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전 집값 잡은 ‘효자 신도시’… 새 모델 만들어야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24일 03시 00분


코멘트

노후화 심해진 1기 신도시… ‘재건축=집값상승’ 딜레마 빠진 정부는 눈만 껌뻑

올해 5000여채를 시작으로 경기 성남시 분당, 고양시 일산 등 1기 신도시에서 재건축 연한인 준공 30년을 넘기는 아파트가 속속 나오기 시작한다. 동아일보DB
올해 5000여채를 시작으로 경기 성남시 분당, 고양시 일산 등 1기 신도시에서 재건축 연한인 준공 30년을 넘기는 아파트가 속속 나오기 시작한다. 동아일보DB
올해로 경기 성남시 분당신도시에 28년째 살고 있는 한영재(가명·49) 씨는 분당 생활에 별다른 불만을 느낀 적은 없다. 지방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분당 인근에서 막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분당에 신혼집을 꾸렸다. 쾌적한 환경이 큰 매력이었다. 서울처럼 갑갑한 느낌이 들지 않으면서도 백화점, 영화관 등 생활 인프라도 탄탄했다. 서울로 출퇴근하던 남편이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한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다니느라 고생했지만, 아이들 교육 환경부터 편의시설까지 잘 갖춰져 있다 보니 이사를 하더라도 분당 내에서만 옮겨 다녔다.

그런 한 씨도 요즘엔 고민이 많다. 아파트가 워낙 오래되다 보니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수납공간도 많고 주차장도 잘 갖춰져 있는 요즘 아파트를 보면 새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든다. 그는 “분당은 신혼생활을 시작해 자녀까지 키운 ‘제2의 고향’과 다름없는 도시”라며 “아파트 노후화만 해결되면 분당에 평생 정착해 살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올해는 1기 신도시에 첫 아파트 입주가 시작된 지 30년이 되는 해다. 1989년 정부는 서울로 쏠린 주택 수요를 해소하고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당, 일산, 평촌, 산본, 중동에 1기 신도시를 조성했다. 1991년 9월 분당 시범단지 입주가 시작되며 1기 신도시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집값 급등기에 지어진 1기 신도시 아파트는 대규모 주택 공급으로 집값을 안정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올해부터 재건축 연한인 30년을 넘긴 아파트가 속속 나오면서 5년 뒤인 2026년에는 연한을 넘긴 주택이 28만 채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처럼 대규모 아파트가 한꺼번에 노후 연한을 넘기는 것은 한국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다. 전문가들은 1기 신도시를 어떻게 지속가능한 도시로 만들어 나갈지에 대한 청사진을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집값 급등기, 집값 잡는 주택공급 모델

1기 신도시 계획은 주택 200만 채 공급계획에서 비롯됐다. 1980년대 후반 부동산 가격은 ‘3저(低·저달러 저유가 저금리) 호황’과 함께 급등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시중 유동성이 부동산으로 대거 몰린 영향도 있었다. KB국민은행 리브부동산 통계에 따르면 1988년 전년 대비 16.6% 상승한 서울 집값은 1989년에는 24.25% 치솟았다. 특히 일자리가 있는 서울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주택난이 심각해졌다.

정부는 대규모 신도시로 서울의 주택 수요를 해소하려 했다. 1989년 중동, 평촌, 산본에 신도시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오히려 개발 기대감으로 인근 지역의 땅값이 급등하는 결과를 낳자 정부는 1989년 분당과 일산을 신도시로 추가 조성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신도시는 총 5곳이 됐다. 1기 신도시 5곳에 주택 약 30만 채를 지어 110만 명이 넘는 인구가 거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공공이 토지를 수용해 택지를 조성하면 민간이 매입해 단기간에 대거 주택을 공급하는 신도시 개발 방식이 이때 본격적으로 정착됐다.

신도시 조성사업은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허허벌판이었던 논밭에 아파트가 들어섰고, 인구도 분산됐다. 분당과 일산만 보더라도 2010년 조사 기준 주택 수는 27만9000채로 계획된 주택 공급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인구수는 분당과 일산을 합쳐 99만 명이 넘는다.

