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정부 경제정책 어떻게 변했나] 李대통령 ‘변화’ 배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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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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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중반기 ‘친기업 → 친서민’ 선회… 비로소 지지도 올라

“이번 위기는 자본주의의 근원적 문제에서 파생된 것이어서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2008년 10월 초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명박 대통령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점을 알리려는 의도였지만 이 대통령의 반응은 강 장관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위기가 곧 기회잖아요. 이 기회를 살려 한국 기업들은 돈을 벌어야 합니다. 기업들이 이 위기를 관리하면서 돈을 벌려면 현찰(달러)이 필요할 것입니다. 한미 통화스와프(원화와 달러 맞교환)를 즉각 추진하세요.”

10월 말 한국은 미국과 통화스와프 협정을 맺고 미국의 ‘달러 우산’ 안에 들어감으로써 한국의 외화 부족 논란이 잠잠해졌다. 정부의 기업 지원책도 상당한 탄력을 받게 됐다.

글로벌 금융위기 국면에서도 이처럼 기업의 수지를 먼저 챙길 정도로 이 대통령은 친기업적이면서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관(觀)을 갖고 있었다. 그는 취임사에서 “기업은 국부의 원천”이라며 기업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그런 이 대통령이 요즘은 친(親)서민 행보에 적극 나서면서 연일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보수진영 일각에서는 “과거 노무현 정권처럼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를 하자는 것이냐”는 비판이 나온다. 이명박 정부의 이런 변화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 747로 집권하자마자 글로벌 금융위기

7% 경제성장, 1인당 국내총생산(GDP) 4만 달러, 7대 경제대국을 의미하는 ‘747’은 이 대통령에게 530만 표의 압도적 차이로 대선 승리를 안긴 훈장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좀처럼 풀기 힘든 족쇄이기도 했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으면서 747 공약의 실현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747은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을 펴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었다. 현 정부의 꿈인 ‘선진일류국가’로 가려면 성장해야 하고, 성장하지 않으면 분배할 것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성장의 주역은 현실적으로 대기업일 수밖에 없다. 이 대통령이 집권 초반기에 ‘친기업’ 행보를 한 것은 그런 점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설명이다.

이 대통령은 2007년 대선에서 당선된 직후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이례적으로 방문해 대기업 총수들에게 “내가 할 말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라 재계의 건의사항을 들으러 왔다”고 말했다. 좌파 정권의 반(反)시장적 반기업적 정책에 한숨 쉬던 기업들은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다”며 환영했다.

이 대통령은 “선진일류국가는 기본을 잘 지킬 때 가능하다. 법과 질서를 지키며 서로 신뢰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나가겠다”(2008년 8월 25일, 한나라당 당원 동지에게 드리는 글)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집권 초반기에는 이른바 ‘보수적 가치’의 실현에 충실했다. 현 정부와 재계의 밀월 관계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도 지속됐다. 그러나 위기의 먹구름이 걷혀 가면서 역설적으로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 정치적 고려가 경제논리 압도

“(대기업) 여러분의 금고에는 100조 원에 이르는 현금성 자산이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안다. 여러분(대기업)이 먼저 금고 문을 열고 투자에 나서 달라.”

지난해 2월 박희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경제단체 간부는 “이 발언을 친기업 정책 변화의 본격적인 신호탄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지난해 상반기 외국 정부와 언론에서는 “한국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가장 모범적으로, 빠르게 극복하고 있다”는 찬사를 쏟아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는 20%대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이 대통령은 취임 후 사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위기도 빨리 극복하고 경제지표도 크게 좋아졌다. 그러나 국내 지지도는 올라가지 않았다. 대통령께서 가끔 ‘좀 야속하고 섭섭하다’고 토로하곤 했다”고 전했다. 대기업 중심의 성장 드라이브가 금융위기 탈출은 앞당겼지만 서민들의 체감경기로는 이어지지 못하고 ‘양극화의 그림자’도 여전하다는 보고와 분석이 잇따랐다.

이에 따라 같은 해 6월 박형준 당시 대통령홍보기획관(전 정무수석비서관)을 중심으로 청와대는 이 대통령의 연설과 발언을 분석해 ‘친서민 중도실용’이란 개념을 이끌어 냈다. 박 전 수석비서관은 “이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너무 오른쪽으로 가는 것도 문제이고 사회경제적으로도 중도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정책이라면 좌파적 정책도 할 수 있고 그것이 실용적이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장 중시의 경제철학인 ‘MB노믹스’에 정치공학적 요소인 정무적 판단이 본격적으로 가미되기 시작한 셈이다.

○ ‘친서민’에서 ‘공정한 사회’로

‘친서민 중도실용노선’이란 개념이 확립되자 이 대통령의 친서민 발언과 행보는 더욱 두드러졌다. 지난해 하반기 들어 이 대통령은 “행정의 중심을 서민생활 향상에 둬 달라”(공무원 격려 메시지), “서민의 삶에 온기가 돌게 할 것”(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축사)이라고 말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친서민’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의 지지율은 50% 안팎으로 급상승했다.

올해 6월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하자 청와대 일각에서는 “아무리 ‘친서민’을 외쳐도 선거에서는 지지 않느냐. 정치적 고려 때문에 (더 성장할 수 있는) 경제적 호기(好機)만 놓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그러나 선거 직후 새로 짜인 청와대 참모진은 임태희 대통령실장, 백용호 정책실장, 정진석 정무수석비서관 등 정무 라인의 강화로 귀결됐다. 이는 친서민 중도실용 노선이 올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정한 사회’란 가치로 확대 재생산된 배경 중 하나라고 여권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경제계의 한 인사는 “여권 핵심 관계자에게 ‘그렇게 친서민만 하다가 집토끼(전통적인 보수 지지층)를 놓치면 어쩌려고 그러냐. 지방선거 패배도 그런 영향 아니냐’고 했더니 ‘집토끼는 야생성(野生性)이 없어 도망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국정 지지도뿐만 아니라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도 친서민 노선이 필요하다는 취지였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최근 몇몇 자리에서 “과거 정부 때는 대기업들이 ‘준조세’라는 것을 (정부에) 많이 내지 않았나.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게 없지 않나. 그러니 나는 대기업에 ‘할 말’을 할 수 있지 않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난해 자신의 전 재산을 예정보다 앞당겨 사회에 환원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는데 기업들은 그런 ‘사회적 책임’에 적극 동참해 주지 않는 것 같다는 아쉬움이 담긴 말이었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청와대 측은 “이 대통령이 친기업에서 친서민으로 변했다는 판단은 그의 진정성을 잘 모르는 데서 오는 오해”라고 반박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부터 이 대통령은 ‘나는 돈 없어서 학교도 못 가고, 몸 아파도 병원에 못 가고,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 없는 서민을 위해 대통령을 하고 싶은 것’이라고 수없이 말해 왔다”고 전했다. 서민 출신으로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그의 정책은 결국 친서민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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