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권재현의 트랜스크리틱]시라노의 판타스틱한 간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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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28일 17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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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소셜 네트워크가 인기라죠. 소셜 네트워크란 게 우리사회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정서적 연결망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운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연에서도 겉보기론 무관한 작품이 고구마줄기처럼 줄줄이 이어져있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시라노 드 베르쥬락'과 28일 서강대 메리홀에서 개막한 연극 '스카펭의 간계' 그리고 11월24일 충무아트홀에서 개막하는 뮤지컬 '판타스틱스'가 그런 작품입니다.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낭만주의 최후의 연극 '시라노 드 베르쥬락'. 외쪽은 시라노 역의 안석환 씨 오른쪽은 크리스티앙 역의 이명호 씨.
사진 제공 명동예술극장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낭만주의 최후의 연극 '시라노 드 베르쥬락'. 외쪽은 시라노 역의 안석환 씨 오른쪽은 크리스티앙 역의 이명호 씨. 사진 제공 명동예술극장

'시라노 드 베르쥬락'은 최근 개봉해 좋은 반응을 얻은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에 모티브를 제공한 연극입니다. 대중적으로는 프랑스 국민배우 제라르 드 파르디유 주연의 영화로 널리 알려진 내용입니다.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이 1897년 발표한 뒤 엄청난 흥행돌풍을 일으키며 일약 '불멸의 40인'으로 알려진 프랑스 학술원 회원 자리까지 안겨준 작품입니다.

유난히 코가 커서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지만 문무를 겸비한 시인검객 시라노(안석환)가 그 주인공입니다. 시라노는 칼을 다루는 솜씨만큼 혀를 놀리는 솜씨가 빼어나 말싸움에서 칼싸움까지 뭐하나 빠질 게 없는 사내 중의 사내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그로테스크한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연애만큼은 꿈도 못 꾸는 숙맥입니다.

사랑하는 록산느(김선경)의 환상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꽃미남 크리스티앙(이명호)을 사랑의 아바타로 조종하던 시라노(안석환)는 임무를 완수한 뒤 깊은 허탈감에 빠진다.
사진 제공 명동예술극장
사랑하는 록산느(김선경)의 환상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꽃미남 크리스티앙(이명호)을 사랑의 아바타로 조종하던 시라노(안석환)는 임무를 완수한 뒤 깊은 허탈감에 빠진다. 사진 제공 명동예술극장

그의 평생의 사랑은 어릴 적부터 소꿉놀이를 함께 했던 사촌여동생 록산느(김선경)입니다. 힘겹게 용기를 내어 록산느에게 사랑을 고백하려 한 순간 사관학교 후배인 크리스티앙(이명호)을 사랑한다는 고백만 듣고 맙니다. 얼결에 크리스티앙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이 꽃미남이란 사실을 알고 절망합니다.

하지만 크리스티앙에게도 문제가 있었으니 좋아하는 여자 앞에만 서면 말도 못하고 글 솜씨도 형편없다는 것. 이를 알게 된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사랑의 말도 읊어주고 연애편지도 대필하며 자신의 뜨거운 연정을 달랩니다. MBC '뜨거운 형제들'에서 사랑의 아바타를 조종하듯 크리스티앙의 껍데기를 쓰고 절절한 연가를 읊어대는 것이지요.

결과는 대성공. 록산느는 꽃미남 외모에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말솜씨 글 솜씨까지 갖춘 크리스티앙에게 홀딱 반합니다. 극적 재미는 그 다음의 윤리적 갈등을 통해 발생합니다. 크리스티앙은 록산느가 사랑하는 게 껍데기뿐인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아바타로 조종하는 시라노가 아닐까 번민하게 됩니다. 크리스티앙은 시라노를 설득해 록산느에게 그 실체를 밝히고 그의 선택을 기다리자고 말합니다.

