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8·15]<2>정진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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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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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듯 기뻐 뛰쳐나온 나가노 동포 어른들
그들이 아홉살 소년 민족의식을 깨웠다

광복절이라고 하면 재일동포 1세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아무런 연고 없는 타향 일본에서 차별과 편견 아래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재일동포 1세가 자유와 밝고 인간다운 표정을 되찾게 된 계기가 바로 이날이기 때문이다.

광복의 기쁨을 온몸으로 터뜨린 1세의 모습.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생기에 찬 그들의 표정은 그때까지 내 안에 잠자던 재일동포로서의 민족의식을 깨우친 원점이기도 하다. 1세는 대부분 가난하고 배움도 짧았지만 꿋꿋하게 살아나가는 힘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선배의 삶의 자세는 2세인 나로 하여금 재일동포로서 살아가는 길을 택하게 만들었다.

1년 중 가장 더운 한여름에 일본 전국의 동포는 각자가 사는 지역에서 민단이 주최하는 광복절 기념행사에 참여해 당시 광복의 기쁨을 기억하며 자축한다. 동포를 위안하기 위해 본국에서 가수가 오기도 하고 추첨으로 고국 여행을 선물하기도 한다. 남녀노소가 모두 모이는 1년에 한 번 있는 우리 민족의 축제이다.

오늘날의 재일동포 사회를 구축해 온 1세는 해마다 줄어들지만 한일 간의 불행했던 역사와 재일동포의 역사를 풍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광복절의 의의를 차세대에 전해 주는 일이야말로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전쟁 세대인 나에게 광복절의 기억은 일본의 패전과 동포의 환희라는 상반된 현장에서 시작된다. 나는 1937년 3월 나가노(長野) 현 마쓰모토(松本) 에서 태어났다. 나가노는 일본의 알프스로 불리는 산악지방으로 1년의 3분의 1이 눈에 덮이는 대단히 추운 곳이다. 동포들은 당시 나가노 현 내에 5000명 정도가 살았지만 이제는 3000명이 안 된다.

예나 지금이나 동포가 적은 지역이지만 태평양전쟁 말기 이곳에서는 군사시설 등 일제의 중추적 기능을 이전하기 위해 동포의 강제동원이 자행됐다. 깊은 산속에 기지를 만드는 노동에 약 7000명의 동포가 강제 연행됐다. 나가노는 강제 연행의 땅이라는 불행한 인연이 은연중에 나의 민족감정에 얽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일본의 패전으로 조국이 광복을 맞은 당시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창씨개명으로 강제로 주어진 일본 이름으로 일본 학교에 다녔다. 친구도 일본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태평양전쟁이 절정에 치달을 무렵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일본은 어떻게 될지 불안을 안고 살았다. 미군 비행기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우리는 방공호로 몸을 숨겨야 했고 한 자루 양초 불빛 아래 숨을 죽여야 했다. 공부는커녕 미군 폭격기의 공습에 방공호가 무너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걱정해야 하는 하루하루였다.

미군 폭격기 B-29가 마쓰모토 상공에 자주 나타나 공습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5월경부터로 기억된다. 군수산업인 후지중공업을 노린 폭격이었다. 지하공장을 만들어 생산을 했던 그 회사에는 한국에서 연행된 동포가 일하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허름한 판잣집이 있었다.

다행히 나는 노골적으로 조센진(조선인·당시 한국인을 낮춰 부르던 말)이라는 놀림을 받거나 직접적인 괴롭힘을 당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저놈은 조센진’이라는 험담과 멸시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늘 불안했다. 조선이라는 단어와 조선인이라는 존재는 자신 속에서 지워버리고 부정하고 싶은 것이었다. 나를 조선인으로 낳은 부모님마저 용서할 수 없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를 비롯한 재일동포 1세가 세월이 흘러도 결코 잊을 수 없고 지울 수 없는 한민족 수난의 역사를 살아온 것을 뒤늦게 알았을 때는 부정해야 할 대상은 재일동포임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 하에서 한민족의 자유를 빼앗고 민족성을 말살한 일본의 악정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한국어 억양이 섞인 이상한 일본어를 말하는 1세를 비웃었던 철없던 시절도 있었지만 한국에 가서 한국어를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스스로의 비참함을 느꼈을 땐 1세에 대한 미안함과 하늘에 침을 뱉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1세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 일본에서 살았지만 일본 사회는 이들에게 제대로 취업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많은 1세는 살기 위해 일본인이 꺼리는 밑바닥 일을 해야 했다. 돼지를 기르고 밀조주를 만들고 건설현장에서 노무자가 되고 야채 찌꺼기를 모아 시장에서 팔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나의 아버지도 누더기 조각 등 폐품 수거를 하면서 우리 8남매를 길렀다. 1세들은 각박한 삶 속에서도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남기 위해 일을 했다.

그러한 어려운 생활이 이어지던 무렵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돼 전황은 하루아침에 종식 국면으로 변했다. 일본의 패전이 멀지 않았음을 어린아이였던 나도 막연히 느낄 수 있었다. 일왕의 ‘옥음방송’ 직후 주변의 일본인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절망으로 일어서지 못했다. 황국신민으로 억지로 만들어진 재일동포 중에는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충격이 컸던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조선인을 일본인 이상으로 일본인답게 만들어 낸 무서운 세뇌교육의 일단을 잘 보여주는 사실이다.

