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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인촌상 수상자]仁村賞 영광의 얼굴들… 수상소감과 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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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인촌상 수상자]仁村賞 영광의 얼굴들… 수상소감과 공적

동아일보입력 2010-09-14 03:00수정 2010-09-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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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세상 만들기 외길… 그 큰 발자취를 기립니다 《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사는 14일 제24회 인촌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인촌 김성수 선생의 탄신 119주년이 되는 올해는 언론출판, 산업기술, 자연과학, 공공봉사 등 4개 부문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룬 인사들이 수상자로 선정됐다. 심사는 부문별로 권위 있는 외부 전문가 4명씩이 참여해 6월 말부터 두 달 동안 진행됐다. 수상자들의 소감과 공적을 소개한다. 》
■ 언론출판 부분- 이명동 씨 (전 동아일보 부국장)

“저보다 더 훌륭한 사진을 찍은 선후배 기자가 많은데 이 상을 받게 돼서 영광스럽습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독자들이 신문보도에서 사진의 중요성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명동 전 동아일보 부국장(90·사진)은 “부족하나마 한평생 사진예술 대중화에 힘쓴 것을 인정받은 것 같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이 전 부국장은 25년 동안 동아일보에서 근무하며 1957년 서울 장충단공원 야당유세 방해 사건, 1960년 영남지역 3·15부정선거 시위, 4·19혁명 때 경무대 앞 발포 사건 등 역사적 사건을 카메라에 담았다. 동아일보가 1950, 60년대 독재타도의 선봉에 설 수 있었던 데는 생생한 현장을 담은 그의 특종 사진이 큰 역할을 했다. 특히 4·19혁명 당시 그가 경무대 앞에서 찍은 시위대 발포 사진은 한국 보도사진사에 길이 남을 만한 사진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그는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탄을 피해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몸을 뒤로 돌려 시위 학생들이 총에 맞는 장면을 카메라에 포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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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 부국장은 “사진 한 장이 장문의 글보다 더 많은 진실을 얘기해 줄 때가 있다”며 “앞으로 인쇄매체에서 사진이 갖는 비주얼 이미지가 더 중요해지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부국장은 1955년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의 권유로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그는 “김 회장은 사진 기록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언론인으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진을 게재했던 동아일보의 전통을 이어가고자 사진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고 말했다. 1960년대 후반 현장 기자에서 한발 물러난 후 김 회장의 권유로 동아일보 사진을 마이크로필름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주도하고 출판국에 별도의 사진부를 만든 것을 그는 가장 보람 있었던 일로 꼽았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 중에 어느 사진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이 전 부국장은 “역사적 의미를 담은 사진을 많이 찍어서 그런지 모두 애착이 간다”며 “당시 좋은 사진 한 컷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며칠 밤낮을 현장에서 보냈지만 취재정신으로 똘똘 뭉친 선후배 동료 기자들과 역사적 기록을 남긴다는 사명감이 있었기에 힘든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1979년 동아일보에서 퇴직한 후 사진 전문잡지 ‘사진예술’을 창간해 운영해 왔다. 현재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광복 후 사진사를 정리하고 자서전을 집필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이 전 부국장은 “역사의 현장을 지켰던 기자로, 사진을 예술로 정착시키는 데 힘썼던 사진문화운동가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공적 ▼

성균관대 정치학과를 졸업했으며 6·25전쟁 때 육군 보병 제7사단에서 기록사진담당으로 복무하며 보도사진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1955∼1979년 동아일보에 근무하며 역사적 현장을 찍은 사진을 남겼다. 사진부장과 출판국 부국장으로 재직 당시 동아사진콘테스트와 동아국제사진살롱을 개최해 국내 사진 발전에 기여했다. 1969년부터 14년 동안 월간지 신동아에 사진평론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1989년 월간잡지 ‘사진예술’을 창간했으며 현재 고문으로 있다. 사진집 ‘승리의 기록’, 저서 ‘보도사진의 이론과 실제’가 있으며 서울시 문화상 언론부문(1961년), 현대사진문화상 본상(1988년), 예총예술문화상 대상(2001년), 옥관문화훈장(2002년) 등을 받았다.

