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勝戰 70주년 푸틴-시진핑 정상회담과 ‘신뢰 외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9일 0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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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8일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제2차 세계대전 성과 수호와 ‘신형국제관계’ 구축을 위한 전면적 전략 협력 동반자 관계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최근 미국과 일본의 정상회담으로 미일 군사동맹이 격상된 데 대항해 러시아와 중국도 미국을 공동견제하고 일본에 맞서는 밀월 관계에 들어선 모습이다.

러-중 정상회담은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항의로 미국 영국 등 서방 정상들이 9일 있을 러시아 2차 대전 승전 70주년 군사퍼레이드를 보이콧한 가운데 열렸다. 서방의 제재로 경제 침체에 빠진 러시아는 중국에서 활로를 찾으려 하고, 중국도 미일의 대중(對中) 포위에 맞서기 위해 러시아의 손을 잡으려는 것이다. 외교에서 ‘적의 적’은 친구가 될 수 있다. 러시아는 중국의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 방위용 S-400 지대공 미사일을 중국에 판매하기로 최근 결정했고 다음 주 지중해에서 합동군사훈련을 하는 등 전방위 협력을 이어간다. 냉전시절 공산주의 노선을 놓고 패권다툼을 벌였던 중소(中蘇) 관계와 비교하면 상당한 변화다.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격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러-중 회담이 신뢰를 바탕으로 한 외교라고 하기는 어렵다. 시 주석의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 및 해상 실크로드) 구상은 중앙아시아를 ‘뒷마당’으로 여기는 러시아의 이익과 충돌할 소지가 크다. 시 주석은 러시아 방문 전 카자흐스탄에서 “주권과 영토 보장”을 강조해 러시아에 견제구를 날리고도 푸틴과 손을 잡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제 주한 외교단 리셉션에서 “흔히 국제정치란 냉엄한 현실 위에 있기 때문에 국가 이익만이 행동기준이 되어야 한다지만 국제정치와 외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신뢰”라고 말했다. 평소 지론인 ‘신뢰 외교’를 강조한 것이고 외교사절 앞에서 덕담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외교 실패론’이 나오고 전문가들은 ‘국익을 위한 실용 외교’로 방향 전환을 요구하는 상황이어서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조지프 나이 미 하버드대 석좌교수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 한국 정부의 외교정책은 현명하고 잘 고안된 것이지만, 현실적 접근 없이 신뢰만 추구한다면 실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상대 국가가 신뢰를 보여줘야 한 단계 높은 관계 발전이 가능하다는 대통령의 신뢰 외교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동북아 평화구상에서도 진전이 없는 상태다. 외교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지만 국익은 영원하다. 도덕적 원칙만 강조하다 방향을 잃은 한국 외교가 제자리를 찾으려면 냉철하게 국익과 실리를 챙기는 현실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러-중이 정말 서로 좋아서 밀월을 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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