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영식]남북대화의 ‘조건’

  • 동아일보

김영식 정치부 차장
김영식 정치부 차장
선친(先親)께선 말(馬)을 잘 다루셨다.

직업이 마부나 기수였다는 건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처음 장기를 배울 때 얘기다. 장기짝의 역할을 이해한 뒤 장기판을 마주하고 앉았을 때 선친께선 “뭘로 해줄까”라고 물으시곤 했다. 입문자의 실력을 아시는지라 얼마나 봐줘야 할지 가늠하셨던 셈이다. 그럴 때면 “‘차포마상졸졸졸’로 해주세요. 그게 아니면 안 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면 선친께선 마(馬) 2개를 다 사용하시겠다며 상(象) 또는 졸(卒)을 하나 더 떼어내는 수정 제안을 하셨다. 협상이 타결되면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됐다. 화려하게 장기판을 오가는 선친의 말(馬)은 내겐 너무도 소중했던 차(車)와 포(包)를 줄줄이 장기판 밖으로 쫓아냈다. 게임이 시작되기 전 선친의 장기짝 절반을 무력화시키는 데 골몰했지만 정작 판을 어떻게 끌고 가야 할지 전혀 준비도, 생각도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던 셈이다.

남북관계를 부자지간의 관계나, 남북대화의 조건을 ‘차포마상졸졸졸’ 제거로 대입하려는 건 아니다. 비유가 적확하지도, 적절치도 않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건만 고집한다면 마주 앉을 기회조차 없다는 점에선 마찬가지인 듯하다.

북한이 15일 ‘공화국 성명’을 내고 남북 당국 간 대화와 협상에 나설 가능성을 시사했다. 물론 북한의 제안이나 메시지엔 항상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북한의 성명 자체가 6·15공동선언 15주년에 맞춰 나온 것이고 “북남 사이에 신뢰하고 화해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면”이라는 조건도 달려 있어서 조심스럽기는 하다. 당장 같은 날에도 체제통일 추구 중단, 미국과의 ‘북침 전쟁연습’ 중단 등 기존 요구를 되풀이했다. 올해 초 남북 당국 간 대화 기류가 흘렀지만 대북 전단(삐라) 문제 등이 내포된 북한의 전제조건을 읽어내지 못했다가 북한의 태도 변화로 대화가 무산된 기억부터 떠오르게 한다. 정부가 북한에 “부당한 전제조건을 내세우지 말라”고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렇다고 정부 대응이 여기서 멈추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남북관계가 최악이라던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정부 당국자들은 북한이 내는 성명이나 담화의 문장 안에 애매하게 들어있는 대화의 단초를 찾아내고 이어가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남북 대치상태가 지속돼서인지 이젠 ‘북남(남북) 관계 발전’이라는 제목이 달린 북한 성명을 보면서도 남북대화의 계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듯하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북한 성명에 대해 17일 “진일보했다”고 평가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판을 이끌어 나가려는 의지와 전략이 필요하다.

대화를 위한 대화가 안 되도록 하려면 분명한 정책적 목표와 한계를 설정하고 접근하면 된다. 북한의 전제조건이 없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또 다른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대화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지만, 만나야 북한의 생각도 알고 더 나은 대책과 방향을 마련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지난 연말처럼 통일준비위원회를 내세우는 것은 좋은 선택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성격과 역할이 아직도 불분명해 보인다. 남북, 통일 문제를 다루는 각종 연구와 구상을 한다지만, 연구 자료가 부족해서 지금의 남북관계가 길을 잃은 건 아니다.

장기는 선친과 함께 즐긴 거의 유일한 부지지간의 놀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차포마상’으로, ‘차포’로 게임의 조건은 변했다. 만약 처음부터 장기짝의 절반에 해당하는 ‘차포마상졸졸졸’을 다 떼지 않으면 안 하겠다고 계속 고집했다면…. 아마도 선친과 마주앉아 한참을 보낼 기회도, 추억도 없었을 것이다.

김영식 정치부 차장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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