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통 뒤지는 배고픈 시민들… 복지 포퓰리즘 부메랑

전승훈특파원 입력 2015-04-15 03:00수정 2015-04-15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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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 8년’ 그리스를 가다]
[‘피폐해진 삶’ 현지 르포]<상>무너진 사회 안전망
무료 급식 긴 줄 동방정교회 부활절인 12일 그리스 아테네 외곽의 한 군부대 막사 앞에서 주민들이 공짜로 나눠 주는 음식을 받아 가고 있다(위쪽 사진). 굶주린 아테네 시민 일부는 쓰레기통을 뒤질 정도(가운데 사진)로 생활고가 심각하다. 건강보험 혜택에서 배제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생겨난 무료 진료소(아래쪽 사진)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다. 아테네=AP 뉴시스·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전승훈 특파원
2010년 그리스 재정위기가 시작된 지 5년.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부터 따지면 8년간 경제위기를 겪고 있지만 그리스 경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2008년에 비해 국민총생산(GDP)이 25%가 줄었고 노동력 인구의 26%(약 150만 명)가 실직 상태다. 청년 실업률은 60%가 넘는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재무장관 협의체 유로그룹의 회의가 열리는 24일은 그리스에 매우 중요한 날이다. 그리스가 제출한 개혁안을 검토해 구제금융 분할금 72억 유로(약 8조4000억 원)를 지급할지 말지 결정하기 때문이다. 현금이 바닥난 그리스로선 한 푼이 아쉽지만 채권국들이 요구하는 추가 긴축 조치는 불가하다며 버티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긴급 구제 자금을 지원받지 못한다면 디폴트(채무불이행) 선언을 하는 방안도 검토 중(13일 파이낸셜타임스)이다. 그리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 위해 아테네를 찾았다.

○ 사회 안전망 붕괴… 시민들 사회연대로 버틴다

“아내가 5일 전에 아기를 낳았습니다. 아기를 먹일 분유가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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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시청 인근 재래시장 뒷골목의 한 건물 3층. ‘자선을 위한 무료진료소(KIFA)’에 그리스인 부부가 다급하게 찾아왔다. 부인은 아직 아랫배가 약간 불러 있을 정도로 산후 회복이 덜 돼 보였다. 진료소에 있던 자원봉사자는 “이곳에는 분유가 없다. 다른 곳에 알아볼 테니 내일 다시 오라”며 돌려보냈다.

경제위기가 장기화되면서 그리스에서는 인구 1100만 명의 3분의 1인 약 310만 명이 건강보험을 잃었다. 실직 뒤 3∼6개월이 지나면 건강보험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병원을 가지 못하는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무료 진료소를 열었다.

이곳의 무료 진료소도 사람들이 집에 있던 약들을 기부하면서 2013년에 문을 열었다. 실제로 진료소 약국에 들어가 보니 상자에 손때가 묻은 약들이 가득했다. 병상과 의자도 은퇴한 의사의 병원에서 통째로 얻어 온 것들이다. 현재 그리스 전국에 있는 70여 곳의 무료진료소에서는 약 750명의 약사와 의사들이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무료 진료소를 찾는 사람들은 대체로 평범한 시민이었다. 오토바이 헬멧을 들고 있던 요로구스 아구메노스 씨(37)는 “3년 동안 일자리를 찾지 못해 계속 집에만 있었더니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며 “7개월 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이곳에서 상담을 받고 매주 약을 받아 가고 있다”고 말했다. 자원봉사 치과의사인 콘스탄티노 바나키오토플로 씨(28)는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하는 것을 꿈꿔 왔는데, 아테네 시내 한복판에서 하게 되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천혜의 기후와 낙천적인 국민성으로 그리스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자살률을 기록해 온 나라다. 그런데 2010년 재정위기 이후 1만2000명 정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자살률이 45%나 급증했다.

