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정신에 충실하지 않은 민주당은 본색을 드러낸 것뿐이다. 민주당은 상임위 논의 단계에서 앞다리 걸고, 자신들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법사위에서 뒷다리 거는 식으로 발목잡기를 거듭했다. 그 바람에 금산분리 완화를 골자로 한 은행법은 우여곡절 끝에 정무위를 통과하고도 끝내 법사위 문턱을 넘지 못해 본회의에 상정조차 안됐다. 회기를 1시간 남긴 오후 11시경에야 본회의로 회부된 법안도 25개나 된다. 민주당은 본회의장에서 수정법안 제출, 의사진행발언과 반대토론 요청으로 시간을 끄는 지연작전을 폈다. 이종걸 의원은 미디어법 안 6개 중 여야가 처리를 합의한 저작권법안과 디지털방송전환특별법안에 대해 폐회시간을 불과 3분 남겨놓고 반대토론을 요청해 통과를 무산시켰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민주당의 이런 꼼수를 충분히 예상하고 대비했어야 했다. 그렇게 겪고도 민주당이 결정적인 순간에 얼마든지 훼방 놓을 수 있음을 몰랐다면 멍청한 것이고, 알고도 대처를 안 했다면 나사가 풀린 것이다.
사실은 한나라당의 나태와 무기력이 더 큰 문제였다. 은행법을 놓고 정무위와 법사위에서 여야가 티격태격하는 바람에 본회의는 오후 2시에서 5시, 다시 7시로 늦춰졌다. 그나마 오후 7시에 열려고 했지만, 한나라당 출석 의원이 의결정족수에 한참 못 미치는 103명에 불과해 무산되고 결국 오후 9시경에야 본회의 개회가 가능했다. 천금같은 2시간을 한나라당 스스로 까먹은 것이다. 오후 11시경 법사위를 통과하지 못한 은행법 등 일부 쟁점법안의 경우 김형오 국회의장이 직권상정까지 고려했으나 한나라당이 발을 뺐다고 한다.
한나라당은 작년 말부터 지금까지 줄곧 국회의장에게 직권상정을 압박하면서까지 쟁점법안의 조속한 처리를 외쳤다. 그래놓고선 정작 멍석이 깔리자 주춤거린 꼴이다. 이것이 민생을 챙기고 국민을 섬기겠다는 거대 여당의 맨얼굴이다. 책임감도, 위기의식도 찾아보기 어렵다. 오죽했으면 민주당 정세균 대표까지 “한나라당이 아직도 자신들이 여당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여당으로서 책임성이 없다”고 꼬집었겠는가.
한나라당 지도부는 대체 어디서 무얼 했는가. 민주당과의 합의만 믿고 승리감에 도취돼 느긋하게 각자 밥그릇 챙길 궁리나 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이런 사람들을 믿고 경제위기 극복에 보탬이 될 법안 통과를 학수고대한 국민만 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