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할매글꼴, 노인을 ‘어르신’으로 바라보는 기회 되길” [따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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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년 3월 30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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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사회적협동조합 박성익 대표가 전한
‘칠곡할매글꼴’ 제작 뒷이야기

칠곡할매글꼴 제작 사업에 참여한 김영분 할머니가 알파벳을 적은 종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어르신들은 영어와 특수문자 적는 걸 유독 힘들어했다. 수년간 배워온 한글과 달리 영어와 특수문자는 폰트 제작 과정에서 처음 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포기하지 않고 마치 그림을 그리듯 영어를 한 글자씩 옮겨 적었다. 아울러 제공
칠곡할매글꼴 제작 사업에 참여한 김영분 할머니가 알파벳을 적은 종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어르신들은 영어와 특수문자 적는 걸 유독 힘들어했다. 수년간 배워온 한글과 달리 영어와 특수문자는 폰트 제작 과정에서 처음 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포기하지 않고 마치 그림을 그리듯 영어를 한 글자씩 옮겨 적었다. 아울러 제공
“폰트가 뭔지 몰라~” “비누 뭐 이런 거 만드는 기라예?”
폰트가 뭔지도 몰랐던, 아직도 그 폰트라는 걸 완벽히 이해하진 못한 할머니들의 손글씨를 문서 작성용 글꼴로 만든 ‘칠곡 할매 글꼴’이 제작 3년 만에 재조명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신년 연하장 글씨체로 이 글꼴을 사용하면서부터다.

칠곡할매글꼴은 경북 칠곡군 ‘성인문해교실’에서 한글을 깨친 권안자 김영분 이원순 이종희 추유을 할머니의 손글씨를 바탕으로 지난 2020년 만들어졌다. 칠곡군청과 비영리단체인 ‘아울러사회적협동조합’(이하 아울러), 디자인 글꼴 제작업체 ‘다온폰트’가 힘을 합쳤다. 2021년엔 한컴오피스, 지난해엔 MS오피스에도 탑재됐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이 글꼴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도 했다.

출시 직후 한 차례 인기를 끌었던 칠곡할매글꼴이 다시금 주목받는 데 대해 박성익 아울러 대표는 “칠곡군은 오랫동안 ‘인문학 마을’이라는 베이스가 있었기 때문에 성인문해교육을 받은 어르신들이 빛을 받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칠곡군은 2000년 평생학습으로 인문학에 입문한 뒤 2004년 교육부로부터 평생학습도시로 선정됐다. 2013년 창조지역사업을 진행하며 인문학 사업을 본격화했으며, 당시 9개 마을로 출발한 칠곡군 인문학 마을은 현재 33개에 달한다.

박 대표는 “(칠곡군이) 인문학 마을로 트레이닝이 된 상태여서, 그 안에서 항상 새로운 문화나 시도 등을 계속 경험하니까 폰트도 만들 수 있었다”며 “‘칠곡할매시집’이나 독립영화 ‘칠곡가시나들’도 다 인문학 마을에서 나왔다. 그런 문화적인 베이스는 절대 무시 못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2020년 12월 경북 칠곡군 왜관읍 금남2리에서 권안자·이원순·추유을·김영분·이종희 할머니(왼쪽부터)가 자기 글꼴로 쓴 인사말을 들고 있다. 아래 사진은 칠곡할매글꼴로 제작된 윤석열 대통령의 2023년 연하장. 칠곡군 제공
2020년 12월 경북 칠곡군 왜관읍 금남2리에서 권안자·이원순·추유을·김영분·이종희 할머니(왼쪽부터)가 자기 글꼴로 쓴 인사말을 들고 있다. 아래 사진은 칠곡할매글꼴로 제작된 윤석열 대통령의 2023년 연하장. 칠곡군 제공


“어르신이 지닌 가치, 젊은 세대와 나누려 글꼴 제작”


박 대표가 이끄는 ‘아울러’는 칠곡할매글꼴을 맨 처음 기획한 비영리단체다. 아울러는 ‘회복탄력성’이라는 가치를 운영 기조로 삼고 있다. 회복탄력성이란 역경과 시련, 실패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이 튀어 오르는 마음의 근력을 말한다.

