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명조끼 여러 벌인 사람에게 또 주나”… 선진국 ‘백신 독식’ 논란[글로벌 포커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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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EU 내달부터 본격 부스터샷… 백신 양극화 갈수록 심화
EU, 화이자와 9억회분 공급 계약, 英은 1조6000억 원어치 주문해
日도 1억7000만회분 계약 체결… 화이자-모더나 값 기존보다 올려
“전염병 틈타 폭리” 비판 목소리… 전세계 10명 중 7명 백신 미접종

“아야, 살살 놔주세요” 4일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고령의 여성이 마스크를 쓴 채 통화를 하며 부스터샷을 맞고 있다.
 지난달 12일 세계 최초로 면역 취약층을 대상으로 부스터샷 접종을 시작한 이스라엘은 같은 달 30일에는 60세 이상 고령층으로 
대상을 확대했다. 예루살렘=AP 뉴시스
“아야, 살살 놔주세요” 4일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고령의 여성이 마스크를 쓴 채 통화를 하며 부스터샷을 맞고 있다. 지난달 12일 세계 최초로 면역 취약층을 대상으로 부스터샷 접종을 시작한 이스라엘은 같은 달 30일에는 60세 이상 고령층으로 대상을 확대했다. 예루살렘=AP 뉴시스
세계 각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2회 접종을 완료한 사람을 대상으로 면역력을 높이기 위한 추가 접종(부스터샷)이 본격화하고 있다. 델타 변이 등 전파력이 높은 각종 변이 바이러스가 유행하면서 백신 접종 선진국에서도 코로나19 재확산이 뚜렷한 탓이다.

하지만 대다수 빈곤국과 개발도상국이 여전히 백신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일부 선진국들이 부스터샷까지 계획하고 나서면서 백신 양극화가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에 대한 비판도 많다. 마이클 라이언 세계보건기구(WHO) 긴급대응담당 이사는 18일 “부스터샷은 이미 여러 벌의 ‘추가 구명조끼(extra lifejackets)’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여분의 구명조끼를 나눠주는 것”이라며 “다른 사람을 단 하나의 구명조끼 없이 익사하게 내버려둘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선진국의 백신 독식을 질타했다.

국제 통계 사이트 아워월드인데이터에 따르면 17일까지 세계 인구의 31.7%가 백신을 1회 이상 접종했다. 뒤집어 말하면 세계인 10명 중 약 7명은 아직 백신을 한 번도 맞지 못했다는 뜻이다. 선진국의 ‘자국 우선주의’로 코로나19 종식은 더 늦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일부 국가가 부스터샷으로 집단 면역을 달성해도 저개발국의 백신 접종이 더디면 변이 바이러스가 계속 출현하고 전염병 대유행 또한 국경을 넘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 각국 부스터샷 속속 시작


부스터샷(booster shot)은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드는 백신의 예방 효과를 다시 늘리기 위해 접종 완료 후 추가로 맞는 모든 백신을 의미한다. 부스터샷 논의는 올해 초 남아프리카공화국발 베타 변이가 확산되면서 시작됐다. 2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는 CBS 인터뷰에서 “코로나19가 퇴치되지 않는 한 앞으로 추가 접종이 필요할 것”이라며 일찌감치 부스터샷을 예고했다. 면역 취약층은 1, 2차 접종만으로는 백신 효과를 제대로 얻지 못한 데다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 역시 기존 백신의 보호막을 피해 가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후 미국, 영국, 이스라엘 등 백신 접종률이 높은 국가에서도 변이 바이러스로 일일 신규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부스터샷 접종이 본격화했다.

이스라엘은 지난달 12일 세계 최초로 부스터샷 접종을 시작했고 이후 접종 대상자를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부스터샷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60세 이상 면역력 취약계층이 대상이었는데 지난달 30일 ‘2회 차 접종 5개월이 지난 60세 이상’으로 넓혔다. 이달 13일부터는 50세 이상 접종을 시작했고, 19일부터는 40세 이상 성인과 교사로도 확대했다.

