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28>

  • 입력 2009년 7월 2일 13시 42분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이겼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승리다운 승리가 있고 패배만도 못한 승리가 있다는 소리다. 격투기는 쌍방의 겨루기지만 결코 상대를 적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상대가 적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싸워 없앨 일이지만, 상대는 결코 적이 아니기 때문에 경기가 끝나면 서로 포옹이나 악수를 나누고 격려한다. 관객들은 여우같이 이 차이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적의(敵意)' 앞에선 환호를 멈춘다. 그들이 원한 것은 스포츠이지 전쟁이 아니다.

경기가 끝난 후 주섬주섬 일어서는 관객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SAIST 차세대로봇연구센터에서 만든 글라슈트가 승리했음에도 박수나 환호는 없었다. 글라슈트의 분노와 살기가 전염된 탓이다. 범인을 처참하게 두 번 죽이고 끝나는 공포영화를 본 듯했다.

그때까지도 석범은 경기장 밖 대형스크린으로 글라슈트의 4강전을 보면서 서성거렸다. 노윤상 원장과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앵거 클리닉에 전화를 했더니, 벌써 2시간 전에 클리닉을 나섰다고 간호사 최미미가 답했다.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밀려들었다.

정말…… 노원장이 범인일까? 내게 만나러 오겠다고 한 뒤 지금쯤 특별시 경계를 빠져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3류 영화도 이런 식으로 만들진 않겠지만, 때론 현실은 3류 영화보다도 더 유치하고 통속적이지 않은가…… 눈에 빤히 드러나도록 살인을 저지르고, 명명백백하기 때문에 오히려 의심을 거두게 만들었다면?

"어서 들어오세요. 늑장 부리면 또 놓칩니다."

앨리스의 걸걸한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오늘은 꼭 앵거 클리닉에서 치료를 받은 마지막 생존자, 볼테르를 조사해야 한다.

"지하통로는 차단했지?"

"보안청 경호로봇들을 구석구석 세웠습니다. 주최 측에도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지하통로 사용을 금한다는 공문을 보냈고요."

"남 형사! 혹시 노윤상 원장이 올 지도 모르니까 나 대신 나와서 기다려 줄래?"

"노 원장이 오기로 했습니까? 몇 시에 약속을 하셨는데요?"

"약속 시간은 지났어. 연락을 해도 닿지가 않네. 클리닉을 출발했다니까 오긴 올 거야."

"알겠습니다."

석범은 재빨리 대기실로 내려갔다. 또 핑계를 대고 사라지기 전에 볼테르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경호 로봇들이 몰려든 기자들을 제지하면서, 음절이 딱딱 끊어지는 안내 방송을 계속 해댔다.

"4강전에 관한 공식 인터뷰는 글라슈트 팀 사정으로 취소되었습니다. 글라슈트 팀은 어느 기자와도 개별 인터뷰를 진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돌아가십시오."

기자들이 아우성을 쳐댔다.

"배틀원에 참가하는 로봇은 이기든 지든 경기 후 공식 인터뷰에 응하는 것이 규정 아닙니까?"

"이런 무례가 어디 있습니까? 결승에 오르면 답니까?"

"주최 측은 글라슈트 팀을 징계 하시오."

"글라슈트는 각성하라! 각성하라!"

구호까지 등장하자, 경호 로봇들이 열을 맞춰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왔다. 기자들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경호 로봇 가슴에 머리를 들이미는 기자도 있었고 아예 드러누워 밟고 지나가라고 소리치는 기자도 있었다. 경호 로봇은 기자들을 함부로 제압하지 않았다. 이 광경이 미디오스피어를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되고 있음을 미리 숙지한 것이다. 경호 로봇들은 귀머거리처럼 벙어리처럼 기자들을 천천히 밀어내기만 했다. 누워 있는 기자들은 친절하게 일으켜 세웠고, 기자들의 주먹질과 발길질도 웃으며 감수했다.

석범은 경호 로봇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혈관 인증이 끝나자 그 로봇이 몸을 90도로 돌렸고, 그 틈으로 석범은 재빨리 뛰어 들어갔다. 기자 하나가 외쳤다.

"저 사람은 뭔데 통과시켜 주는 거야?"

"혹시 <보노보> 기자 아냐?"

