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구 기자의 對話]“공무원이 연애질한다고 각하가 대로해서… 잘렸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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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선 탤런트 최불암

연극 ‘바람불어 별이 흔들릴 때’를 연습 중인 배우 박혜영(오른쪽)과 최불암. 그는 5일 인터뷰에서 “사람은 늘 가슴속에 시 한 편을 품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25년 만에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연극 무대에서 그가 말하려는 시는 무엇일까. 왜 그는 이제는 모른 척해도 될 나이에, 아직도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민을 못 버리는 것일까. 그는 “이 연극을 통해 아픈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위로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연극 ‘바람불어 별이 흔들릴 때’를 연습 중인 배우 박혜영(오른쪽)과 최불암. 그는 5일 인터뷰에서 “사람은 늘 가슴속에 시 한 편을 품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25년 만에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연극 무대에서 그가 말하려는 시는 무엇일까. 왜 그는 이제는 모른 척해도 될 나이에, 아직도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민을 못 버리는 것일까. 그는 “이 연극을 통해 아픈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위로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 산업화의 어두운 그림자가 조금씩 드리워지던 1970년대, 미국에는 ‘형사 콜롬보’가 있었고 우리에게는 ‘수사반장’이 있었다. 희끗희끗한 흰머리를 날리며 번득이는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던 정의의 사도. 범죄에는 가차 없으면서도 물질만능사회가 빚어낸 현실을 가슴 아파하며 “빌딩이 높을수록 그림자는 길어지지∼”라는 명대사를 남긴 사람. 캬∼.

그가 25년 만에 연극배우로 돌아왔다. 18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막을 올리는 ‘바람불어 별이 흔들릴 때’에서 ‘미지의 노인’역으로. 》
 

이진구 기자
이진구 기자
―25년 만에 연극 무대에 오르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1993년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각색한 ‘어느 아버지의 죽음’ 이후 처음이니까 그 정도된 건데…. TV 하느라 시간이 그렇게 안 됩디다. 대본도 이것저것 받아봤는데… 굉장히 후회스러운 일이지요…. 연극이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이제 내 나이도 있으니 한 번 모든 것을 들여서 평가를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내가 연극에서 시작했으니까 그동안 못 다한 빚을 갚고 싶은 생각도 있고….”(그는 1959년 연극 ‘햄릿’으로 데뷔했다. ‘바람불어 별이 흔들릴 때’는 자신이 우주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한 노인이 만나는 지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연극을 통해 말하고 싶은게 있다면….

“사람들이 많이 아프잖아요. 다들 삶의 의미가 희박해져가는 것도 같고….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더 가지려고만 하고…. 그게 다 채워질 수가 없는 건데…. 사람은 저마다 빛을 가진 별이에요. 그 별들이 모여 우주가 되는 것이고. 때론 보잘것없다고 느껴질 때도 있겠지만 나의 삶이 곧 우주라는 걸 이 연극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죠. 배우로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어떤 방법들이 필요할까를 연극을 통해 호소할 수 있다면…. 그런 사명감이 있죠.”

―교양프로그램을 제외하면 2014년 이후에는 방송 드라마도 안 하셨는데요.

“연기를 하면 감독이나 작가로부터 이렇게 해달라는 주문과 지적을 받아야 하는데, 이제는 모두들 예우만 해주고 별다른 말을 안 해줍디다. 어려워만 하고…. 은퇴는 아니고 그냥 물러남이지요. 후배들에게 불편함이 돼서는 안 되니까요.” (지금 연습에서는 지적을 받습니까?) “혹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지만 참는 건 아닌지…. 지적을 못 받다 보면 왠지 서럽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선생님, 거기는 이렇게 해주셔야 합니다’ 이런 말을 듣고 싶은데….”

TV 드라마 ‘수사반장’.
TV 드라마 ‘수사반장’.
―‘수사반장’ ‘전원일기’ 때와 똑같으신 것 같습니다.


“정말? 파∼으하하. 요즘도 지방에 촬영 가면 사람들이 ‘당신 구십 넘었지?’라고 묻습디다. ‘그렇게 보여요?’ 하고 되물으면 ‘내가 마흔 몇 살 때 전원일기 김 회장이었으니 지금은 구십도 훨씬 넘은 거 아니오?’라면서요. 수사반장(1971년) 박 반장 역이 서른 하나였고, 전원일기(1980년) 김 회장은 마흔에 했으니…. 지금은 안 해도 되지만 평생 머리에 흰 칠하고 살았을 정도로 아버지 역, 노인 역을 해서겠죠.”

―30대에 노인 역 맡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대학에서 처음에는 연출을 전공했는데 그 당시에는 내 얼굴로 배우 하겠다고 하면 웃었을 때니까…. 근데 연기자들이 노인 역을 못해서 연기 지적을 했는데, 그걸 본 선생님이 ‘최불암 네가 해라’라고 하십디다. 그렇게 시작된 거지요.”

―그 덕분에 한국의 아버지상, 국민 배우로 각인됐는데 아쉬운 점도 있으신가요.

“참 해보고 싶은 범죄자 역이 있었는데…. 범죄자의 의식 속에는 성장 배경이나 범행 동기 등 배우로서 연기해볼 만한 요소가 너무 좋은 게 많거든요. 근데 시키지도 않지만 해봐도 별로 효과가 없습디다. 몇 번 해봤는데…. (수사반장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망나니 역도 해봤는데 잘했다는 말은 안합디다. 파∼. 전원일기도 그렇고 너무 이미지가 좋게만 나와서… 그게 사람들 뇌를 아주 고정시켜 놓은 것 같습디다.”