박 대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부정적인 순간들은 묻지 않아도 잘 얘기하는데, 좋았거나 힘이 됐던 순간들은 짧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기 삶이 더 불행하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싶다. 저희가 하는 일은 긍정의 기억을 이끌어내고, 같이 풍성하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어떤 형태가 회복탄력성이란 가치를 잘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글꼴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왜 칠곡 할머니들일까. 박 대표는 “대구·경북 쪽에도 거래처들이 있지만 가장 깊은 라포르(rapport·신뢰관계)를 형성한 곳이 칠곡군”이라며 “칠곡군과 10년 가까이 교류해왔다. 그동안 어르신들과 지내며 느꼈던 것은, 그들이 가진 좋은 가치들이 너무나 많다는 거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재해석해서 더 많은 세대와 경계 없이 나눌 수 있을까 고민하다 글꼴이라는 걸 제안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성익 아울러사회적협동조합 대표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 제 인생책이에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특징을 분석해보니 삶의 의미를 발견한 이들은 그런 곳에서도 살아남았대요.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나야 해’, ‘논문을 마저 써야 해’ 같은 것들이요. 저자인 빅터 프랭클은 한평생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돕는 역할을 했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김소영 동아닷컴 기자 sykim41@donga.com
박성익 아울러사회적협동조합 대표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 제 인생책이에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특징을 분석해보니 삶의 의미를 발견한 이들은 그런 곳에서도 살아남았대요.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나야 해’, ‘논문을 마저 써야 해’ 같은 것들이요. 저자인 빅터 프랭클은 한평생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돕는 역할을 했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김소영 동아닷컴 기자 sykim41@donga.com


칠곡군민-칠곡군청-아울러 ‘삼위일체’로 진행

글꼴 제작 과정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박 대표는 함께 일한 사람들에게 그 공을 돌렸다. 그는 “아이디어만 가지고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디어를 내면 행정에서 지원해줘야 실현할 수 있다. 칠곡군청의 한선혁 계장님이 굉장히 오픈 마인드라 이 제안도 받아들여졌다”고 했다. 이어 “성인문해 강사분들도 어르신들과 관계를 굉장히 잘 유지해줬다. 또 실제 폰트 개발은 다온폰트가 맡았는데, 저희 가치에 공감하며 흔쾌히 합류해줬다”고 덧붙였다.

칠곡군에 대한 애정도 드러냈다. 박 대표는 “칠곡은 토양이 좋다. 20년 가까이 (인문학으로) 트레이닝된 지역이고, 전입·전출이 활발해 외부에 대한 적개심은 낮고 포용심은 높다. 기획자로서는 새로운 시도를 하기 좋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칠곡은 삼위일체처럼 민관과 외부 업체, 이 세 개의 합이 너무 좋다. 보통 밸런스가 깨져서 관이 주가 되면 민간에 압력이 가해지고, 반대로 민간이 강화되면 민원 형태가 된다. 또 기획자(외부업체)가 강해지면 휘발성으로 끝나버리는데, 여기는 이 밸런스가 너무 좋다”고 강조했다.

아울러는 칠곡 교육문화회관과 수의계약을 맺고 이번 사업을 진행했다. 기자가 칠곡할매글꼴처럼 사업이 잘되는 경우 그만큼 수익이 발생하는 구조냐고 묻자 박 대표는 웃으며 그건 아니라고 답했다. 그는 “나중에 또 건수가 있으면 ‘한 번 더 같이합시다’ 이렇게 좋은 인식을 심어주는 정도다. 그래서 지자체 사업을 할 때 앞으로 이런 용역사나 함께 일한 많은 단위도 같이 알려지면 좋을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2020년 10월 박성익 아울러 대표(왼쪽)가 칠곡군청 한선혁 계장(가운데), 이정홍 주무관과 칠곡할매글꼴 관련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울러 제공
2020년 10월 박성익 아울러 대표(왼쪽)가 칠곡군청 한선혁 계장(가운데), 이정홍 주무관과 칠곡할매글꼴 관련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울러 제공