"맞다. <보노보>만 계속 특종을 터뜨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보노보>는 각성하라! 각성하라!"

기자들의 구호 소리를 뒤로 하고 복도를 따라 걸었다. 왼편으로 꺾으니 민선이 마중 나온 사람처럼 서 있었다. 두 사람이 진하게 키스 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축하해!"

석범이 걸음을 멈추고 인사를 건넸다.

"축하인사는 우승 후에 받을래요."

"왜 나와 있는 거야?"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민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극 대사처럼 읊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석범에게 밀물지어 왔다가 썰물지어 갔다.

"날? 왜?"

"보안청에서 출구를 모두 막았더군요. 은 검사님이 하신 일이죠? 한시라도 빨리 글라슈트를 수리해야 합니다. 길을 내주세요."

"최 볼테르 교수를 만나기 전엔 대기실에서 나갈 수 없어."

"정말 최 교수를 의심하는 건가요? 격투 로봇 외엔 아무 데도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보증해요. 혹시 테러라도 당할까 염려하는 거라면 더더욱 걱정 말아요. 결승전까지 최 교수는 글라슈트와 함께 꽁꽁 숨을 테니까."

"민선 씨 판단을 존중해. 하지만 민선 씨가 모르는 일도 많아. 일단 만나서 확인해야겠어."

"결승전까진 팀원 외엔 그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확인을 해주겠습니다. 뭡니까?"

말을 자르고 등장한 이는 놀랍게도 볼테르였다.

비밀연구소로 돌아가서 글라슈트를 재정비할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석범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민선을 쳐다보았다.

"단 둘이 얘기했으면 좋겠는데……."

볼테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민선은 아쉬운 듯 머리를 흔들며 대기실로 들어갔다.

"5분 드리겠습니다."

볼테르가 시간부터 정했다. 석범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미성여자고등학교 동네 한 바퀴'란 사이트를 아십니까?"

"처음 듣습니다."

"축구 만세, 여자싫어, 버터플라이의 공통점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

볼테르는 즉답을 않고 한심한 듯 석범을 노려보았다.

"지금 뭣하는 겁니까? 스무고개라도 넘자고요?"

"앵거 클리닉에 가기 전에 시정희 씨와 변주민 선수 그리고 박말동 씨를 만난 적 없습니까?"

"방문종이 아니라 박말동입니까? 박말동이란 사람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나머지 두 사람과도 앵거 클리닉에 갔던 첫날 함께 그룹치료를 받았을 뿐입니다. 대체 뭘 알고 싶은 겁니까? 속 시원히 먼저 밝히세요. 은 검사님이 그런 질문을 던지는 전후사정을 알아야 답을 드릴 게 아닙니까?"

석범은 볼테르의 청을 무시하고 다시 물었다.

"노윤상 원장과도 그전에는 일면식이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노 원장과 심하게 다퉜다고 들었습니다만……."

최미미로부터 입수한 정보였다. 지금으로선 지푸라기라도 쥐고 흔들어야 한다.

"상담치료를 연장하겠다고 했습니다. 배틀원 준비로 바쁜데도 꼬박꼬박 치료에 응했는데……."

"치료를 연장한 이유가 뭡니까?"

"그건 노 원장에게 직접 들으세요. 난 모릅니다. 이제 5분 거의 다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글라슈트와 함께 잠적하는 곳이 어딥니까? 저만 알고 있겠습니다. 위급한 상황이라도 벌어지면 돕겠습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워낙 돈에 미쳐 도는 세상이니까요. 그럼 이제 지하 통로를 열어주십시오."

볼테르가 목례를 하고 대기실로 향했다. 석범은 입맛만 다시며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볼테르가 대기실 문고리를 쥐는 순간 안에서 민선이 달려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석범에게 1급 살인사건 정보가 떴다. 피살자는 노, 윤, 상 원장이었다.

"민선 씨!"

석범이 민선의 앞을 막아섰다.

"아빠가…… 아빠가……."

그녀는 겨우 세 글자를 반복해서 떨어뜨리며 부들부들 떨었다. 아무리 미운 아버지라고 해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혈육! 그가 질병이나 사고가 아니라 참혹하게 살해당했다는 연락이었다.

"민선 씨! 그쪽엔 기자들이 가득 있어. 이리 지하로 한 칸 더 내려가면 내 차가 있어. 같이 타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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