1기 신도시 주민들이 입주하기 시작하자 그 전까지 치솟던 수도권 집값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1989년 1기 신도시 조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듬해인 1990년 서울 집값은 전년 대비 2.15% 하락했다. 이후로도 약 10년간 집값은 하락하거나 1∼2% 안팎의 안정적인 상승률을 보였다.

이처럼 1기 신도시는 서울의 주택수요를 해소하겠다는 당초 정책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계획도시인 만큼 녹지, 편의시설과 교육환경 등 쾌적한 주거환경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

○서울 수요 흡수했지만 노후화로 불편 커져

30년이 지난 지금도 1기 신도시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주거 만족도는 높은 편이다. 경기연구원이 2019년 1기 신도시 405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반적인 주거 만족도에 대해 84.7%가 만족하거나 보통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개별 주택의 시설에 관한 질문에서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 단지 내 주차장에 대해서는 전체의 53.6%가 만족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소음 및 진동(40.5%), 단열 및 방풍(28.6%) 등에서도 불만족한다는 답변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주택 노후화가 전체적인 주거 만족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실제 1기 신도시 아파트는 올해 5000채를 시작으로 내년 4만5000채, 2022년 7만 채 등 2026년까지 28만 채가 재건축 연한(30년)을 넘기게 된다.

주택 노후화 문제를 해결하는 대표적인 방법인 재건축의 경우 현행 법규로는 사업성을 확보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1기 신도시의 용적률은 170∼226%로 2기 신도시(159∼200%)에 비해서도 높은 편이다. 분당의 경우 현행 용적률 대비 개별 지구단위계획에서 허용하는 용적률 간 차이는 주거지역의 경우 1∼2% 수준에 그친다. 이미 최대 용적률을 꽉 채워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집값 불안에 대한 우려가 큰 상황에서 무작정 규제를 풀어 사업성을 높여주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분당과 일산만 하더라도 2008년 금융위기 등 경기 침체기를 제외하고는 집값이 꾸준히 상승곡선을 그려왔다. 정부가 최근 수도권 교통망 확충에 나서면서 일부 지역이 급등세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재건축 규제를 풀면 단기적으로 집값이 치솟을 가능성이 높다. 각 단지가 대거 재건축이나 리모델링에 돌입하면 이주 수요가 발생해 인근 전월세 가격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특히 해당 지역이 확연히 쇠퇴하거나 주택의 구조적 안전성에 큰 문제가 없는데 규제를 풀어줄 명분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주민 간에도 재건축이나 리모델링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200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분당에 살고 있는 김모 씨(24)는 “오랫동안 살던 어르신들 중에는 분담금을 부담할 정도로 소득이나 자산 여력이 없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2019년 경기연구원 조사에서도 주민의 66.9%가 리모델링 사업 추진에는 동의했지만 비용 부담은 57.5%가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도시정비 모델 만들어야”

전문가들은 도시가 완전히 낡아 쇠퇴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고 말한다. 1기 신도시가 지금과 같은 주거환경을 유지하지 못하면 1기 신도시의 고령화, 슬럼화 속도가 빨라질 뿐 아니라 여기서 이탈한 수요가 또다시 서울을 향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현재 정부가 3기 신도시 등 신규 택지를 지정해 신도시 개발을 하고 있지만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기 때문에 생활 교통 인프라가 이미 잘 구축된 1기 신도시를 리모델링이나 재건축을 해서 1기 신도시도 잘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건설산업연구원은 최근 내놓은 ‘수도권 1기 신도시 현황과 발전방향 모색’ 보고서에서 “경기도 다른 지역에 비해 1기 신도시, 특히 일산, 중동 등은 젊은층 감소, 고령자 증가 속도가 빠른 편”이라며 “주택 노후화로 주민 불편이 커지고 있을 뿐 아니라 5개 신도시 모두에서 사회적 노후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개별 단지를 산발적으로 재건축하거나 리모델링하는 것 이상의 장기적, 종합적인 계획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도시마다 환경이 다른 만큼 그에 맞는 도시 정비의 청사진을 만들어 도시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허윤경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1기 신도시는 시작일 뿐 앞으로 계속해서 노후화된 공간과 도시를 어떻게 바꿔 나갈지에 대한 문제가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대두될 것”이라며 “1기 신도시가 도시 개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만큼 도시 정비, 주택 정비에서도 새로운 방향성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리모델링, 재건축보다 허가 쉽지만 내력벽 변경 등 까다로워
올해 입주 30년을 맞은 1기 신도시 등 노후 아파트 단지에서 리모델링 바람이 불고 있다. 리모델링은 기존 아파트를 완전히 철거하고 다시 짓는 재건축과 달리 골조는 유지한 채 증축하거나 지하주차장을 신설하는 방식이다. 재건축보다 규제가 덜해 재건축 사업성이 낮아 추진이 어려운 단지들이 차선책으로 리모델링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22일 한국리모델링협회에 따르면 이달 기준 수도권에서 리모델링 조합 설립을 마친 단지는 총 62개 단지의 4만5527채로 2019년 12월(37개 단지·2만3935채)에 비하면 60%가량 늘었다. 협회 관계자는 “아직 조합을 설립하지 못한 단지까지 포함하면 실제 리모델링 추진 단지는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리모델링의 장점은 재건축보다 규제가 덜하다는 점이다. 재건축을 하려면 준공한 지 30년이 지나고 안전진단 D등급 이하를 받아야 하지만 리모델링은 준공 15년 이상에 안전진단 B, C등급을 받으면 추진이 가능하다. 기부채납 의무도 없다.

