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D/Topic]봄날은 간다… 단양 풍경

  • 동아닷컴
  • 입력 2016년 8월 19일 10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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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철의 종횡무진 시간기행(16)

충북 단양(丹陽)의 붉은 노을 풍경을 화폭에 옮기는 B그룹 창업주 J회장의 재빠른 붓놀림은 전문화가 솜씨 같다. J회장과 그를 지켜보는 부초미술관 O관장은 남들 눈에는 다정한 부녀(父女)처럼 보인다.
“붓을 몇 번 놀리니 캔버스가 금세 벌겋게 타오르는 광경으로 바뀌었습니다. 정식으로 화가 데뷔를 하셔야겠습니다.”
“소싯적에 극장 간판쟁이로 밥 벌어 묵었으니께 푸로(프로) 하가(화가)로 이미 데부(데뷔)했소.”
“미술사에 이름을 남기는 대(大)화가로 활약하셔야….”
“나는 그저 풍겡(풍경)을 그리거나 나무(남의) 그림 베끼는 재주나 있을 뿐이오. 진정한 여술가(예술가)는 새로운 겡지(경지)를 창조해야지. 나도 내 여술 재능에 대해서는 분수를 아는 기라.”
“…….”

“단양… 붉을 단, 벹(볕) 양… 지명 때미네( 때문에) 그란지(그런지) 해가 더 뻘겋게 보이네!”
“맞습니다! 유난히 짙은 이곳 녹음(綠陰)과 붉은 태양이 보색(補色) 관계여서 그런가 봅니다.”
J회장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 몇 걸음 걷자 O관장이 J회장의 팔을 잡고 부축한다.
“이렇게 갱치(경치) 좋은 데 있응께 내가 신선이 된 기분이네!”
“단양이란 지명은 ‘연단조양(鍊丹調陽)’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연단’은 신선들이 먹는 환약(丸藥)이고, ‘조양’은 빛을 골고루 따스하게 비춘다는 뜻입니다. 단양은 ‘신선이 다스리는 낙원 같은 마을’인 셈이지요. 그러니 회장님께서는 당연히 신선이십니다.”
“해몽(解夢)도 좋네! 허허허!”

10분쯤 걸었을까. 이들은 몸을 돌려 다시 미술관 쪽으로 걸어온다.
“미술관이 여느 평범한 별장처럼 보이네요.”
“겉보기로는 그렇지요? 건축 허가를 받을 때는 쪼맨한(조그마한) 벨장(별장) 하나 짓는다고 했소만….”
“거대한 지하 전시관과 수장고는 허가 받지 않았습니까?”
“일일이 허가 받을 꺼 없소. 비밀 미술관이어서 간판도 안 달았소. 항공 찰영(촬영)해도 울창한 숲 때미네 지상 전시간(전시관) 건물이 나타나지도 않소.”

실제로 인터넷 검색 포털에 들어가 이 부근을 지도로 확대해보아도 수풀만 보인다. 작은 별장 옥상이 희미하게 나타날 뿐이다.
“나중에 적발되면 낭패당하지 않겠습니까?”
“똥도야지(돼지) 겉은(같은) 건력자(권력자)놈들 썩은 잇똥 내미(냄새) 안 풍기는 치에법껀(치외법권) 지역을 내 맘대로 만들고 싶었소. 저기가 그런 곳이오.”
“그러다가 법에 걸리면 어떡하실려구요?”
“헌법에 보장된 저항껀(저항권)을 행사하는 중이오.”
“저항권이라… 회장님, 무섭지 않으신지요?”
“내 나이에 무서울 게 뭐 있겄소? 할배 테러리스트로 나서고 싶은데….”
“테러리스트라면 누구를 응징하시려고?”
“똥도야지 놈들….”

J회장이 냉소를 짓는 동안 해는 서쪽으로 넘어가 사위(四圍)엔 땅거미가 깔렸다. O관장은 이젤과 캔버스를 들고 미술관 쪽으로 걸어가며 J회장에게 저녁 일정을 보고했다.
“며칠 전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저희에게 귀중한 문화재를 맡긴 분들이 오늘 저녁에 방문하십니다. 두 분은 이탈리아에서 오십니다.”
“쿠레오파트라(클레오파트라) 왕간(왕관)하고 시자(시저) 죽인 보검 맡긴 분?”
“예. 마르티노 박사님과 줄리아나 양입니다. S대 의과대학 K교수도 동행하십니다.”