크리스티앙(이명호)의 갑작스런 죽음에 오열하는 록산느(김선경)와 크리스티앙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영원히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절망하는 시라노(안석환)
사진 제공 명동예술극장
크리스티앙(이명호)의 갑작스런 죽음에 오열하는 록산느(김선경)와 크리스티앙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영원히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절망하는 시라노(안석환) 사진 제공 명동예술극장

아 과연 록산느는 둘 중 누구를 선택할까요. 그 극적 선택은 연기됩니다. 크리스티앙이 갑자기 전사하면서 록산느에게 크리스티앙은 불멸의 사랑으로 영혼에 각인돼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현실 앞에서 시라노는 자신의 의지를 지니고 운명에 대한 사랑을 실천합니다. 크리스티앙에 대한 록산느의 환상이 깨지지 않도록 평생 그 비밀을 간직한 채 록산느의 그림자로 살아가는 길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자 이 낭만적 희비극이 어떻게 '스카펭의 간계'와 연결될까요. 연극의 말미에 프랑스를 대표하는 극작가 몰리에르가 쓴 이 작품이 직접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해 비타협적 자세를 지키다 가난과 고독에 절은 시라노를 만난 친구는 몰리에르가 쓴 '스카펭의 간계'가 시라노가 쓴 희곡의 내용과 대사를 고스란히 베낀 것이라며 분노를 표합니다. 하지만 이미 세상의 영욕에 초탈한 시라노는 그렇게 베낀 장면에 관객들이 죄다 배꼽들을 잡았다는 말을 듣고 "그럼 됐다"며 록산느에게 말합니다.

"내 인생도 프롬프터 같아서 잊혀지는 게 당연해! (록산느에게) 발코니 아래에서 크리스티앙이 말을 걸던 그날 밤 생각나지? 그래! 바로 그게 내 인생이야. 내가 밑에서 캄캄한 어둠 속에 파묻혀 있는 동안, 누군가 다른 이가 위로 올라가 영광의 키스를 얻어내지! 그건 잘 된 거야. 죽음의 문턱에서도 난 인정할거야. 몰리에르는 천재였고, 크리스티앙은 꽃미남이었노라."

죽음을 예감하고 마지막으로 록산느(김선경)을 찾아온 시라노(안석환)는 14년간 비밀로 간직해왔던 진실을 전한다.
사진 제공 명동예술극장
죽음을 예감하고 마지막으로 록산느(김선경)을 찾아온 시라노(안석환)는 14년간 비밀로 간직해왔던 진실을 전한다. 사진 제공 명동예술극장

죽음을 앞둔 시라노의 고백으로 크리스티앙의 죽음으로 미뤄졌던 극적 선택의 순간이 다시 찾아옵니다. 록산느는 죽어가는 시라노를 안고서 "시라노, 전 당신을 사랑해요. 가시면 안 돼요"라며 울먹입니다. 그렇다면 록산느의 최종 선택은 시라노일까요? 아닙니다. 크리스티앙의 죽음 앞에서 외모와 말, 육체와 영혼, 아름다움과 진심의 구분이 무의미해졌듯이 시라노의 죽음 앞에서도 그런 이분법은 무의지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전 오직 한 사람만을 사랑했는데, 잃는 건 두 사람이군요"라는 록산느의 대사에 진실이 담겼습니다. 록산느는 결국 둘 중 하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선택한 셈입니다. 이 무(無)야말로 크리스티앙과 시라노가 합작해서 충족시켜준 록산느 환상의 실체입니다. 모든 환상은 그렇게 무(無)를 먹고 자라고 무(無)로서 종결됩니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시라노가 자신의 비명을 남기듯 "시라노 드 베르쥬락, 그는 모든 것이었으며, 또한 아무것도 아니었다"라고 남기는 대사의 의미를 곱씹을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엔 시라노가 평생 추구해왔던 낭만적 삶과 가치가 실상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깨달음의 엄습이 숨어있습니다. 시라노는 낭만적 사랑의 완성으로 숨을 거둔 게 아니라 그 허구성을 깨닫고 숨을 거뒀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입니다. 이 작품이 흔히 낭만주의 최후의 작품으로 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시라노의 대사야말로 낭만주의 사조의 묘비명으로 제격이기 때문입니다.

