박한 질감과 회화 작품 속 거친 천연 안료가 교차하는 가운데, 달항아리 도자기 옆에는 한국 어디에서나 보이던 항아리를 그린 송현숙의 연작이 전시됐다. 송현숙은 1970년대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건너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말뚝, 항아리, 명주실 등의 사물로 표현하고 있다.김환기가 백자를 그린 회화 ‘항아리’ 앞에는 칠흑처럼 까만 ‘흑자편호’가 자리한다. 흑자는 철분이 다량 함유된 유약을 칠해 만든 것으로, 고려 초기 등장해 조선 말까지 제작됐다.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흑자는 15~16세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전시장 맞은편에는 백자 술병인 ‘표형문자입주병’이 전시됐다. 이 병을 좌우로 김환기가 한글을 연상케 하는 문자를 그린 추상 ‘무제’(1960년대)와 작은 활자들을 모아서 제작한 이진용 작가의 ‘컨티뉴엄’ 연작이 벽면을 가득 채운다. 이렇게 전시는 흙으로 빚은 도자기에서 시작해 흙을 재료로 하거나 이것을 연상케 하는 회화, 설치 작품으로 확장된다.학고재 신관에서는 박광수, 로와정, 지근욱 등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이어진다. 박광수 작가는 ‘땅과 화살’을 비롯해 ‘땅의 표면에 닿는 느낌’에서 영감을 얻은 회화 연작을, 로와정은 못을 이용한 개념 설치 작품 ‘N’을 선보인다. 지근욱 작가는 우주의 형상을 상상하며 색연필로 규칙적인 선을 긋거나 프린트로 미세한 망점을 새겨 만든 회화 연작 ‘스페이스 엔진’을 공개했다.신리사 학고재 기획팀장은 “흙을 따라 전통과 현대, 물질과 정신, 기억과 감각 사이 연속성을 하나의 장에 펼쳐보고자 했다”며 “흙이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니듯 한국성 역시 시대와 맥락 속에서 유연하게 변주되는 개념임을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통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 달 13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다 한국에 갔다”, “두 명만 모이면 한국 이야기가 나온다”. 1990년대 이후 중국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은 한국으로의 대거 이주에 나섰다. 한국에서 번 돈으로 집을 장만한 가족을 일컫는 ‘만원호’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였다. ‘1만 위안의 집’이란 뜻인 만원호는 한국행으로 큰 부를 거둔 이들을 가리켰다. 이처럼 코리안 드림은 조선족 농민과 노동자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책은 이러한 연변 출신 노동자들이 경험하게 되는 코리안 드림의 현실과 희로애락을 인류학 연구자의 시선으로 담았다. 2004년 서울에서 미등록 조선족 노동자를 만나고 관심을 갖게 된 저자는 2016년까지 한국과 중국, 연변에서 조선족 동포 및 가족 연구자와 활동가를 만나 이들의 실상을 관찰하고 이들의 꿈과 좌절, 생존을 위한 전략을 세밀하게 그린다. 이 책에서 주요하게 그려지는 장면 중 하나는 조선족 노동자들이 가족과 고향을 뒤로하고 국경을 넘는 과정이다. 조선족 노동자들은 소수민족으로 겪는 중국 내에서의 경제적 한계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또 한국에서 돈을 벌면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 속에 빚을 내거나 친지의 도움을 받아 한국행을 택한다. 하지만 한국에 도착하고 나면 기대와는 달리 현실의 벽을 마주하게 된다. 언어와 문화가 비슷한 동포로서 환대를 받음과 동시에 차별이 공존한다. 이들은 한국에서도 노동시장 주변부의 가장 고된 일자리로 내몰린다. 책에서 한 조선족 여성은 고향에 집을 장만한다는 꿈을 안고 하루 12시간 이상 식당 주방에서 고되게 일하지만, 자신을 향한 차가운 경계의 시선을 늘 느낀다. 가족을 한국에 보내고 연변에 남은 조선족 역시 삶은 쉽지 않다. 멀리 있는 파트너를 기다리며 혼자 자녀를 키우거나 가사를 돌보는 남편이나 부인들을 연변에서는 ‘보토리’라고 부른다. 