1기 신도시에서 리모델링을 추진하는 단지가 늘고 있는 건 용적률과 관련이 크다. 기존 단지의 용적률이 200%를 넘으면 재건축 수익성이 낮다고 보는데, 1기 신도시 아파트 대부분이 용적률 200%를 초과한다.

올해 2월 경기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한솔마을5단지’가 1기 신도시 최초로 리모델링 사업계획 승인을 받았다. 현재 1156채인 이 단지는 리모델링을 통해 1255채 신축으로 탈바꿈된다. 경기 군포시 ‘율곡주공3단지’를 비롯해 산본역 인근 단지들도 리모델링 조합을 설립했거나 추진하고 있다. 안양시 ‘평촌 목련2, 3차’도 시공사 선정까지 마치는 등 다른 1기 신도시에서도 추진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리모델링은 건설업계의 새로운 먹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한동안 리모델링 업계에선 쌍용건설이 강자였다. 하지만 2014년 포스코건설이 전담 부서를 꾸리고 리모델링 사업에 진출하면서 양 강 구도로 재편됐다. 최근 리모델링 사업에 소극적이던 대형 건설사들까지 수주전에 뛰어들면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대우건설은 올해 3월 전담 팀을 신설하고 쌍용건설, 포스코건설, 현대엔지니어링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서울 송파구 ‘가락쌍용1차아파트’ 리모델링 입찰에 참가했다. 대우건설이 리모델링 입찰에 참여한 건 2009년 이후 12년 만이다. 이에 앞서 현대건설은 기존에 리모델링 사업을 담당하던 태스크포스(TF)를 지난해 11월 정식 부서로 재편했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재건축에 비해 일반 분양 가구가 적어 조합원이 내는 분담금이 늘어날 수 있다. 수직 증축 시 일반 분양 가구를 늘릴 수 있지만 수평 증축에 비해 안전진단이 매우 까다롭다. 지금까지 수직 증축 방식의 리모델링을 허가받은 곳은 한 곳뿐이다.

아파트 무게를 지탱하는 ‘내력벽’을 마음대로 철거할 수 없다 보니 평면상 제약이 크다. 업계에서 내력벽 관련 규제를 완화해달라고 요구하지만 정부는 안전상 이유로 소극적이다. 리모델링도 주민 66.7%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재건축 주민 동의(75%)보다는 낮지만, 리모델링도 반대하는 주민이 많으면 사업 추진이 무산될 수 있는 셈이다. 리모델링으로 늘어나는 주택은 기존 주택 수의 5∼10% 정도로 재건축보다 공급 효과가 작다.

고준석 동국대 법무대학원 겸임교수는 “리모델링은 신규 공급 규모가 적다”며 “수도권 주택 공급난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재건축 규제를 풀어 재건축 추진을 원활하게 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새샘 iamsam@donga.com·이지윤 기자 /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
#신도시#집값#노후화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