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로 밀려난 이낙연… ‘이재명 구하기’냐, ‘반명 전선 구축’이냐 갈림길[황형준의 법정모독]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9일 14시 00분


코멘트

<6화>

정치인과 연예인의 공통점이 있다. 잊혀지는 걸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정치권에서 “(본인의) 부고기사만 빼고 비판이든 미담이든 언론에 나오면 다 좋다”는 말이 있는 이유다.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하는(표를 얻어야 하는) 정치인의 사전에 ‘잊혀질 권리’란 없다.

대선에서 패배한 유력 대선 주자는 해외로 떠난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배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5개월 동안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갔던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대표적 사례다. 귀국한 뒤 “정치 절대 않겠다”는 말까지 했던 그는 결국 말을 바꿨다는 비판을 받고도 15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됐다.

이후 많은 유력 정치인들이 대선에서 패배한 뒤 연구와 견문 등을 목적으로 출국해 휴지기를 가졌다. 국민들이 다시 불러주기를, 돌아오는 공항 입국장에 환영인파로 가득 차길 간절히 바라면서….

하지만 DJ 이후 그렇게 ‘재기’에 성공한 이는 없다. 대부분 국민들에게 잊혀진 존재가 된다. 올해 6월 미국에서 귀국하는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 박지원, 이낙연에게 “당신이 DJ야?”
2012년 5월 민주통합당 제19대 원내대표로 선거 당일 의원이었던 이낙연 전 대표(오른쪽 두 번째)가 유인태 전병헌 당시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날 선거 결과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이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동아일보DB
2012년 5월 민주통합당 제19대 원내대표로 선거 당일 의원이었던 이낙연 전 대표(오른쪽 두 번째)가 유인태 전병헌 당시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날 선거 결과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이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동아일보DB
“이 전 대표는 미국 간 것부터 잘못됐어. 그리고 그는 대통령후보로 낙선한 게 아니라 경선에서 패한 것이다. 대선 후보 코스프레하는 꼴이 됐다.”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최근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지난해 미국에 간다는 이 전 대표에게 “당신이 DJ야? 가지 마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DJ는 낙선을 해도 민주당과 호남에서 ‘우리 대통령 후보다’라는 생각이 항상 있었기 때문에 재기에 성공했다”며 “근데 이 전 대표는 당의 대선 후보가 아니었다. 그러기 때문에 미국에 안 가고 지금 현장에서 이재명 대표와 함께 투쟁을 해 나갔어야 된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이낙연이 사는 길은 확실하게 이재명을 도와야 된다. (미국에서라도) 관련 메시지를 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재명 대표에 대한 검찰 수사를 ‘정치보복’ ‘검찰독재’ 등으로 규정하며 민주당은 6년 만에 장외투쟁까지 나섰다. ‘전장’을 떠나 있는 이 전 대표에게 민주당 지지자들은 싸늘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실제 세계일보 의뢰로 한국갤럽이 지난달 26~27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6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그 밖의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 따르면 ‘앞으로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정치 지도자로 누구를 선호하나’라는 질문에 이 전 대표를 꼽은 응답자는 2.1%에 불과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 24.6% △한동훈 법무부 장관 11.1%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 6.9% △홍준표 대구시장 4.9%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3.8% △오세훈 서울시장 2.7% 등 순이었다.

그래픽=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그래픽=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이는 이 전 대표가 문재인 정부 국무총리 시절 수개월 동안 대선 주자 1위를 달렸던 것과 천지 차이다. ‘에이스’의 위치에 있던 득점왕이 4년 만에 벤치로 밀려난 격이다. 미국 워싱턴 조지워싱턴대에서 방문연구원을 지내는 동안 잊혀진 탓도 있다.

그는 지난해 6월 미국으로 출국한 뒤 페이스북 등 SNS에 15개의 글을 썼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일본 아베 신조 총리 별세 등 이슈에 대해 언급하긴 했지만 눈에 띄는 메시지는 아니었다. 지난해 12월 서훈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으로 구속되자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뒤집고 지우는 현 정부의 난폭한 처사를 깊게 우려한다”고 점잖게 비판했을 뿐이다. 이어 “전임 정부 각 부처가 판단하고 대통령이 승인한 안보적 결정을 아무 근거도 없이 번복하고 공직자를 구속했다. 그렇게 하면, 대한민국의 대외신뢰는 추락하고, 공직사회는 신념으로 일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했다.