보토리들이 가족의 송금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가족의 귀환 혹은 한국에 갈 기회를 기다리는 것 역시 ‘기다림의 노동’이라고 저자는 표현한다. 2008년 이후 중국 경제가 부상하면서 수많은 조선족들이 ‘차이나 드림’으로 눈을 돌리게 된 상황도 소개한다. 이 무렵 연변 지역의 ‘한국 바람’은 재평가를 받는다. 친구들에게 한국에 간다고 하면 ‘아직도 한국에 가느냐’, ‘왜 가느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이에 ‘중국에서 사업을 한다’고 거짓말한다는 일화도 등장한다. 책은 코리안 드림이나 차이나 드림처럼 ‘국가의 이름’으로 단순화된 꿈을 넘어, 새로운 삶의 경로를 모색하는 세대의 부상을 전망한다. 연변은 조선족의 우선권과 한국어 사용이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지역이다. 그러나 조선족이 ‘중국의 소수민족이자 한국의 재외동포’라는 경계적 위치에 있듯, 연변도 서로 다른 꿈들이 경합을 벌이는 역동적인 공간임을 책은 인류학적인 렌즈로 분석한다. 미국 새크라멘토 캘리포니아주립대 아시아학과 교수인 저자가 2023년 미국에 먼저 출간한 책으로, 북미·유럽 중심의 이주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24년 미국동아시아인류학회(SEAA) 저술상을 수상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마크 브래드포드의 개인전 ‘킵 워킹(Keep Walking)’이 열리는 서울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 가면, 전시장 바닥에 넓게 펼쳐진 작품 ‘Float’가 관객을 맞이합니다.이 작품 옆으로는 골목길을 당당하게 걷는 사람의 모습이 담긴 영상 작품 ‘나이아가라’가 상영되고 있고요.두 조합은 ‘망설이지 말고 어서 들어와, 그리고 계속 걸어‘라는 메시지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작가의 초청에 따라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파마지와 길거리 전단지를 갈고 닦아 만든 아름다운 추상화들이 관객을 맞이합니다.그리고 마지막 방 ‘폭풍이 밀려온다’로 들어서면 휘몰아치는 허리케인을 느낄 수 있습니다.이 모든 경험에 대해 작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브래드포드는 재료를 사용하게 된 과정부터, 미국 추상표현주의와 모더니즘에 대한 의견, 그리고 한국 전시를 준비하며 느꼈던 걱정까지 진솔하게 들려주었습니다. 인터뷰 전문을 뉴스레터로 보내드립니다.— 먼저 작가님이 ‘파마지’를 사용하게 된 계기를 물어보고 싶어요. 언제 처음 그걸 쓰겠다고 생각했는지, 또 그 종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길래 그걸 사용하는지요.“제가 석사 과정을 할 때인데, 당시 ‘기억’과 ‘재료’에 관심이 많았어요.내가 유화 물감을 사용한다면, 내 작품이 속하는 역사란 ‘유화 그림의 역사’라고 생각했죠.물론 그 ‘유화 그림의 역사’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유럽 회화 중심의) 미술사죠.여기에 더해서 사람들은 (흑인이자 미용사의 아들이라는) 제 출신과 성장 스토리에 집착했거든요.그러니 (파마지라는) 재료의 기원을 생각하며 이걸 전략적으로 쓸 수 있겠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역사에 대해 대화를 여는 전략으로 재료를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파마지를 쓰게 된 거예요.”— 파마지에 담긴 사회적, 정치적 맥락이란 어떤 걸까요?간단해요. 파마지는 파마를 할 때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미용실에서 쓰는 종이죠. 한국 사람들도 파마를 많이 하니까 그 재료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죠.저는 흑인 여성들이 자주 드나드는 공간인 미용실에서 파마지를 사용하며 자랐습니다. 그러니 내가 속한 사회의 역사와 관련 있는 재료죠.동시에 저는 미술사, 특히 추상 미술의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유럽의 추상과 1950년대 미국 추상이 그것인데. 