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린과 IPTV[2030세상/박찬용]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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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용 칼럼니스트
박찬용 칼럼니스트
“오리지널 뮤직비디오 보셨어요? 저 군대 있을 때 정말 많이 봤습니다.” 2016년 군번인 20대와 2021년 상반기 최대 히트곡 ‘롤린’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들은 말이다. 찾아보니 정말 있었다. 롤린의 오리지널 뮤직비디오는 성인 인증을 받아야 할 만큼 자극적이다. 그걸 보자 롤린 공연 영상 속 장병들의 포효가 이해됐다. 그 소리에는 문명인은 따라 하지 못할 짐승 같은 기운이 있었다. 그 함성 속 기운은 롤린이 회자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롤린의 인기에는 기술적 배경도 있다. 인터넷TV(IPTV)다. 국방부는 2009년부터 생활관 내에 IPTV 설치를 시작해 2013년 보급을 완료했다. 특정 콘텐츠를 무한 반복해서 볼 수 있는 기술적 인프라가 구축된 셈이다. 그때 군 생활을 한 젊은이들에게서 “IPTV로 계속 돌려보기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군내 IPTV 보급 시기는 걸그룹에 ‘군통령’이라는 별명이 붙은 때와도 묘하게 겹친다.

일반병으로 복무한 사람이라면 군대가 걸그룹 학습기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군 장병들은 ‘사회의 것’에 대해 비합리적일 정도로 극심한 갈증을 느낀다. TV를 보지 않던 남성들도 군대에서 온갖 프로그램을 볼 만큼. 그 결과 장병들은 현대 한국에서는 찾을 수 없는 맹목적 시청자층이 된다.

특정 콘텐츠가 특정 집단에 완전히 스며드는 건 현대 미디어 환경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반면 시청 요건이 통제되는 2010년대의 한국 군대는 천연기념물이 뛰어다니는 비무장지대(DMZ) 같은 특수 생태계다. 생활관 TV는 군인들에게는 사회의 창과도 같다. 그 제한된 창에서 콘텐츠 반복 시청이 가능하다면 걸어 다니는 남성 호르몬과도 같은 군 장병들이 무엇을 볼지 예상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다. ‘군통령’이란 그런 특수 미디어 환경의 결과물이다.

요즘 각 부대에는 ‘싸지방의 엑셀 파일’이 있다고 한다. 싸지방은 ‘사이버 지식 정보방’의 약자인 군부대 내 컴퓨터실이고, 엑셀 파일은 ‘특정 영상의 몇 분 몇 초에 이런 그룹이 나온다’는 정보를 모아둔 목록표다. 부대에 따라 그 파일을 최고 선임병이 보유하거나 공용 컴퓨터에 있는 걸 사람들이 업로드한다고 한다. 롤린은 군 장병의 스마트폰 사용이 허락되기 1년 전인 2017년에 발매되어 ‘싸지방의 엑셀 파일’을 타고 부대 안의 병사들에게 계속 스며들 수 있었다.

모든 게 너무 빨리 변하는 한국에서는 이마저도 옛날이야기다. 2018년부터 군내 스마트폰 반입이 허가되었기 때문이다. 2020년 전역한 어느 대학생이 말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에는 단체로 공유하는 감성이 있었지만 이제 관심사가 비슷한 친구들이 따로 모입니다. 한 부대에 있어도 별개의 집단 같아요. 스마트폰이 보급됨에 따라 콘텐츠 소비도 개별적으로 변했으니까요.” 스마트폰이 완성한 멀티 트렌드 시대가 군대에까지 왔다. 브레이브걸스의 끈질긴 근성과 뛰어난 인품과 ‘롤린’의 매력과는 별개로, 제2의 롤린은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박찬용 칼럼니스트



#롤린#iptv#군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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