이윽고 방문객들이 도착했다. 보안을 이유로 이들은 서울에서 단양까지 눈이 가려진 채 미술관측에서 제공한 승용차를 타고 왔다. K교수는 투덜거렸지만 마르티노 박사는 철저한 보안책에 오히려 안도했다.
“먼 길 오신다꼬 수고 많았십니더. 어서 오이소!”
J회장의 인사말을 O관장이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통역했다.
“저희 문화재를 안전하게 보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디에 수장했는지 보고 싶군요.”

O관장이 마르티노 박사 일행을 수장고까지 안내했다. 2중, 3중의 개폐 보안장치를 단 출입문을 통과하면 이보다 더 두터운 문이 또 나오고…. 미로를 헤맨 끝에 지성소(至聖所) 같은 공간에 보관된 클레오파트라의 왕관과 브루투스의 검을 발견한 마르티노와 줄리아나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제의(祭儀)를 올리듯 중얼중얼 기도문을 길게 읊었다.

K교수가 미간을 잔뜩 찌푸려 경건한 표정을 짓는 마르티노에게 슬며시 물었다.
“문화재가 귀중하기는 하지만 우상처럼 숭배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마르티노는 그제야 미간을 펴고 활짝 웃으며 대답한다.
“우상처럼…이 아니라 우상으로 숭배합니다.”
“지금이 고대나 중세도 아닌데요.”
“이 왕관은 지혜의 상징입니다. 클레오파트라 여왕은 난세(亂世)에 치밀한 외교술과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이집트를 부흥시킨 영웅 아닙니까? 그래서 이 왕관을 쓰면 머리가 맑아지고 통찰력이 생긴다고 해요. 브루투스의 칼은 힘과 용기를 준답니다. 실제로 제가 20여 년 전에 이 왕관을 잠시 쓰고 머리가 맑아져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했답니다.”
줄리아나도 맞장구쳤다.
“브루투스의 칼을 마피아가 노리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저도 잡념, 불안으로 시달릴 때면 이 칼을 잡고 용기를 회복한답니다.”
K교수는 마르티노 박사가 정규 대학의 교수가 되지 못하고 재야 학자로 활동하는 원인을 파악했다. 이런 신비주의를 주장하면 정통파 학자의 눈에는 이단(異端)으로 비치지 않겠는가.

다이닝 룸으로 자리를 옮겨 저녁식사를 했다. 메뉴는 그리 화려하지 않은 갈비찜 한정식, 술은 복분자주.
O관장은 손님들에게 음식에 대해 설명했다.
“보안상 여러 사람을 들락거리게 할 수 없어 소박한 한국식 밥상을 마련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한국 식당을 열어 이탈리아 현지인의 입맛에 맞는 한국 요리를 만들었던 쉐프가 오늘 저녁상을 차렸습니다.”
J회장이 복분자주가 든 와인잔을 들며 건배를 제의했다.
“이 뻘건 피 겉이(같이) 생긴 술매이로(술처럼) 열정적으로 우리 간계(관계)를 맺어보입시더! 건배!”

갈비찜 맛을 본 마르티노는 눈을 껌벅거리며 말한다.
“이렇게 맛있는 요리는 처음 먹어봤습니다.”
줄리아나도 서투른 젓가락질로 숙주나물을 먹어보곤 감탄사를 내뱉었다.
“코레아 샐러드가 이렇게 맛있나요?”
마르티노는 O관장에게 요리를 만든 쉐프를 만나고 싶다고 청했다.
O관장이 머뭇거리자 J회장이 손님 요구대로 하라는 신호인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P씨가 나타나 물결처럼 흐르는 이탈리아어로 인사했다.
“제 요리에 대해 칭찬하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국 음식은 자연 재료의 본질을 최대한 살리는 데 특징이 있습니다.”
K교수가 P씨를 보고 반색했다.
“구면이군요. 일전에 로마행 비행기에서 만났고 로마 식당에서도 뵈었지요?”
“비행기 안에서 경기 걸린 아기를 살린 의사 선생님이시지요?”
“의사라지만 장롱 면허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떻게?”

P씨가 즉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O관장이 대신 설명했다.
“P선생님은 원래 촉망 받는 테너 성악가였습니다. 개인 사정에 의해 노래를 접고 로마에서 한국 식당을 경영하셨지요. 그러다 이탈리아 청춘 남녀가 한국 방송에 출연하는 일을 도우려고 귀국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위해 특별히 저희 미술관에 오셔서 정성스레 요리를 장만해주셨답니다.”

