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도 반한 기타 영웅, ‘활화산 속주’ 마치고 잠들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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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 It’ 연주했던 ‘양손 태핑의 전설’ 에디 밴 헤일런 별세

기타리스트 에디 밴 헤일런(왼쪽)이 1984년 미국 텍사스주 어빙의 공연장에서 마이클 잭슨과 ‘Beat It’을 연주하는 모습. AP 뉴시스
기타리스트 에디 밴 헤일런(왼쪽)이 1984년 미국 텍사스주 어빙의 공연장에서 마이클 잭슨과 ‘Beat It’을 연주하는 모습. AP 뉴시스
1975년경, 미국 캘리포니아주 일대의 라이브 클럽에서는 밤마다 기묘한 장면이 펼쳐졌다. 한 기타리스트가 독주를 할 때마다 객석을 등지고 돌아섰다. 관객은 그의 손을 볼 수 없었고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마치 2명 이상의 기타리스트가 동시에 연주하듯 초고속 3연음 레가토가 활화산처럼 분출했다. 트위터도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 이 장관은 입에서 입으로 번져나갔다. 기타리스트의 객석을 등진 연주는 한동안 계속됐다. 독자적 새 연주기법을 감추기 위해서.

희대의 기타리스트 에디 밴 헤일런(본명 에드바르트 로데베이크 판할런)이 지병인 암으로 6일(현지 시간) 별세했다. 향년 65세. 그는 양손으로 기타 지판을 때리는 ‘투 핸드 태핑’ 속주로 록 기타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밴드 ‘펄 잼’의 마이크 매크리디, ‘머틀리 크루’의 니키 식스 등 음악인들이 앞다퉈 고인을 “록계의 모차르트”라 회고하며 추모하고 있다. 고인은 1955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1962년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로 가족이 이주하면서 형 알렉스와 피아노를 배웠다. 악보를 읽을 줄 몰랐지만 바흐나 모차르트 콘서트 실황을 보며 즉흥연주를 했고 피아노 경연대회에서 우승했다. 훗날 헤일런 형제는 그들의 성을 딴 밴드를 만들었다. ‘밴 헤일런’이다.

여전히 전 세계의 TV 스포츠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곡 ‘Jump’는 ‘기타 영웅’ 헤일런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줬다. 인류라면 단 한 번에 뇌에 새길 신시사이저 전주가 역시 그의 솜씨이자 아이디어다. 1978년 데뷔한 밴 헤일런은 ‘Jump’를 담은 앨범 ‘1984’(1984년)로 성공의 정점에 섰다. 차기작 ‘5150’(1986년)부터 ‘Balance’(1995년)까지 네 장의 앨범을 연속으로 빌보드 앨범차트 정상에 올렸다.

2017년 내한 때 기자와 만난 도미닉 밀러(스팅의 기타리스트이자 ‘Shape of My Heart’의 공동 작곡가)는 “1979년 밴 헤일런 2집을 듣고 뿅 갔다. 기타 솔로도 대단하지만 리프(riff)의 탄탄한 리듬감도 발군이다. 힘, 유머 감각, 환희에 찬 분위기, 과감성을 모두 갖춘 에디 밴 헤일런은 미국 최고의 기타리스트다. 지미 헨드릭스를 빼고 말한다면”이라고 말했다.

‘Jump’ ‘Why Can‘t This Be Love’ ‘Panama’ ‘When It’s Love’…. 화려한 선율과 통쾌한 록 연주로 밴드는 1980년대 팝계의 지형까지 흔들었다. 헤일런의 폭발적인 연주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귀까지 사로잡았다. 잭슨은 팝계 사상 최대 프로젝트였던 ‘Thriller’(1982년) 앨범에 헤일런을 초청했다. 헤일런이 무보수로 연주해준 ‘Beat It’의 기타 솔로는 이 곡의 얼굴 없는 신 스틸러다.

그러나 ‘헤일런 마니아’들이 이 비르투오소를 기억하는 최고의 방법은 1975년부터 밴드의 공연 레퍼토리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저 1분 42초짜리 짧은 연주곡 ‘Eruption(분출)’이다. 조회수 1500만 회를 넘은 이 곡의 생전 라이브 유튜브 영상에는 1만 개의 댓글이 달려 있다.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누리꾼들은 이 영상 밑으로 몰려들고 있다. 한 누리꾼은 이렇게 썼다.

‘당신 같은 사람은 단 하나뿐이다. 결코 잊히지 않을 것.’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기타리스트 에디 밴 헤일런#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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