달빛 부서지는 고목 아래서 자신이 간직해왔던 사랑의 환상이 함께 부서지는 것을 깨닫고 오열하는 록산느.
사진 제공 명동예술극장
달빛 부서지는 고목 아래서 자신이 간직해왔던 사랑의 환상이 함께 부서지는 것을 깨닫고 오열하는 록산느. 사진 제공 명동예술극장

이 최후의 낭만주의 연극은 17세기에 실존했던 인물(1619~1655)을 토대로 극화한 것입니다. 시라노는 프랑스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몰리에르(1622~1673)와 동시대 인물로 철학 문학 군사 과학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던 르네상스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달세계 여행'과 '태양의 세계여행'이란 공상여행기로 SF소설의 선구자라는 평가까지 받습니다. 그런 그가 쓴 희곡 중에 '우롱당한 현학자'란 작품이 몰리에르의 '스카펭의 간계'(1671)와 유사합니다.

'우롱당한 현학자'는 현학자인 아버지가 아들과 애인을 놓고 쟁탈전을 벌이다가 꾀 많은 하인의 도움을 받은 아들에게 크게 망신을 산다는 코미디입니다. '스카펭의 간계'는 두 아버지에 의해 정략결혼을 해야 할 위기에 처한 아들들이 하인 스카펭의 기지로 위기에서 벗어나 실제 사랑하는 여인들과 결혼에 성공한다는 코미디입니다. 두 작품이 닮은 것은 사실이지만 17세기에는 요즘과 같은 표절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두 작품 모두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설화를 토대로 했고, 당시 상류층들의 허위의식 풍자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쌍둥이라는 점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극중 시라노도 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문턱에서 몰리에르가 천재라는 점을 인정하겠노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작품을 비교해서 보진 못했지만 '스카펭의 간계'가 더 탁월한 작품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오늘날 '우롱당한 현학자'는 거의 공연을 하지 않고 있지만 '스카펭의 간계'는 몰리에르 작품 중에서도 가장 스펙터클한 작품으로 요즘도 각광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네스북에 단일 극장에서 공연된 최장 공연으로 기록된 뮤지컬 '판타스틱스'는 '시라노 드 베르쥬락'과 어떻게 연결될까요. 1960년 발표된 '판타스틱스'의 원작이 바로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처녀작 '로마네스크'(1894년)입니다. 판타스틱스의 내용은 '스카펭의 간계'를 뒤집어 놓은 것과 비슷합니다. 각각 아들과 딸을 둔 아버지가 둘을 결혼시키기 위해 일부러 철천지원수처럼 연기를 펼치는 '음모'를 펼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로마네스크'도 원전성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원수 집안 아들 딸의 비극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피라무스와 티스베'에서부터 기원하기 때문입니다. '피라무스와 티스베'는 셰익스피어 말년의 희극 '한여름 밤의 꿈'에서 극중극으로 등장할 만큼 유명한 이야기였습니다. 또한 젊은 시절 셰익스피어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형이 되기도 했습니다.

에드몽 로스탕은 평소부터 시라노를 매우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7세기 풍자작가의 캐릭터를 끌고 와서 지고지순한 사랑의 영웅으로 재탄생시킨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와 동시대 극작가였던 몰리에르를 능가하는 천재로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조차 다양한 원전을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극작활동을 했기 때문에 '몰리에르는 글도둑'이라고 말할 순 없었겠지요. 그래서 시라노의 입을 빌려 그를 정당화했던 것은 아닐까요? "원작자가 누구든 뭔 소용이냐, 더 잘 써먹은 놈이 임자지"라고. 세 작품을 하나로 엮어서 '시라노의 판타스틱한 간계'란 공연을 만들면 딱 어울릴만한 주제가 아닐까요. ^^

시라노 드 베르쥬락 원작의 '우롱당한 현학자'와 유사한 몰리에르 원작의 희극 '스카펭의 간계'.
사진제공 극단 수레무대
시라노 드 베르쥬락 원작의 '우롱당한 현학자'와 유사한 몰리에르 원작의 희극 '스카펭의 간계'. 사진제공 극단 수레무대

'시라노 드 베르쥬락'
2만~5만 원. 11월14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1644-2003

'스카펭의 간계'
1만2000~2만 원. 11월9일까지 서울 마포구 신수동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 031-358-2515

'판타스틱스'
4만원. 11월24일~내년1월30일 서울 중구 흥인동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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