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노의 음식이야기]<10>숭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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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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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日서 꽃피운 茶문화가 한국에 없는 건…

요즘은 한 집 건너 커피전문점이 생길 정도다. 점심시간이면 식사를 끝낸 사람들이 커피 한잔 마시려고 줄서서 기다리는 풍경도 흔히 볼 수 있다. 커피가 아예 국민음료로 자리 잡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 우리의 국민음료는 숭늉이었다. 한중일 중에서 우리만 유독 차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는데 차가 널리 보급되지 못할 정도로 숭늉을 즐겨 마셨기 때문이다.

지금은 식후에 커피나 차를 마시거나 과일을 먹지만 예전에는 숭늉을 마셔야 식사를 끝낸 것으로 여겼다. 숭늉을 마시지 못하면 속이 더부룩하다며 먹은 음식마저 소화를 시키지 못했다.

한국인이 숭늉을 즐겨 마신 역사는 뿌리가 무척 깊다. 12세기 초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갔던 서긍이 고려도경이라는 책을 남겼는데 여기서 고려인은 숭늉을 갖고 다니면서 마신다며 신기해한다.

“고려 사람이 들고 다니는 물그릇은 위가 뾰족하고 바닥이 평평한데 그릇 속에는 숭늉을 담는다. 나라의 관리나 귀족들은 언제나 시중드는 자를 시켜 숭늉 그릇을 들고 따라다니게 한다.”

이렇게 숭늉을 마셨으니 요즘 사람들이 카페인에 인이 박인 것처럼 옛날 선조들은 숭늉에 중독됐던 모양이다. 조선시대 문헌을 보면 사신으로 중국에 갔던 사람들이 현지에서 숭늉을 마시지 못해 애를 먹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숙종 때 청나라를 다녀온 김창업은 연행일기에서 식사 후 숭늉을 구해 마시고 속이 편해졌다고 기뻐하는 장면을 적었고, 정조 때 서유문이 쓴 무오연행록에도 숭늉을 먹고 간신히 소화를 시켰다는 내용이 있다. 음료수일 뿐만 아니라 소화제 역할도 했던 것이다.

반면에 정조 때 동지사 일행으로 중국을 다녀온 이갑이 연행기사라는 기행문에서 중국의 풍속을 전하는데 “중국 사람들은 먹는 밥이 한두 홉에 지나지 않는데도 혹시 독이 들어 있지 않을까 해서 쌀을 끓인 후에 묵은 물을 버리고 반드시 새 물을 다시 부어 두 번 지은 밥을 먹는다”고 했다.

순조 때 동지사 겸 사은사를 수행해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온 김경선도 연원직지(燕轅直指)에 중국인은 차는 마시지만 숭늉은 마시지 않는다고 적어 놓았다.

“손님을 대접할 때 비록 반찬은 없어도 차는 반드시 권하니 마치 우리나라에서 담배를 권하는 것과 같다. 대체로 차는 마시지 않는 사람이 없고 아무 때나 마시는데 냉수나 숭늉을 마시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숭늉을 마시지 않는 중국인들을 낯설게 느꼈던 것인데 송나라 사신인 서긍은 오히려 밥물을 마시는 고려인을 이상한 눈으로 봤으니 자기가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갖는 편견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숭늉을 한자로 쓰면 숙랭(熟冷)이다. 누룽지를 끓여 식힌 물이라는 뜻이다. 한데 과학적으로 숭늉에는 진짜 소화제 성분이 들어 있다고 한다.

밥을 푼 후 다시 물을 붓고 데운 숭늉에는 전분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포도당과 덱스트린이 생기는데 구수한 맛을 내는 덱스트린이 바로 소화에 도움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숭늉을 마시지 않으면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 불편해했던 것이다.

조상들은 오랜 세월 숭늉을 고집했는데 후손인 우리는 지금 커피에 더 길들여져 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영화 대사처럼 어떻게 입맛이 이렇게 변했는지 궁금하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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