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상인]익명사회의 그늘

  • 입력 2008년 9월 17일 03시 02분


“108동 1403호님, 부재 중이어서 우편물을 경비실에 맡깁니다.” 어느 날 집에 아무도 없는 사이 우편집배원이 아파트 현관에 붙이고 간 쪽지의 내용이다. 우편물에는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주소와 함께 내 이름도 분명히 적혀 있었을 텐데 집배원은 나를 그냥 ‘108동 1403호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혹시 그는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내 이름을 일부러 감추어준 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에 대한 배려라기보다 본인을 위한 행동일 수도 있다고 여겨진 것은 다음과 같은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난봄 경기 고양시 일산의 어떤 우편집배원이 ‘공공기관의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었다. 자신이 주로 다니던 아파트의 600여 가구 출입문 인터폰 아래에 거주자의 이름을 몰래 적어둔 것이 죄목이었다. 경찰 조사에서 그는 하루에 150건 이상의 우편물을 배달하는 동안 일일이 동 호수와 이름을 확인하는 것이 번거로웠다고 진술했다.

단독주택가 대문처럼 만약 아파트 현관에도 문패가 있었더라면 과연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언제부턴가 아파트 중심의 우리나라 도시 거주문화에서 문패가 일제히 사라지고 있다. 덩달아 일반 가옥에서도 옛날처럼 정성스레 문패를 만들어 다는 경우가 확연히 줄었다. 사실 요즘 아이들은 도대체 문패가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문패의 실종에 따라 이웃의 이름을 쉽게 알 수 없게 되었고 이름의 은닉에 의해 사회적 친밀감 또한 많이 약해진 듯하다.

문패 없는 이웃 친밀감도 줄어

익명(匿名)사회는 이처럼 한편으로 도시화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전통적 농경사회의 면식(面識)관계에서 벗어나 불특정 다수의 일원으로 산다는 것이야말로 도회적 삶의 전형적 특성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정보화가 사회의 익명화를 특히 심화시키는 추세다. 예컨대 인터넷 게시판이나 토론방에서 실명(實名)을 사용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언론매체에 등장하는 일반인도 자신의 이름 대신 ID를 내세우기 일쑤다. 휴대전화번호 끝자리 4개에 ‘님’자를 붙여 호칭하는 일도 일상에서 빈번해졌다.

물론 미성년자의 경우 이름을 감추어야 할 때가 있다. 내부 고발자나 취재원의 본명도 공익을 위해서라면 보호해야 한다. 문제는 사회의 익명성이 무턱대고 증대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익명사회는 무엇보다 사람들을 비겁하게 만든다. 또한 사람들을 위선적이며 무책임한 존재로 만들 개연성을 키운다. 남이 나를 모른다고 믿는데 무슨 말을 못하고 어떤 행동을 주저하겠는가. 익명화 사회의 국가적 폐해 또한 장난이 아니다. 익명의 힘은 집단적 자아도취를 생성시켜 사회구성원의 우중화(愚衆化)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왜곡과 과장이 진실을 가리고 허구와 괴담이 과학을 이겼던 지난번 촛불시위가 그 대표적 사례다.

무릇 이름에는 단순한 개인정보 그 이상의 의미와 기능이 있다. 일련번호나 ID 따위는 통제나 편의를 위한 효용성만 가질 뿐, 이른바 ‘이름 석 자’를 걸 때와 같은 인격적 자아감과 사회적 책임의식을 동반하지는 못한다. 부호나 기호가 아닌 이름이 있어서 그래도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세상 아니겠는가. 김춘수 시인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비로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썼다.

당당한 시민과 건강한 사회를 위해 익명성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가상공간에서의 인터넷 실명제부터 하루가 급하다. 세계적 인터넷 강국의 이면에서 범람하고 있는 사이버 폭력과 범죄는 사실상 국가적 수치다. 현실공간에서도 주거의 실명화(實名化)를 정책적으로 유도했으면 싶다. 사실상 공동주택과 익명사회는 논리적 상관이 없는 것이다.

사이버범죄 막을 實名制시급

일본에서는 아파트에도 현관에 문패를 걸거나 출입구에 공동문패를 다는 것이 상례다. 서양의 경우에도 아파트 우편함에 이름표를 붙여 이웃에 사는 사람이 누군지 대개는 알고 지낸다. 선진국 사회가 사적 영역의 중요성을 결코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그 나라들은 공동체의 규범과 공공성의 가치도 동시에 고려한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다소 유별난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는 익명성의 증대가 걱정스러운 것은 마치 그것이 삶의 선진화 혹은 사회적 진보인 양 인식하려는 외눈박이 시대정신 때문이다.

전상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sangi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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