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삭발의 계절’ [김지현의 정치언락]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3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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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윤재갑 의원이 3월 30일 오전 서울 국회 본관 앞 계단에서 열린 일본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 반대 및 대일 굴욕외교 규탄대회에서 삭발하고 있다. 윤 의원 뒤로 이를 바라보는 이재명 대표 모습. 뉴스1


“혹시 나만 모르는 국회의원의 엄청난 장점, 아니면 특혜가 있는 건가? 아니, 이게 정말 이렇게 머리까지 밀어 가면서 할 일이야…?”

2019년 9월 자유한국당 의원들 사이 삭발이 유행처럼 번지던 어느 날 더불어민주당의 한 초선 의원이 조심스럽게 물어보더군요. 3년도 더 된 대화이지만 아직도 생생한 게, 당시 자유한국당의 재선 박인숙 의원이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에 반대한다”라며 국회 본관 앞 계단에서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직후였습니다. 의사 출신으로 당시 71세였던 박 의원은 조국 법무부 장관의 해임과 문재인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며 삭발식을 했습니다. 같은 당의 김숙향 동작갑 당협위원장도 이날 나란히 머리를 밀었죠.

전날 같은 장소에서 무소속 이언주 의원도 같은 이유로 삭발했습니다. 보수 야권 여성 의원들의 연이은 삭발에 놀란 집권여당 초선 의원이 “머리카락이 없어도 좋을 만큼 국회의원이 괜찮은 직업인 거냐?”고 물어봤던 거죠.

2019년 9월 10일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당시 무소속이었던 이언주 의원이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에 항의하며 눈물의 삭발식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 ‘조국 반대’ 외치며 릴레이 삭발
여성 정치인들의 ‘결기’에 자극받은 황교안 당시 대표도 삭발에 동참했습니다. 5일 뒤 청와대 앞 분수대에 선 그는 ‘조국 파면’을 촉구하며 머리를 밀었습니다. 다음날엔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같은 장소에서 삭발했고요. 당시 김 전 지사의 머리는 앞서 5월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삭발했던 ‘삭발 선배’ 박대출 의원이 밀어줬습니다. 박 의원은 현재 집권여당 정책위 의장이죠. 김 전 지사는 “머리밖에 깎을 수 없는 미약함에 죄송스럽다”라며 동료 의원들을 향해 “전부 머리 깎고, 의원직 던지고, 문재인을 끌어내려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2019년 9월 17일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에 항의하며 삭발식을 하고 있다. 머리를 밀어주는 사람은 앞서 5월 패스트트랙 사태 때 먼저 삭발했던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박대출 의원. 동아일보 DB
이어 삭발 바톤을 넘겨받은 강효상 의원은 동대구역 광장에서 머리를 밀어 버린 뒤 나경원 당시 원내대표에게 공을 넘겼죠. “사실 나 원내대표도 며칠 전 조국이 장관으로 임명되자마자 삭발 각오를 말한 적이 있다”라는 그의 말에 나 전 원내대표는 한동안 ‘언제 삭발할 거냐?’’는 질문에 시달렸습니다.

2019년 9월 16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삭발하는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 모습을 나경원 당시 원내대표(앉아있는 앞줄 왼쪽 세 번째)가 바라보고 있다. 당시 야권에선 나 전 원내대표도 삭발하라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 전 원내대표 뒤쪽으로 앞서 삭발했던 김숙향 당시 동작갑 당협위원장과 박인숙 의원 등이 서 있다. 동아일보 DB
그 시절 ‘조국 삭발’ 바람 속 머리를 민 보수 진영 인사만 현역 의원 9명을 포함해 총 15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릴레이 삭발식’에 대한 비판도 많았습니다. 보여주기식 쇼가 메시지의 진정성을 떨어트리고 정치를 희화화한다는 겁니다. 특히 이듬해 치러질 21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을 노린 것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도 적지 않았습니다. “머리카락보다 소중한 공천이냐”는 거죠.

당시 정의당 대표였던 심상정 의원은 “삭발과 단식은 몸뚱어리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수많은 약자가 자기 삶을 지키고 신념을 표현하는 최후의 투쟁 방법인데 (자유한국당이) 국민이 준 제1야당의 막강한 권력을 쥐고 ‘약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라고 비판했습니다. 110석이나 가진 제1야당 의원들이 이미 국민으로부터 받은 수많은 정치적 수단을 두고 삭발이나 하는 것이 무책임하다는 지적이었습니다.

북한의 대남선전매체 메아리도 ‘삭발의 새로운 의미’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인기 없는 정치인들의 여론 끌기”라고 비판했습니다.

“삭발은 머리카락을 모조리 바싹 깎는다는 뜻으로, 머리카락이 다 자랄 때까지 지은 죄를 뉘우치라는 것으로 죄인의 징표다. (중략) 민심이 바라는 좋은 일 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애꿎은 머리털이나 박박 깎아버린다고 민심이 박수를 쳐줄까. 이제 말짱 깎아놓은 머리카락이 다시 다 솟아 나올 때까지도 일이 뜻대로 안 되면 그때에는 또 뭘 잘라버리는 용기를 보여줄까.”