K교수는 그 이탈리아 청춘 남녀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봤다며 반가워했다.
“이탈리아 처녀, 총각이 어쩜 그렇게 한국말을 잘하는지, 깜짝 놀랐답니다. 그 아가씨는 어디선가 낯익은 얼굴이던데요.”
“제 로마 한국식당 종업원이었습니다. 이름은 소피아…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이탈리아 신문에 꽤 자주 기고한답니다. 북한 지도자를 한국어로 인터뷰하겠다며 말을 배웠다고 합니다.”
“청년은?”
“소피아의 남자친구인 무기고(Mughigo)인데 이 친구도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시인 등으로 활동한답니다.“
“이름이 무기고?”
“묘하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들 남녀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제목에 ‘무·소’가 붙었지요.”
K교수와 P씨의 대화를 O관장이 동시통역 방식으로 마리티노와 줄리아나에게 나지막하게 이탈리아어로 전했다.

‘북한 지도자’라는 말을 들은 줄리아나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문을 연다.
“걔? 중학생 때는 얌전했는데….”
P씨가 줄리아나에게 질문했다.
“북한 지도자의 학창 시절을 어떻게 아시나요?”
“스위스 베른중학교 동기생이에요. 저희 아버지가 스위스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셔서 저도 그 학교에 다녔거든요.”
“친한 편이었나요?”
“같은 동아리였어요. 전 세계에 흩어진 동아리 멤버들은 요즘도 인터넷 사이트에서 서로 연락을 주고받아요.”
“북한 지도자에게도 연락이 닿나요?”
“글쎄요. 걔가 요즘 그 사이트를 열어보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암튼 저희끼리는 모든 소통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쓰던 쐐기문자를 암호로 사용한답니다.”
“쐐기문자?”

줄리아나는 A4 용지를 꺼내들더니 그 위에 다음과 같은 글자를 쓴다.

𒀴𒀷𒑄𒀊𒑔𒀈

“모양이 이상하지요? 함무라비 법전은 이 쐐기문자로 작성됐답니다.”
P씨와 K교수, J회장, O관장은 모두 이 신비한 글자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P씨는 줄리아나에게 간청했다.
“북한 지도자에게 연락하여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소피아와의 인터뷰를 성사시켜 주세요!”
이들의 대화를 듣던 J회장도 끼어들었다.
“나도 북한 지도자를 만나고 싶소. 원자폭탄, 수소폭탄 위헵(위협)을 받으며 살아가는 한국 국민을 살리는 방안을 그자와 담판 지으려 하오. 그리고, 헐벗고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을 돕는 방안도 헵이(협의)할까 카는데….”

O관장이 듣기에 J회장이 좀 ‘오버’하는 것 같았다. 민간 차원에서 북한주민을 돕는 운동가들은 있지만 마치 남북 정상회담을 펼칠 것처럼 나서는 민간인이 있었는가?
남북한 관계의 미묘하고 절박한 관계를 잘 모르는 줄리아나는 순진하게도 쉽게 대답했다.
“오늘 밤에라도 암호 문자를 보내볼게요. 걔가 그땐 저를 졸졸 따라다녔는데… 호호호!”

P씨는 뜻밖의 기회를 잡은 듯하여 침을 꼴깍 삼키며 소피아의 인터뷰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을까.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지?
J회장은 이탈리아에서 온 젊은 여성의 말을 반신반의(半信半疑)했다. 그녀가 북한 지도자라고 믿는 중학생 동기생은 혹시 다른 동양인이 아닐까?

“제게 부탁하셨으니 제 간청도 들어주시겠어요?”
복분자주 몇 잔을 마신 줄리아나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P씨에게 향하고 말했다.
“무슨 간청을? 제가 할 수 있다면 들어드려야지요.”
“테너 성악가였다면서요?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술을 마셨으니 한국 노래를 듣고 싶군요.”

P씨는 거절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 ‘한국 노래’라는 단어가 귀에서 맴돌았다.
‘이런 기회를 거절하면 누가 한국 노래를 부르랴?’
무대를 떠난 지 오래 되었지만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언제든 목청을 울려야 하는 것이 ‘노래쟁이’의 숙명이 아닌가?
“좋습니다. 오랜만에 한 곡조 뽑아보겠습니다.”
“이왕이면 평화와 관련된 노래가 좋겠어요.”

P씨는 어릴 때 감명 깊게 들었던 한상억 작시, 최영섭 작곡, 백남옥 메조 소프라노의 명곡 ‘그리운 금강산’이 떠올랐다.

