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인터넷 문화전쟁

  • 입력 2008년 7월 5일 03시 03분


이탈리아 출신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1920년 산업화된 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신속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지배계급이 장악한 문화 헤게모니 때문이라는 이론을 폈다.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계급이 대중매체 대중문화 의무교육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허위의식을 주입함으로써 노동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혁명 대신에 부르주아적 가치를 수용하게 된다는 논리였다. 그람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서는 반(反)자본주의 운동 세력이 대중매체와 대중조직 교육기관에서 문화전쟁(culture war)을 벌여 주도권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그러나 동유럽의 공산화는 그람시의 문화전쟁이 아니라, 소련군 탱크에 의해 이루어졌다. 세상의 진리를 독점한 것처럼 오만한 이론에 맞추어 세계의 역사가 움직인 적은 없다. 문화전쟁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만들고 사용한 말이지만 199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진보와 보수 사이의 정치투쟁을 일컫는 용어로 쓰였다. 보수적인 근본주의 기독교 세력은 ‘문화전쟁’ 개념을 빌려 지방 교육위원회를 장악해 공립학교 교육과정에서 진화론을 삭제하려고 들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88년 전 유럽에서 그람시가 주창한 문화전쟁이 언론 교육 문화 분야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는 양상이다. 광우병대책회의가 주도하는 야간시위와 좌파 인터넷 매체에서는 ‘조중동 폐간하라’는 구호가 울려 퍼진다. 이들은 한겨레 경향신문을 편들고 KBS MBC의 현 경영진을 옹호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던지, 동아 조선 중앙일보 광고주 협박에 나섰다.

언론 교육 문화 장악 운동

교육현장에서는 전교조가 ‘미친 소’ ‘미친 교육’ 반대 운동을 극성스럽게 펼친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하는 한 교수는 “젊은 세대에 미치는 전교조의 부정적 영향력이 막대한데도 걱정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신입생들에게 질문을 던지면 어휘의 선택과 생각의 흐름이 친북반미를 기조로 스테레오 타입의 답변이 나와 놀랄 때가 많다”고 토로했다. 전교조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이른바 진보신문 활용을 유도하고 보수신문에 대한 적개심을 부채질한다는 얘기도 학교 현장에서 흘러나온다. 이 교수는 진보신문만을 읽고 편향된 의견을 개진하는 학생들에게 “주류(主流)신문을 함께 읽어보고 사고의 폭을 넓히라”는 조언을 조심스럽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21세기를 사는 젊은이들은 갈수록 평평해지는 세계에서 넓은 시야와 열린 생각을 가져야만 더 멀리 보고, 빠르게 바뀌는 세상의 물결에 더 신속하게 올라탈 수 있다. 젊은 세대는 다양한 세계와 의견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인터넷을 가졌다. 그런데 정작 인터넷에서는 ‘깃털이 같은 새’끼리만 모여 유유상종(類類相從)하고 조금이라도 깃털의 색깔이 다른 새에 대해서는 저주를 퍼붓는다. 다매체 다채널 시대의 도래로 뉴스의 소비자들은 선택권이 전례 없이 넓어졌지만 뉴스의 편식(偏食)은 이전 시대보다 오히려 심해졌다. 누리꾼들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사이트만 찾아다니며 자기 의견을 강화하기에 바쁘다.

민주노총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전국농민회총연맹 한국진보연대 노동네트워크 전국민중연대 FTA저지범국본 이라크파병반대국민행동 민주노동당 통일연대 6·15남측위원회 등 15개 기관에 링크를 걸어놓고 있다. 모두 최근 이슈와 관련해 똑같은 견해를 가진 단체들이다. 이들 사이트를 순례하다 보면 이명박 정부와 미국산 쇠고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그리고 보수신문을 지구에서 ‘아웃(out)’시키기로 합의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인터넷 사이트마다 그룹싱크(groupthink·집단사고) 현상이 심해지는 것은 오른쪽 왼쪽 다 마찬가지다. 그룹싱크에 빠져든 누리꾼들은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그 타당성을 검증하는 일에 소홀하다. 그룹 간에 균열이 더 깊고 넓어질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여러 그룹의 사람이 다른 그룹과 서로 타협하는 과정에 의존한다. 자기 의견에 집착해 다양한 견해에 귀를 닫는 사고는 민주주의의 미래를 위협하게 된다.

다른 의견 저주하는 집단사고

민주노총 전교조 진보연대 민언련 아고라 회원들이 어떤 신문을 보고 어떤 사이트에 들어가서 활동하든 우리가 관여할 바는 아니다. 그들 나름대로 자기 생각과 취향에 맞는 신문을 구독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동아 조선 중앙일보를 좋아하는 수백만 독자의 선택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기사와 논평이 실리는 신문이라고 해서 ‘폐간하라’고 악을 쓰며 소동을 피우는 ‘문화전쟁’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민주주의와 언론자유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증오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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