남한 정치인들의 뼈를 무지막지하게 때렸네요.

● 여의도는 또다시 삭발 중
어느덧 총선이 또 1년 앞으로 다가와서일까요. 2023년 봄, 정치권엔 다시 삭발의 계절이 왔습니다. 요즘 여의도엔 만개한 벚꽃잎뿐 아니라 머리카락도 흩날리는 중입니다.

지난달 30일 오전 국회에선 3년 전과 똑같은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다만 올해 주인공은 민주당입니다. 3년 전 보수야당 의원들이 머리를 밀었던 그 장소에서 이번엔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민주당 윤재갑 의원(전남 해남완도진도·초선)이 삭발에 나선 거죠.

“(후쿠시마 오염수의) 위험을 온몸으로 저지하겠다는 일념으로 (윤 의원이) 삭발을 결의했다”라는 민주당 양이원영 의원의 발표에 해군 출신인 윤 의원은 “50년 동안 길러온 머리카락을 자르겠다”라며 머리를 밀었습니다.‘일본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 반대 및 대일 굴욕외교 규탄대회’의 일환으로 열린 이날 삭발식엔 이재명 대표 등 지도부도 참석했습니다. 이 대표와 의원들은 윤 의원의 삭발을 응원하며 “윤석열 대통령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출 저지하라”라는 구호를 함께 외쳤습니다. 당원들 사이에선 “윤석열도 삭발하라”라는 외침도 들려왔습니다.

오늘(3일)도 삭발식이 예고돼 있습니다. 4월 3일 오후 2시부터 국회에서 열리는 '쌀값 정상화법 공포 촉구 결의대회'에서 역시 농해수위 소속이자 민주당의 '쌀값 정상화 태스크포스 팀장'인 신정훈 의원이 삭발에 나선다 합니다.

더불어민주당 윤재갑 의원이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국회 본관 앞 계단에서 “50년 동안 길러온 머리를 자르겠다”라고 외친 뒤 삭발하고 있다. 뉴스1
지난달 30일 삭발을 마친 더불어민주당 윤재갑 의원 뒤에서 손에 피켓을 든 채 구호를 외치는 이재명 대표(왼쪽), 박홍근 원내대표. 뉴스1
169석의 거야(巨野)이자 원내 1당인 민주당이 야당이 된 지 1년도 안 돼서 벌써 ‘삭발 카드’를 꺼내든 건 그만큼 제1야당으로서의 메시지 파워가 떨어졌다는 얘기일 겁니다.

한 민주당 의원은 “요즘 우리 당이 내놓는 메시지의 방향성은 옳다고 본다. 야당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견제와 지적이다. 그런데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저쪽에서 ‘이재명 방탄 정당용’이라고 해 버리는 순간 우리의 명분이 사라진다. 이 대표가 아무리 입바른 소리를 해도 사람들이 ‘너나 잘하세요’라고들 하지 않냐”라고 하더군요.

실제 지난주 민주당이 ‘한일 정상회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를 추진하겠다고 하자마자 국민의힘은 기다렸다는 듯 “또 이재명 방탄용”이라고 일축해버렸죠. 이러니 민주당 의원들이 머리를 밀던 말던 과거 보수야당만큼 관심조차 못 받는 거고요.

삭발식이 결국 어느덧 1년 앞으로 다가온 22대 총선 공천을 위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적지 않습니다. 한 민주당 의원은 “결국 총선을 앞두고 농해수위 의원들만 삭발해서 각자 지역에 이름을 알리는 수혜를 입은 것 아니냐”라며 “다만 요즘 시대엔 삭발 등 강성으로 나가는 게 결코 국민 눈엔 좋게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날을 세우더군요.

2019년 ‘조국 삭발’에 동참했던 보수 야권 의원들의 공천 생존률은 50%에 그쳤습니다. 어차피 삭발도 공천을 보장하진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민주당 의원님들도 아까운 머리털을 잘 지키시는 게 어떨까요. 민주당이 꼼수를 다 내려놓고 진짜 민생을 위해 국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면 그렇게 티 내지 않아도 유권자도 다 압니다.

그럼 2019년 자유한국당의 삭발식을 일제히 ‘정치쇼’라고 평가절하했던 당시 민주당 의원님들의 ‘맞는 말 대잔치’로 이번 칼럼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황 대표의 삭발, 참 억지스럽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진짜 모발이라고 꿋꿋이 소수 주장을 펴온 저의 시력이 드디어 입증된 날.”(박홍근 의원)

“참 코미디 같다. 대표가 삭발한 현장에 대해 국민이 얼마나 동의했을까” (이재정 의원, 당시 당 대변인)

“머리카락이 아니라 양심의 털부터 깎으라는 것이 민심” (노웅래 의원)

“자신의 지지자 결집을 위한 대권 놀음 아닌가. 민생을 제쳐두고 제1야당 대표가 삭발을 통한 ‘정치쇼’를 강행할 때가 아니다” (정춘숙 의원, 당시 원내대변인)


김지현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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