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북스] “기자 출신이 소설 쓰는 이유는?” ‘은빛 까마귀‘ 발표한 고승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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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17일 19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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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자와 기자, 주류와 마이너리티의 대립을 절묘하게 버무린 소설
● "소설은 가공의 진실, 그러나 흥미와 감동 그리고 교양을 모두 좇고 싶다"

《"기자 된 것 후회하지 않으세요?"

"밥벌이라고 생각하면 못할 노릇이지요. 사회가 썩지 않도록 소금역할을 한다고 믿으니 후회하지 않아요. 아마 사주팔자를 비교하면 사술과 기망이 판을 치는 현장을 뛰어다니는 기자, 신앙을 지키려 목숨을 내놓는 순교자, 무망한 독립을 쟁취하려 몸을 던지는 투사는 서로 엇비슷할 거예요. 백호대살, 양인살, 괴강살이 수두룩할 겁니다. 역마살도 당연히 있을 거고요."('은빛까마귀' 中 반윤식과 시현의 대화)》
고승철 작가의 신작소설 ‘은빛 까마귀’
고승철 작가의 신작소설 ‘은빛 까마귀’

국내에는 기자 출신 작가의 숫자가 외국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대중이 기억하는 기자출신 작가라고 해봐야 김훈, 고종석, 김소진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근대화 초기에는 기자와 작가의 구분이 비교적 모호했으나 산업화 이후에는 두 직역의 간극이 크게 벌어진 것이 한국문화계의 특징이다.

기자의 글쓰기와 소설가의 글쓰기는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다는 설명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서구나 일본에서는 세밀한 현장 취재경험을 바탕으로 픽션은 물론이고 논픽션 작가로 성공적으로 변신한 기자들이 많다.

지난 7월말 '은빛 까마귀'를 발표한 고승철(54) 작가는 27년간 언론계를 지켰던 경제 기자 출신이다. 2008년 '고유'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장편 '서재필 광야에 서다'(2008)로 제1회 디지털작가상(팩션 부문)을 받으며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이번에 발표한 작품은 작가의 기자 시절 경험을 최대한 부각시킨 사회고발 소설. 권력의 창출과 유지 과정을 비교적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는 평가다. 작가 역시 취재현장에서 마주쳤던 다양한 본성의 인간 군상을 캐릭터로 승화시켜 독자들이 보다 생생하게 정치현실을 반추할 수 있도록 했다.

작가는 "기자출신이야 말로 이야기에 구체성과 사실성을 불어넣어 보다 세계적인 소설이 나올 수 있는 토양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기자로서의 경험은 내러티브가 강한 작품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됐다"며 시나리오나 희곡을 쓰는 것처럼 한 장면 한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썼다고 설명했다.

■ 기자란 거지부터 대통령까지, 현실적 캐릭터를 심도 깊게 연구하는 직업
경제전문기자 시절 남덕우 전총리와 인터뷰 중인 고승철 작가(동아일보 DB)
경제전문기자 시절 남덕우 전총리와 인터뷰 중인 고승철 작가(동아일보 DB)

- 경제기자 출신 작가라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사실 경제기사처럼 비문학적인 장르도 없다. 기자 초년병 시절부터 한국은행 경제월보를 보며 한마디로 숫자만 보면서 기사를 써왔다. 소설적 글쓰기와는 가장 거리가 먼 장르에서 출발했지만 결국은 기자생활을 마감하면서 '취재원이 사라지면 어떤 글감으로 살아야 하나'를 고민했다. 이제까지 만나온 사람들을 재구성하고 여기에 나의 목소리와 아이디어를 담는 글쓰기로 소설이란 장르가 최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 첫 작품은 치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한 '서재필'이란 캐릭터의 복원과정이었다. 기자적 장기를 발휘한 대목인데….

"아무래도 소설 창작의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팩션(faction)에서 출발해 기초를 닦고 앞으로 보다 다양한 소재로 넓혀가고 싶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늘상 현실에 기초한 글쓰기만을 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소재를 발굴하고 싶은 생각은 있다."

- 원래부터 소설 쓰기에 관심이 많았나?