“참여 어르신, ‘귀한 글씨’라고 너무 힘줘 끝이 번지기도”

폰트화 사업에 참여할 어르신 선발은 성인문해 강사들의 추천과 공모 등을 통해 이뤄졌다. 박 대표는 “열린 절차를 거쳐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다섯 분을 최종 선발했다. 한글 공부가 더 절절했던 분이라든가, 수업에 더 열의를 가졌다거나, 한글 공부와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거나…. 이런 다양한 어르신들을 성인문해 강사, 저희(아울러), 칠곡군 교육문화회관 세 곳이 심사숙고 끝에 뽑았다”고 부연했다. 이어 “선정 결과를 어르신들께 말씀드리니까 섭섭해하는 분도 있고, 안타까워하는 분도 있었다. 그게 제일 고통이었다”고 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폰트화 사업은 코로나19 여파로 문해교실이 중단된 상황에서 어르신들에게 찾아온 배움의 기회였다. 1년 넘게 수업을 듣지 못해 아쉬움을 토로하던 어르신들은 폰트가 뭔지는 몰라도 다시 글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하셨다고 박 대표는 전했다.

코로나19로 여럿이 한데 모일 수 없게 되자 성인문해 강사들은 어르신을 직접 찾아가 글씨 연습을 도왔다. 박 대표는 “처음엔 A4용지 100장과 네임펜을 3자루씩 드렸다. 근데 그걸 다 쓰고도 모자라신다더라. 성인문해 강사분들이 일주일 만에 찾아가면 종이가 엄청 쌓여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더 보내드렸다. 종이만 2000장이 넘는다”고 했다.

아울러는 어르신들이 폰트 제작 과정을 언제든 되돌아볼 수 있도록 책을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 어르신 다섯 분과 그들의 가족, 성인문해 강사들의 인터뷰가 담긴 작은 책자다. 박 대표는 이 책자를 펼치며 말을 이었다.

“폰트를 만들 때 볼펜으로 쓰면 글자가 너무 가늘어서 네임펜을 써야 한다더라고요. 근데 네임펜은 꾹 누르면 잉크가 번지잖아요. 어르신들이 귀한 글씨라고 힘을 잔뜩 주고 쓰다 보니 끝이 번져서 덩어리진 부분이 많아요. 여기 보면 끝이 이렇게 동글동글한 게 있죠. 이게 귀한 글씨라고 힘을 너무 많이 주셔서 그런 거예요. 다온폰트가 이걸 다듬느라 고생을 많이 했죠. 제 눈엔 어르신들의 어떤 마음이 담긴 흔적으로 보여요.”

아울러가 글꼴 제작에 참여한 어르신들께 선물한 책자. 어르신과 그들의 가족, 성인문해 강사들의 인터뷰가 담겨 있다. 김소영 동아닷컴 기자 sykim41@donga.com
아울러가 글꼴 제작에 참여한 어르신들께 선물한 책자. 어르신과 그들의 가족, 성인문해 강사들의 인터뷰가 담겨 있다. 김소영 동아닷컴 기자 sykim41@donga.com


칠곡할매글꼴 열풍 그 후…

칠곡할매글꼴이 세상에 나온 뒤 전국 각지에선 ‘우리도 폰트를 만들고 싶다’는 문의가 빗발쳤다. 박 대표는 “칠곡군청으로 문의 전화가 폭주했는데 행정은 제작 과정을 잘 모르니까 저희한테 전달했다. 한번은 문의하신 분이 ‘거기서 폰트 만들었느냐’고 묻기에 ‘아니다. 저희는 전후 스토리텔링을 담당했다. 폰트는 다온폰트에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근데 자기들은 폰트만 만들면 된다고 제작업체를 소개해달라더라. 이게 참 아쉬웠다”고 털어놨다.

