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고미석]마지막 황태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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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등 9개 부문 상을 거머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는 푸이(1906∼1967)의 삶을 다루고 있다. 1908년 두 살배기 황제로 등극한 푸이는 청의 멸망으로 여섯 살에 쯔진청(紫禁城)에 유폐된다. 훗날 만주로 옮겨간 푸이는 1934년 일제가 침략의 발판으로 세운 괴뢰정권 만주국의 꼭두각시 황제에 올랐다가 일본 패망 후 전범 신세가 됐다.

▷1940년 7월 푸이가 일본을 방문할 때 영접을 나간 사람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897∼1970)이었다. 격변하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비운의 황제와 황태자, 몰락한 왕조의 두 후예가 만나는 장면을 일제가 연출한 것이다. 영친왕 이은은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이다. 만 열 살 때 황태자로 책봉됐으나 이토 히로부미의 건의에 따라 그해 12월 일본으로 끌려갔다. 명분은 유학이되 실제로는 볼모였다.

▷영친왕과 영친왕비의 한 많은 생이 묻힌 ‘영원(英園)’,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 경내에 자리한 무덤이 5월 10일부터 일반에 처음 개방된다. 어린 나이에 부모 품을 떠난 영친왕은 일본 왕족 마사코(李方子·1901∼1989)와 정략결혼을 했다. 우리 왕실을 일본 왕실에 편입하려는 일본의 내선일체 정책에 따른 것이다. 일찌감치 영친왕의 세자비로 간택된 민갑완이 있었음에도 일제는 멋대로 파혼 결정을 내렸다.

▷조선 왕조와 대한제국 최후의 한 페이지를 살다 간 영친왕은 일제의 마수로 인해 꼬일 대로 꼬인 삶을 살았다. 일본 패망 이후 왕족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한일 양국에서 국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무국적자로 살기도 했다. 광복 후에도 ‘조선 황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승만 정부의 방침에 따라 고국 땅을 밟을 수 없었다. 1963년 뇌출혈 상태로 귀국했으나 숨을 거둘 때까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비운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굴곡진 삶. 자신이 기억하는 역사와 다른 역사를 이야기하는 아베 신조 총리를 보며 무덤 속에서 마지막 황태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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