저에게 그런 추상과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의 자체가 텅 빈 것처럼 느껴졌어요.예술가의 고요한 작업실에서 만들어지는 추상화가 세상과는 동떨어진 ‘텅 빈 그릇’과 같다고 해야 할까요?저는 그런 모더니즘의 개념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죠. 전혀요.— 그러면 파마지를 보고 ‘아, 내가 이걸 재료로 쓸 수 있겠다’했던 정확한 순간은 기억이 나나요?네, 작업실에 있을 때였어요.교수님과 크리틱을 하고 있었고, 제가 플라스틱 위에 반투명한 흰색 파마지를 붙였어요.교수님이 들어와서 봤고,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저는 이게 회화라고 생각해요.”교수님이 아래로 훑어보더니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하고 걸어 나갔어요. 그 순간 생각했죠.“음, 이거 흥미로운데?”그때부터 파마지를 재료로 쓰기 시작한 거예요.그런데 제가 다녔던 학교(CalArts)는 9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의 이론을 중시하는 곳이었어요. 유럽 이론이 정점에 이르렀고, 자크 데리다는 신이었으며 할 포스터, 호미 바바, 로잘린드 크라우스… 그러니까 정체성과 이론의 시대였죠. 그런 가운데 제 작업을 보고 어떤 교수는 이렇게 말했어요.“너 이거 계속하면, 네 커리어는 끝날 거야.”— 왜 커리어가 끝난다고 했어요?너무 ‘재료적’(material)이었고, ‘모더니즘 회화’,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뉴욕 화파를 직접 건드렸기 때문이에요.모더니즘 회화는 잭슨 폴록 같은 커다란 백인 남자들이 그린 추상화이고, 그건 헤테로섹슈얼, 나쁜 남자, 카우보이들의 그림이었어요.페미니즘을 비롯한 이론의 시대에 폴록 같은 추상화가는 ‘악당’이었거든요.근데 저는 생각했어요.“왜 그리면 안 돼? 그 역사를 확장하면 안 돼? 거기로 직접 뛰어들어서 내가 차지하면 되는 거 아닌가?나도 카우보이가 될 수 있지. 게이도 카우보이 할 수 있잖아.”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죠.“아니, 회화는 죽었어.”그 사람들에게 저는 이렇게 답한 거예요.“그래? 회화가 죽었다면 나는 뱀파이어가 되지 뭐.”— 그러니까 뱀파이어가 될지언정 남들이 다 죽었다는 회화로 승부를 걸겠다. 다만 유럽 미술사의 상징인 유화 물감은 쓰지 않고 다른 재료를 쓰겠다는 거였네요. 맞아요. 회화만큼 ‘재료의 순수성’에 집착하는 매체는 없을 거예요.지금 작가들이 조각을 전부 대리석으로 만들지는 않잖아요? 그래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요.그런데 회화에서는 순수성, 위계적 순수성을 고집하죠.저는 물감을 쓰지 않으면서 내 이야기를 회화사로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조각가가 이탈리아 카라라 대리석을 쓰지 않아도 조각사에 들어가는 것처럼요.그러니까 사실 저에게 중요한 건 재료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권력’이에요.— 그 말은 당신이 ‘유화’를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했다고 이해해도 될까요?맞아요. 그와 동시에 저는 회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그것도 추상. 특히 미국 추상.뉴욕 현대미술관(MoMA)과 초대 관장이었던 알프레드 바. 1950년대.세상과의 문을 닫아 버리고 캔버스와 아주 원초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그 개념.(모더니즘) 저는 그런 말을 믿지 않아요.생각해 보세요. 그 당시 작가들의 작업실 밖에서 마틴 루서 킹은 암살됐고 민권 운동이 일어났어요. 잭슨 폴록이 ‘타임’ 표지에 실릴 때와 같은 시기였죠.1950년대 미국 추상은 아주 글로벌하게 퍼져 나가서 한국에서까지 볼 수 있는 것이 되었지만.그건 미국 내부가 정치적으로 너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형상이 없는 추상을 미국의 이미지로 바깥에 보낸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그런 추상들이 미국 국경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다 가려버린 거죠.”