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29>

  • 입력 2009년 2월 15일 14시 54분


29회

제7장 다시 살인은 시작되고

사체는 꽃으로 가득한 들판에서 발견되었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2월에도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 꽃이 동시에 만발했다.

특별시 안전지대에서 3킬로미터 벗어난 곳이다. 24시간 내내 특별시 경계에서 반경 10킬로미터를 감시하는 위성에 ‘사체 추정 생명체’가 포착된 것이다. 여기서‘사체 추정 생명체’란 5시간 이상 움직임이 없는 생명체를 가리킨다. 생명체의 실루엣과 크기를 종합한 결과 인간일 가능성이 95퍼센트가 넘었다. GPS 근접거리 촬영으로도 얼굴 형상이 또렷하게 잡히지 않았다.

대뇌수사팀은 언제나 가장 빨리 살인사건 현장에 닿았다. 스티머스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이 팀의 공식 명칭은 강력 사건만 전담하는 ‘검시 3팀’이었다. 특별수사대의 다른 팀원들도 그들을 조금 유별난 검시 팀으로만 알았다.

“지랄 같네요, 정말!”

앨리스는 오늘따라 더욱 말이 거칠었다. 휴일에 살인사건 현장으로 출두했기 때문은 아니다. 새벽 서너 시에 비상이 걸려도 쏜살같이 달려오던 그녀다. 껴입은 가죽옷에 특수안경과 입 코 귀를 한꺼번에 덮은 마스크가 문제였다. 9년 전 <안전지대 제외 지역의 사체에 관한 법>이 통과했다. 이 법에 따르면, 사체는 발견 즉시 소각을 원칙으로 하며, 특수 목적으로 사체에 접근하여 접촉할 때는 위생장비 착용이 의무사항이다. 특별시 안전지대 바깥의 사체에서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검출된 직후의 일이다.

“시작하지.”

석범이 왼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그도 앨리스처럼 흰 위생복에 검은 마스크와 안경을 썼다. 동승한 대뇌수사팀 형사 지병식과 성창수는 사체에서 30미터 거리를 두고 남북으로 나누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은석범-남앨리스 콤비는 시신을 덮은 꽃무더기부터 제거하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한 움큼씩 떠서 옮기고 싶겠지만, 두 사람은 능숙한 솜씨로 꽃잎 한 장 한 장을 따로 투명 팩에 넣었다. 범행 현장의 사소한 유류품 하나가 범인 체포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 정말…… 휴우우! 참!”

앨리스는 자꾸 어깨를 들썩이면서 고개를 들고 한숨을 토했다. 땀이 눈썹을 타고 흘러 눈동자까지 스며든 탓이다. 석범은 단순 노동용 로봇처럼 묵묵히 핀셋으로 꽃잎을 집어 팩에 넣고 잠근 후 손가방에 넣고 다시 핀셋으로 꽃잎 집기를 반복했다. 방금 비행 카페에서 선을 보다가 달려왔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꽃잎 한 장 한 장에만 집중했다.

168…… 169…….

170장을 떼어냈을 때, 비로소 배꼽 위에 곱게 포갠 사체의 손등이 드러났다.

“이런…… 죽일 놈!”

앨리스가 움찔 어깨를 떨며 다시 욕을 뱉었다. 벌거숭이 사체의 손가락 열 개가 모두 잘려나간 것이다.

사체는 구타당한 흔적이 명백했다.

허벅지와 옆구리 그리고 등과 목덜미에도 피멍이 들었다. 사망자의 신원 확인을 도울 부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절단되고 코와 귀가 잘리고 눈까지 뽑혀 홍채도 없었다. 칩이나 기계장치를 부착하지 않은 100퍼센트 천연몸이니 일련번호도 부여되지 않았다.

석범의 시선이 사체의 이마를 덮은 털모자로 향했다.

나체와 털모자! 어울리지 않았다.

“잠깐만요.”

앨리스가 폭발물 및 바이러스 탐지용 펜을 뽑아 털모자 위를 재빨리 훑었다. 반경 10미터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이미 한 차례 탐지를 마쳤다.

“뭘까요?”

앨리스가 펜을 허리에 꽂은 후 물었다.

“일단 세 걸음만 물러서 있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폭발물 및 바이러스는 음성 반응입니다.”

앨리스가 버텼다. 석범의 목소리가 커졌다.

“변종 바이러스가 하루에도 수십 종씩 등록되고 있어. 반경 1미터 안에서 공기 접촉만으로도 전염되는 노리톤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를 읽어보라고 열흘 전에 줬을 텐데.”

“검사님! 그러니까 더더욱 제가 하겠습니다.”

“명령이야. 어서 물러나. 시간이 없어.”

사망 후 12시간 안에 두개골을 열고 뇌를 떼어 스티머스에 연결해야 한다. 한계 시간을 넘으면 뇌가 부패하기 때문에 기억 재생 자체가 불가능하다. 앨리스가 울상을 지으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석범이 위로하듯 한 마디 보탰다.

“저녁은 내가 살게. 또 녹즙 팩으로 점심을 대충 때웠지?”

앨리스가 피식 웃었다.

“그 약속 꼭 지키십시오. 두 번 바람맞히면 가만 두지 않을 겁니다.”

석범도 미소로 답한 후 핀셋을 털모자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천천히 이마를 덮은 털모자의 끝을 집어 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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