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의 법과 사람]‘성완종의 올무’에 걸린 풍운아 홍준표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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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논설위원
최영훈 논설위원
1994년 8월 서울지검 강력부 홍준표 검사에게 SBS 김종학 PD와 송지나 작가가 찾아왔다. ‘6공 황태자’라 불리던 박철언 전 의원이 연루된 슬롯머신 사건을 소재로 드라마를 제작해 볼 생각이라고 털어놨다. 홍 검사는 이들의 제의를 두어 차례 거절하다 협조하라는 검찰 간부의 말을 듣고 승낙한다.

그의 이야기는 1995년 김 PD에 의해 SBS 드라마 ‘모래시계’로 만들어져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에겐 ‘모래시계 검사’라는 별명이 붙고 정계에 투신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96년 4월 총선에서 서울 송파갑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그의 정치 역정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 부침이 심했다.

100억 제의 뿌리친 홍 검사

검사로 10년, 정치인으로 20년을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홍준표 경남지사가 어제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에 소환됐다. 22년 전 강력부 검사로 밤을 새우며 슬롯머신 사건 수사를 했던 그곳이다. 그는 1996년에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은 일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 피의자로 포토라인에 선 감회는 그때와 달랐을 것이다.

홍 지사는 검사 때 권력형 비리 수사를 한 뒤에는 어김없이 물을 먹었다.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그의 수사 스타일은 5, 6공 당시의 검찰 수뇌부에겐 골칫거리였다. 서울지검 남부지청 검사 때 5공 비리 수사의 신호탄이었던 노량진수산시장 강탈사건 수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광주지검 강력부로 유배를 갔다. 슬롯머신 사건 수사를 마무리한 뒤에는 국가안전기획부로 옮겨야 했다.

그는 1991년 광주지검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며 조직폭력배와 전쟁하듯 수사를 했다. 그 바람에 ‘조폭의 로비’로 서울지검 강력부로 오게 됐다는 말까지 한다. 검은돈은 결코 받지 않고 여자가 나오는 술집도 가지 않는다는 철칙을 세운 것도 그 무렵이었다. 조폭의 음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2년 뒤 슬롯머신 사건 내사를 할 때 그는 “수사를 하지 않으면 100억 원을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당시 그 말을 전한 고위층에게 “나를 그렇게 비싸게 쳐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한 뒤 수사를 밀어붙였다. 그런 강단과 기개를 지녔던 홍 지사가 1억 원의 불법자금에 덜미를 잡힌 걸까. 불행의 씨앗은 그가 승리한 2011년 당내 경선 때 뿌려졌다.

검사 때의 初心 지켰다면

독불장군으로 세력이 없던 그가 집권당 대표에 오른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당내 권력지형이 요동치는 바람에 기회가 왔던 것이다. 국회의원직에서 낙마해도 지명도가 높은 그에겐 매번 보궐선거의 기회가 주어져 오뚝이처럼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20년 정치인생의 마지막 꿈을 접고 마음을 비워야 할지도 모른다.

‘성완종 리스트’의 8인 중 홍 지사만 돈을 건넨 전달자가 처음부터 적시됐다. 그래서 자신을 희생양이라는 뜻의 ‘팻감’으로 표현한 심정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망자의 올무’는 홍 지사가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그를 옥죌 가능성이 높다. 정치 입문 뒤 그는 “검찰총장보다 센 검사도 해봤고 구치소 갈 일만 당하지 않으면 누릴 만큼 누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벼랑길에 서 있다.

최영훈 논설위원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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