— 멀리서 보면 당신의 작업은 정말 화려하고 아름다워요.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찢어지고 긁히고 닳아 있는 흔적을 볼 수 있는데요. 혹시 여기에 ‘분노’가 담겨 있나요?그럴지도 모르죠. 흠, 내가 분노하고 있을까?사회적인 맥락에서 분노라면 맞아요. 저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특정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는 화를 내고 있는 게 맞아요.그러나 예술적으로? 음, 예술적으로는 아니에요.제 표현이 강렬할 수는 있지만, 작품을 만들 때 분노에 사로잡혀 있진 않아요.내 작업은 굉장히 육체적이에요. 물리적인 측면이 강하고.그래서 공격적 에너지가 느껴질 수는 있죠.하지만 그게 단순히 화가 난 상태는 아니거든요. 이렇게 말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나는 재료를 내가 원하는 대로 굽히는 데 아주 능숙해요. 이 과정이 공격적으로 보일 수는 있어요.미용사라면 고객이 원하는 대로 머리를 반드시 만들어 줘야 하잖아요.때로는 고객이 원하는 걸 위해서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어요. 내가 미용사로 일할 때 그걸 배운 것 같아요.예를 들어 보죠. 흑인 손님이 와서 ‘나 백금발로 머리하고 싶어’라고 하면 저는 나무 조각을 주고 입에 물라고 해요.“백금발을 원한다고? 그래 그럼 이거 물고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안 멈출 테니까 아파도 참아야 해.” 이런 식이었죠. — 저도 곱슬머리라서 무슨 말인지 알아요. 찰랑이는 머리카락으로 만들기 위해 몇 시간이고 가만히 앉아서 참아야 하거든요.그러니까요.회화를 할 때도 내가 타고난 본성과 내가 원하는 욕망 사이의 긴장이 있어요. 저는 곱슬머리 흑인한테 하는 이런 말을 싫어해요.‘네 원래 머리가 얼마나 예쁜데 바꾸려고 해? 그대로 둬’아니? 저 여자는 생머리를 하고 싶다잖아. 그냥 닥쳐.그림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어떻게든 만드는 거예요.낑낑거리며 그림을 타고 올라가 밀어 넣고 잡아당기면서 애를 쓰죠.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 곱슬머리는 곧게 펴진 머리가 되어 있어요. — 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이번에 공개한 신작 ‘폭풍이 몰려온다’가 있는 마지막 방이 생각나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끄집어낸 느낌? 작가님에게 직접 설명을 듣고 싶어요.그 작품은 아주 층위가 많아요.자연재해인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있고,카트리나라는 이름을 가진 트랜스젠더 여성이 있으며,필라델피아에서 볼룸 문화를 만든 최초의 드랙퀸 윌리엄 도시,그리고 나 자신이 있어요.우리가 공유하는 유일한 공통점은 모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겁니다.저는… 모든 역사를 하나로 불러와, 방 안에서 소용돌이치듯 함께 회전하는 힘을 만들고 싶었어요. — ‘폭풍이 몰려온다’가 전시된 방에서 저는 윌리엄 도시라는 사람을 세상이 지우려 했지만, 그런 억압이 시간이 지나 더 큰 반작용으로 돌아와 태풍처럼 모든 것을 드러내고 집어삼키는 움직임이 느껴졌어요.맞습니다. 정확해요.사실 이 연작을 뉴욕이나 할렘에서 발표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너무 쉬운 길 같았어요.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허리케인은 예상 못 하는 것에서 불어오는 거니까. 그걸 서울에서 보여주고 싶었어요.어쩌면 그 허리케인이 바로 저일 수도 있고요.나, 마크 브래드포드가 서울로 온 허리케인 인거죠. — 흥미롭네요. 네 그런 허리케인 같은 휘몰아치는 바람이 느껴졌어요.그걸 느꼈다니 너무 좋네요.맞아요. 한국인이라고 이걸 이해할 수 있고, 저건 이해할 수 없다. 저는 그런 생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나는 지역성(locality)을 믿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진리도 있다고 믿어요. 