● 호남-중도층-당심(黨心) 잃어… 이낙연계, 10명도 안 돼
그의 최대 기반이었던 호남도 흔들리고 있다. 앞선 세계일보 의뢰 한국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 전 대표에 대한 광주·전라 지역의 지지율은 2.1%에 그친 반면 이재명 대표에 대한 호남 지지율은 48.5%였다. 2021년 9월 대선 경선에서 지역 중 유일하게 이재명 대표보다 이 전 대표에게 표를 줬던 광주·전남 민심조차 그에게 등을 돌리고 이재명 대표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모양새다. 전남 영광군 출신으로 광주제일고를 졸업한 그의 지역 기반이 사실상 무너진 셈이다. 호남 지역에선 이 전 대표에 대해 “뒤에서 관망하며 기회만 엿보지 말고, 정권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여론이 높은 것으로 전해졌다.

총리 시절 중도층을 흡수하며 외연 확장을 이끌었던 이 전 대표는 대표 시절 여러 차례 실망감을 줬다. 2020년 11월 ‘당 소속 공직자가 중대 잘못으로 직위를 상실해 재보선을 실시할 경우, 해당 선거구에 후보자를 내지 않는다’는 당헌을 전 당원투표로 고쳤다가 결국 이듬해 6월 서울과 부산시장 선거에서 모두 패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 대선 경선 과정에선 강성 지지층에 호소하기 위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옹호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도 보였다.

흔히 계파라고 불리는 당직자와 의원 등 세력도 적다. 2012년 5월 당시 원내대표 선거에 출마했다가 박지원 유인태 전병헌 의원에게 밀려 4위를 차지한 적도 있다(당시 박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전남도지사 시절 ‘이 주사(6급 공무원)’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깐깐하고 엄격한 업무 스타일은 당 대표로 재직하는 동안 오히려 독이 됐다. 당직자는 물론 동료 의원들까지 이 전 대표에게 ‘깨진’ 적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1년 1월 여권 고위 관계자가 했던 이 전 대표에 대한 평가다.
“당의 힘을 하나로 묶어내야 되는데 전남도지사나 국무총리할 때야 상명하복이잖아. 근데 당은 상명하복이 아니잖아. 의원총회하면 초선이 당 대표한테 삿대질하고 물러나라 하고 난리인데….”
- 취재 메모 중 -
그는 정책에서 대관소찰(大觀小察·크게 보고 작은 것도 살핀다)을 강조했지만 정작 당내 구성원들의 마음은 살피지 못했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이 전 대표의 대선 경선 캠프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자기가 아직도 총리인 줄 아는 ‘꼰대’ 같았다. 의원들과 스킨십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형식적으로 느껴졌다”며 “호남 후보로는 대선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당내 분위기도 있었다”고 전했다.

2020년 8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당 대표로 있으면서도 ‘이낙연계’라고 불리는 의원은 현재 10명 수준에 불과하다. 설훈 박광온 전혜숙 윤영찬 양기대 이병훈 홍성국 오영환 의원 등과 오영훈 제주도지사 정도만 ‘찐이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비명(비이재명)계라고 해도 이 전 대표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친이낙연계 의원이 적으니 향후 대선을 위해 이 전 대표를 지원하는 기초·광역의원은 물론 필요한 전국 조직 구성 등 조직력이 충분치 않은 상황이다.
● 대선 패배 책임론, ‘올드 보이’ 이미지도 장애
당내에서 이어지는 ‘대선 패배 책임론’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당내에선 경선 과정에서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 의혹을 이 전 대표 캠프에서 먼저 거론하면서 검찰 수사로 이어지게 됐고, 결과적으로 득표율 0.73%포인트 차로 정권을 내줬다고 보는 측면이 있어 거부감이 크다.

총리로서 존재감을 보여줬던 이 전 대표의 리더십이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나온다. 시대가 요구하는 민주당 리더에 걸맞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통화한 한 민주당 중진 의원의 이야기다.
“2022년 대선을 거치면서 윤석열 정부 탄생과 함께 요구되는 리더십이 완전히 바뀌었다. 현 정부를 극복하는 리더십은 이낙연처럼 디테일한 정책능력이나 갈등조정능력 등을 요구하지 않는다. 과거처럼 ‘전선적 지도력’이 필요하다. 민주 대 반민주, 검찰독재 대 민주공화정의 싸움 등 전선 대 전선으로 구도가 형성되기 때문에 호남을 기반으로 좋은 스펙과 디테일한 정책을 가진 인물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선명하면서도 그걸 뛰어넘는 지도력이 있어야 된다. 그런 면에서 이낙연은 이미 역사의 한 페이지로 넘어간 거지….”
1952년생으로 71세인 이 전 대표가 현 정치권을 주도하는 세대보다 고령으로 ‘올드 보이’ 이미지가 강하다는 점도 장애물이다. 2027년 대선 때는 75세다. 유승민 전 의원(65)과 김부겸 전 총리(65)를 제외하면 윤석열 대통령(63)은 물론 이재명 대표(59), 안철수 의원(61), 오세훈 서울시장(62) 등 예비 대선주자들은 모두 1960년대생이고, 한동훈 법무부 장관(50)은 1970년대생으로 보다 젊다.
● ‘이재명 구하기’냐, ‘당 정상화’냐… 이낙연의 돌파구는?
2021년 12월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이재명 대표와 이낙연 전 대표가 오찬을 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영찬 의원, 이 전 대표, 이  대표, 오영훈 현 제주도지사. 동아일보DB
2021년 12월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이재명 대표와 이낙연 전 대표가 오찬을 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영찬 의원, 이 전 대표, 이 대표, 오영훈 현 제주도지사. 동아일보DB
차기를 노리는 이 전 대표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지 관심이다. 정치권 징크스 중 하나지만 아직까지 ‘2인자’인 총리 출신이 대선에 성공한 사례가 없다. 반면 이 전 대표 측 생각은 다르다. 지난달 중순 미국에서 이 전 대표를 만나고 온 민주당 윤영찬 의원의 말이다.
“지금 국내 상황이 가변적이니까 뭘 이렇게 한다, 저렇게 한다고 하기보다는 본인은 당을 정상화시켜야 한다는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조금이라도 당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으면 몸을 던져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재명 대표 개인과 측근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를 당 전체의 문제로 치환시켜 대응하고 있는 게 비정상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 전 대표는 미국에서 외교·안보 관련 저서를 집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21일(현지 시간)에는 연수 중인 조지워싱턴대 한국학연구소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주제로 한 초청 포럼에도 참석한다.