아워월드인데이터에 따르면 16일 기준 이스라엘의 부스터샷 접종자는 약 105만 명으로 전체 인구 930만 명의 약 11%에 달한다. 코로나19 백신 1회 접종률이 아직 한 자릿수인 나라가 적지 않은데 부스터샷 접종률이 두 자릿수를 기록할 만큼 접종 속도가 빠른 이유로 14일부터 적용된 ‘24시간 주 7일’ 체제가 꼽힌다. 이스라엘은 병원이 열리지 않는 밤과 새벽 시간에도 백신을 접종받을 수 있는 이동 차량을 전국 곳곳에 속속 설치하면서 접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계 최대 감염국인 미국도 부스터샷을 결정했다. 18일 미국 보건복지부 등은 “다음 달 20일부터 모든 미국인을 대상으로 부스터샷을 제공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번 부스터샷의 1차 대상자는 화이자, 모더나 백신 2회 접종을 마친 지 8개월이 지난 18세 이상 성인 1억5500만 명이다. 접종에는 대상자가 1, 2차에 맞은 백신과 같은 종류의 백신이 쓰인다.

독일은 다음 달 1일부터 면역 취약층, 고령층, 요양시설 거주자, 아스트라제네카 및 얀센 백신 접종 완료자를 대상으로 부스터샷을 시작한다.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만 쓰인다. 프랑스 역시 다음 달 15일부터 올해 1, 2월 백신 접종자 중 면역 취약층과 고령층을 대상으로 부스터샷을 맞게 한다. 종류는 미정이나 화이자가 유력하다.

영국은 다음 달 6일부터 면역 취약층을 대상으로 부스터샷을 접종한다. 영국은 교차 접종이 면역 반응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기존에 접종했던 자국산 아스트라제네카가 아닌 화이자를 부스터샷 백신으로 선택했다. 50대 이상을 대상으로 부스터샷을 접종할지도 논의하고 있다.

일본 역시 이르면 10월, 늦어도 내년에 부스터샷을 진행한다. 백신 접종 업무를 담당하는 고노 다로(河野太郞) 행정개혁담당상은 19일 미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의료진 등이 2차 접종을 마치고 8개월 후에 부스터샷을 맞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2월 접종을 끝낸 의료 종사자는 10월에 접종 후 8개월이 된다. 후생노동성의 판단을 기다려야 하지만 필요하면 곧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며 연내 부스터샷 가능성을 거론했다.

20일 마이니치신문은 정부가 내년 2월 말까지로 예정된 코로나19 백신 무료 접종 기간을 연장해 3차 접종 또한 무료로 받을 수 있게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은 화이자, 모더나와 각각 1억2000만 회분, 5000만 회분의 부스터샷용 백신 추가 공급 계약도 체결했다.

터키 등 중국산 백신의 낮은 효능에 고민하는 일부 국가 역시 화이자 백신을 추가로 맞는 3, 4차 접종을 시작했다. 터키 보건부는 최근 중국산 시노백 백신을 1, 2차 접종한 사람들에게 추가 백신 접종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터키는 올 1월부터 접종한 시노백 백신의 코로나19 예방률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자 최근 시노백 백신 접종자가 화이자 백신을 2회 추가로 맞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다만 터키의 3, 4차 접종은 시노백 백신의 낮은 효과 때문이어서 부스터샷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 높은 예방 효과는 입증

여러 연구 결과에서 부스터샷의 효능은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18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60세 이상 부스터샷 접종자의 코로나19 예방 효능은 86%에 달했다. 이스라엘 보건당국은 화이자 부스터샷을 맞은 60세 이상 14만9144명 중 코로나19 감염자는 37명이었다고 밝혔다. 반면 2회 접종 완료자 67만5630명 중에서는 1064명의 감염자가 나왔다. 당국은 “두 집단 모두 올해 1, 2월 2차 접종을 했고 접종자의 인구통계학적 특성도 비슷하다”며 신규 감염자 비율에서 부스터샷의 예방 효과가 충분히 입증된다고 진단했다.