―혹시 멜로드라마는 안 해보셨습니까. 거의 본 적은 없습니다만….

“왜? 한 번 했지요….(이 대목에서 그는 무척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개구리 남편’이라고… 뭍에서도 살고, 물에서도 사는….” (제목에서 벌써 느낌이 확 오는데요?) “내가 공무원 남편으로 나오는 일일연속극이었는데 그날은 깜빡 잊고 두고 간 서류를 여비서가 직접 부산까지 가지고 온 내용이었어요. 둘이 태종대에 간 장면이 있었는데…. 난 바바리 깃 세우고, 여비서는 마후라(머플러) 감싸고…. 그날 방송이 나간 뒤에 방송국에서 난리가 나서 빨리 의상 그대로 입고 튀어오라고 합디다. 놀라서 가보니 작가며 PD며 다 나와서 다음 회부터 내용을 바꿔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박정희 대통령이 방송 보고 노발대발했다고….” (왜요?) “국민의 녹을 먹는 국가공무원이 나가서 연애질이나 한다고…. 더구나 자기 여비서랑….” (그냥 드라마일 뿐인데요?) “그냥 드라마인데…. 원래 80회 분량이었는데 10회인가 하고 흐지부지 끝났죠. 그러고 나니까 다시는 연애하는 게 안 들어옵디다. 1969년이었지? 아마?” (박 대통령이 펄펄 날 때였네요) “어이구∼, 말도 못하지…. 무서워서…. 결국 바람 못 피우고 끝났는데 한국 최초의 건전 불륜드라마라고 할까. 하하하. 수사반장도 한 편도 안 빼고 보셨다고 합디다.”

―국사가 다망하실 텐데 매일 본방 사수를 했다고요?

“그런 것 같습디다. 1974년인가? 일요일 집에서 그날 방송된 수사반장을 모니터링하고 있는데 청와대에서 또 전화가 왔지요. 집사람이 받았는데, 청와대 부속실이라고 합디다. 그땐 부속실이 뭔지도 모를 때니까…. 저쪽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더니 ‘깔깔’ 하며 웃는 소리가 들리는데 갑자기 ‘저 육영수예요’ 하더라고? 그때 나도 모르게 놀라서 탁자를 ‘탁’ 치면서 ‘네!’ 하고 벌떡 일어났지요. 육 여사가 ‘담배를 너무 자주 피우세요’ 하시더라고…. ‘네! 방송에서 도입부, 클라이맥스 때 등 네 번 피우기로 설정했습니다!’ 했더니, 웃으시면서 ‘한두 대만 하세요. 최 선생님 태우실 때마다 이 양반도 따라 피우세요. 그런데 이 양반도 그렇지만 국민들도 다 따라 피우지 않겠어요’ 하시더라고. 멀리서 박 대통령이 ‘쓸데없는 얘기한다’는 말이 들립디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어떻게 되긴, 한두 대로 줄이고 그나마 전원일기부터는 한 대도 안 피웠지요.”

―14대 국회의원도 하셨는데 잘 맞으시던가요.

“난 안됩디다. 그 사람들이 나보다 더 진짜 연기자 같고…. 야단만 맞았지요.” (국회의원이었는데 야단을 맞았다고요?) “국회상임위에서 ‘장관께서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질의했더니 쉬는 시간에 선배 의원이 불러냅디다. 위아래로 쳐다보면서 ‘장관!’ 하고 세게 불러야지 그게 뭐냐고….” (그때는 여당 아니었나요?) “여당이었는데 그래도 그렇게 야단치라는 거지요. 사실 정치인이 될 생각도 없었는데… 그냥 정주영 씨를 좋아해서 열심히 찬조연설하고 다녔더니 전국구 의원이 됩디다. 의원이 되는 줄 알았으면 아마 안 했을 텐데….”

―평소 ‘배우란 세상을 비추는 방향판’이라는 말을 자주 하시는데….

“배우도 역시 사회 안에서 의미를 지닌 사람이 돼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거죠. 사회를 걱정하고, 미래를 생각하는…. 작가들의 펜이 그런 쪽으로 가야 하는데…. 이게 시청률 때문에 쉽지 않지요. 인기를 끌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돈을 많이 벌려면 인기 작가가 돼야 하고…. 그러다 보니 자꾸 갈등 구조를 만들어서 흥미롭게 만들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있죠. 그런데 나는 그런 면에서는 좀 달리하고 싶어요. 이 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이고, 이렇게 가면 안 된다는 것을 누군가 말해줘야 하고 배우도, 드라마도, 연극도 그 소명이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은… 그렇게 해야만 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내년이면 데뷔 60주년인데 가장 아쉬움이 남는 배역이 있으셨습니까.

“40대 중반에 셰익스피어 ‘리어왕’ 역을 맡았는데 기운이 달려 뻗어버렸죠. 수사반장하고 전원일기를 하던 때라 너무 힘들었던 것 같습디다. 연출자가 ‘지금 못하면 결국 못 한다. 꼭 해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포기한 게 지금도 아픔으로 남지요.” (지금 다시 하면 되지 않습니까?) “하하하. 이제는 몸이….”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최불암#바람불어 별이 흔들릴 때#수사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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