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늘리는 일본, 임금은 평균 55세부터 삭감[수요논점]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6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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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피크제 합법성 논란

《임금피크제를 둘러싸고 기업 현장의 혼선이 커지고 있다. 기존 정년을 유지하면서 고연령 직원의 임금만 일괄 삭감하는 방식의 임금피크제는 위법이라는 지난달 대법원 판결이 도화선이 됐다. 삼성디스플레이 등 대기업 노조는 즉각 임금피크제 폐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기업들은 임금피크제가 무력화되면 인건비가 늘어 신규 채용 감소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계속 연장되는 일본의 정년

임금피크제의 원조는 일본이다. 일본은 한국과 함께 연공서열에 따라 임금이 늘어나는 연공급제 임금체계를 채택하고 있다. 미국 등 대부분 국가에서는 노동유연성이 큰 데다 연봉제가 일반화돼 임금피크제를 운영할 필요가 없다. 그런 만큼 한국과 비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 임금피크제는 정년 연장과 함께 도입됐다. 저출산 고령화로 생산가능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정년 연장 필요성이 높아졌다. 연금 수급 시기가 2025년까지 단계적으로 65세로 늦춰진 점도 주요 요인이었다.

일본은 2013년 ‘고령자고용안정법’을 개정해 근로자가 희망하면 65세까지 고용을 연장하도록 의무화했다. 1994년 정년을 55세에서 60세로 늘린 데 이은 것이다. 3년마다 한 살씩 단계적으로 연장해 2025년 4월까지 모든 사업장에 적용된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정년제 폐지 △정년을 65세로 연장 △형식 정년인 60세 정년 후 촉탁직 등으로 새로 계약하는 계속고용제도 도입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후생노동성 조사에서 80% 이상의 기업은 계속고용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작년 4월 ‘70세까지 취업 기회 확보 노력’ 의무를 추가했다. 기존 3가지 고용 연장 방식에 더해 △다른 회사에 재취업 알선 △업무 위탁 프리랜서 계약 체결 △창업 지원 △사회공헌활동 참가 지원 등 4가지 권고사항이 제시됐다. 70세까지 취업 기회 확보 노력이 지금은 권고사항이지만 일본의 노동 인력 부족과 연금 수급 연령이 추가로 상향 조정될 가능성이 커 머지않아 의무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66세 이상도 일할 수 있는 기업은 이미 33%에 달한다. 가전 판매점 노지마는 80세까지 일할 수 있다.

60세 이후엔 임금 절반 수준


정년이 늦춰지면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커진다. 그래서 도입된 게 임금피크제다. 일본 기업은 노사 합의를 통해 평균 55세를 전후해 임금의 20∼30%를 삭감하고, 60세 정년 이후에는 재고용 계약을 맺어 절반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고 있다.

정년 전 대표적으로 활용되는 임금피크제는 ‘직책 정년제’다. 부장 과장 등 직책을 가진 근로자가 일정 연령이 되면 직책을 해제하는 제도다. 직책수당이 사라지고 기본급이 감액돼 임금이 삭감된다. 일본 정부 조사에 따르면 500인 이상 기업의 30% 정도가 이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예컨대 화장품회사 만담은 관리직보좌는 50세, 과장은 55세, 차장 이상은 57세에 직책을 뗀다. 그만큼 임금이 줄어든다.

직책 정년제 외에 계열사나 자회사로 보내는 이른바 ‘출향(出向)제도’를 통해 임금을 삭감하는 기업도 많다. 이로 인해 50대의 근로 의욕 저하를 의미하는 ‘50대 신드롬’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평균 정년 연령인 60세가 되면 대부분 일단 퇴직 후 촉탁직으로 재고용 계약을 한다. 임금은 닛케이비즈니스 작년 조사에 따르면 정년퇴직 때의 40∼60% 정도가 많다. 임금이 퇴직 전에 비해 25% 이상 삭감되면 정부가 일부 보전해 준다.

근로 의욕 저하 극복 노력도

임금 감소에 따른 근로 의욕 저하를 막기 위한 기업들의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카시오계산기는 50세 이상 사원에 대해 부업을 허용한다. 프리랜서 일뿐만 아니라 주 1∼2일 다른 회사와의 고용계약도 인정해 준다. 깎이는 임금을 다른 곳에서 보전 받도록 한 것이다. 60세 이상 사원에 대해서는 성과주의를 도입했다. 제도 도입 후 종전보다 오히려 연봉이 60%나 올라간 사례도 나타났다. 부업과 정년 후 실력주의로 근로자의 생산성을 최대한 유지하려는 시도다.