전쟁이 끝나자 많은 동포가 마쓰모토로 돌아와 우리 집에 속속 모여들었다. 당시 나의 아버지는 다른 동포보다 비교적 경제력이 있었으며 일본어가 완벽한 편이어서 동포사회로부터 상당한 신망을 얻고 있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수백 명의 동포는 마쓰모토 역과 시내 중심가에 나가 광복의 기쁨을 만끽했다. ‘조선 광복 만세’ ‘독립 만세’를 외치며 노면 전철을 막아 멈추게 하기도 했다. 아무리 무서운 일본 경찰도 전승 국민의 돌진을 막을 수가 없었다. 겁을 먹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패전으로 완전히 기운을 잃은 일본인과 광복에 미친 듯 기뻐하는 동포 어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일본인이 아니고 재일본 조선인임을 강하게 의식했다. 그때까지는 자신이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도 잘 모르고 심각히 생각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가슴의 울증이 일거에 사라진 듯 기뻐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나로 하여금 민족의식이 싹트게 한 계기가 됐다.

나라가 광복을 맞으면서 우리의 생활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동포들은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을 결성했다. 식민지시대에 빼앗긴 우리말을 가르치는 강습소도 생겼다. 재일동포의 삶이 새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쁨도 잠시. 광복 5년 후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된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일본인은 패전의 충격도 벌써 사라졌는지 한국과 북한을 보는 눈이 냉정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군인 출신의 교사가 학생 앞에서 “히가시모토(나의 일본 이름)는 북쪽이냐 남쪽이냐”를 따지고 물었다. 갑작스러운 말씨에 동요한 나는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북쪽”이라고 말해버렸다.

오늘날처럼 남쪽과 북쪽의 사상적 단절이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당시는 조련의 영향력이 강했고 민단의 힘은 약했다. 아버지는 조련과 민단 양쪽 모두 교제가 있었다. 북쪽에 대한 알레르기가 없었기에 그 말이 나온 것뿐이다. 그날 이후 나는 ‘저놈은 공산당’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일본 사회에서 사람을 깔보는 말이기도 했다. 나가노 현에 사는 동포들이 공산화된 조련에서 이탈하여 마음을 하나로 합쳐 민단을 결성한 시기는 1948년 11월. 조련에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한 동포에게 민단은 구심점이 됐지만 아직은 역부족이었던 시절이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처음으로 아버지의 손을 잡고 광복절 축하행사장에 참여했던 기억이 있다. 정확히 몇 살 때였는지 떠오르지 않지만 그때 정말 많은 동포가 모여 깜짝 놀랐다. 여기저기서 재회를 기뻐하는 어른들이 악수하며 어깨를 서로 껴안고 아이처럼 신이 나 떠들고 있었다. 광복 직후 마쓰모토 역 주변에서 목격한 감격의 재현이었다.

대학생이 되고 도쿄에 상경한 이후 개인적인 일로 바빠져 점차 광복절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하지만 1996년에 민단 나가노 현 본부 단장이 된 이후 비로소 광복절을 자신의 책임 문제로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다. 1세의 감소와 2세 이하의 민단조직 기피가 두드러지면서 얼마나 많은 동포가 광복절 행사에 모일지 최대 걱정거리가 됐다.

다행히 임기 동안 일본 프로야구에서 3000개가 넘는 안타를 터뜨려 안타제조기라는 위대한 기록을 남긴 재일동포 선수인 장훈 씨나 ‘청하로 가는 길’로 일본의 각종 음악상을 수상한 귀화동포 가수인 아라이 에이이치 씨를 초청하는 노력으로 젊은 세대가 많이 모여 주었다. 또 2006년 9월 민단 중앙본부 단장에 취임한 이후에는 전국적 단위의 민단사업을 추진하는 입장이 됐고 광복절 행사의 재일동포 동원에 더욱 큰 책임을 갖게 됐다.

3·1절, 4·19혁명, 6·25전쟁, 7·4남북공동성명 등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은 그 일이 일어난 날짜와 함께 사람의 기억에 남아 있다. 최근 재일동포 사회에서는 8·15 광복절을 8월 15일에 개최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평일에 개최하면 많은 동포가 참여하기 어렵기 때문에 모이기 쉬운 휴일에 개최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실정이다.

광복 기념일을 축하하려는 취지라면 날짜에 너무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아무래도 나는 ‘광복절=8·15’라는 형식에 집착하고 싶어 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광복절은 우리에게는 광복 기념일이지만 일본인에게는 패전의 날이다. 같은 날이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맑은 날이 되고 일본인에게는 우울한 날이 되는 명암을 재일동포는 앞으로도 계속 일본에서 느낄 것이다.

한때 한일 양국에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사실을 한국인도 일본인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만 끌려 밝은 미래를 함께 구축해 나갈 싹을 자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민족에게 빛이 부활한 날로서 영원히 기억에 남는 날이기는 하지만 미래지향적 견지에서 광복절의 호칭을 바꾸는 것도 이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일본이 한국을 강제병합한 지 100년인 올해 맞이한 광복절이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는 역사적 계기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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