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FTA 협정문 번역 오류 속의 ‘나사 빠진 정부’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4월 4일 03시 00분


한-유럽연합(EU) 자유무혁협정(FTA) 문안의 한글 번역 오류로 정부가 이 협정의 국회 비준동의안을 세 차례나 수정 제출하는 한심한 일이 벌어지게 됐다. 자유선진당 정책위의장인 박선영 의원은 “번역 오류가 협정문 부속서와 도표에서 이미 확인된 160개보다 훨씬 늘어난 200여 곳이나 된다”고 지적했다. 협정문 본문에서도 오류가 추가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한-EU FTA 협정문의 번역 오류 사태는 정부가 올 2월 제출한 비준동의안에 ‘원산지로 인정받기 위한 역외산(域外産) 재료허용 비율’을 잘못 기재하면서 비롯됐다. 완구류와 왁스류의 경우 영문본에는 50%로, 한글본에는 각각 40%와 20%로 다르게 써넣은 것이다. 정부는 번역 오류가 계속 발견되면서 두 차례 국무회의 의결 및 비준동의안 제출 과정을 거쳤다. 외교부 통상교섭본부는 4월 국회에 새로운 비준동의안을 내놓을 계획이지만 비준 과정에서 논란이 예상된다.

FTA 협정문 번역 오류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7년 발효된 한-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FTA와 지난해 발효된 한-인도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CEPA)의 국회 비준동의안에서도 번역 오류와 오탈자가 여러 곳 드러났다. 심지어 ‘협정에 합치하는 방식으로’를 ‘협정에 불합치하는 방식으로’라고 정반대로 번역한 경우까지 있었다. 총수입액의 25%를 ‘총수입액의 10%’로 잘못 표기하기도 했다. 50개 이상의 조항에서 영문본에 있는 ‘any’라는 단어가 한글 번역본에는 누락된 것으로 확인됐다. 쉼표(,) 하나로도 완전히 뜻이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 조약문인 만큼 중대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외교부는 “영문본이 한글본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법 해석에는 문제가 없다”고 밝혔지만 국민이 듣기에 답답하고 화가 나는 변명이다. 그동안 한글본은 대충 작성했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FTA 비준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바로 법률의 효력을 갖게 된다. 오류를 바로잡지 못한다면 상대국과 분쟁의 소지가 생길 수도 있다.

기업이 정관(定款) 하나를 만들 때도 변호사와 국어학자에게 자문해 정밀한 검토를 한다. 이번에는 2500만 원을 들여 대형 로펌에 검증을 의뢰했지만 오류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국가 경제의 미래가 달린 중대한 국제조약 문안을 다루는 외교부의 자세와 역량이 의심스러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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