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은 열정을 낳는다[이정향의 오후 3시]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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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파올로 소렌티노 ‘유스’


이정향 영화감독
이정향 영화감독
알프스산맥에 있는 고급 호텔. 저명인사들이 휴가를 보내는 곳이다. 모두 재력가이지만 다들 연로한 건 아니다. 젊은 나이에 엄청난 부를 소유한 이들도 머문다. 그런데 이들의 표정도 노인과 다르지 않다. 투숙객들은 기상벨 소리에 맞춰 일어난 후, 한 줄로 나란히 사우나실로 이동하고, 마사지를 받고, 일광욕을 하고, 건강검진을 받고, 최고급 코스 요리를 먹고, 밤에는 화려한 공연을 본다. 은퇴한 거장 지휘자인 프레드는 이곳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영국 왕실로부터 그의 대표곡인 ‘심플 송(Simple song)’을 공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지만 단호히 거절한다.

이 고급 호텔은 적막한 요양원 같다. 손님들은 내일에 대한 기대를 상실한 듯 무기력하고 무표정이다. 자신을 위해 수족을 쓰는 건 식사 때뿐인 듯, 하루 종일 타인에게 몸을 맡긴다. 즐겁거나 편안하기는커녕 고독해 보인다. 이들은 부를 축적하는 대신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 젊은 부자들은 앞으로의 삶도 권태로울 거라고 확신하는 듯하고, 노인들은 지금껏 살아온 결과가 결국 권태라는 사실에 화가 난 것 같다. 프레드는 영국 왕실이 끈질기게 공연 요청을 해오자 심플 송은 자신이 아내를 위해 만든 곡이기에, 아내 이외에는 아무도 부를 수 없다며 재차 거절한다. 그의 아내는 치매를 앓아 10년 넘게 입원 중이다. 하지만 그는 아내를 오랫동안 보러 가질 않았다.

제목이 ‘유스(Youth·젊음)’라서 영화가 노년과 젊음을 극명하게 구분해줄 줄 알았는데, 아니다. 고령의 투숙객 속에 끼어 있는 젊은이들도 빛나 보이지 않는다. 결핍이 없는 상태는 매력이 없다. 부족함이 아쉬움을, 투지를, 정열을 불러오는 법이다. 이 세상에 부족함이 없었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발명해 내지 않았을 거다. 묵언 수행 중에 더 깊은 깨달음을 얻고, 금욕의 시대에 예술작품이 가장 화려했던 건 우연이 아니다. 결핍이 목표와 열정을 만들어내고, 열정 앞에서 육체적 노화는 무색하다.

프레드는 좋은 남편이 아니었다. 아내를 외롭게 버려두고, 자신의 음악 안에서만 안주했다. 그가 아내를 병문안 가지 않는 건, 형편없던 남편으로서의 자신을 마주하기 싫어서다. 망가진 아내를 보는 건 자신의 과오를 보는 셈이니까. 그 대신 심플 송을 더 이상 공연하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었다. 이런 그가, 음악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자 두려움과 맞선다. 마침내 아내를 찾아가, 속마음을 고해처럼 털어놓는다. 그 뒤, 여왕이 부탁한 무대 위에 선다. 영화의 마지막, 프레드의 지휘에 맞춰, 소프라노 조수미가 ‘심플 송’을 우아하게 부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눈과 귀가 호강하는 영화다.

이정향 영화감독
#파올로 소렌티노#유스#결핍#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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