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26>

  • 입력 2009년 2월 10일 13시 00분


영영 지우고픈 순간이 있다. 저 사람은 절대로 아니겠지 싶은데 바로 그 사람과 마주앉아야만 할 때!

"손…… 미주 씨를 아십니까?"

"알죠. 『도시의 종말』을 쓴 손미주 선생을 모르는 특별시민이 있나요? 근데 이상하다. 35분이나 늦었으면 사과부터 하셔야죠. 왜 손미주 이름 석 자부터 꺼내는 건가요?"

그녀는 석범의 질문에 불쾌한 듯 반문했다. 선글라스와 마스크가 눈매와 입매를 가렸다. 감기에 눈병까지 걸렸다며 미리 양해를 구했지만, 석범은 가면 쓴 인형과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말아 올린 뒷머리에 꽂은 벚꽃 모양 헤어핀도 신경이 쓰였다.

이름만큼이나 촌스러운 카페 'UFO'는 애드벌룬처럼 한강 위에 떠 있었다. 2023년에는 비행 카페 자체가 드물었고 더군다나 100퍼센트 로봇으로만 카페를 운영한다는 사실 때문에 손님이 들끓었다. 지상에서 카페까지 100 미터를 초고속 캡슐로 이동하는 재미 또한 각별했다.

26년 만에 비행 카페의 판도가 바뀌었다. 지금은 허공에 떠서 제자리 회전하는 정도로는 고객을 끌 수 없다. 30분 만에 서울특별시와 도쿄특별시를 왕복하는 카페도 생겼고 구름 위와 바다 밑을 오가며 데이트를 즐기는 공수(空水) 겸용 카페도 등장했다. 카페 'UFO'는 비행 카페의 첫 가게로만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미, 미안합니다. 헌데 정말 손미주 씨랑 만난 적 없습니까?"

"지금…… 심문하는 건가요? 역시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이왕 질문하셨으니 답을 드리죠. 만난 적은 물론 없고요. 자연인 그룹을 너무너무너무 싫어한답니다. 됐나요, 은 검사님?"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 미, 미안합니다만 성함이……?"

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민선이에요. 노, 민, 선!"

"그럼 민선 씨 부모님은 혹시 손미……?"

민선이 말허리를 잘랐다.

"저, 고아에요."

"네?"

"혈연관계를 완전히 끊었으니 부모형제 운운하진 말아주세요. 실롄 준 아시죠?"

『특별시연합공용어사전』에 따르면 '고아'는 두 가지 의미로 쓰였다. 1) 부모를 여의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은 어린이. 2) 부모와의 관계를 스스로 끊은 어린이.

2)는 성인 부부의 이혼율이 2040년 평균 4.5회로 급증하고, 어린이를 특별시민으로 양육할 의무가 절반 가까이 특별시에 부여되면서 새롭게 사전에 수록되었다. 2)에 해당하는 어린이는 엄격한 심사를 거친 후 특별시 훈육청이 전담 관리했다.

"왜 아직 결혼을 안 하셨습니까?"

"무관심 때문이죠."

"무관심이라면?"

"짝짓기에 대한 무관심!"

"헌데 왜 이런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제가 묻고 싶은 말이네요. 보아하니 은 검사님도 결혼 생각이 전혀 없으신 듯합니다. 35분이나 늦고 상대편 이름도 모르고…….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을 받았다는 정도로 해두죠."

석범은 마음이 편해졌다. 민선도 오매불망 생의 반쪽을 찾아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아니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빵모자를 눌러 쓴 꼬마로봇이 불룩한 배를 앞세우며 다가섰다. 동영상 요리 리스트가 모자이크처럼 테이블에 깔렸다. 석범은 슬쩍 매운 라면을 찾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라면은, 없다. 민선이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물었다.

"이 'UFO 스파게티 세트'는 어떤 건가요?"

꼬마로봇의 이마에 붉은 등이 깜박이자, 테이블 위에 요리가 가상으로 차려졌다. 스파게티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고 하트 모양의 밥은 알이 굵고 기름기가 좌르르 흘렀으며, 옥수수 스프는 매운 기운이 감돌았다.

"밥 대신 크루아상으로 바꿔주시고요."

테이블에서 밥이 사라지고 크루아상이 대신 놓였다. 출근을 서두르는 파리지엔들을 군침 돌게 만드는 빵이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고 싶은데, 민선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너무 크고 딱딱해 보여요. 차라리 난(nan, 아랍 지역의 빵)이 낫겠네요."

초승달 모양 크루아상이 사라지고 둥글넓적한 난 세 개를 담은 대바구니가 올려졌다. 민선은 그 난도 내키지 않는 듯했다.

"이렇게 하죠. 밥과 크루아상과 난을 각각 33.3 퍼센트 씩 섞어주세요."

"따로따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 섞어 달란 말씀이시죠?"

기본 요리에 포함되지 않는 주문인 경우, 꼬마로봇은 한 번 더 손님의 의도를 확인했다. 민선이 코를 실룩이며 약간 짜증을 냈다.

"그래요. 제대로, 잘, 섞어요. 꼭 33.3 퍼센트여야 해요. 33.4라든가 33.5로 내오면 먹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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