"일종의 주류적인 소설쓰기 방법에 조금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현재 한국 문단에서는 독백류 소설이 많이 읽히고 있는데 기자입장에서 볼 때에는 작가의 부족한 체험을 관념으로 메운 이야기가 많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지만 사회관계망의 관점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만들어 내는 구조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사회적인 관점을 갖고 소설을 창작하는 것이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가 꼭 해야 하는 글쓰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그 방법이 유리하기 때문에 택한 전략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지만…."

■ 은빛까마귀의 주요 소재는 '프랑스, 신문기자, 그리고 공무원'


대통령 김시몽은 운동권에서 정치 검사로, 그리고 인권변호사를 거쳐 정치인으로 거듭 변신에 성공하며 최고 권좌에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계속된 실정으로 인기가 떨어지자 노벨문학상 수상 프로젝트를 통한 지지율 반전과 개헌을 통한 영구집권 음모를 획책하게 된다. 청와대의 음모를 눈치 챈 신입 신문기자 시현은 끈질긴 취재를 통해 이를 특종 보도한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시현을 돕는 것은 은오산 공동체의 비주류 인물들인데….

소설 '은빛 까마귀'는 권력층의 영구집권 음모에 맞선 마이너리티들의 불굴의 의지를 그린, 박진감 넘치는 남성적 소설이다. 한국 사회 권력층의 이면과 권력의 작동 방식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텍스트다.

- 어째서 '김시몽' 같은 권력자를 캐릭터화할 생각을 했나?

"기자직업의 장점이이란 현실 권력자를 공식적으로 리뷰하는 것 이외에도 그들의 사생활을 깊숙이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보다 더 친밀해지면 현실인간의 내면세계까지 내려갈 수도 있다. 그런데 기사라는 글쓰기 방식으로는 사람의 면모를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소설 창작을 통해 캐릭터로 만들어 내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소설이란 가공의 진실'이란 명제를 확인해 본 셈이 됐다."

- 권력이란 많은 작품에서 반복된 주제인데, 인간이 야심을 갖고 권력을 쫓는 과정 자체를 부정하는 않았다.

"물론이다.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선진시스템으로 진보하기 위해서는 양질의 정치인이 선택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 악질, 부정부패, 사리사욕을 가진 정치인이 선택되면 그것이 바로 후진 정치인 것이다. 현재 상당수 개발도상국들이 이런 딜레마에 빠져 있다. 한국의 정치 역시도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이런 딜레마에서 자유롭지는 못한 실정이다."

- 실제 정치 분야 취재는 오래하지 않았는데….

"사실 기자로서의 이력 전체가 경제부 기자였다. 그러나 경제의 작동 역시 정치와 무관하지 않았고 권력의 작동 시스템에 대해서는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경제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권력은 정치권력이 유일하다. 그러나 반대로 정치권력의 기한은 비교적 짧고 유한한 데 반해 경제 권력은 길게 유지되며 정치에 영향을 끼친다. 사실 이 정도는 기자라면 한번쯤은 다 취재해본 얘기다."
2008년 제1회 디지털작가상(팩션 부문) 수상장인 '서재필 광야에 서다'
2008년 제1회 디지털작가상(팩션 부문) 수상장인 '서재필 광야에 서다'

- 일반 독자 입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권력의 작동 방식일 듯싶다. 학계와 언론계 관계 그리고 재계가 엉켜져 어느 정도 이너서클 형식으로 움직이는 대목이다.

"가상의 질서를 구축해 한국적인 권력 형성의 과정을 그려보려고 노력해봤다. 선거를 의식한 경력관리와 스폰서의 전폭적인 지원, 포퓰리즘적인 정치유세, 그리고 민중의 취약점을 활용해 집권에 성공하는 프로세스를 그려봤다. 많은 독자들이 '과연 그게 누구인가?'를 묻곤 하는데 많은 인물의 특징을 조합해 만든 가공의 인물이라는 사실만 알아줬으면 싶다."

- 소설 속 반 기자를 통해서도 언론의 정도에 대해서 말한 것 같다. 권력이 시스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므로 권력자의 자의적인 부분을 알고 이에 대해 견제해야 한다는 의도로 비쳤다.

