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83>

  • 입력 2009년 9월 17일 13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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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판결 시스템]

"피고 노민선은 'AID 판결 시스템'을 통해 1차 예비판결이 유죄로 나왔습니다. 배심원이 동석한 가운데 2차 최종판결을 위한 첫 공판을 열흘 뒤 열겠습니다."

민선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신의 재판 일정을 들었다. 미소를 겨우 감춘 보안청 특수수사대 수사관들이 귓속말로 무언가를 상의하였다. 연쇄살인 용의자 노민선에 대한 최종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특별시연합 고등법원은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강 마이클 판사를 특별히 주심으로 정했다. 그는 얼음보다 차갑고 강철보다 단단하게 재판을 이끌기로 정평이 난 인물이다. 'AID 판결 시스템'이 노민선의 유죄를 선고하자, 강 판사는 곧바로 2차 재판 일정을 확정지었다. 시일을 끌어 여론을 어지럽힐 까닭이 없었다.

민선은 고등법원에서 추천한 관선 변호인을 여러 차례 거부했다. '단독 변호' 즉 피고인이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이 불법은 아니지만, 복잡한 법률과 이미 구속된 상황이 주는 불리함 때문에, 단독 변호를 고집한 피고는 민선이 처음이었다.

'AID 판결 시스템'은 1970년 중반, 인공지능 분야의 '전문가 시스템'(expert system)이란 개념에서 비롯됐다. 의사가 의학지식을 바탕으로 환자를 진료하고, 판사가 법률을 기반으로 피고를 판결하는 과정을 컴퓨터 알고리즘화 하는 것이 전문가 시스템의 중요한 아이디어였다.

처음부터 전문가 시스템이 각광받은 것은 아니다. 전문가 시스템 개발은 예상보다 훨씬 어려웠다. 컴퓨터 공학자들이 컴퓨터에 법전을 통째로 집어넣고 사건을 법률적으로 검토하는 시스템을 개발했지만, 개별 사안에 따라 어떤 법률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환자 진단매뉴얼을 하드 디스크에 저장해 두고 환자를 문진해 질병을 진단하려고 했지만,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를 택해 처방하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 의사의 두뇌가 필요했다.

21세기 초반까지도 '전문가 시스템'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당시의 저급했던 '전문가 시스템'으로는 까다로운 의사 그룹과 냉정한 판사 그룹을 만족시키기 어려웠다. 인공지능을 사회시스템에 적용하는 프로젝트에 가장 적극적인 일본도 '전문가 시스템'만큼은 유보 조항을 달았다.

전문가 시스템 연구가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한 것은 2021년 덴마크 벤처 회사가 '헬프 닥터(Help doctor)'란 시스템을 개발하면서부터다. 의사의 진료를 돕는 이 시스템은 접근부터 달랐다. 그들은 완벽한 알고리즘에 매달리는 대신, 의사의 행동을 정교하게 관찰했다. 최고의 의사들이 어떻게 진료하는지를 웹캠을 이용해 관찰한 것이다. 그들이 환자에게 어떤 질문을 하고, 환자들의 대답을 토대로 어떻게 진단하는지, CT나 fMRI 영상데이터를 어떻게 해석하여 가능한 질병 수를 줄여나가는지 꼼꼼히 살핀 다음, 그 결과를 컴퓨터에 알고리즘화 했다.

'헬프 닥터'는 경험이 부족한 인턴과 레지던트의 오진율을 줄이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환자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의사가 진료카드를 컴퓨터에 작성하면, '헬프 닥터'가 옆 모니터를 통해 도와주는 방식이다. '헬프 닥터'라는 이름도 한몫을 했다. '전문가 시스템'이 의사나 판사처럼 콧대 높은 인간들에게 저항감을 주었고, 환자나 피고도 컴퓨터의 의사결정에 내 인생을 맡기는 것 자체를 못미더워 했다. 그러나 헬핑 시스템은 좀 더 완벽한 판단을 위해 인공지능의 도움을 얻는다고 강조하여 이런 불만을 잠재웠다.

