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상훈]스스로 호르무즈를 뚫어야 할 시대가 왔다

  • 동아일보

이상훈 경제부장
이상훈 경제부장
1953년 5월 9일, 일본 도쿄 인근 가와사키항. 거대한 배가 시야에 들어오자 사람들은 일장기를 흔들며 환호했다. 이란산 석유를 가득 싣고 사선을 넘어 돌아온 유조선 닛쇼마루(日章丸)였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으로 눈총을 받던 일본의 당돌한 승부수에 전 세계가 경악했다. 세계 에너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일명 ‘닛쇼마루 사건’이다.

당시는 이란이 석유 국유화를 전격 선언하고 앵글로-이란 오일 컴퍼니(AIOC)를 접수했던 때다. 영국은 중동에 군함을 파견해 해상 봉쇄에 나섰다. 서슬 퍼런 위협에 정면으로 맞선 인물이 일본 정유사 이데미쓰의 창업주 이데미쓰 사조였다. ‘영국 제재는 국제법상 정당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극비리에 유조선 닛쇼마루를 보냈다. 단순한 무모함이 아니었다. 치밀한 전략을 짜고도 겉으로는 침묵을 지킨 일본 정부의 묵인, 영국이 주도하던 에너지 질서의 재편을 꾀하던 미국의 조용한 지원이 있었다. 비참한 처지의 패전국이 냉철한 전략적 판단으로 에너지 안보의 새 길을 열었다.

무색해진 항행의 자유

지금 호르무즈 해협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당시 닛쇼마루가 마주했던 환경보다 훨씬 엄혹하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와 카타르 액화천연가스(LNG) 시설 공격, 미국의 ‘48시간 이내 초토화’ 위협으로 글로벌 석유 공급망이 붕괴할 위기에 직면했다. 한국으로서는 미국의 태도가 더 충격적이다. “미국에는 필요 없다”며 이해관계가 있는 나라가 호르무즈 해협을 알아서 지켜야 한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언을 보여준다. 미국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전 세계에 무료로 제공하던 항행의 자유라는 공공재가, 이제는 각국이 스스로 비용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유료 서비스로 바뀐 것이다.

세계사적 혼란 속에서 일본 정부는 70여 년 전 닛쇼마루의 실리적 행보를 재현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미일 정상회담에서 대규모 투자를 약속하며 동맹의 명분을 세워주는 한편, 미국의 파병 요청에는 모호한 태도로 실질적 부담을 피하고 있다. 동시에 이란과 물밑에서 호르무즈 해협 선박 통과 협의를 진행하며 생존선을 구축하고 있다. 강대국과 신뢰는 지키면서 에너지는 어떻게든 확보하겠다는 철저한 이중 전략이다.

한국도 ‘특별 전략적 동반 관계’인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원유 2400만 배럴을 긴급 도입하는 등 에너지 안보를 지키는 데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기름을 확보해도, 유조선이 지나가는 호르무즈 해협이 열리지 않으면 한국 정부의 모든 대책은 미봉책에 그칠 수 있다. 단순한 자원 확보를 넘어서, 그 자원을 우리 힘으로 끌어올 항로의 안보를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할 시점이 왔다.

국내 소비 원유의 70%를 중동에 의존하고 공업으로 먹고사는 한국의 에너지 안보는 미국을 비롯한 그 어떤 나라도 대신 지켜주지 않는다. 6·25전쟁 이후 한미동맹의 울타리 안에서 누려온 항행의 자유 시대가 끝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호르무즈의 위기는 어쩌면 시작일 뿐일지도 모른다. 만약 중국이 대만해협을 봉쇄하고 동·남중국해 패권을 장악해 목줄을 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중동에서 기름을 확보하더라도 우리 앞바다 항로가 막힌다면 한국 경제는 고립될 수밖에 없다.

전략적 사고 절실히 필요할 때

미국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에너지가 들어오던 관성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세계지도를 부감하는 전략적 사고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기다. 해체되는 국제 질서 속에서 대한민국의 생존을 보장할 나침반은 불변의 국익뿐이다. 한국은 거친 정글이 된 바다를 뚫고 나갈 독자적인 항로를 개척할 수 있을까. 누구도 대신 풀어주지 않을, 우리의 생존이 달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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