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말 세로의 ‘긴긴밤’[동아광장/김금희]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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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긴긴밤’ 문명에 영향받는 동물 모습 그려
도심 등장 얼룩말, 무감각했던 풍경 바꿨지만
엉뚱한 존재 아닌 도시의 한 구성원이 나온 것
계속되는 동물원의 삶, 쉽게 잊고 있진 않았나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최근 우리에게 가장 큰 관심을 받은 동물은 얼룩말 세로일 것이다. 2021년생 얼룩말 세로는 지난주 어린이대공원 나무 울타리를 부수고 동물원을 탈출해 도로를 달리고 골목을 누비다 세 시간 반 만에 포획되었다. 도심에 나타난 세로의 모습은 우리가 평소 무감하게 지나던 모든 풍경을 새로운 것으로 바꿔놓았다. 짬뽕집 간판 앞이나 줄지어 서 있는 자동차 사이, 빈 화분이 나와 있는 주택가 골목 그리고 헬멧을 쓴 배달원 앞에 서 있는 세로의 모습은 흥미로운 사건사고라고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층이 깊은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것이 뭘까, 생각하다 떠오른 책이 루리의 ‘긴긴밤’이다.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은 이 소설은 흰바위코뿔소 노든, 펭귄 치쿠를 비롯한 다양한 동물에 관한 이야기다. 이들은 동물원에서 지내다 갑자기 벌어진 전쟁으로 동물원을 나오게 되고 이후 치쿠가 돌보는 펭귄 알을 부화시켜 바다로 돌려보내기 위해 긴 여정을 떠난다. ‘긴긴밤’을 읽으며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점은 이 동물들이 인간이 만들어낸 ‘시설’로서의 거주공간과 태생적으로 살아내야 하는 자연을 여러 번 오간다는 점이었다.

노든이 처음 지낸 곳은 가족을 잃은 어린 코끼리들을 수용하는 고아원이었고, 그곳에서 코끼리들은 외견상으로는 관리자 인간의 통제를 받는 듯하지만 사실은 리더 격인 한 할머니 코끼리의 인솔 아래 ‘순리’를 이루며 살아간다. 그때의 순리는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되는 상호의존의 법칙이다. 이후 성장한 노든은 자연으로 방생되고 가족을 이루며 살다가 뿔사냥꾼에게 공격을 당한다. 진흙 속에서 죽어가던 노든은 인간들 눈에 띄어 생명을 구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인간에 의해 잃은 노든은 “숨을 쉬는 매순간” 화가 나 있었고 동물원 관계자들을 적대적으로 대한다. 그때마다 노든을 진정시키는 건 동물원에서 태어나 성장한 앙가부라는 동족 코뿔소다. 앙가부는 자연에서 노든이 겪은 비극을 자신에게 털어놓게 함으로써 아픈 상처를 나누고 노든과 함께 동물원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떠나볼 모험을 계획한다.

그러므로 ‘긴긴밤’의 동물들은 문명이라는 조건 속에 놓이게 된 이 세계 모든 동물들의 상태를 정직하게 보여준다. 인간이 살지 않는 오지 속 동물일지라도 인간 문명이 만들어내고 있는 여러 환경적 변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도시라는 공간 속으로 실제적으로 끌려 들어온 존재들이라면 인간과 다름없는 환경적 노출 속에 도시 문명의 무게를 짊어진 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느 봄, 세상으로 나와 달렸던 세로는 전혀 엉뚱한 곳에 나타난 존재가 아니라, 원래 이 도시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던 구성원이 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에 가깝다. 인간들의 소풍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되는 동물원의 삶을, 우리가 손쉽게 잊어버리고 있었을 뿐이다.

노든과 함께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어린 펭귄은 시설에 있었던 동물들처럼 이름을 갖고 싶어한다. 하지만 노든은 “이름을 가져서 좋을 거 하나도 없다”고 어린 펭귄을 타이른다. 이름이 없어도 우리는 서로를 냄새만으로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고. 하지만 동물원 울타리를 박차고 나옴으로써 우리에게 자기 존재를 알렸던 세로에게는 인간이 붙여준 이름이 이미 존재한다. 그러므로 세로는 아마도 계속 세로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동물원과 수족관을 소비하지 않고 다른 이들도 여기에 동참해주기를 원하지만 이 공간과 그 안의 동물들에 대한 책임도 끝까지 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세 시간 반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세로가 만난 이 도시의 어떤 것들도 세로를 다치지 않게 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자동차도, 오토바이도, 당연히 짬뽕집도 알지 못할 세로를 위해 어쨌든 사람들은 위험에서 생명을 구해내는 순리를 발휘했으니까. 그렇게 해서 얼룩말 세로의 외출은 인간이라서 미안하고 동물들을 가둔 존재로서의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면서도, 어느 한 면으로는 이 도시 속 ‘세로들’의 긴긴밤에 우리 자신도 연관돼 있음을 깨닫게 하는 슬프고도 따뜻한 이야기가 되었다.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얼룩말#세로#긴긴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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