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02>

  • 입력 2009년 5월 27일 13시 44분


20세기 초, 조셉 콘라드라는 소설가는 갈등을 거칠게 정면으로 돌파하는 이야기를 즐겨 썼다. 암흑을 파헤치고 싶은가. 뚜벅뚜벅 똑바로 걸어가서 암흑의 핵심을 쥘 일이다.

끈적거리는 이 액체는 피가 분명했다.

"당했어. 녀석들이 어깨를…… 쿨럭쿨럭!"

병식이 말을 맺지 못하고 기침을 해댔다. 총상을 입은 상처 부위를 움켜쥐었으니, 병식이 비명을 지를 만도 했다.

"미, 미안합니다. 누가 이런 겁니까?"

병식이 답하기 전에, 스팟, 빛과 어둠이, 스파팟, 두 번 바뀌더니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바닥엔 피가 흥건했고 병식의 왼 어깨와 가슴도 온통 피투성이였다. 앨리스가 자신의 옷을 찢어 피가 흐르는 병식의 어깨를 단단히 묶었다.

"윽!"

병식이 고개를 흔들며 고통을 참아냈다.

"성 선배는?"

"갈림길에서 놓쳤어…… 너무 빨라 따라잡을 수가 없었지…… 무선도 닿지 않아…… 굴이 너무 복잡하게 얽혔고 어쩌면 방해전파까지……."

"방문종 패거립니까?"

"정확하진 않아……폐쇄구역엔 늘 부랑자와 범법자로 우글거리니까…… 영리한 놈들이야…… 총성으로 성 형사와 날 갈라놓은 후 전기를 끊고 급습했어…… 신중한 성 형사가 왜 날 기다리지 않고 먼저 뛰어들었을까……? 도대체 뭘 보았기에…… 쿨럭!"

병식은 기침을 토하고 가래침을 뱉었다. 걸쭉한 피가 섞여 나왔다.

"지 선배! 말을 아끼세요. 이건 처음부터 완전히 계획된 겁니다. 우리가 보안청 형사란 걸 알면서도 총을 쏘고 있습니다. 빨리 성 선배를 찾아야 합니다. 걸을 수 있겠어요?"

"물론! 어깰 살짝 스쳤을 뿐이야…… 애송이 네댓쯤은 상대할 수 있다고. 으윽! ……괜찮아. 부축할 필요 없어. 이 까짓 것!"

병식의 너스레에 앨리스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관통상과 찰과상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병식을 부축해서 일으켰고, 병식은 신음조차 감추며 엉덩이를 뗀 후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탕!

총성이 다시 울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크고 또렷했다. 아주 가까운 거리란 걸 직감한 앨리스와 병식이 달리기 시작했다. 앨리스가 앞장을 서고 병식이 오른손으로 왼 어깨를 누른 채 뒤따랐다.

"쿨럭!"

기침을 쏟으며 병식이 오른 무릎을 꿇었다. 달리던 앨리스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병식이 부들부들 무릎을 떨며 겨우 일어섰다.

"달려, 앨리스 런! 이제부턴 멈추지 마."

앨리스가 턱을 한 번 까닥인 다음 힘껏 뛰었다.

성 선배! 잠시만 기다려요. 내가 꼭 찾아낼게. 잠시만, 죽지 말고, 그래 잠시만!

굴이 심하게 휘었지만 앨리스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쿠쿨럭 따라오는 병식의 기침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하나 둘 그리고 세 개의 천을 걷었지만 창수는 없었다.

네 번째 오른쪽으로 꺾어든 후 앨리스가 갑자기 속도를 뚝 떨어뜨렸다. 달리기를 멈춘 채 아예 천천히 걸었다. 흰 바탕에 사선으로 붉은 빗금이 그어진 천 밑으로 구두가 삐쭉 나와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부랑자라고 하더라도 연이은 총성을 듣고 마음 편히 누워 있을 리 없다. 십중팔구 시체다.

"나, 남형……."

뒤따라온 병식을 향해 앨리스가 왼 주먹을 들었다가 천 아래 구두 쪽을 가리켰다. 병식도 말을 멈추고 벽에 붙었다.

제발, 성 선배, 제발!

천을 집을 때까지 앨리스는 계속 구두의 주인이 창수가 아니기를 빌었다. 천을 집으려는 순간, 병식이 그녀의 팔꿈치를 툭 쳤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병식과 눈을 맞추었다. 병식의 두 눈은 어느새 눈물범벅이었다. 앨리스는 창수의 구두를 구별하기 어려웠지만 단짝인 병식은 벌써 구두 임자를 알아차린 듯했다.

아냐. 같은 구둔 얼마든지 있어.

그녀는 천을 말아 쥐고 뜯어내듯 당겼다. 그리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안 돼!"

병식이 달려와서 창수의 시신을 끌어안았다. 엉성하게 이마와 머리를 덮었던 머리카락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머리뼈들을 끼워 맞출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텅 빈 두개골이 곧 드러났다. 이번에도 역시 뇌가 사라졌다. 연쇄살인마의 칼날이 대뇌수사팀까지 파고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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