사회 안전망에 구멍이 뚫린 것은 병원만이 아니었다. 특히 배고픈 시민들이 쓰레기통을 뒤지며 음식물을 찾는 장면은 그리스인들에게 충격을 던져 주었다. 기자도 아테네 주택가 재래시장에서 한 모녀가 비닐봉지를 가져와 시장바닥에 떨어진 채소 부스러기를 주워 담는 모습을 목격했다. 생선가게 주인은 “생선을 팔고 남은 머리나 꼬리 같은 찌꺼기 부위, 심지어 알이라도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실직과 월급·연금 삭감에 직격탄을 맞은 시민들의 생존 노하우는 ‘물물교환’이었다. 지난해 경영난 끝에 레스토랑 문을 닫은 에반젤리아 트리포나 씨(59)는 요즘도 매일 빵을 굽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 있는 음식을 가져와 빵과 바꿔 가기 때문이다. 그는 “과일이나 냄비에 담긴 달걀수프, 가끔 생선도 가져온다”며 “그 덕분에 배고프지 않고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이달 초 아테네 시내의 한 광장에 ‘모두를 위한 음식(Food for All)’이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1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가스 불을 켜고 수프를 끓이고 마카로니 스파게티를 만들기 시작했다. 기부받은 음식을 조리해서 실업자나 노숙인들과 함께 나눠 먹기 위해서다. 시민단체 ‘소셜 키친’의 콘스탄티노스 폴리크로노풀로스 대표(50)는 “가끔 길거리에서 음식을 먹는다며 경찰에 신고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정작 사람들이 쓰레기통에서 음식을 뒤지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전직 기자인 크리스토스 알레판티스 씨는 ‘서스펜디드 커피’라는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노란색 ‘서스펜디드 커피’라는 로고가 보이는 커피숍에 들어갈 경우 내가 마실 커피 외에 남을 위한 한 잔의 값을 더 계산해 주는 운동이다. 점원은 바 뒤의 칠판에 분필로 기부받은 커피를 표시해 두기 때문에 돈이 없는 사람도 당당히 커피를 주문할 수 있다.

알레판티스 씨는 “실업자들이 수년 동안 아파트 안에만 머물며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며 “그들이 커피숍에서 친구와 이웃을 만나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하도록 이 운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서스펜디드 커피’에 참가하고 있는 카페 여주인 엘레니 야노풀로 씨(43)는 “불쌍한 사람을 돕는 자선이 아니라 ‘신뢰의 위기’에 빠진 그리스에서 함께 고통과 소외를 극복하고자 하는 연대(Solidarity)”라고 말했다.

○ 가난한 서민을 구제 못하는 ‘보편적 복지’


아테네 인근 피레우스 항구 주변의 산기슭 빈민촌에서 스피로스 씨(52)를 만났다. 그의 가족 6명은 한 달에 400유로(약 48만3500원)가량 되는 할머니의 연금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전기요금을 체납해 1년 반 동안이나 전기가 끊긴 채 살아야 했다. 그는 “아이들이 촛불을 켜고 공부하고 한겨울에도 난방 없이 지냈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리스 시민들 중에는 전기가 끊긴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30만 가구가 넘는다. 보통 6개월∼1년 전기료(약 500∼1500유로)를 내지 않으면 전기가 끊긴다. 지난해 크레타 섬에서는 전기가 끊긴 집에서 중풍 환자가 의료기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어 여론이 들썩이기도 했다. 요즘 그리스에서는 국민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세금 납부를 거부하는 불복종 운동도 확산되고 있다.

그리스는 1980년대부터 초중고교부터 대학까지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 유럽 수준의 복지정책을 펼쳐 왔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유럽연합(EU) 회원국 어느 국가보다 더 많은 교육비를 지출한다. 무료인 공공교육의 질이 낮다 보니 사교육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무상의료도 마찬가지다. 더 나은 진료를 받으려면 의사나 간호사에게 별도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리스의 ‘보편적’ 복지 혜택은 빈곤층보다는 부유층이 더 큰 혜택을 보게 됨으로써 빈곤 완화를 위한 효율성 측면에서는 유럽 최하위 수준이다. 아리스티데스 하지스 아테네대 교수는 “그리스에서는 최상위 10% 계층이 최하위 10% 계층보다 더 많은 복지 혜택을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며 “그리스의 ‘보편적 복지’는 정치권력과 공공노조, 부유층 같은 힘센 사람들의 전리품으로 전락해 버렸다”고 지적했다. 그는 “복지가 정작 서민들을 보호하지 못해 아프리카 국가도 아닌데 그리스에서 시민들이 굶주리고, 전기가 끊기는 ‘인도주의적 위기’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아테네=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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