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역사와 문화의 이야기꾼

  • 입력 2009년 5월 4일 02시 55분


2일 오후 경북 경주시 인왕동 첨성대(국보 31호). 가족과 함께 신라시대 천문관측대인 이곳에 들러 박순호 문화관광해설사(57)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입구에서 늘 관람객을 기다리던 박 해설사가 흔쾌히 작은 확성기를 메고 나와 “설명 들을 분은 모여라”고 하자 두 가족이 더 모였다. 한 아이가 “첨성대가 생각보다 크다”고 했더니 그는 “이렇게 9m 남짓한 높이에서 별을 관찰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것이다. 요즘 천문대는 모두 높은 산에 있지 않느냐”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첨성대를 세운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는 가로등이나 건물의 불빛 등 잡광(雜光)이 없어 평지에서도 별을 관측할 수 있었습니다. 별의 이상한 움직임을 바로 왕에게 보고해야 하기 때문에 평지에 설치한 것입니다.”

박 해설사의 설명은 구수한 옛 이야기 같았다. 그가 설명을 한 지 10여 분이 지나자 어느새 80여 명이 모였다. 대부분 초등학생과 함께 온 가족이었다. 이들은 박 해설사가 “첨성대는 모두 몇 단이냐” “선덕여왕은 결혼을 세 번 한 걸 아느냐” “신라의 김유신, 백제의 계백, 그러면 고구려는 누구냐?” 등을 물으면 서로 답을 했다. 마치 ‘엄마와 아빠와 함께 듣는 신라 문화사 강의실’에 온 듯했다. ‘학습’ 분위기가 무르익자 박 해설사가 흥을 더했다. 그의 이야기는 사자와 물개를 새긴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30호·경주시 구황동)의 유래, 해룡이 되어 왜구를 물리치겠다며 동해에 잠든 문무대왕의 능(사적 158호·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선덕여왕 말기 비담과 염종의 난을 물리친 김유신과 김춘추의 일화 등으로 이어졌다. ‘수강생 가족’은 점점 늘었고, 해설이 끝난 뒤에도 “첨성대 위에서 어떻게 하늘을 관측했나” “첨성대 위에는 어떻게 올라갈 수 있나” 등을 따로 묻기도 했다. 한 엄마는 아이에게 박 해설사의 이야기를 복습시키며 “첨성대가 지진에도 끄떡없어 일본 고고학자들이 감탄했다”고 말해주기도 했다.

박 해설사는 9년 정도 경력을 갖고 있으며 6주 동안 전문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경주에는 외국어 해설사를 포함해 5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신라 1000년의 역사를 이야기해 주면서 아이들이 우리 문화와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는 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박 해설사와 같은 문화관광(유산)해설사는 10여 년 전 생기기 시작해 현재는 거의 모든 지방자치단체에서 역사와 문화의 이야기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단순한 정보 전달 및 해설자가 아니라 역사 전문 스토리 텔러 같다는 인상을 이날 받았다.

기자는 이날 오전 석굴암석굴(국보 24호)에 갔다가 마침 부처님 오신 날이어서 석굴의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의 뒤까지 둘러볼 행운을 얻었다. 평소에는 유리벽 너머로만 볼 수 있는데 1년에 이날 하루만 석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을 한발 한발 디디니 본존불의 불가사의한 미소를 탄생시킨 신라인들의 마음이 전해져 왔다. 30여 분 줄을 서야 했던 까닭으로 문화유산해설사에게 부탁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게 아쉬웠다.

내일은 어린이날이다. 어딜 가도 줄을 서야 할 테니 이럴 때는 집 인근의 역사 유적지로 가서 문화해설사의 이야기를 듣는 게 여유로울 듯하다. 아이들이 미리 지식을 갖추고 가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우리 문화와 전통에 대해 구수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의 지적 흥미를 일깨울 수 있다.

허엽 문화부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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