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혁신 ‘골든타임’ 2부]“NO 하는 순간 모든 걸 잃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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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사회에 뿌리박힌 갑을관계 (上) 비뚤어진 인식

《 “노(No)라고 거절하는 순간, 모든 걸 잃을까 두렵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을’들의 직업은 다양했다. 영화관 매니저, 중소기업 사장, 대학원생, 인턴사원, 제약업체 직원, 아파트 경비원 등. 그만큼 갑을관계는 이제 먼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일이 됐다. 병원장 부인 및 자녀들과 놀이동산에 가는 제약업체 직원(‘연가시’), 고객에게 무릎을 꿇는 마트 직원들(‘카트’)은 이제 영화에도 흔히 등장한다. 》

5년 동안 영화관 현장매니저로 일한 김모 씨(27·여)는 일을 그만두고 나서야 고객들의 ‘갑질’과 막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난해 말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를 고교생 아들과 함께 보겠다고 우기던 부모의 막말은 아직도 생생하다. 김 씨가 영화관 입장을 막자 그 부모는 “야 이 ×같은 년아, 이년이 어디서 어른한테 말대꾸야”라고 했다. 김 씨는 20분 동안 ‘○○년’ 소리를 수없이 들으면서도 고객에게 ‘님’자를 붙여야 했다.

○ “대-중소기업 상생은 한 편의 쇼”

“특허심판, 민사소송, 공정거래위원회 제소까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 싸우고 있지만 이미 회사는 망했고 소송비용도 걱정입니다.”

특허 기술로 냉장고 부품을 만들던 배흥진 씨(43)는 지난해 9월 결국 회사 문을 닫았다. 직원 20여 명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의 회사 제품은 범용성이 없는 냉장고 부품이라 원청업체인 A전자와만 거래할 수 있었다. 독점공급계약을 맺었지만 A전자는 돌연 다른 협력업체인 B사에도 일감을 주기 시작했다.

배 씨는 “우연히 B사의 금형을 본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았다”고 말했다. 배 씨 회사의 기술을 그대로 이용해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A전자의 소행이었다.

특허심판원에서의 권리범위 확인 청구소송 끝에 B사 부품은 배 씨 회사의 특허 범위에 들어 있다는 결론이 났다. 하지만 배 씨는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대기업인 A전자가 굴지의 로펌을 선임했어요. 대출받아 겨우 소송비용을 대는데 언제까지 싸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대기업의 중소기업 핵심기술 탈취는 최근 국정감사에서도 화제가 됐다. LG유플러스와 서오텔레콤은 10년 동안 특허 침해, 기술유용 여부를 두고 법정공방 중이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갑의 기술 유용은 증명하기도 어렵고, 소송비용이 커 그냥 포기하는 중소기업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 갑의 개인사도 을이 처리

“내 차가 방전됐는데 시동 좀 걸어줘.”

병원장의 부탁에 제약업체 영업직 김모 씨(34)는 병원장 차의 시동을 켠 채 배터리가 충전될 때까지 2시간이나 멍하니 앉아있어야 했다. 그는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혹시 중간에 자리를 비운 걸 병원장이 알면 싫어할까 봐 참아야 했다”고 말했다.

한 광고업체 10년 차 박모 과장(37)은 인턴직원 이모 씨(28·여)에게 자신의 대학원 논문을 대신 쓰도록 했다. 정규직 전환 평가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던 이 씨는 어쩔 수 없이 대필을 해줬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전모 씨(31·여)는 지난해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다가 황당한 전화를 받았다. 원청업체 직원이었다. 그 직원은 “우리 회사 관계자가 상을 당했다”며 “당장 근처 꽃집으로 가 사진을 찍어 내게 확인을 받은 후, 상가로 화환을 보내라”고 했다. 전 씨는 결국 낯선 여행지에서 화환을 찾아 헤매야 했다.

갑의 횡포는 신체적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 사립 명문대 대학원생 정모 씨(26)는 지난해 여름 군대에서나 볼 법한 장면을 목격했다. 대학원생 1명이 교수 책상에 손을 짚은 채 엎드려 있었고 교수는 그 옆에서 지시봉을 손에 들고 있었다. 정 씨는 “교수가 폭력을 휘둘러도 대학원생의 미래를 쥐고 흔들고 있으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 ‘만인에 대한 만인의 갑질’

평소 110대를 유지하던 경비원 10년 차인 장모 씨(67)의 혈압은 올 8월 말 ‘그 사건’ 이후 140 이상으로 오른 뒤 떨어지질 않고 있다. 그는 자정 무렵 아파트 주차관리를 하다 술 취한 아들뻘 방문객에게 주먹으로 얻어맞았다. 체중 50kg의 왜소한 체격인 그는 맞는 순간 쓰러지면서 바닥에 얼굴을 부딪쳤다. 틀니가 날아가버렸다.

하지만 그를 더 서럽게 한 것은 관리소의 태도였다. 왜 취객을 건드려 아파트에 소란을 일으켰냐는 것이었다. 장 씨는 “주차관리를 안 하면 주민들과 관리소로부터 문책을 당하고, 업무대로 하다 폭력을 당하면 소란을 피웠다고 욕을 먹으니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다.

불특정 다수가 소수의 서비스직에 대해 갑으로 군림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고객의 폭력과 관리자의 침묵 속에 이른바 감정노동자의 직무 스트레스는 극에 달하고 있다. 지난달 서울시내 한 아파트에서 일하던 경비원은 주민의 폭언에 분신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한 백화점 판매직원은 “서비스직 흡연율이 다른 어떤 직종보다 높을 것”이라며 “서비스직은 고객과 기업 모두의 을”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우리 사회의 갑을관계는 전방위로 뻗어 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갑질’이다. 제어받지 않는 갑의 횡포는 수없이 많은 사회적 갈등 비용과 마찰, 창의성 저해 등 부작용을 일으킨다. 실제로 현장에서 만난 을들은 “갑들은 일을 잘하는 것보다 내가 더 납작 엎드리기만 바라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한 대형마트 납품업체 관계자는 “‘더러우면 나도 갑이 돼야지’라는 생각이 들 뿐 현 상황에서 당당히 일할 수 있는 여건은 떠올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현용진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봉건적인 상하 관계에 대한 가치관이 뿌리 깊어 ‘을’도 기회만 되면 순식간에 ‘갑질’을 한다. 대기업이나 법을 집행하는 주체도 개선 의지가 별로 없다”며 “결국 사회 전체가 비싼 수업료를 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수 kimhs@donga.com·김호경 기자
#갑을관계#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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