■ 산업기술 부분- 김정식 씨 (대덕전자 회장)

“인촌상 수상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언론과 교육에 힘써 오신 인촌의 뜻을 받들고 앞으로 후대를 위해 더 노력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대덕전자 김정식 회장(81·사진)은 한국전자산업의 선구자로 불린다. ‘전자’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던 시기에 전자통신을 공부했고 부품사업을 일으켜 한국이 정보기술(IT) 신화를 창조할 수 있는 기초체력을 닦았기 때문이다. 1965년 대덕산업(대덕GDS의 전신)을 설립한 이래 45년 동안 전자제품의 핵심부품인 인쇄배선회로기판(PCB) 개발 한 길을 걸어 왔다. 13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해동과학문화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김 회장은 “라디오, TV, 휴대전화 어디에도 PCB가 들어간다”며 “PCB 개발 한 길이라고 해서 똑같은 제품이 아니다.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거기에 맞는 첨단 PCB를 개발하며 한국 전자산업의 역사를 같이 해왔다”고 말했다.

김 회장이 전자산업과 인연을 맺은 것은 6·25전쟁과 대학 은사의 꾸지람 덕분이었다. 서울대 전자통신학과 3학년이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해 공군 통신장교로 입대했다. 이때 새로운 첨단 통신장비에 눈을 떴다고 한다. 하지만 전역 후 처음 택한 직업은 철강사업이었다. 김 회장은 “1963년 어느 날 대학 은사이자 전우였던 오현위 교수님이 ‘전공을 버리고 왜 철강 도매업을 하느냐’며 꾸지람을 하셨다”며 “그게 통신장비 산업에 뛰어든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통신장비 사업을 하면서 늘 PCB가 골칫거리였다.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직접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회장은 “일본을 오가며 기술을 배웠는데 그때의 고생은 말로 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1972년 대덕전자를 세워 산업용 PCB를 개발한 결과 1975년 국내 최초로 양면 PCB 제조에 성공했다. 1983년 수출 200만 달러를 시작으로 2000년에는 수출 2억 달러 기록을 세웠다.

1991년부터는 해동과학문화재단 설립을 시작으로 과학인재 양성에 힘쓰고 있다. 그동안 후원사업 규모만 105억 원이 넘는다. 대덕전자가 위치한 경기 안산시의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1996년 장애인 근로작업시설인 ‘해동일터’를 지어 대덕 계열사의 작업복을 만들게 했다.

김 회장은 “해외에서 소니, 파나소닉 간판이 삼성, LG로 바뀌는 걸 보면 뿌듯하고 전자부품을 시작하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계속 글로벌 경쟁력을 가지려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우리 회사 부장급까지 스마트폰 나눠주고 공부하라고 했다”며 “많은 과학 인재가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 공적 ▼

한국 전자산업의 기초체력인 핵심부품 기술개발에 헌신해온 선구자. 1956년 서울대 전자통신학과를 졸업한 후 1965년 대덕산업(대덕GDS의 전신), 1972년 대덕전자를 세웠다. 인쇄배선회로기판(PCB)이 전자제품의 핵심부품이 될 것임을 내다보고 45년 동안 PCB 개발 한 길을 걸어 왔다. PCB는 라디오, TV, 휴대전화 등 거의 모든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핵심부품. 일본 한국을 오가며 기술을 배우기 위해 맨발로 뛰었다. 그 결과 PCB의 국산화에 성공했고 대덕은 수출 기업으로도 성장했다. 삼성전자, LG전자 같은 세계적 기업이 나올 수 있는 기초를 닦은 셈이다. 1991년 사재를 털어 해동과학문화재단을 설립한 이래 지금까지 과학인재를 키우는 데에도 헌신하고 있다.