판사들이 '헬프 젓지'(Help judge) 시스템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십여 년 후다. 지역마다 법률시스템이 통일되지 않아 개발이 늦어졌고, 전산화된 판례들을 모두 집어넣느라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대덕연구단지에 본사를 둔 세 회사가 전혀 다른 방식의 알고리즘을 개발해 '법률 판단 시스템'을 개발했고, 지난 10년간 우수성이 입증되자, 2035년부터 일명 '디지털 판결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이들 회사는 판례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시스템, 법률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시스템, 다른 지역의 판결을 비교해 주는 시스템 등, 세 시스템을 독립적으로 개발했다. 그들의 판결 정확도(기존 사건들에 대한 판사의 판결과 비교해 정량적으로 계산한 비율)는 96%, 그리고 판결 일치율(세 컴퓨터 시스템이 독립적으로 판단해 형량이 석 달 이내로 차이가 난 비율)도 95%가 넘었다.

판결의 객관성이 입증되자, 사법부는 이 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한 특별법을 마련해달라고 의회에 요청했다. 판사의 하루 판결 사건 수가 50건 이하로 떨어지지 않고, 판사마다 형량이 들쭉날쭉하다는 여론이 거세지자, 사법부가 인공지능 판결 시스템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민선이 받을 재판은 최근 개발된 'AID 판결 시스템 3.0'을 따랐다. 검찰에 의해 기소된 민선의 혐의점을 보안청 특수대 수사관이 사건일지로 정교하게 기술해 제출하자, 재판부는 세 인공지능 'AID 판결 시스템 3.0'에 따라 법률적 예비판단을 했다. 그 결과, 노민선이 받을 것으로 예상된 선고형량은 65년이었다.

유죄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없었지만, 정황 증거 상 유죄 가능성이 높고, 유죄 확정시 그 죄질이 심각하여 높은 형량을 피할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왔다. 본격적으로 재판이 시작되고, 검찰과 변호인단의 변론이 진행되면, 이를 바탕으로 'AID 판결 시스템'이 2차 최종 판결을 할 예정이다.

그러나 'AID 판결 시스템'은 법률적 근거와 판례들을 바탕으로 인공지능 시스템이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보완할 시스템이 또한 필요했다. 그래서 살인사건을 포함한 형사소송에서는 12개 특별시에서 선발된 30명으로 구성된 특별시민 배심원단이 'AID 판결 시스템'과는 독립적으로 검찰과 변호인단의 변론만으로 판단을 내린다. 그 공판이 열흘 뒤 454 호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로봇은 과연 증인으로 출석할 수 있을까?

2040년대 내내 사법부에서 논쟁이 끊이질 않았던 주제다. 서울변련에서는 의사표현이 가능하고 기준점 이상의 지적 수준이 된다면 로봇도 충분히 증인으로서 사법부의 법률적 판단과 법적 정의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건 현장에서 용의자를 목격했다면 로봇의 뇌에 저장된 데이터가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봇 뇌 속 데이터는 개인적으로 관리되기 때문에 조작이 쉬우며, 증거 자료로 채택할 수는 있으나, 증인 즉 사건 정황을 판단할 주체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민변의 주장이었다.

두 법률단체의 엇갈린 주장이 오랫동안 평행선을 그리다가, 2045년 '로봇의 증언 출석에 대한 법률'이 마련됐다. 언어 또는 영상을 통해 의사표현이 가능하고, 지적 수준이 level 5 이상 이며, 사건 현장에서 범인에 대한 증언 또는 증거 제시가 가능한 경우, 로봇도 증인으로 출석할 수 있는 법률이 제정된 것이다.

재판은 방청객을 두고 진행될 수도 있고, 피고나 검찰 또는 증인의 요청에 따라 방청객 없이 진행할 수도 있었다. 3회에 걸친 공판에서 검찰과 변호인단의 피고인 심문, 증인 출석 및 증언, 경찰 조사팀 증언 등을 모두 마친 후 최종 선고가 내려질 것이다.

이제부터 또 다른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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