결제솔루션 회사인 TIS는 65세 이상 우수 사원에게 현역 때와 같은 수준의 기본급과 상여를 주는 재고용제도를 도입했다. 시니어 사원 전체의 상위 30%가 혜택을 받는다. 메이지야스다생명보험은 60세 이후에도 지점장 등 관리직을 맡을 수 있도록 했다. 이로 인해 기존보다 급여가 많아지는 시니어 사원이 나오고 있다.

화장품과 정보시스템 유통 회사인 미타니산업은 작년 무기한 계속고용제도를 도입했다. 60세 정년을 맞지만 원하는 사원은 계속 고용해 사실상 정년제를 폐지했다. 60∼65세는 마스터 사원, 65세 이후는 마스터 촉탁사원으로 불러 대우해 주고 6개월마다 목표를 세우고 평가받도록 했다. 평가 결과는 상여에 반영하고 있다.

식품기업인 에자키글리코는 작년 4월 고령자고용안정법 개정에 호응해 사원 재고용 연령을 70세까지로 늘렸다. 65세에 희망을 받아 역할과 직무 내용에 변경이 없으면 기존 대우를 그대로 유지한다.

일본 기업들이 이처럼 고령자 근로 의욕 자극에 매진하는 이유는 임금피크제 도입의 사회적 배경이 한국과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은 저출산 고령화로 실질적으로 노동력 부족을 겪었고 이에 따라 고령 인력을 활용한다는 측면이 강하다. 반면 한국은 연금 수급 연령 상향조정에 따라 정년을 연장하되 기업의 총인건비 부담은 억제하려는 측면이 우선하고 있다. 여기에 인건비 재원을 가급적 ‘청년실업 해소’에 돌려야 하는 사회적 과제까지 얹혀 있다.

엇갈린 판결, 정년 연장 등 추가 혜택 도입 여부가 관건


지난달 26일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임금피크제 유·무효를 둘러싸고 경영계와 노동계가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대법원이 임금피크제가 무효라고 한 판결은 한국전자기술원에 근무했던 A 씨 사례다. 기술원은 2009년 노조와의 합의를 통해 정년을 61세로 유지하되 만 55세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A 씨는 2011년 대상이 됐는데 2014년 명예퇴직 시점까지 줄어든 기본급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다. 대법원은 해당 임금피크제가 경영성과 제고를 목적으로 도입된 데다 정년을 늘리거나 업무를 줄이는 등 근로자에게 유리한 조정이 없었던 점을 무효의 근거로 삼았다.

하루 뒤 서울남부지법은 한국전력거래소 직원들이 회사를 상대로 청구한 임금 지급 소송을 기각했다. 거래소는 2016년 60세 정년 법제화 시행에 따라 일반직 직원 정년을 58세에서 60세로 연장하는 대신 이 구간 임금을 종전의 60%로 줄였다. 법원은 정년을 늘리면서 임금을 줄인 것은 연령 차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결국 어떤 목적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느냐와 근로자에 대한 추가적인 혜택 유무가 합법성을 가르는 주요 판단 기준이 됐다.

다만 경총은 추가 혜택이 없었더라도 무효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60세 정년 법제화 전인 2010년 기업들의 규정상 평균 정년은 57.4세였지만 실제 퇴직연령은 남성 53.8세, 여성 50.1세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규정상 정년을 보장하기 위해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면 별도의 추가 조치가 없어도 그 자체로 정당하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노동계는 제도 도입의 정당성과 필요성, 임금 감액의 적정성, 보완 조치의 적정성 등이 모두 합법성 판단 기준으로 정년연장형까지 적용 대상이라고 맞서고 있다.

임금피크제
근로자가 일정 연령에 도달하면 임금 근로시간 근로일수를 조정해 임금을 감액하는 대신 정년을 보장하거나 늘리는 제도. 한국에서는 2003년 신용보증기금이 최초로 도입했다. 당시는 정리해고나 조기퇴직 압박이 강했던 시기로 정년보장형 임금피크제가 다수였다. 2013년 60세 이상 정년이 법제화되고 2016년 시행되면서 민간 분야로 확산됐다. 현재 300인 이상 기업의 54%가 운영 중이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일본#임금피크제#합법성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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