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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1월 17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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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용을 계산해 볼 수 있는 기업은 그래도 낫다. 최악의 상황에 몰린 기업주들은 한밤에 모든 걸 버리고 도망가는 야반도주(夜半逃走)에 나선다. 작년 칭다오(靑島) 자오저우(膠州) 지역에서 몰래 철수한 외국 기업인 119명 중 103명이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종업원 3000명을 둔 산둥(山東) 성 소재 섬유업체의 한국인 임직원 10명도 며칠 전 자취를 감췄다.
“대출받은 은행에 여권을 맡겨 놓아야 한다.”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팔면 현지 근로자들의 감시가 더 심해진다.” “몇몇 기업인이 몰래 철수하는 바람에 남아 있는 기업들의 신용도가 한 등급씩 하락했다.” 현지 소식은 이렇게 우울하다.
많은 한국 기업인이 야반도주 후보로 취급된다. 본격적인 중국 투자 15년 만에 4만 개 기업이 진출했는데 한계상황인 기업이 10%라 해도 4000개나 된다. ‘야반도주 쓰나미’ 경보로 받아들여야 한다.
‘양국 간 외교문제로 번질까 우려된다’고도 하지만 기업인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차라리 빨리 외교문제가 되는 게 나을 것 같다. 양국 정부가 나서지 않는다면 한계기업들이 서서히 죽어가고 그 과정에서 별별 일이 다 벌어져 양국 기업인과 노동자가 모두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문제가 꼬인 데는 양측 다 책임이 있다. 중국의 저임금을 노려 현지 여건은 자세히 파악하지 않은 채 진출한 한국 기업의 책임이 우선 크다. 현지의 제도 변화와 그 충격에 대해 국내에서까지 자주 거론됐는데도 이를 무시한 기업인이 많았다.
중국은 자본주의적 제도를 도입하고 있지만 여전히 미흡하다. 기업청산 제도가 한 예다. 현지에서 비용 상승 등으로 고전하는 한국 기업이 문을 닫으려고 하면 고용 유지에 더 신경을 쓰는 지방정부가 이를 말린다. 그러다가 ‘그동안 세금혜택 받은 걸 토해내라’고 압박한다. 현지인은 공장 값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자산을 처분해도 채무 변제에 모자라면 ‘빚잔치’라도 해야 하지만 중국엔 이런 관행이 없다.
한국 정부가 다 책임질 일은 아니어도 1년 넘게 ‘야반도주’ 상황에 무대책인 것은 문제다. 지난해 12월 중국을 방문한 한덕수 국무총리가 “정상적인 기업퇴출을 가로막는 중국의 제도 개선을 중국 당국과 협의해 나가겠다”고 한 정도다. 곧 실태조사를 한다니 대책 마련까지는 또 몇 달이 걸릴까. 한때 중국에서 환영받던 한국 기업인들이 ‘찬밥’ 신세를 넘어 감시 대상이 됐다. 이들이 일정한 희생을 하고라도 정상적으로 철수할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서 중국 정부와 협상할 수는 없는가.
컴퓨터 부품업체 H&T의 정국교 사장은 2년 반 전 ‘한국 기업들의 중국에서의 야반도주 가능성’을 언론을 통해 예고했다. 일본 정부가 ‘통상백서’를 통해 중국의 생산비용 상승과 지적재산권 보호 미흡 등 투자위험을 경고할 때였다. 정 사장의 우려 전달에 우리 정부 관계자들의 대답은 늘 “알겠다”뿐이었다.
홍권희 논설위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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