“제가 그분께 ‘단순히 폰트를 만드는 게 아니라 지역에서 의미 있는 주민들을 발굴하고, 이들이 왜 폰트를 만들어야 하는지 명분을 먼저 잡는 게 어떠냐’고 조언하니까 필요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게 너무 속상했어요. 마상(마음의 상처)이었죠. 의미를 발굴하는 작업이 있어야 확산할 수 있는 건데, 하나의 콘텐츠로 휘발돼 버린 게…. 이런 아쉬움이 제일 컸어요.”

이후 아울러는 칠곡할매글꼴의 의미와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칠곡 교육문화회관과 함께 글꼴을 활용한 굿즈를 제작했다. 칠곡군민으로 구성된 굿즈제작단은 4번의 교육과 2번의 실습을 거쳐 베개, 손가방, 밥주걱 등 30여 개의 굿즈를 만들어냈다. 2021년 한글날엔 굿즈 전시회를 열어 글꼴 제작에 참여한 어르신들을 초대했다. 이날 추유을 할머니는 훈민정음(訓民正音)처럼 칠곡할매글꼴이 널리 이용되길 바라면서 ‘용민정음(用民正音)’을 낭독했다.

칠곡할매글꼴의 의미와 가치를 알리고 한글 사랑운동 확산을 위해 경북 칠곡군이 군청 갤러리에서 ‘칠곡할매 굿즈 전시회’를 열었다. 2021.10.6. 뉴스1
칠곡할매글꼴의 의미와 가치를 알리고 한글 사랑운동 확산을 위해 경북 칠곡군이 군청 갤러리에서 ‘칠곡할매 굿즈 전시회’를 열었다. 2021.10.6. 뉴스1
추유을 할머니가 칠곡할매 굿즈 전시회에서 칠곡할매글꼴 선언문인 ‘용민정음(用民正音)’을 낭독하고 있다. 2021.10.6. 뉴스1
추유을 할머니가 칠곡할매 굿즈 전시회에서 칠곡할매글꼴 선언문인 ‘용민정음(用民正音)’을 낭독하고 있다. 2021.10.6. 뉴스1


“칠곡할매 콘텐츠, 노인 아닌 ‘어르신’으로 해석하는 기회 되길”

박 대표는 칠곡할매글꼴을 비롯한 콘텐츠가 노인을 어르신으로 해석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어르신들이 당장은 다가가기도 어렵고 불편하고 조금은 꼰대 같지만, 그런 부분을 한 번 싹 걷어내면 느낄 수 있는 진정성이 있다. 그런 걸 알리는 게 제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문화 콘텐츠는 어르신들과 젊은 세대를 잇는 징검다리라고 생각해요. 앉아서 고리타분하게 옛날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어르신들이 만든 글꼴을 많은 사람이 활용한다는 것 자체가 간접적인 세대 교류라고 볼 수 있죠. 글꼴을 쓰는 과정에서 어르신들의 스토리가 전달된다고 보거든요. 단발성, 행사성으로 끝나지 않고 실생활에서도 쓰이는 걸 보면 너무 좋아요.”

박 대표는 민관이 힘을 모아 칠곡할매글꼴을 만들었듯,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시민이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을지를 연구하는 것이 앞으로 아울러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말했다.

“개인별로 스트레스가 많아져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거나 위로할 여유가 없어진 것 같아요. 아픔을 치유하는 것도 개인의 몫이 돼버린 게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누군가 힘들어할 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그를 위로해 주는 문화가 생기면 좋겠어요. 칠곡할매글꼴이 칠곡군 어르신을 위로하는 버전이었다면, 다른 버전을 계속 연구하고 개발하는 게 아울러의 역할이죠. 다양한 방식으로 아픔을 해소하는 문화를 아울러가 만들어 가겠습니다.”

■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따만사)은 기부와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위기에 빠진 타인을 도운 의인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숨겨진 ‘따만사’가 있으면 메일(ddamansa@donga.com) 주세요.


김소영 동아닷컴 기자 sykim4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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