누구의 주제련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 이천 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만민/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

짝, 짝, 짝!
“브라보!”
갈채와 환호가 이어졌다.
모두 그런 반응을 보이는데 유독 J회장만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회장님, 어디 불편하세요?”
O관장이 J회장의 어깨에 손을 살며시 대며 물었다. 어깨가 들썩였다. J회장은 울고 있었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가사, 곡조, 노래 솜씨가 너무 좋아서….”
그렇게 중얼거린 J회장은 고개를 들어 벌게진 눈으로 P씨를 바라보더니 벌떡 일어선다. J회장은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P씨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덥석 잡는다.
“흙수저 음악제, 한 번 하입시다! 꼭 출연해 주이소!”
“흙수저 음악제? 그런 행사도 있습니까?”
“우리가 맹글어(만들어) 봐야지요.”

그날 밤 부초미술관 게스트 룸에서 묵은 줄리아나는 재미 삼아 북한 지도자에게 암호를 보냈다. P씨의 부탁대로 이탈리아 저널리스트를 만나보라는 제의와 함께 중학교 친구들의 근황을 적었다.

𒀆𒀑𒀩𒐫𒐻𒁟𒀛𒀴

미술관 마당의 벤치에 나란히 앉은 P씨와 O관장.
“이런 심산유곡에 대규모 미술관이 소리 소문 없이 지어졌다니 대단한 일이군.”
“저희 J회장님이 아까 흙수저 음악회 이야기하셨잖아요. 그분 자신이 흙수저 출신이어서 그런 행사를 구상하시는 모양이에요.”
“회장이 흙수저 출신을 좋아하는 모양이네?”
“맞아요. 제가 이 미술관 관장으로 발탁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죠.”
“나도 뼛속까지 흙수저이지. 하하하!”

K교수와 마르티노 박사는 미술관 휴게실에 마주 보고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박사님께서 일전에 선물로 주신 루왁 커피, 맛있게 잘 마셨습니다. 몇몇 지인에게 권했더니 향기가 아주 좋다고 극찬하더군요. ‘고양이 똥 커피’라고 실토하니 그들의 표정이 울상으로 바뀌더라고요. 하하하!”
“모르는 게 약이다, 라는 한국 속담이 있다면서요?”
“한국에 대해서도 많이 연구하셨군요. 그건 그렇고… 대부님이 마피아 공격을 받아 별세하셨다니 안타깝네요. 왕관과 보검의 행방에 대해 마피아들이 알고 있는지요?”
“낌새가 이상합니다. 한국으로 빼돌렸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 같습니다. 그러니 여기 미술관의 보안을 더욱 강화해야 합니다.”
“저도 이곳이 어디인지 모릅니다.”

줄리아나는 창문을 열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북두칠성이 어디 있나? 앗, 저기!
북두칠성은 7개가 아니라 자세히 보면 8개! 마지막 꼬리 앞의 별은 이중성으로 망원경으로 보면 2개의 별로 보인다. 맑은 하늘에서 눈이 아주 밝은 사람은 볼 수 있다. 고대 로마에서는 병사의 시력 측정법으로 쓰였다.
줄리아나는 8번째 별을 본 날엔 행운이 찾아온 경험을 몇 번 했다. 혹시나 하고 노트북을 열어봤다. 북한 지도자에게서 암호가 왔다!

𒀭𒁍𒀿𒐯𒐇𒀍𒀃𒁃

J회장은 숙소 테이블에 혼자 앉아 복분자 술을 홀짝홀짝 마셨다. 취기가 오르자 실내가 답답해져 미술관 바깥으로 나왔다. 컴컴한 하늘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이 저마다 빛을 뿜는다.
“내가 코흘리개 때 곡마단 찢어진 천막 틈 사이로 저런 벨(별)들이 보였지.”
J회장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곡예사인 J회장의 어머니가 공중그네를 타다 떨어져 크게 다친 날도 별들이 유난히 찬란한 빛을 뿜었다.
“우리 어무이(어머니), 저 하늘에서 벨이 됐을까?”
J회장은 어머니의 동그란 얼굴을 떠올리며 미술관 주위를 걸었다.

벤치 쪽에서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J회장이 눈을 크게 뜨고 그쪽을 살펴보니 P씨와 O관장이 앉아 있다. 심야에 두 남녀가 앉아 있다니!
J회장은 이들의 데이트를 방해하지 않으려 얼른 몸을 돌렸다. 그러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은 O관장이 벌떡 일어서며 말을 걸었다.
“회장님, 잠이 오지 않으십니까?”
J회장이 엉거주춤 서 있으니 P씨도 일어서서 말문을 연다.
“회장님, 여기 벤치에 앉아 하늘을 좀 보십시오. 유성우(流星雨)가 떨어지는 광경을 볼지 모릅니다.”
“두 사람 데이또하는데 내가 방해하는지 모르겄네!”
“저희는 사제지간입니다. 제가 청년 시절 여고에서 음악을 가르칠 때 제자….”
“그런 인연이 있었소? 두 사람이 함께 있으이 보기가 너무 좋아서….”