■ 자연과학 부분-천진우 씨 (연세대 화학과 교수)

“하늘에서 갑자기 ‘별’이 제게로 쏟아져 내려온 느낌이라고 할까요. 전혀 예상을 못하고 있다가 지난달 30일 전화로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과학 한국’을 세계에 알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천진우 연세대 화학과 교수(48·사진)는 ‘나노’와 관련해 세계에서 손꼽히는 학자다. 그는 주로 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 크기의 작은 물질이 ‘어떤 성질을 갖는지’와 ‘나노 물질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한다. 천 교수가 나노 연구에 뛰어든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당시만 해도 학계에서는 나노 분야가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예상했지만 나노의 법칙성이나 합성방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야 그곳에서 정상에 오르기 용이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노를 선택했고 10년 넘게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이제 다소 결실을 거두고 있습니다.”

천 교수는 2001년과 2002년에 막대, 사각형, 별 형상 등 다양한 모양으로 나노 물질을 만드는 방법을 발표해 주목 받았다. ‘미국화학학회지’ ‘사이언스’ 등에 주요 논문으로 소개되면서 세계 화학계의 ‘스타’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는 나노 물질이 갖는 특징을 이해하고 조작하는 정도에서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천 교수는 “기초 연구지만 항상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며 “기존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기초과학에서 발견한 새 방법으로 시도하면 풀 수 있다”고 강조했다.

천 교수가 7년 전부터 관심을 갖고 연구한 것은 나노 기술과 의학을 접목한 ‘나노 의학’이다. 그는 암세포 등을 만나면 달라붙는 나노 입자를 혈관에 주입하고 이를 통해 질병을 진단하는 데 성공했다. 천 교수는 이 연구로 ‘나노의학’을 독자적인 학문 영역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같은 공로로 지난해부터 인용 빈도 면에서 세계 상위 1%에 속하는 과학 학술지인 ‘어카운트 오브 케미컬 리서치’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제가 유명 학술지에서 세계적인 과학자들의 논문을 심사합니다. 우리나라 과학이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말입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연구를 개척해 세계적 학자들로부터 ‘내가 연구하고 싶은 것을 한국 학자가 먼저했구나’라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천 교수는 “제가 학위를 준 국내 과학자가 이미 미국 대학교수로 임용되기도 했다”며 “한국의 과학이 세계의 과학”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도 국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과학 연구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김규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youtae@donga.com

▼ 공적 ▼

연세대 화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부터 4년간 KAIST 교수를 지냈고 2002년부터 현재까지 연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노 합성 분야의 세계적인 연구자로 유명하다. 현재 ‘어카운트 오브 케미컬 리서치’ 수석 편집장, ‘나노 레터스’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세계 유수 학술지에 85편의 논문을 냈고 4600회가량 인용됐으며 이 중 20여 편은 ‘세계 최다 인용 상위 1% 논문’으로 꼽혔다. 2001년에는 대한화학회의 ‘젊은 화학자상’, 2007년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송곡 과학기술상’을 받았고 2007년에는 교육과학기술부의 ‘미래를 만드는 한국의 과학자 14인’에 선정됐다.

■ 공공봉사 부분-김천주 씨 (대한주부클럽연합회 회장)

“43년 동안 사회운동을 하면서 매일 ‘보람’과 ‘기쁨’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또 상을 받게 됐네요.”