친이낙연계에선 2021년 대선 경선에서 이재명 대표에게 패배한 이유로 준비 기간이 짧았고 본인이 대권을 갖겠다는 권력 의지가 강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꼽고 있다. 진흙탕에 같이 뒹굴려고 하지 않고 선비 스타일을 고수하며 당 대표 시절에도 인사권 활용 등 당을 사당(私黨)화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한 게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또 언론인 20년, 정치인 20년, 총리와 당 대표를 거친 이 전 대표의 나이는 오히려 연륜과 안정감을 줄 수 있고, 귀국해 활동을 시작하면 지지율은 상승세를 탈 것이라는 게 측근 그룹의 생각이다.

다만 이 전 대표가 ‘반명(반이재명) 전선’의 선봉에 설 경우 단일대오를 강조하는 친명계와 개혁의 딸 등 강성 지지층으로부터 “적전 분열”이라는 강한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이미 이 전 대표는 2021년 전직 대통령 사면 건의 논란을 거치면서 지지율이 폭락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결국 4개월 뒤 정치적 상황과 그가 귀국 후 어떤 어젠다(의제)를 들고 오는지, 국민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사법 리스크’로 안갯속에 갇힌 민주당에서 ‘이재명 구하기’에 나설지, 이재명 대표와 각을 세우며 ‘반명’의 선봉에 설지 그의 선택이 2027년 대선을 향한 1차 관문이 될 것이다. 대선 시계는 이미 돌아가고 있다.

그래픽=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그래픽=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요즘 법조계와 정치권을 보면 정말 답답합니다. ‘모독’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집니다. 개인 측근 비리에 대해 대표직 사퇴 등 책임지는 태도는 취하지 않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이재명 대표, 과거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직하던 시절로 시계를 돌리며 당대표 선출까지 사실상 오더를 내리는 여권. 여야는 모두 정당을 사당화하기 바쁩니다. 후지고 후진적입니다.

이 전 대표는 한때 국민들에게 청량감을 안겨 줬습니다. 가장 기억나는 장면은 총리 시절인 2019년 11월 강기정 정무수석이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나경원 원내대표를 향해 “우기는 게 뭐예요? 우기다가 뭐냐고?”라고 고성으로 항의해 논란이 됐을 때입니다. 그는 “정부에 몸담은 사람이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국회 파행의 원인 중 하나를 제공한 것은 온당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송구스럽다”며 사과했고 이에 당시 한국당 주광덕 의원은 “야당인 저도 감동이고 국민들이 정치권에서 이러한 총리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가장 아름답고 멋진 장면이 아닌가 한다”라며 이 총리를 치켜세웠습니다. 국민들은 지금도 그런 정치를 보고 싶어 합니다.

지금 한동훈 법무부 장관처럼 총리 시절 이 전 대표의 말과 글은 유튜브 등 영상으로도, 책으로도 출간되며 인기가 높았습니다. 하지만 금방 잊혀지고 여야가 뒤바뀌는 게 정치권입니다. 그가 다시 에이스로 뛸 수 있을까요? 4개월 뒤 이 전 대표가 귀국하는 날 공항 입국장의 풍경이 궁금해집니다.

16일 공개될 <7화>에선 다시 여권 인사 ‘찰스’로 넘어갑니다. 요즘 모습이 골리앗에 맞서 싸우는 다윗 같습니다. 이미 미들급 경쟁자도 기권을 선언했는데 라이트급인 이분이 KO패를 면할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