한국에서도 사람들이 이 작업을 이해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당신은 언제 처음으로 ‘예술가가 되겠다’고 의식했나요?사람들이 저에게 항상 그 질문을 해요. 그런데 그런 결정적인 순간 같은 건 없었어요.‘꿈을 따라라’는 식의 말은 중산층이나 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생각이에요.내가 자란 건 그런 환경이 아니었거든요.나는 밤에 일을 마치고 야간 학교에 가서 미술 수업을 들었어요.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그러한 과정을 거쳤죠.— 그런데 물감 아닌 재료를 쓴 회화로 승부하려 마음먹었다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꿈을 갖지 않았다기엔, 그 말은 세잔이 ‘사과로 파리를 정복하겠다’고 한 것처럼 야심에 가득한 예술가의 말로 들렸는데요.그런가요? 사람들이 저를 보고 자신감이 넘친다는 말은 하는데. 스스로 내가 그런 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보다 나는 ‘시도’를 하는 사람이었어요.난 늘 변두리에 밀려난 사람이었거든요.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바가 없으니, 역설적으로 나에겐 어떤 자유가 있었어요.나 역시 사람들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고. 그러니 자신감 보다는 그런 자유가 내 안에 늘 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내가 예술가로 성공했다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그게 때로는 족쇄가 될 수 있어요. 성공할수록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아지니까요. — 당신은 파마지뿐 아니라 길거리 전단지처럼 버려진 재료를 쓰잖아요. 네. 그 버려진 재료를 가져와 회화사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고 있죠. 버려진 것, 주변부로 밀려난 것을 붙잡아다가, 중심으로 가져오는 거예요. 그 버려진 것은 어쩌면 나 자신인지도 몰라요.가난하고, 동성애자이고, 흑인인.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나의 위치. 하지만 난 결코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절대로. 오히려 권력자들이 앉는 식탁(왕좌)에 비집고 들어가 걸리적거리는 걸 치우고 내 자리를 만들려고 했죠.나에게 추상 회화는 정치적인 행위였고 내가 그걸 하는 이유는 분명했어요. 중심에 앉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왜 여기 앉으면 안 되는데? 반문하면서.어떤 사람들은 “네 얘길 듣고 싶지 않아”라고 했습니다.그럼 난 “그래?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난 여기 앉을 거야”라고 한 거고요. 전 여자들한테도 항상 ‘제발 먼저 나서서 사과 좀 하지마’라고 해요.여자들은 테이블에 놓인 생수병 하나를 가져가면서도, “미안한데 이거 마셔도 돼요?” 묻잖아요.제발 그러지 마. 백인 남자들은 묻지도 않고 그냥 가져가잖아.그러니까 우리도 마시고 싶으면 그냥 집어서 가져가자고요.나는 권력에 대해 아주 민감한 사람이고, 모든 사람이 왕좌에 앉아 버티며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 그 말을 듣고 있으니 당신이 ‘계속해서 걸어 나가고(keep walking)’ 그 뒤로 폭풍이 밀려오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네요.네. 맞습니다. 제 작품은 허리케인이 오는 것과 같아요. 사실 한국에서 ‘폭풍이 밀려온다’ 연작을 공개하는 건 저에게 불안감을 주는 경험이었어요. 한국의 문화에 대해 내가 완벽하게 알지 못하고, 이건 흑인 문화에 관한 이야기니까 다르게 읽힐 수가 있잖아요. 그렇지만 아냐, 하자. 그냥 하자. 여기서도 좋을 거야. 라고 생각했죠. — 전시를 보고 이야기를 듣고 나니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후련해요. 가만히 있지 말고 원하는 것을 싸워서 얻어 내라는 메시지가 느껴져서요.정말요? 그럼 됐어요. 그게 바로 제가 원하는 거였어요.