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암투 다룬 ‘궁녀 영화’ ‘허균의 궁녀’와는 딴세상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입력 2021-04-15 03:00수정 2021-04-15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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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를 영화로 읊다]〈14〉궁녀의 노래
영화 ‘궁녀’(2007년)에서 궁녀들은 입궁 후 자유를 빼앗긴 채 입단속과 정절을 강요받는다. CJ ENM 제공
신상옥 감독의 영화 ‘궁녀’(1972년)에서 윤정희가 연기한 복녀는 번듯한 양반집 며느리였지만 남편을 구하기 위해 궁녀가 된다. 복녀는 임금의 눈에 들어 후궁으로 신분이 상승하지만 궁중 암투의 희생양이 돼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사실 임금의 총애를 받는 궁녀 이야기란 대부분의 궁녀와는 무관한 일이다. 허균(許筠·1569∼1618)은 1610년 여름 어느 궁녀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100수의 시를 남겼다.

이 무렵 허균은 벼슬에서 물러나 요양 중이었다. 집에 있으면 불길하다는 점쟁이의 말에 거처를 옮겨 다니다 우연히 은퇴한 늙은 궁녀를 만나게 됐다. 그녀는 각심이(婢子·여자 종)로 입궁해 두 명의 왕후를 모셨던 사람으로 궁중 일에 밝았다. 허균은 당나라 왕건(王建·767?∼831)이 환관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궁사’ 100수를 떠올리며 세상에 교훈을 남기고자 이 시를 썼다.

동아시아 고대 왕조부터 시작된 궁녀 제도는 조선 시대에도 이어졌다. 당 현종의 4만 궁녀에는 못 미치지만 조선 시대에도 700여 명의 여성이 궁 안에 있었다(이익 ‘성호사설’). 그녀들은 각기 역할이 달랐지만 절대 군주에게 예속된 자유를 빼앗긴 존재란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김미정 감독의 ‘궁녀’(2007년)에선 이런 궁녀들의 삶을 스릴러 형식으로 풀어냈다. 주인공 천령이 궁녀들의 잇따른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왕자를 낳아 권력을 쟁취하려는 궁중 여인들의 비정상적 집착이 드러난다. 영화에서처럼 궁녀의 원혼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그녀들 삶의 조건 자체가 비극임이 이 시에서 잘 드러난다.

허균은 100수의 ‘궁사’를 통해 밖에서 알 수 없는 궁궐 안의 일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냈다. 다른 시인들도 ‘궁사’를 남겼지만 대개 중국의 역사 기록에서 유래한 관념적 궁녀 형상을 담았을 뿐, 실제 조선의 궁녀를 읊은 경우는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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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시에선 주방에서 일하는 하급 궁녀의 입장에서 삶의 고단함과 안타까운 처지를 드러낸다. 임금을 볼 일조차 없으면서 정조를 지켜야 했던 궁녀들의 억눌린 본능은, 허균이 다음 수(여든네 번째 수)에서 읊은 것처럼 대식(對食·궁녀 사이의 동성애)으로 분출되기도 했다. 시인이 궁녀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물론이고 금지된 욕망조차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궁녀를 다룬 영화는 많다. 대부분의 궁중 비화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권력 관계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허균의 시처럼 궁녀의 눈으로 본 궁중 이야기가 담긴 영화를 보고 싶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한시#궁녀 영화#궁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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