O관장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다.
“회장님, 이 선생님은 제 첫사랑이었어요!”
“첫 사랑이라! 보아 하니 두 사람이 모도(모두) 노총각, 노처녀 같은데 첫 사랑 겸 마지막 사랑으로 삼아도 좋겄네요.”
“…….”

세 사람은 나란히 벤치에 앉아 하늘을 쳐다본다.
J회장이 문득 P씨의 손을 꼭 잡고 부탁한다.
“내가 노래 듣는 기(귀)는 없지만 아까 노래 듣기가 너무 좋데요. 저 하늘 벨을 보이께 그 머시더라, 이태리 노래 중에서 ‘벨은 빛나건만’인가 먼가(뭔가) 하는 노래 있지요? 그거 들어보면 좋겄는데, 불러줄 수 있소?”

‘토스카’의 유명한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은 P씨와 O관장이 청년, 소녀 시절에 함께 즐겨 부르던 노래다.
요즘 들어 편안한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니 무대공포증에서 점점 벗어나는 느낌이 든 P씨는 J회장의 청을 받아들였다.

에 루체반 레 스텔레(E lucevan le stele)
에 올레스차바 라 떼라(e oleszava la tera)
스뜨리데아 루시오 델로또(stridea l’uscio dell’oto)
에 운 빠쏘 스피오라바 라 레나(e un passo sfiorava la rena)…

별들은 반짝이고
대지는 향기로운데
저 화원 문을 열고
가벼운 발자국소리 났네…

P씨의 노래를 멀리서 들은 K교수와 마르티노, 줄리아나도 바깥으로 나와 박수를 쳤다.
“브라보!”
그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노랫값을 드리겠어요.”
줄리아나가 P씨에게 다가가 활짝 웃으며 말문을 연다.
“뭘 받으려 부른 노래가 아닙니다.”
“드리고 싶은 기쁜 소식이 있답니다!”
“기쁜 소식?”
“테너님께서 북한 지도자 인터뷰를 주선해보라 하셨잖아요. 방금 응답이 왔어요.”
“예?”
“암호를 풀이하는 중입니다. 저를 기억하더군요.”
“암호로 소통한다… 그것 참, 묘하군요!”

J회장이 거기 모인 전원에게 당부했다.
“오늘 우리끼리 말한 거, 밖에서 발설하모 안 됩니데이! 기간(기관)에서는 국가보안법이니 뭐니 들이대면서 우리를 끌고 갑니데이!”

P씨는 줄리아나에게 간청했다.
“힘드시겠지만 지금 숙소에 돌아가셔서 암호를 모두 해독해 주시겠습니까? 너무도 궁금해서 기다리기 어렵군요.”
“알겠습니다. 대신 제가 돌아오면 노래 하나 더 불러주셔야 해요.”

10분쯤 후 줄리아나가 다시 나타나 해독한 암호를 설명했다.
“직접 인터뷰는 곤란하고 마카오의 지정 장소에서 화상 대담을 하자는군요.”
“언제쯤?”
“구체적인 시간과 만날 장소는 추후 알려준답니다.”
“그런 사무적인 내용만 있었나요?”
“예? 그럼 무슨 사랑 고백 같은 것도 있었을까요? 호호호!”
“당연히 그러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노래를 더 불러주시기로 하셨으니… 이왕이면 오늘 자리를 마련해주신 회장님의 애청곡으로….”

J회장은 애청곡, 애창곡이 뭐냐는 질문을 받고 평소 귀에, 입은 익은 노래 ‘봄날은 간다’를 청했다.
“정통파 테너한테 유행가 부탁하는 기 곌례(결례)인 줄 알지만 울 어무이가 곡마단, 악극단에서 부르던 노래라서….”
“저는 유행가니 클래식이니, 가리지 않습니다. 회장님 애청곡이라면 기꺼이 부르겠습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J회장은 감정이 북받치는지 노래를 들으며 눈시울을 훔쳤다. O관장이 손수건을 꺼내 J회장의 눈 부위를 닦아준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닿자 J회장은 눈물을 그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꺼억꺽 소리를 내며 울먹거린다. O관장이 비쩍 마른 노인의 어깨를 토닥거려주자 J회장은 어엉,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O관장의 품에 안긴다.
“어무이! 어무이예!”
O관장은 아무 말 없이 J회장을 양팔로 감싸 안고 오른손으로 그의 등을 토닥거린다.

고승철 소설가 songcheer@naver.com


#단양#충북#고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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