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대통령의 자식이잖아요”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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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세월호 유족의 들끓는 외침
“지도자는 무한책임”이라는 전통적 인식과 맞물려 있어
국민안전 확보에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더 무서운 역풍 부를 것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그제 경기 안산의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에 조문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한 유족은 “저희 자식이기도 하지만 대통령의 자식이잖아요”라고 소리쳤다. 대통령이 사고를 잘 수습해 주지 못한 데 대한 깊은 원망이 담겨 있었다. 이 한마디에는 국민이 대통령에게 어떤 역할을 바라고 있는지가 그대로 농축되어 있다.

대통령에게도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점을 사람들이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이 그리는 국가지도자의 모델은 시대가 바뀌어도 전통시대의 군주상과 맞닿아 있다. 모든 일을 해내는 지도자, 모든 책임을 떠안고 감내하는 대통령이다. 우리 사회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임금의 자리는 온갖 일이 말미암는 곳이고, 모든 책임이 모이는 곳이며, 온갖 욕심이 나타나는 곳이고, 갖가지 간사함이 속출하는 곳입니다.” 1568년 67세의 퇴계 이황은 16세의 어린 임금 선조에게 바치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이 때문에 임금이 한번 태만하고 방종하면 산이 무너지고 바다에 해일이 일어나는 것 같은 위기가 오고 만다”고 경고하면서 “임금은 도를 이루어 성인(聖人·완벽한 존재)이 되어야 하고 근본을 바로잡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죽음을 앞둔 노(老)학자가 평생 축적한 학문을 바탕으로 ‘제왕의 길’을 제시한 이 책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어떤 임금을 바라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또한 현대 한국인들이 읽더라도 공감을 얻기에 충분하다. 오늘날 대통령의 자리 역시 나랏일에 무한 책임을 느껴야 하는 곳이고, 모든 일이 대통령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엄중한 자세가 필요한 자리다. 국민도 이런 대통령상(像)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대통령의 자식이잖아요”라는 유족의 외침은 다른 한편으로 국민 내부의 변화를 실감하게 한다. 자식을 잃은 비통한 심정에서 나온 돌출 발언이기는 했어도 삼엄한 경호의 벽을 넘어 이런 말이 대통령을 직접 향할 정도로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고위 공무원과 국회의원 등 권력자들이 국민에게 사탕발림을 하면서 여전히 제 잇속을 챙기고 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는 국민이 한번 분노를 터뜨리면 엄청난 역풍이 그들에게 불어 닥치는 현실을 목격 중이다.

박 대통령의 그동안 행보는 이런 국민 정서에 부합하지 못했다. 국가적으로 실망스러운 사태가 벌어졌을 때 대통령으로서 무한 책임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제3자 입장에서 내각을 질책하는 일이 종종 나타났다. 국민은 대통령으로부터 “재발 방지를 위해 어떤 일을 하겠다”는 속 시원한 말을 듣고 싶은데도 아랫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해야 한다”며 지시만 내리는 어법(語法)이 번번이 거부감을 불렀다. 청와대 상공을 유유히 돌아다녔던 북한의 무인기가 발견되어 국가 안보에 경종이 울렸는데도 대통령이 군과 국방부를 질타하는 광경만 국민에게 전달됐다. 국가정보원의 증거조작 사건 때 국정원의 최고 책임자를 재신임한 것도 보편적인 민심과는 거리가 있었다.

세월호 사고 발생 이후 14일째에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국민에게 사과하자 “너무 늦은 사과”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씨랜드 화재 사건 때 바로 다음 날 사과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때 사흘 만에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사과한 것을 상기시킨다. 인터넷에선 “만약 노무현 대통령이었다면 이번 사태에서 박 대통령처럼 했겠느냐”며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은 시기를 따지기 이전에 진심 어린 사과를 더 중요하게 여길 게 분명하다. 대통령으로서 뭔가 머뭇거리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야권이 이번 참사를 정치적 공격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이 역시 유권자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유족들이 원하는 바도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 안전한 나라로 올라서는 일이며, 자신들이 겪은 아픔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교훈으로 남기를 바랄 듯하다. 퇴계는 “배운다는 것은 그 일을 익혀 참으로 실천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400여 년 전의 가르침이지만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상황에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박 대통령에게 주어진 과제는 앞으로 안전 문제의 쇄신과 개혁에 무한한 책임감을 갖는 것이다. 이 과제를 실천에 옮기지 못할 경우 더 무서운 국민의 분노를 부를 수밖에 없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박근혜 대통령#세월호#유족#국민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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