미국 제약사 화이자가 최근 미국 보건당국에 제출한 부스터샷 초기 임상시험 자료 역시 마찬가지다. 화이자는 코로나19 백신 2회 접종 완료자가 2회 접종 후 8, 9개월이 지난 후 3차 접종을 했을 때 면역 재활성화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알베르트 부를라 화이자 최고경영자(CEO)는 “백신을 3회 접종한 결과 2회 접종보다 훨씬 많은 항체가 만들어졌다”며 부스터샷이 델타와 베타 변이 바이러스에 모두 효과를 보였다고 밝혔다. 우우르 샤힌 독일 바이오엔테크 최고경영자(CEO)도 “우리 백신의 3차 접종이 변이 바이러스에 높은 수준의 예방 효과를 나타냈다”고 했다.

평소 면역 억제제를 투여하는 장기이식 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11일 AP통신에 따르면 캐나다 토론토 보건연구기관 유니버시티헬스네트워크(UHN)는 미국 모더나 백신 2회 접종을 완료한 장기이식 환자 120명을 대상으로 2차 접종 2개월 후 60명에게는 3차 접종을 하고 나머지 60명에게는 위약만 투여했다. 그 결과 3차 접종자의 55%는 상당한 수준으로 항체가 형성됐는데 위약이 투여된 환자는 그 비율이 18%에 그쳤다. 특히 부스터샷 접종자는 중증 질환 예방을 돕는 T세포도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 백신 양극화·가격 인상 불가피


세계 백신 양극화 속에서 일부 선진국이 백신을 독식하는 상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특히 화이자와 모더나 등 소수 제약사가 폭리를 취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에이즈보건재단(AHF)을 비롯한 미국 시민단체는 17일 뉴욕 맨해튼의 화이자 본부 앞에서 화이자, 모더나 등 주요 백신 제조사들이 전염병 대유행 국면에 폭리를 취하고 있다며 누워서 죽은 척하는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전염병으로 특정 회사가 폭리를 취하면 안 된다며 “백신 가격을 낮추고 특허와 기술을 공유해 백신 생산을 전 세계적으로 확대하라”고 촉구했다.

실제 화이자와 모더나는 최근 2023년까지 유럽연합(EU)에 공급하는 백신 가격을 큰 폭으로 인상했다. 1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화이자가 기존 회당 15.5유로(약 2만1300원)였던 백신 가격을 19.5유로(약 2만6700원)로 25.8% 올렸고, 모더나 역시 22.6달러(약 2만6600원)에서 25.5달러(약 3만 원)로 12.8% 높였다고 보도했다. 두 제약사는 자사 백신이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미국 얀센 백신보다 예방 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나타나자 EU와 공급가를 재협상해 가격을 대폭 올렸다.

최근 영국 정부 또한 화이자에 내년 부스터샷을 위한 백신 10억 파운드(약 1조6000억 원)어치를 주문했다. 이번 주문의 백신 가격 역시 이전 계약보다 약 20% 높다. 특히 영국은 EU가 최근 화이자 등과 향후 2년간 쓰일 9억 회분의 백신 계약을 맺으면서 같은 양을 추가로 구매할 수 있는 조건까지 넣었다는 소식에 조바심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국이 소수 제약사에 매달리면서 백신 가격 추가 상승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주요 제약사 또한 부스터샷 판매로 천문학적인 규모의 추가 수익을 올릴 가능성이 크다. 화이자는 올해 이미 백신 판매로만 330억 달러(약 38조84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지구촌의 ‘백신 빈익빈 부익부’도 한층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브루스 에일워드 WHO 선임고문은 18일 “전 세계의 코로나19 백신은 충분하지만 올바른 순서를 통해 제대로 된 장소에 가지 못하고 있다”며 “수십억 명이 초기 투약을 받지 못했고 저소득 국가에서는 인구의 5% 미만만 접종했다”며 백신 양극화를 우려했다. 델타 변이가 기존 변이보다 돌파 감염을 더 잘 일으키는 것은 맞지만 우려할 수준은 아니고, 백신 접종을 완료한 사람은 변이 바이러스에 감염돼도 대체로 증상이 경미한 만큼 코로나19의 빠른 종식을 위해서라도 전 세계가 부스터샷이 아닌 미접종자의 접종에 합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 또한 “백신 불균형 해소를 위해 부스터샷 접종을 미뤄 달라. 많은 사람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일부 국가의 부스터샷 접종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할 부분”이라고 선진국에 연일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강제력 없는 그의 말이 ‘대답 없는 메아리’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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