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49>

  • 입력 2009년 3월 15일 13시 59분


제10장 또 다른 뇌

보안청 민원실은 항상 붐볐다.

집에서 편안히 민원을 내고 결과를 확인할 수 있지만, 특별시민 중 일부는 직접 서류를 제출하고 민원실 직원과 인사말이라도 섞어야 안심을 했다. 다음 달부터는 민원실 직원을 전원 로봇으로 교체할 예정이었다. 로봇이 민원을 받더라도 민원실이 붐빌까. 사이버 공간에서 아바타의 친절한 안내를 받는 것보다 민원실로 나와서 로봇과 손잡고 말 섞는 것을 즐길까.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들을 묶어 '아날로그 퇴행'이라고 지칭하고 『특별시연합공용어사전』에 수록했다. 편리한 디지털 기기 대신 낡고 불편한 아날로그 기기에서 더 큰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아침 8시, 이른 시각인데도 민원실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민선은 흘끔 민원실을 곁눈질한 후 복도를 가로질러 2층 계단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안내 로봇이 그녀를 인식하기 전에 여자치고는 굵고 씩씩한 음성이 귀에 닿았다. 지각을 면하기 위해 달려온 앨리스였다.

"민원실은…… 헉헉, 여기가 아니라 저 방입니다."

"알고 있어요."

민선이 짧게 답하고 앨리스를 지나치려 했다.

"자, 잠깐! 2층은 아무나 함부로 출입하는 곳이 아닙니다."

"알아요. 특별수사대가 있죠."

다시 민선이 답하고 걸음을 옮겼다. 앨리스가 민선의 앞을 막으면서 빤히 얼굴을 노려보았다.

"왜 그래요?"

민선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물었다.

"우리 혹시 만난 적 있습니까? 그쪽이 낯이 익습니다."

"초면입니다만……."

"이상하다……. 실례지면 성함이……?"

"먼저 밝히는 게 예의 아닌가요?"

민선이 입 꼬리로만 웃으며 버텼다.

"아, 그렇군요. 저는 남앨리스 형삽니다. 특수대 검시 3팀 소속입니다."

앨리스가 성격대로 시원시원하게 답했다.

"남형사님이시군요. 저는 노민선이라고 합니다."

"노민선, 노민선이라……. 아, 기억났다. 노민선! 뇌신경과학자 노민선 씨죠? 글라슈트 팀?"

"절…… 아세요?"

"알다마다요. 지난 번 부엉이 빌딩 테러 생존자시잖아요? 헌데 보안청엔 무슨 일로……?"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군요. 보안청에서 연락이 왔어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가 겸직 연구원으로 있는 특별시립 뇌박물관으로 자문 요청이 온 거지요. 박운호 관장님은 '루시드 드림(자각몽) 특별시연합 워크숍' 참석차 뉴욕특별시로 출장 가셨습니다."

앨리스가 다시 민선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남형사님!"

민선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불쾌한 빛이 역력했다.

"아, 미안합니다. 헌데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겁니까? 함께 추락한 로봇 트레이너 서사라 씨는 처참하게 망가졌습니다. 테러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충격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문제를 일으킬지 모릅니다. 가서 쉬십시오. 자문은 다른 연구원님께 받겠습니다."

"박관장님을 대신해서 왔다고 말씀드렸지만, '비교신경과학'(Comparative Neuroscience)이라고, 사람의 뇌와 동물의 뇌를 생리학적으로 비교 연구하는 학문을 전공한 연구원은 저밖에 없어요. 제 몸은 걱정 마세요. 먼저 땅에 닿은 서사라 트레이너가 충격을 최대한 흡수하면서 저를 보호해 줬답니다. 아직도 목과 무릎이 시큰거리긴 하지만 끄떡없어요."

앨리스가 기억을 더듬었다.

"오늘 방문자 명단엔 노민선 대신 안나라고 나와 있었습니다만……."

"뉴욕특별시에 머물 때 사용하던 이름이에요. 도쿄특별시로 반 년 남짓 봉사활동을 갔을 땐 교쿄로 통했죠."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멀쩡하다니까요."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앨리스도 더 이상 묻지 않고 앞장을 섰다.

특별수사대는 보안청에서도 외롭게 떠도는 섬이다. 누구도, 설령 특별수사대 소속 직원이래도, 특수대 전체 인원과 배치 상황과 사무실 위치를 알지 못했다. 계단을 올라가서 2층 복도 입구에 서면, 방문자의 목적에 따라 부채꼴 모양 주름이 흔들리다가 복도가 열렸다. 얼마나 많은 복도가 어떤 방향으로 뻗어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앨리스는 '검시 3팀'이란 글자가 달처럼 빙빙 도는 사무실 문을 열었다.

"손님 오셨습니다."

개에 관한 자료를 책상 가득 쌓아놓고 읽던 석범은 독서 삼매경에 빠져 움직일 줄을 몰랐다.

"손님 오셨다고요."

그제야 석범이 쌓아둔 책과 책 사이로 얼굴을 디밀었다. 민선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벌떡 일어섰고, 그의 팔꿈치가 책을 쳤다.

"아, 아니 당신은……."

좌우에 쌓아둔 책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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