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헌재]美구단에 유망주 입도선매 당하는 프로야구

  • 입력 2009년 8월 18일 02시 55분


“저놈 저거 물건잉께 앞으로 눈여겨보쇼∼.” 2002년 프로야구 KIA의 관계자는 한 중학생 선수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정말 물건이었다. 고교에 입학해서는 강속구와 빼어난 경기 운영능력으로 고교 야구를 평정했다. 대번 메이저리그의 스카우트 대상이 됐다.

KIA는 그를 메이저리그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수년간 공을 들였다. 부모와 수시로 접촉했고 그의 모교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06년 KIA에 1차 지명을 받은 그는 10억 원의 계약금을 받고 국내에 남았다. 그의 이름은 한기주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8개 구단은 모두 자기 지역 선수를 지키기 위해 이 같은 노력을 해 왔다. 하지만 연고 지명 방식으로 신인을 선발한 지난해까지만 이랬다.

17일 2010년 신인선수 지명 행사가 열린 서울 서초구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올해 처음 전면드래프트가 실시됐지만 분위기는 예년 같지 않았다. 실력 있는 유망주들은 해외로 줄줄이 빠져나가 맥이 풀린 탓이다. 구단들이 지명하려 했던 나경민(덕수고·시카고 컵스), 김선기(세광고·시애틀), 신진호(화순고·캔자스시티) 등 7명은 이미 메이저리그 구단과 계약을 끝냈다. 지난해 베이징 올림픽과 올해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 야구의 저력을 확인한 미국 구단들의 국내 유망주 싹쓸이는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하지만 국내 구단들은 ‘우리 선수’가 될지 확실히 모르는 상황이라 공을 들일 수도 없다. 제도 도입 첫해부터 부작용이 더욱 부각되고 있는 셈이다.

구단들의 입장도 엇갈려 해결책을 찾기 힘들다. 지역 내 좋은 선수가 많이 나오는 KIA SK 두산 롯데는 이전 방식으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반면 선수층이 얇은 삼성 한화 LG 히어로즈는 전면드래프트에 찬성이다. 그 사이 유망주들은 헐값에 미국으로 건너가고 있다.

꿈을 안고 미국으로 떠나는 선수들을 폄훼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 수준에서 메이저리거가 될 선수는 거의 없다는 게 스카우트들의 냉정한 평가다. 2000년 120만 달러를 받고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던 권윤민 KIA 스카우트는 “2000년대 초반 100만∼200만 달러를 받고 미국에 간 선수 중 성공한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고 반문했다. 김인식 한화 감독의 말대로 그들은 “메이저리그에 가는 게 아니라 미국에 가는 것”뿐이다. 혹독한 마이너리그의 수련을 거쳐 빅리거가 되는 선수는 수백 명 중 한 명이다.

유망주들의 유출은 모처럼 중흥을 맞고 있는 한국 프로야구에 무시할 수 없는 악재다. 유망주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한국 프로야구를 위해서도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이헌재 스포츠레저부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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