다음 세대의 관객들이 내 작품을 보고 용기를 내는 거요.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가 좋아하건 싫어하건 반드시 몰려오게 되어 있으니, 그들이 제 작품을 보고 용감해질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마크 브래드포드: Keep Walking- 2025년 8월 1일 ~ 2026년 1월 25일- 서울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뭐든 도전하고 싶습니다.” 2년 동안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전국 투어에 나섰던 배우 박근형이 투어가 끝난 지 한 달여 만에 다시 무대에 선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전 ‘고도를 기다리며’를 오마주한 코미디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의 대역배우 에스터 역을 통해서다. 19일 서울 종로구 예스24스테이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박근형은 “배우는 수천 가지 역할에 도전하는 습성이 있다. 노년에도 어떤 역할이든 시간이 나면 도전하고 싶다”며 “시간을 오래 두지 않고 바로 에스터 역할을 자청했다”고 밝혔다. 미국 극작가 데이브 핸슨이 쓴 이 작품은 2013년 뉴욕 국제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첫선을 보였고 국내에서는 지난해 초연됐다. 무대 뒤 허름한 분장실에서 연출자를 기다리는 두 언더스터디(대역 배우) 에스터와 벨의 기다림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이번 공연은 오경택이 연출을 맡았고 박근형과 김병철이 ‘에스터’역을, 이상윤과 최민호가 ‘벨’ 역을 맡았다. 박근형은 “한 번도 무대에 서 본 일 없이 일생 무대와 연출자를 기다리는 인물이 에스터”라며 “사회에서 소외되는 마지막 심정을 얘기하고 싶었다. 사라져 가는 노배우가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저와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배우는 어느 역할이든 단 한 번 연기할 수 있기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 기대해 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창작극 지원에 대한 의견도 밝혔다. 그는 “창작극에 배고파 있다. 희곡 문학이 많이 없어서 맨날 남의 나라 작품을 하고 있다. 배우들이 공연하기 좋은 환경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다음 달 16일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 개막한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꿀벌, 두루미, 희귀한 새들과 자생 넝쿨식물까지. 반세기 넘게 사람의 발길이 끊긴 비무장지대(DMZ)는 전쟁과 분단의 상흔이 가득하다. 하지만 생물들 입장에선 야생에서 다양성이 공존하는 땅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각에서 DMZ를 바라본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은 현대미술 전시 ‘DMZ OPEN 전시: 언두 디엠지(UNDO DMZ)’가 11일 경기 파주시 DMZ 일대에서 개막했다.전시는 작가 10명의 작품 26점을 민통선 내 통일촌 마을과 미군 기지 내 볼링장을 전시장으로 바꾼 ‘갤러리 그리브스’,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선보인다. 통일촌 마을에선 쌀을 보관하는 수매창고도 전시장으로 탈바꿈했다. 강원 철원의 가상 세계를 배경으로 꿀벌 ‘봉희’가 겪는 사건을 담은 양혜규 작가의 영상 ‘황색 춤’과 그래픽 작업 ‘디엠지 비행’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디엠지 비행’에선 로봇 벌과 철조망, 망원경 같은 오브제가 등장한다. 이는 작가가 DMZ 이면에 흐르는 인간과 자연의 에너지 흐름을 상상해 조합했다고 한다. 