13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대한주부클럽연합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천주 대한주부클럽연합회 회장(77·사진)은 “배운 사람이라면 당연히 사회에 봉사할 의무가 있다”며 “해야 할 일을 했는데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겸손하게 수상 소감을 밝혔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김 회장은 1957년 이화여대 사회사업과를 졸업한 이후 평생 사회운동가의 길을 걸어왔다. 늘 한복을 입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 회장은 ‘소비자’라는 개념조차 없던 1960년대부터 주부들을 중심으로 한 소비자운동을 시작했다. 1976년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를 창립했고 1979년에는 ‘소비자보호법’ 제정을 이끌어냈다. 이후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한편 국산품 애용 운동과 자원절약 운동을 펼쳐 국력 향상에도 기여했다. 김 회장은 “6·25전쟁 이후 국내 기업이 제대로 성장하기 전이라 불량품이 많이 유통됐다”며 “연탄도 쉽게 깨지고 석유곤로도 자주 폭발하는 것을 보고 소비자운동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기업과 공장을 직접 찾아다니고 주부클럽을 조직해 소비자 교육을 시작했다. 김 회장은 “물건을 살 때 가격뿐 아니라 품질표시도 확인할 것을 가르쳤다”며 “소비자운동은 주부들이 사회구성원으로 목소리를 낼 기회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는 1985년 화학물질 범벅이던 양조간장과 발암물질이 들어있던 색소 단무지를 고발했던 일. 당시 기업들의 협박이 쏟아져 경찰이 집을 지켰고 자녀들은 학교에 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굳은 의지로 운동을 지속했던 이유에 대해 김 회장은 “전쟁 당시 친구들은 폭격을 맞거나 납치되어 죽었는데 난 지금까지 살아있다”며 “살아남아 공부를 했으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998년 금 모으기 범국민운동, 2007년 재래시장 활성화운동을 벌여 주부들의 힘을 공동체의 힘으로 키워내기도 했다. 김 회장은 “주부들의 의식이 높아져야 나라가 발전하고 자녀교육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며 “소비자운동은 곧 여권신장운동이자 경제살리기운동이었다”고 평가했다.

여성 일자리를 만들어 주부들의 사회 진출을 돕는 데도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가사도우미(파출부) 요리사 간병인 등 주부들에게 취업 교육을 시키고 일자리를 알선했다.

김 회장은 “사회단체를 정치의 디딤돌이 아니라 희생과 봉사하는 자리로 생각하는 후배가 대한주부클럽연합회의 전통을 이어주었으면 한다”며 앞으로의 바람을 전했다.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 공적 ▼

생활 속에서 새로운 소비자보호 어젠다를 발굴해 실천을 이끌어 낸 사회운동의 대모다. 1957년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서울시청에서 근무하다 1968년 대한주부클럽연합회 총무를 맡으면서 소비자운동에 뛰어들었다. 1976년에는 4개 여성단체가 모여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를 결성했고 1979년 소비자보호법 제정을 이끌어냈다. 1977년부터 저학력 중고령 여성의 사회진출을 돕기 위해 가사도우미 간병인 탁아모 출장요리사 등을 직업훈련을 통해 1만여 명 배출했다. 1969년부터 ‘신사임당의 날’을 제정해 서예·미술 분야에서 3000여 명의 여성 예술가를 키워냈다. 이 같은 공로로 1987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0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다.

■ 제24회 인촌상 심사위원

언론출판 △위원장: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위원: 이광훈 전 경향신문 논설주간, 이기웅 도서출판 열화당 사장, 양승목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산업기술 △위원장: 금동화 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 △위원: 박종용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부회장, 이종희 모다정보통신㈜ 회장, 홍국선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자연과학 △위원장: 백성기 포스텍 총장 △위원: 국양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윤경병 서강대 자연과학부 학장, 황인환 포스텍 생명과학과 교수

공공봉사 △위원장: 김상균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위원: 김동배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미혜 이화여대 사회복지전문대학원장, 박영란 강남대 실버산업학부 교수

교육 △위원장: 이돈희 전 교육부 장관 △위원: 이택휘 한영외고 교장, 김헌규 동국대 명예교수, 권대봉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원장

인문사회문학 △위원장: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 △위원: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진덕규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원장, 홍정선 인하대 문과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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