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영식]특명전권대사의 정신이 필요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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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정치부 차장
김영식 정치부 차장
정보 홍수 시대엔 외교관들의 설 땅이 좁아진다.

과거 특명전권대사라는 타이틀로 해외에 파견된 재외공관 수장들은 국가의 원수를 대신하는 국가대표였다. 특명은 지도자의 뜻을 받는다는 것이고, 전권은 스스로 판단해 결정하고 그 책임도 진다는 의미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아 본국과의 연락이 원활하지 않던 시절 얘기다.

이젠 환경이 달라졌다. 21세기 정보통신혁명을 거친 현 시점에선 언론뿐 아니라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정보가 넘쳐나면서 다양한 플레이어들이 외교 사안을 두고 감 놔라 배 놔라 한다. 이처럼 정보가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시대에선 특명전권대사의 역할은 축소되고 정보가 모이는 외교부 본부의 힘과 목소리가 커지는 법이다.

한 고참급 대사는 이명박 정권 후반기에 주재국 공관으로 파견되기 직전 이런 말을 했다. “지금은 특명전권대사라는 이름만 있다. 전권 행사는커녕 본국의 지시를 일일이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정작 인상적인 대목은 다음의 언급이었다. “대통령도 외교관보다는 고차원의 외교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총체적인 외교의 스펙트럼에서 볼 때 대통령의 생각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2012년 8월 이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왕을 겨냥한 사과 발언으로 한일관계가 악화되던 시점의 얘기다. 외교 전문가들의 의견이 무시됐다는 아쉬움의 표현이었지만 지금도 상황이 크게 바뀐 것 같지는 않다. 그런 흐름 속에서 지난달 미국을 방문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미일 방위협력지침 개정으로 신안보동맹 체제를 구축하자 한국 외교 위기론이 확산되고 있다.

작금의 동북아 국제질서는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는 게 쉽지 않을 정도로 급변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 국제질서를 이끌겠다는 신형대국관계를 앞세워 동아시아 질서의 새로운 판을 짜고 있다.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내세우는 미국의 대응 카드는 일본과의 동맹 강화로 나타났다. 하지만 국제정치의 영역에선 하나의 행동이 대응을 낳고, 새로운 동맹은 이에 대응하는 동맹을 불러온다. 강력한 미일 신안보동맹은 중국과 러시아의 새로운 동맹 또는 공동대응 전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다양한 관계의 이합집산 속에서 어느 일방과의 관계만 중시해선 설 땅을 찾지 못하는 외교의 ‘21세기 춘추전국시대’이다.

동아일보가 보도한 한국 외교 ‘신(新)실용의 길’ 시리즈는 누구도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려운 국제질서의 변화 속에서 한국 외교가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체질 개선을 모색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외교를 걱정하는 여론과 정치권의 목소리가 높아지는데 “문제없다”는 답변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현대외교의 난제를 돌파하기 위해선 특명전권대사의 기본정신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지시나 지침을 기다리는 것으로 내성이 굳어진 외교라면 대통령이 혹시나 잘못된 판단을 하더라도 조정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외교가 어려움에 빠진 주요 이유는 이런 외교 전략가를 키우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젊은 외교관이라면 어학에 능통하고 국제경제나 안보 문제를 잘 알면 된다. 하지만 고위급 외교관이라면 전략가여야 한다. 깊은 성찰과 필요할 때 싸울 수 있는 투지, 책임감이 필요하다. 그래야 외교가 살아난다. 하지만 아무런 투지를 보이지 않는 선배들을 보면서 젊은 후배 외교관들은 과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전략도 없고, 특명전권대사의 책임감도 없다면 본부에서 지시하는 성격의 전문만 쏟아낸다고 안 되던 외교가 갑자기 잘될 리 없다.

김영식 정치부 차장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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