"사실 한국적 질서에서 보자면 그런 인치적인 요소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보스정치의 폐해가 남아 있고…. 이런 표현이 기억난다. '정의는 권력을 얻지 못하고, 권력은 정의롭지 못하다' 절대 명제는 아닌데 일부분은 타당성이 있는 지적이다. 결국 언론이 권력을 견제하는 소금 역할을 해야 한다."

■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마이너리티들의 강인함

소설에는 권력자의 얘기뿐만이 아니라 일평생 자신의 직업을 연마해 온 다수의 무명씨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과 인생에 대한 진지한 태도는 화려하게 권력만을 좇아온 이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특히 이들 마이너리티들이 내어 놓는 고상한 철학적 대사들은 권력자들의 일상어휘를 천박하게 보이게 만들 정도다.

- 소설을 쓰면서 목표하는 점은 무엇인가.

"재미와 감동 그리고 교양이다. 이를테면 제 소설을 읽는 분이라면 이야기 속에서 재미와 감동을 느꼈으면 싶고 자연스럽게 역사적 배경이나 철학 같은 교양이라는 선물을 챙겨갔으면 싶었다. 은오산의 역사적 배경을 통해서 한국의 마이너리티의 역사와 그들의 인생에 배어 있는 철학의 향기를 맡기를 원했다."

- 저자가 프랑스 특파원을 했기 때문인지 특히 프랑스 소재가 많아 흥미롭다. 사실 프랑스는 조금 멀게 느껴지는 문화권인데….

"지금은 미국 문화가 압도적이지만 개화 초기에 프랑스에서 받은 영향이 상당하다. 1950~60년대만 해도 젊은이라면 누구나 프랑스 문학과 철학을 얘기할 정도였다. 한국은 미국에서 실용을 배웠고 정신적인 자양분은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암브로시오 신부를 통해 그런 면을 부각하려고 노력했다."

■ "여기자 역으로는 배우 '임수정'을 떠올리며 작업
현실권력의 은밀한 속성을 그려낸 장편소설 '은빛 까마귀'의 작가 고승철
현실권력의 은밀한 속성을 그려낸 장편소설 '은빛 까마귀'의 작가 고승철

- 은오산과 글로벌 빌리지로 등장하는 배경은 대략 어디쯤인가?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머릿속으로는 강원도 원주쯤을 배경삼아 그려냈다. 물론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소설적인 현실감을 위한 배경일 뿐이다."

- 미모의 수습 여기자가 광기어린 대통령과 맞선다는 소재는 조금 상투적이라는 느낌도 있었다.

"아하하. 실제 조금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 대신 소설적 장치가 있다. 조금은 나약했던 기자 지망생이 독사에게 물리는 사건을 통해 체질적인 변화, 즉 강한 추진력을 갖게 됐다는 복선이 바로 그것이다. 독을 품고 권력에 맞선다는 설정이었는데 조금 무리였을까?"

- 드라마나 영화 소재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시종일관 박진감이 넘쳤다.

"실제 몇몇 드라마 제작 관계자들이 극화를 타진해 오기도 했다. 꽤나 실감나는 여기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여기자 역으로 배우 임수정을 설정해 소설을 쓴 것도 사실인데…(웃음) 누가 적합한 캐스팅일 지는 독자여러분께 맡기겠다."

- 소설의 소재는 한국 정치에서, 재미는 언론과의 대결에서, 교양은 프랑스 철학에서 왔다고 결론 내려도 될까?

"(웃음)그럴 수도 있겠다. 저널리즘이라는 것이 권력에 대한 저항 그리고 감시라고 생각해왔다. 비판기능을 되살려야 한다는 얘기를 담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소설적 재미를 먼저 떠올려 줬으면 싶다."

소설 속에서 저자와 가장 닮은 사람은 수습기자 시현을 지도하는 '반윤식'이란 기자다.

그는 작품 속에서 "기자에게는 신을 섬기는 인간의 겸허함과 예술가의 섬세함, 과학자의 두뇌, 혁명가의 열정, 탐험가의 불굴정신, 스포츠맨의 강인한 체력이 요구된다"고 수습기자를 지도한다. 아마도 작가가 기자시절 습관처럼 읊조렸던 대사인 듯했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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