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천광암]지도에 없는 길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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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산업부장
천광암 산업부장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경제정책의 초점을 내수를 살리고 가계소득을 늘리는 데 맞추면서 최근 ‘소득주도성장론’이 주목을 받고 있다. 기업 투자를 활성화하고 수출을 늘려 고용을 창출하고, 가계를 먹여 살리는 경제운용모델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낯선 용어다. 아직 선진국에서도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이론이다. 최 부총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도에도 없는 길”이다.

최 부총리가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들고 나온 것은 의외다. 무엇보다 소득주도성장론은 보수가 아닌 진보의 어젠다이기 때문이다.

진보진영의 소득주도성장론은 한마디로 임금을 올리고 복지를 확대해 국내 수요를 늘리면 자연스럽게 경제성장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이다. ‘성장이 먼저냐, 분배가 먼저냐’라는 논란의 연장선상에서 보자면 분배우선론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분배라는 용어 대신 소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대립 개념인 성장까지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당의(糖衣)를 입힌 분배우선론이라고 할 수 있다.

내수시장이 빈약하고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에 소득주도성장론이 들어맞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임금을 올리면 내수 소비와 투자를 촉진하는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우리 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을 떨어뜨려 제조업 공동화를 가속화하고 경상수지를 악화시키는 부작용이 더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부에선 가계소득이 기업소득을 쫓아가지 못하는 원인으로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가 직원들에게 월급을 적게 줘서 그렇다는 ‘대기업 원죄론’을 펴지만 말이 안 되는 주장이다. ‘프라이드치킨 버블’로 상징되는 자영업의 영세성과 지나친 비대화가 진짜 원인이다.

일례로 우리나라의 호프집과 통닭집 수는 9만3945개로 10년 전보다 3배나 늘었다. 어떤 동네에서는 두세 집 건너 한 집이 치킨집이다 보니 절반 이상이 개업 후 3년 내에 문을 닫고,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수익을 내는 곳이 부지기수다.

이런 와중에 영세자영업이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비정상적으로 높다. 전체 취업자 중에서 자영업자와 무급가족종사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미국과 일본은 각각 6.8%와 11.9%에 불과한데 한국은 무려 28.2%에 이른다. 반면 질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의료·교육·금융 등 고부가가치형 서비스업은 규제와 집단이기주의의 벽에 가로막혀 질식하기 직전이다.

진보진영에서 말하는 소득주도성장은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는 13억5000만 중국시장을 바로 이웃에 두고 5000만도 안 되는 좁은 내수시장에 ‘올인’하자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물론 경제이론과 실무에 모두 밝은 최 부총리가 이런 주장에 동조할 가능성은 없으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경제주체들은 불확실성을 가장 싫어한다. 경제계와의 올바른 소통을 위해서는 최 부총리가 말하는 소득주도성장은 기업주도성장론을 뒤엎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일부 보완하기 위한 실용주의적 정책조합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고용 없는 성장, 기업소득과 가계소득의 괴리 등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법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큰 틀에서 보면 정부가 12일 제6차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발표한 대책 안에 모두 들어 있다. 정치권은 무능하고, 정부는 이해집단의 눈치를 살피느라 십여 년째 입으로만 떠들고 있어서 문제이지, 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곧게 뻗은 대로(大路)가 눈앞에 있는데, 지도에도 없는 길에서 헤맬 이유가 없다.

더구나 옛 사람은 이렇게 경고한다.

‘눈 덮인 들길을 걸을 때 아무렇게나 걷지 마라. 오늘의 내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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