수매창고 밖으로 나오면 DMZ 문화예술 공간 ‘통’에서 DMZ에서 수집한 소리를 이용한 김준의 설치 작품, 2019년부터 DMZ 파주 권역의 동식물 잔해를 수집하고 액침 표본으로 보존한 박준식의 ‘비옥한 땅에 핀 꽃’을 볼 수 있다. 갤러리 그리브스에서는 버려지는 텐트, 군복, 낙하산을 이용해 옷으로 재탄생시킨 래코드의 ‘전장에서 일상으로: 군용 소재’가 중앙에 설치됐다. 그 뒤편으로 방탄복에 사용되는 아라미드 원사를 재활용해서 버섯 형태로 만든 오상민 작가의 ‘쏘일 투 쏘울’이 보인다. ‘학의 눈밭’은 홍영인 작가가 DMZ의 두루미를 관찰하고 만든 작품으로 하얀 모래 위에 여덟 쌍의 두루미 신발을 만들어 올려놓았다. 두루미를 익명의 집단이 아닌 각기 다른 신발을 신는 개별적인 존재로 본다는 의미를 담았다.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는 지장보살이 황금털을 가진 멧돼지로 환생해 원한의 고리를 끊어 냈다는 신라시대 설화를 담은 원성원 작가의 ‘황금털을 가진 멧돼지’, DMZ 자생 식물의 형태를 본떠 금속 실로 자수를 놓아서 표현한 오상민의 ‘빛: 자연과 선의 틈에서’ 등이 야외 공간에 큰 규모로 설치됐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은 “70여 년간 긴장과 전쟁의 잔재로 남아있던 비무장지대가 자연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되는 과정을 예술가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시도”라며 “DMZ의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지형을 열어주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11월 5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꿀벌, 두루미, 희귀한 새들과 자생 넝쿨식물까지.반세기 넘게 사람의 발길이 끊진 비무장지대(DMZ)는 전쟁과 분단의 상흔이 가득하다. 하지만 생물들 입장에선 야생에서 다양성이 공존하는 땅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각에서 DMZ를 바라본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은 현대미술 전시 ‘DMZ OPEN 전시: 언두 디엠지(UNDO DMZ)’가 11일 경기 파주시 DMZ 일대에서 개막했다.전시는 작가 10명의 작품 26점을 민통선 내 통일촌 마을과 미군 기지 내 볼링장을 전시장으로 바꾼 ‘갤러리 그리브스’,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선보인다. 통일촌 마을에선 쌀을 보관하는 수매창고도 전시장으로 탈바꿈했다. 강원도 철원의 가상 세계를 배경으로 꿀벌 ‘봉희’가 겪는 사건을 담은 양혜규 작가의 영상 ‘황색 춤’과 그래픽 작업 ‘디엠지 비행’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디엠지 비행’에선 로봇 벌과 철조망, 망원경 같은 오브제가 등장한다. 이는 작가가 DMZ 이면에 흐르는 인간과 자연의 에너지 흐름을 상상해 조합했다고 한다.수매창고 밖으로 나오면 DMZ 문화예술 공간 ‘통’에서 DMZ에서 수집한 소리를 이용한 김준의 설치 작품, 2019년부터 DMZ 파주권역의 동∙식물 잔해를 수집하고 액침 표본으로 보존한 박준식의 ‘비옥한 땅에 핀 꽃’을 볼 수 있다.갤러리 그리브스에서는 버려지는 텐트, 군복, 낙하산을 이용해 옷으로 재탄생시킨 래코드의 ‘전장에서 일상으로: 군용 소재’가 중앙에 설치됐다. 그 뒤편으로 방탄복에 사용되는 아라미드 원사를 재활용해서 버섯 형태로 만든 오상민 작가의 ‘쏘일 투 쏘울’이 보인다. ‘학의 눈밭’은 홍영인 작가가 DMZ의 두루미를 관찰하고 만든 작품으로 하얀 모래 위에 여덟 쌍의 두루미 신발을 만들어 올려놓았다. 두루미를 익명의 집단이 아닌 각기 다른 신발을 신는 개별적인 존재로 본다는 의미를 담았다.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는 지장보살이 황금털을 가진 멧돼지로 환생해 원한의 고리를 끊어 냈다는 신라시대 설화를 담은 원성원 작가의 ‘황금털을 가진 멧돼지’, DMZ 자생 식물의 형태를 본떠 금속 실로 자수를 놓아서 표현한 오상민의 ‘빛: 자연과 선의 틈에서’ 등이 야외 공간에 큰 규모로 설치됐다.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은 “70여 년간 긴장과 전쟁의 잔재로 남아있던 비무장지대가 자연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되는 과정을 예술가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시도”라며 “DMZ의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지형을 열어주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11월 5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1년 전 배윤환 작가(42)는 서울 종로구 인사미술공간에서 연 개인전에서 폭 50m의 캔버스를 꽉 채운 그림의 ‘일부’를 공개한 적이 있다. 전시장이 50m 그림을 펼치기에 턱없이 작았던 탓이다. 전시장에서 관객은 절반인 25m만 볼 수 있고 나머지 절반은 말려 있는 상태였다. 이 무렵부터 배윤환은 거대한 스케일에 수많은 이야기가 ‘와글거리는’ 그림으로 기억되곤 했다. 그런 그가 서울 강서구 스페이스K 서울에서 14일 개막한 개인전 ‘딥 다이버(Deep Diver)’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을 공개했다. 12일 미술관에서 만난 배 작가는 “4, 5년 전부터 ‘와글거림’을 지워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엄두를 못 내다 이제서야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그림을 한창 그릴 땐 단서를 숨겨 놓는 재미도 있었고, 새벽까지 몰두해서 그리면 그림 속 세상에 내가 살고 있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걸 못 벗어나면 내 그림자에 영원히 끌려다닐 것 같았습니다.”기존의 스타일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결과는 회화 ‘서커스’, ‘선크림’, ‘사이렌’, ‘두 번 내려쳐’ 연작으로 나왔다. ‘서커스’ 연작에선 인물이 달리거나 점프하는 듯한 모습을 통해 ‘역동성’을, ‘선크림’에선 얼굴에 크림을 바르는 행위를 담아 ‘촉감’을 내세웠다. ‘사이렌’은 시끄러운 확성기에서 들리는 ‘청각’이 중심이다. 줄줄이 이어지는 이야기 대신 한순간의 강렬한 느낌을 포착했다. 전시장 가장 안쪽에는 좌우로 격하게 흔들리는 배를 묘사한 작품 ‘요람’과 함께 대형 벽화가 있다. 선과 도형, 문자로 벽을 채운 것도 이전의 그림과 다른 점이다. 이번 전시 작품 대부분은 흑백 톤으로 색을 제한했다. 어두운 그림은 평범한 관객이나 컬렉터가 받아들이기에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면에서 과감한 선택이다. 이장욱 스페이스K 수석큐레이터는 “배 작가가 초기 검은 색조의 힘 있는 그림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색채를 쓰면서 미술시장에서도 반응을 얻었다”며 “미술관에서는 전업 작가로 생존한 작가의 예술적 역량을 다시금 보여주는 기회를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의 제목 ‘딥 다이버’는 마음속의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 꺼내지 못한 것들을 풀어 놓는다는 의미를 담았다. 배 작가는 “목구멍에 걸려 있던 이야기를 가만히 맴돌며 관찰한다는 이미지를 상상하며 붙인 제목”이라고 했다. 배 작가가 과거 스타일로 그린 작품도 볼 수 있다. 폭이 10m인 작품 ‘우린 잘 지내고 있어’는 동굴 속 광부들이 무언가를 긁고 파내고 부수는 과정을 복잡한 구성으로 담았다. 광부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도 손에 트럼프 카드를 쥐고 있는데, ‘각자의 패를 쥐고 분투하는 사람들’이라고 작가는 표현했다. 그 옆 ‘두 번 내려쳐’ 연작은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한 광부들의 얼굴에서 금(金)이 나오는 모습을 묘사했다. 과거의 자신을 부숴야만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배 작가는 “유료 전시에서 작품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며 “입장료가 아깝지 않은 전시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11월 9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